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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모 암(聖 母 庵) 불기 2558(2014)년 6월 1일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
효심이 지극했던 진묵대사(震默大師)는 그의 출가로 대를 이을 손이 끊기어, 그의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기에 풍수설에서 말하는 無子孫千年香火之地(무자손천년 향화지지, 자손이 없어도 묘사를 지내줄 사람이 천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 유앙산)에 안장 하였다. 성모암(聖母庵)은 일제강점기에 진묵대사(震默大師) 모친의 묘소에 세워진 암자이다.
진묵대사(震默大師) : 조선 중기의 고승(高僧) 1562 - 1633(명종 17-인조 11년). 전라도 만경현(萬頃懸) 불거촌(佛居村) 출신으로, 태어난 뒤 3년 동안 초목이 말라 시들었고, (혈처(穴處)에 묘를 쓰면 주위의 지기를 흡수해가기 때문에 주위 초목이 시든다는 게 풍수 이론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초목이 말랐다는 것은 그 아기가 지기를 흡수해갔다는 얘기가 되고, 평범한 아기가 아니란 의미도 된다.) 비린내가 나는 음식과 마늘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 났다." 고 하였다고 전한다. 7세에 출가하여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읽었는데, 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 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봉서사 주지는 어린 진묵에게 조석으로 신중단에 소향예배(燒香禮拜)하는 소임을 맡겼다. 어느날 신중들이 그 주지 승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들이 어찌 감히 불(佛)의 예를 받겠는가, 원컨대, 다시는 아침 저녁으로 소향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 대사의 전기는 따로 없을 뿐 아니라 기타 문헌상에도 대사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찾아 볼 수 없어 미상하다. 그러나 다만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라는 소책자자가 있어서 그의 편영을 전해 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대사는 명종 17년 임술(1562)에 전라도 만경현(萬頃縣) 불거촌(佛居村)에서 태어났다. 대사가 태어날 때 불거촌의 초목이 3년이나 위고(萎枯)하였으므 사람들이 말하기를 「간기이생(間氣而生)하였다」고 하였다. 나서는 마늘과 비린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성품은 지혜로우며 마음이 자비로왔으므로 「불거촌에 불(佛)이 났다」고 하였다 한다.
나이 7세 때 전주부(全州府)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棲寺)에 출가하여 내전(內典-佛典)을 처음으로 읽으매 실꾸리가 풀리듯이 풀려 눈만 한 번 스치면 곧 암송되었으며 따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중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작은 한 사미승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봉서사의 주지승은 이 사미에게 조석으로 신중단(神衆壇)에 소향예배(燒香禮拜)하는 소임을 시켰다. 그런데 어느날 신중(神衆)들이 그 주지승에게 현몽을 하여 사죄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小神)들이어찌 감히 불(佛)의 예를 받을 수 있겠는가. 원컨대 다시는 신석(晨夕)으로 소향케 하지 말라. 그렇게 하는 것이 편안하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중(大衆)은 크게 놀라서 불(佛)의 대접을 하였다.
그의 법휘(法諱)는 일옥(一玉)이요, 진묵(震默)은 그의 자호(自號)이다. 대사가 하루는 부중(府中) 선비의 집에 가서 《강목(綱目)》75책을 빌려서 한 사람에게 짊어지워 가지고 절로 돌아가면서 한권씩 빼내어 읽고서는 길가에 내던지고 또 읽고 읽고 해서 절까지 30리 거리에 전부 읽어 마쳤다. 후일 그 책 주인이 독후에 책자를 길가에 버린 이유를 물으니 「고기를 얻은 사람은 통발은 잊어버리는 것〔得魚者忘筌〕이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사람이 책을 펴 보면서 낱낱이 들어 물으니 무불통달(無不通達)하였다 한다.
대사는 노경에는 산문을 나가지 않고 손에 경을 들면 앉은 것이 허수아비와 같이 부동하고 비록 여러 날을 침식치 않을지라도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대사는 인조 11년 계유(1633)에 입적(入寂)하니 나이가 72, 10월 28일이었다.
대사가 친히 붓을 들고 저술한 서적이라고는 한 권도 없다. 그러므로 그의 적나라한 사상을 알아보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초의 의순선사(草依意恂禪師)의 저에 《진목조사유적고》상·하 2권이 있다. 초의는 정조 10년 병오(1786)출생으로서 진묵대사보다는 2백 24년 후생이요, 지금으로부터 1백 88년 전의 인물이라, 그 기사의 확실성은 그다지 신임할 수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약용(丁若鏞)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워 그 당시의 문신인 홍석주(洪奭周)·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등과 교류가 잦아 시와 문명(문명(文名)이 일시에 훤전(喧傳)하였던 문승이요, 학승이었으므로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도 독단적으로 이것을 저술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까지 대대로 널리 전해 온 구비(口碑)를 모아서 그것도 승려가 아닌 유생들이 초의에게 그 편록(編錄)을 위촉하였으므로 부득이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
이제 이 《유적고》의 체재와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은고거사(隱 居士) 김기종(金箕鍾)의 「진묵선사유적고 서(震默禪師遺蹟攷序)」가 먼저 실려 있고, 그 다음에 초의의 「동서(同序)」 가 있다. 그리고「진묵조사유적고 상」이 시작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사가 봉서사에 출가하여 내전(內典)을 독송(讀誦)한 일과 신중(神衆)을 봉행하자 신중이 주지승에게 현몽해서 사절했다는 내용. 2. 대사가 사미 때 창원(昌原)의 마상포(馬上浦)를 지나갈 때 한 동녀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으므로 그녀는 드디어 죽어서 남자가 되어 다시 전주(全州) 대원사(大元寺)에서 만나 기춘(奇春) 이라는 시동이 되고 대사는 그를 고애(顧愛)하였는데 이것이 중승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 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선언케 하고, 대사는 대중에게 바리〔鉢〕를 펴라고 하고 기춘시자로 하여금 각각 바늘 한 개씩을 바리 가운데 넣어 주게 하니 대사의 바리에는 바늘이 가는 국수로 변해서 바리에 가득하였으나 다른 승려들의 바리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이 있었다. 3. 노모를 왜막촌(倭幕村-全州地)에 봉양하였을 때, 여름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후로는 왜막촌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다는 일과 노모가 돌아가시자 제문을 지어 위령했다는 내용. 4.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 하면 마시지 않는 것이 대사 평소의 계행이었는데, 어느 날 한 중이 술을 걸르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세 차례나 물었으나, 중은 모두 「술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므로 금강 역사(金剛力士)가 그 중을 타살하였다는 내용. 5. 대사가 변산(邊山) 월명암(月明庵)에 있을 때 제승이 모두 출타한 후 홀로 《능엄경(楞嚴經)》 을 읽다가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서 문지방에 놓고 있던 손가락이 바람에 문이 열리고 닫히고 하는 바람에 피가 난 것과 또 식사하는 것도 며칠 밤이 지나간 것도 몰랐다는 내용이다. 6. 역시 월명암에 있을 때 일로서 전주 땅에 있는 목부암(木鳧庵)의 불등(佛燈)이 매일 밤 一점 성광(星光)으로 멀리 비추어 왔으므로 대사는 이것을 발견하고 드디어 목부암으로 옮겨가서 원등암(遠燈庵)이라 개칭하였다. 이 땅은 본래 一六나한(羅漢)의 도량으로서 그들은 항상 대사를 시봉하는 마음에서 멀리 등광(燈光)을 월명암에 비추었으니 그것은 대사의 뜻을 계발하기 위해서였다. 7. 전주부에 있는 한 흠포자(欠逋者 - 官物을 축낸 罪人)가 도망을 가려고 대사에게 인사를 왔으므로 대사는 말하기를 「흠포죄로 도망하는 것이 어찌 남자가 할 짓이겠는가. 그러지 말고 나한에게 공양을 올리라」고 하였다. 그리고서는 대단치 않은 옥(獄)의 형리(刑吏)의 자리에라도 앉아 三○일만 허물없이 있으라 하고 일러서 돌려 보낸 대사는 주장자(柱杖子)를 가지고 나한당(羅漢堂)에 들어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며 말하기를 「관리 아무의 일을 잘 도와주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밤에 나한이 그 관리의 꿈속에 나타나서 책하여 말하기를 「네가 구하는 바가 있으면 직접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지 어째서 대사에게 말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의 소위를 보아서는 불고(不顧)해도 가하나 대사의 명령이시니 좇지 않을 수 없다」하고, 그를 구해 주었다. 8. 물을 거너다가 한 사미승에게 속아서 깊은 물 속에 빠지고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나한의 장난이었다. 그래서 그때 한 게송(偈頌)으로 이르기를, 너희들 여산의 열 여섯 어리석은 자야 마을의 잿밥을 즐기니 언제나 쉴 것인가. 신통 묘용으로는 비록 미치기 어려우나 대도는 마땅히 늙은 비구에게 물을 지니라. 라고 하였다. 9. 봉서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봉곡(鳳谷)이라는 유학자가 있었는데 그에게 가서 《강목》을 빌려서 모두 읽고서 통실(洞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내용. 10. 봉곡선생이 음식을 장만하여 어린 비녀(婢女)로 하여금 갖다 올리게 했더니, 대사는 때마침 허공을 바라보면서 배회하다가 그 하녀를 보고 「너는 아들을 낳고 싶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그 처녀가 대답하지 않으니 대사는 말하기를 「너의 복이 박하니 어찌 하리요」라고 하였다. 11. 대사가 길을 가는데 천렵하는 소년들이 냇가에서 생선을 끓이고 있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이 무고(無辜)한 고기들이 확탕(鑊湯)의 고생을 당하는구나」하니, 한 소년이 희롱해 말하기를 「선사도 먹고 싶지 않은가」하였다. 「나도 잘 먹는다」하니 대사에게 그 고기 솥을 주었는지라 그것을 먹고서는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무수한 고기가 퍼덕퍼덕 헤엄쳐 갔다. 12. 대사가 하루는 시자를 시켜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으로 소금을 갖다 주라하니 시자가 . 누구에게 주느냐고 반문하자 가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시자가 가서 보니 엽사(獵士) 여러 사람이 노루 고기를 회해놓고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뻐서 소금을 받으면서 「이것은 반드시 옥로(玉老)께서 우리의 주림을 볼쌍히 여기심일 것이다. 활인지불(活人之佛)은 골마다 있다 함은 이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3. 대사께서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의 화재를 물을 뿜어서 껐다는 내용. 14. 대사가 상운암(上雲庵)에 있을 때, 제자들이 양식을 구걸하기 위해 월여만에 돌아오니 대사의 면상에는 거미줄이 쳐 있고 무릎에는 먼지가 쌓여 있으므로, 이것을 소제하고 아무가 다녀왔습니다 하고 절을 하니, 너는 어찌 그리 빨리도 돌아왔느냐고 하였다. 15. 대사가 전주 대원사(大元寺)에 있을 때 끼니마다 밀기울을 물에 타서 자시니 제자들은 그것이 묽다 또는 그것이 더럽다하고 먹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중이 별안간 밥그릇을 가지고 허공으로 날아와서 대사에게 올렸다. 대사가 말하기를 「밥을 가지고 오는 것은 좋으나 하필이면 친히 왔는가」하니, 그 중은 말하기를 「소납(小衲)은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에 현주하옵는데 밥을 먹고 있던 중 반우(飯盂)가 자동(自動)하므로 괴이하여 이것을 가지고 신력에 이끌려서 여기에 이르렀나이다」라고 하였다. 16. 천계(天啓) 임술년에 완부(完府) 송광사(松廣寺)와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동시에 불상을 조상하게 되어 대사에게 증사(證師)로 와 달라고 청하였는데, 대사는 직접 가지 못하고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수주(數珠)를 각각 보내어 증명역을 하게 하였다. 17. 대사는 일찍이 한 게송을 읊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하며 달은 촛불로 하고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동이로 하여 크게 취해서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18. 대사가 하루는 목욕·정발(淨髮)하고 갱의(更衣)·예장(曳杖)하고서 문을 나가 시냇가를 따라 가다가 지팡이를 세우고 서서 손가락으로 물 가운데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이르기를 「이는 석가모니불의 영자(影子)니라」하니, 시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화상의 그림자 입니다」하였다. 대사가 이르기를 「너는 화상의 가(假)만 알 뿐 석가의 진(眞)은 모르는구나」 라고 하였다.
이상 一八개조의 신이설(神異說)이 게재되어 있다. 그리고 「석가여래인지설(釋迦如來因地說)」 이 四장(丈) 실림으로써 그 상권이 끝났다. 조수삼(趙秀三)의 《영당중수기(影堂重修記)》와 운고(雲皐)의 발(跋)과 김영곤(金永坤)의 발과 김영학(金永學)의 발등이 게재되어 있는 것이 그 하권으로서 이것이 본서 상·하 二권 三一장(丈) 전부의 내용이다.
대사의 사상은 그의 《유적고(遺蹟攷)》에 의해서는 명확한 줄거리를 찾아 낼 수 없다. 그 대강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대사 당대 불교계의 사상적 환경이 여하하였던가 하는 것을 먼저 일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국가적 견지에서 본다면 선조 二五년(一五九二)에 이른바 임진란이 일어나 동왕 三一년에 왜군이 철퇴하기는 하였으나, 사명대사가 전후 수교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 동왕 三八년(一六○五)이니 무릇 一三년간 전란중에 있었던 셈이다. 국가가 이와 같은 불안 가운데 있었으므로 불교계라고 어찌 평온할 수 있었겠는가. 서산대사를 총수로 한 사명·처영· 영규등 제승장들이 법복을 벗고 종군하여 보국의 비상행(非常行)을 하게 되었으니 교계 자체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후 교계는 그 본연의 자세를 찾기에 노력하였다. 서산대사는 교·선 양사상 중 선(禪)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적극 주장하였고, 사명은 서산의 제자로서 특히 선의 종통(宗統)을 잘 지켜 달라는 위촉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종인(敎宗人) 으로 보여졌으며, 부휴는 사명대사로부터 위미부진(萎靡不振)한 교세의 재흥을 위촉받을 반큼 선교의 권위자이었으며, 편양 언기(鞭羊彦機)와 청매 인오(靑梅印悟)는 다같이 서산의 선지(禪旨)를 게승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이 진묵대사는 《유적고》에도 불유사교(不由師敎)라 하여 있는 바와 같이 그 사상의 계통이 불분명하다. 교인가, 선인가, 아니면 선교 일치 겸수주의 였던가. 대사의 《유적고》뿐 아니라 기타 아무데도 대사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대사는 이조 불교계에 있어 엄연히 부동하는 위대한 존재로서 과거 삼국시대나 신라·고려시대 고승 가운데서도 그다지 흔한 존재가 아님을 어찌하랴. 그 《유적고》중에 나타난 신중(神衆)이 대사의 향다(香茶)의 조석 예경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사절하였다는 사실 같은 것은, 우리나라 불교 신앙계에 초유였던 경종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340여년 전의 일은 알 수 없지만 그 후 오늘날 까지도 우리나라 여러 사암에서 아직 신상을 모시고 조석으로 에경을 하고 있는 현상이다.
그 다음에 대사는 아라한을 경시하였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도 교리사상으로 중대한 문제로서 과거 우리나라 불교사상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간단히 말해서 아라한이라 하는 성자는 소승불교의 극과(極果)로서 소승불교에서는 이 이상의 극과가 없다. 그런데 대사가 이것을 경시하였다는 것은 즉 자기는 소승불교의 사상을 배제하고 불타가 되는 것을 극과로 하는 대승불교 사상을 신봉한다는 그의 사상을 스스로 표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중(神衆)이 대사의 예배를 사퇴(謝退)하는 이유로 대사는 불이기 때문이라든가 또는 임종 때 법담으로 제자와 더불어 물속에 비치는 자기의 영자를 가리켜서 이것이야말로 석가불의 진영자(眞影子)라고 하였 다는 등 이것이 모두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헌상으로만 본다면 전문가적 견지에서 볼때 대사의 위치는 실로 미미한 존재이었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도의시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조원류(佛祖源流)》같은 데서는 대사의 법통을 서산대사에 두고 있으나 그것은 아마 우리나라 의 그 당시 승려들이 대개 서산문류였으므로 그렇게 지적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유적고》 에서는 그 사실을 완전히 뒤엎고 말았다. 즉 대사임종 때에 그 제자들이 묻기를 「화상 백세 후에 는 종승(宗乘)을 누가 잇겠읍니까」하니 대사는 한참 있다가 「무슨 종승이 있겠느냐」하였다. 제자가 다시 수시(垂示)를 걸(乞)하니 부특이해서 말하기를 「명리승(名利僧)이니라」하였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대사 당시의 교계는 대체로 교종·선종으로 분립되어 피차 자찬(自讚) 훼타(毁他)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사는 이러한 종아(宗我)의 편집(偏執)을 초월하여 대동(大同)통일적 견지에서 있었던 것 같다. 교종이나 선종의 소기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 같은 성불(成佛)이 아닌가. 그렇다면 교·선 어느 한편에만 편경(偏傾)한다는 것은 불교의 본지에 배치된 소인적 태도라고 본 것 같다. 그런데 그 당시 종파적 세력이나 또는 명리에만 치주(馳走)하던 교계이므로 대사에 관심이 있었을 리가 없다. 종교인의 실력은 교화(敎化)에 있다. 대사의 교화력은 명리승(名利僧)들 에게는 도외시되었지만 일반 속계에는 대단한 경이심을 환기하였던 모양으로 대사의 《유적고》 가 특히 유생들에 의해 전해지고 또 간행된 이유도 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출처 : 동국대학교 불교사회문화연구원/뇌허 김동화 전집/2001.10>
***서산대사는 사명대사가 아닌 편양언기에게 법을 전했는데 이는 지범개차라 할지라도 임진왜란 때 지은 살생 의 업이 여러 가지 장애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 진묵대사는 임진왜란때 나라와 백성을 위헤 큰 공을 세운 서산ㆍ사명대사를 명리승(名利僧)이라고 질타했다는 점을 새겨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극락보전
無子孫千年香火之地(무자손천년향화지지)
누구든지 여기 진묵대사 어머니 산소의 풀을 베고 과일과 음식을 차려놓으면 그 사람의 농사가 풍년이 들었다. 이런 소문이 나자 주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벌초를 하고 과일을 차려 놓았고, 산소는 언제든지 말끔히 정돈돼 있었다고 하며,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향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은 ‘이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病)이 저절로 낫고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면서 정치가, 사업가, 난임부부, 수험생 학부모 등도 즐겨 찾고 음력 1월, 윤달, 수능시험, 중요시험 행사 때가 되면 전국에서 불공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수능길지 명당기도처들 중의 한 곳으로 소문나 있다. 진묵대사 모친 묘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분류되며, 연화부수형은 대개 낮은 곳에 있고, 주위는 평야지대나 강물 등으로 둘러 싸여야 한다. 좋은 땅에 묻힌 이의 좋은 기운은 후손이 이어받는데 동기감응(同氣感應)이다. 그러나 진묵대사에겐 후손이 없으니 그의 어머니 묘를 돌보는 사람들이 모두 후손을 대신하고 후손대신 기운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 땅의 복을 나누어 받기 위해 지금까지 세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고시례전
고시래 ; 야외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씩 떼어내 던지며 ‘고시래’하고 외치는 것으로 고수래, 고시례, 고씨네 등으로도 불리며 지신(地神)이나 수신(水神)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무사히 행사를 치르게 해달라는 기원과 잡귀 추방의 주술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경 벌을 지나던 진묵대사는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로부터 공양 받을 때마다 음식을 조금 떼어내 성이 제주 고씨인 어머니를 위해 ‘고시래(고씨에게 예를 올린다는 말)’하며 들판에 던졌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농부들도 논에서 일을 하다가 음식을 먹을 때면 후손이 없어 제삿밥을 받아 먹을 수 없는 진묵대사 어머니 고씨에게 먼저 ‘고씨래’하며 음식을 조금 떼어준후 먹었다고 합니다.
나한전
震默大師 慈母四十九祭 祭文 (진묵대사 자모49제 제문)
胎中十月之恩 何以報也 (태중십월지은 하이보야) 膝下三年之養 未能忘矣 (슬하삼년지양 미능망의) 萬歲上 更加萬歲 子之心 猶爲嫌焉 (만세상 갱가만세 자지심 유위혐언) 百年內 未滿百年 母之壽 何其短也 (백년내 미만백년 모지수 하기단야) 單瓢路上 行乞一僧 旣云已矣 (단표로상 행걸일승 기운이의) 橫釵閨中 未婚小妹 寧不哀哉 (횡차규중 미혼소매 영불애재) 上壇了 下壇罷 僧尋各房 (상단료 하단파 승심각방) 前山疊 後山重 魂歸何處 (전산첩 후산중 혼귀하처) 嗚呼哀哉 (오호애재) 열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슬하에 삼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 잊을 수 없습니다.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그래도 부족하온데, 백년 생애에 백년도 채우지 못한 어머님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습니까! 표주박 하나 들고 길거리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 할 것이 없거니와 비녀를 꽂지 못하고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상단 불공을 마치고 하단 제사를 파하니 스님들은 제각기 방을 찾아 들어가고 앞산 첩첩 뒷산 중중한데 어머님 영혼 어디메로 가시렵니까! 아아! 애달프고 슬프도다.
***하늘을 이불로 삼고와 같이 ~삼고로 많이들 해석하는데, ~삼고는 무엇을 무엇으로 여기거나 가정하다는 뜻인데, 진묵대사같은 무애자재한 도인은 하늘을 이불로 여기거나 가정하기 보다는, 하늘이 바로 이불이고, 땅이 자리이고, 산이 베개일 것이므로 위와 같이 해석했습니다.
***일부에서는 天衾地席山爲枕이 天衾地褥山爲枕로 席(석)이 褥(욕)으로 표기된 곳이 있으며, 한국고전종합DB에서 天衾地席을 검색하면 검색되는 글이 없으나 天衾地褥으로 검색하면 순암집(順菴集)과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天衾地褥이라는 표현이 보이고, 이치상으로도 衾(이불), 席(자리), 枕(베개)보다는 衾(이불), 褥(요), 枕(베개)가 어울려 褥이 맞는 듯한데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초의 의순의 震默祖師遺蹟攷(진묵조사유적고)에 席으로 표기되어 있어 이에 따릅니다.
<위 아래 사진출처 : 불교문화종합DB>
蓮花浮水(연화부수)의 의미를 담아 한반도의 지도형으로 조성한 연못
여기서 약초정식으로 저녁 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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