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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달라이라마와 황필호교수의 대화
지난 1월에 만삭의 아내와 함께 일산의 황필호 교수 댁으로
신년 정초 인사를 갔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늙어버린 황필호 교수께서는 그래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6년 전쯤에 전립선암이 발견되어 암수술을 받은 후 건강이 많이 나빠진 탓도 있었고,
젊은 날 지나친 에너지를 소모해서
불과 68세에 벌써 노년말기의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80년대 황필호 교수께서 동국대학교에 있을 때
고서아 동문 16기인 최온순(경기고 출신)이 그의 제자였고,
15기 지재붕(서울공고 출신, 인도철학과)도 그의 제자였는데,
지재붕이 총학생회장으로 있을 때에는 학생들 편에 서서
동국대학교 재단과 투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해임된 인연도 있었다.
그때 치사하게도 해임사유가 동국대는 불교재단인데, 황 교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였다.
최온순은 동국대 재학 당시 학생운동권의 중심적 인물이었는데,
결국은 녹화사업에 걸려 강제징집되었고, 군대에 끌려간 후
의문의 총상을 입은 채 죽음을 당하였다.
최온순은 지금 대전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지재붕은 총학생회장으로 당시 많은 투쟁을 주도하다가 감옥에 끌려가 옥살이를 하였고,
한때 정치에 입문했으나 선거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참으로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나는 지난 2005년 12월, 병고에 시달리는 황필호 교수를 모시고
북인도의 다람살라를 향했다.
당시 세계적인 평화주의자인 달라이라마와의 인터뷰를 추진 중이었는데,
6개월간 교섭 끝에 티벳의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의
달라이라마 비서실에서 허가가 났기 때문이었다.
사진기자 1인과 불교계 인사 1명을 대동하고, 진행경비는
도서출판 운주사의 협찬을 받아서 길을 떠났다.
당시 황필호 교수의 건강 상태는 그 도정에서 초상을 치를지도 모르는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의자에 앉아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결국은 인터뷰를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기로 하고
다람살라의 티벳망명정부에 취소요청을 하였는데,
상태가 여의치 않은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달라이라마비서실의 한국 쪽 임시 에이전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람살라의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의 중앙일보와 오늘 인터뷰를 하기로 하였는데,
아무도 나타나지도 않고, 연락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중앙일보로 연락을 해 보았다.
그러자 달라이라마와의 인터뷰를 약속한 해당 기자는 이미 퇴사를 하였고,
그 담당 부서원들도 자리이동이 한 뒤였으며,
그 인터뷰 약속은 업무 인수인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인터뷰 약속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은 국제적 망신만 당한 채 중앙일보의 어이없는 실수는 그렇게
달라이라마의 황망한 기다림이 무위로 돌아간 채 끝났다.
그 상황에서 우리마저 인터뷰를 취소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한국의 이미지 실추도 문제지만, 비서실의 강경입장은
이후로 한국언론과의 인터뷰나 행사는 도와주지 않겠다는 질책이 날아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황필호 교수는
사모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달라이라마를 만나러 가는 길에 죽는다면
그것도 운명이다. 종교철학자가 그 길에서 죽는 것도 어쩌면
필연일지 모르겠다며, 결국은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인도의 겨울은 춥다. 앉아있기조차 힘든 병자를
일곱시간이 걸리는 두 번의 비행기를 타야했고,
그리고 다람살라의 공항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가장 여행환경이 어렵다는 인도의 육로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델리에서는 인도 유학생에게 부탁해서 잡아준 호텔이 창문마저 없는
대리석 건물에서 짐승들의 들락거림도 겪어야했고,
달라이라마가 계시는 맥그로드간즈까지 대절한 지프차는
중간에 잦은 고장으로 가뜩이나 열악한 도로환경과 함께
정말 인터뷰할 때까지 황 교수님이 이상이 없을지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서울을 떠난지 나흘.... 어찌되었든 인터뷰 하루 전에
우리는 티벳정부의 도착 예약과 인터뷰 사전 조율,
경호문제와 의전, 자리배치 및 포토라인 등등을 협의했다.
다음날 두 시간의 일정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장은 소박했고, 그쪽에서는 인터뷰를 녹화하는 기술진과
통역자 2인, 그리고 종교문화담당 장관이 배석했고,
자리는 모두 똑같은 평등한 의자를 약 3m정도 떨어져서 앉게 되어 있었다.
이내 들어선 달라이라마 께서는 예전의 그 겸손한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구부린 합장으로 우리를 환영하였고,
환영의 까따를 각자의 목에 걸어주셨다.
한국의 일행 모두에게 일일이 개인 신상과 종교 등을 묻고는
준비된 불상을 선물하였다.
촬영기자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불상을 주지는 않았다.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그날의 인터뷰 내용은 나중에 따로 소개하겠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터뷰 도중에 황필호 교수는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통곡에 가까웠고, 결국에는 대성통곡을 넘어
그칠 수 없는 엉엉울음이 되어 1시간이나 그렇게 울었다.
한국에서 간 일행도 이심전심이 되어 함께 울었다.
우리 일정 뒤에는 프랑스의 국영텔리비전의 인터뷰 때문에
대기실에는 프랑스팀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려 1시간 30분을 지체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달라이라마는 황필호 교수를 포옹한 채 내내 기다리면서
울음이 그칠 때까지 달래주었고, 겨우 듬성듬성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오랜 수행으로 인한 자비의 포스는 그렇게 마음의 벽을 허물었나 보다.
<- [사진]
어렵게 인터뷰를 마치고 악수하는 달라이라마와 황필호 교수. 벌써 한 시간째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히말라야가 보이는 자줏빛 꽃이 흐드러진 정원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우린 통역진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
거기서 황필호 교수께 왜 그리 울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그냥 “모른다...” 그 말씀뿐이었다.
죽음조차 감수하고 나선 길에서
종교철학자로서 준비한 온갖 질문들이 일순간 너무나 하잘 것이 없었고,
말로써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는...
갑자기 찾아든 그 빈 공(空)앞에서 그만 솟구쳐 오르는 내면의 폭포수 같은 눈물의 분수를
제어할 수 없었다는 촌평만 이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어렴풋이 그 눈물의 의미를 안다.
사실로서 달라이라마를 만났는데,
진실로 그 분은 없기 때문이다. 학문이라 덧칠된 이런저런 언어들이
아(我)의 존재성이 없는 달라리이라마의 눈빛을 만나고
형언키 어려운 미소를 만났을 때
그만 길을 잃어버린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아무튼 당시 지재붕은 네팔의 카트만두에 있었는데,
황필호 교수께서 그곳으로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강상태는 더 이상의 여행을 할 수 없어서
제자의 간곡한 요청은 지킬 수가 없었다.
황필호 교수만 별도의 티켓을 준비해서 한국으로 보내고
나머지 일행만 예정대로 네팔에 가서 일주일을 더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장 대중적이며 시대적 아픔에도 피해가지 않았고,
생활철학이라는 타이틀로 대중들과 함께 나누는 철학을 강조하던 한 종교철학자가
그동안 쌓아올린 학문적 상아탑을 허물고 병고의 칩거에 들어서
이제 더는 황필호 교수의 필력과 강의를 들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때의 그 여행에서 한 노 철학자의
지적여행의 정수를 본 것 같아서 두고두고 각인된 감동이 있었다.
<- [사진]
동국대 이거룡교수를 우연히 인도에서 만났다. 이거룡 교수는 황필호 교수의 제자이기도 하면서 당시 남인도 마드라스에서 요가수행을 수년째 하고 있었다.
충북에서 태어난 황필호 교수는 서울대학교로 진학했는데,
독실한 기독교집안이라 어머님은 당신 자식이 목사가 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그러나 황 교수는 오히려 불교에 더 관심이 많았고, 20대에 출가를 결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었는데, 마침 대한광학에서
지사가 나가있는 베트남에서 근무할 직원을 뽑는다고 하였다.
전쟁 중의 베트남에 간다고 하니 참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월남에 가서 황 교수는 마침 미국에서 나와 있던 미국계 군납업체로 직장을 옮겼다.
그런데 중간에 일주일간의 휴가를 받아서 태국으로 나갔는데,
그만 그 길로 영영 세계일주 여행길로 무단이탈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회사 공금을 들고서....
결국은 프랑스 쯤에서 잡혀서 베트남으로 돌아와 온갖 고초를 겪은 후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뒤늦은 미국 유학길에 올라서 오클라호마에서 철학박사가 되었다.
36세에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 이대 덕성여대 강사를 할 즈음
운좋게도 소흥렬 철학과 교수께서 방송국으로 주선하여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주가를 올리는 대중적인 스타철학자가 되었다.
이제 나도 황필호 교수와의 인연이 20여년 가까이 되었다.
말술을 하시는 황 교수는 아카데미 모임에서 종종 젊은이들과
밤샘토론을 즐겼고, 취해서는 길거리 아무 벤치에서나 쓰러져 코를 골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구기동으로 해서 사모바위까지 등산을
문협 작가와 약간은 별난듯한 철학과 교수들과 몰려 다녔고,
단골로 정해놓은 북한산 아래 두부요리집에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올라 술을 거부하면 그 특유의 강한 액센트로
“섀끼... 자 마셔...”하면서 주고 받고 마시면서 모두가 나가 떨어질 때까지
술을 권하고는 했다. 그 분의 병은 그 술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황 교수님과 월간지 편집일 할 때 편집주간으로 모셨을 때는
편집방향 때문에 아무래도 내부에서 의견이 달라 싸움이 잦았는데,
나는 고집이 워낙 세서 내 의견을 접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마포의 어느 술집에서 내가 술판을 뒤엎으면서까지
편집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른 부서의 책임자와 싸움을 벌였는데,
황 교수님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 주셨다.
“결코 화를 내지 말라....나처럼 된다...”
그 말은 아마 동국대에서 끝까지 주장을 안 굽히고 싸우다가 잘린 일 때문일 것이다.
“절대로 법에 호소하지 말라”... 그것도 학생들을 변호하려고 재판에 걸었다가
학자로서는 종무 해석할 수 없는 세상의 온갖 이해관계에
결국은 예기치 않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 경험 때문이리라...
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지키지 못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부딪치고 결국은 싸웠지만
내게는 상처만 남고 늘 승자는 내가 아니었다.
법에 호소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오해와 엉뚱한 피해를 입는 것으로 끝났다.
나이 40세가 넘으면서 나는 많이 참게 되었다.
아니 이제는 피할 줄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사람은 만남의 존재다. 모든 일은 만남에서 시작된다.
좋은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고 나쁜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세상이다.
사람을 만나야지 궁극적 실재라든지, 성인의 도라든지, 깨달음의 경지를 만나지,
미추(美醜)와 선악(善惡) 중에서 미와 선과 성스러움만 추구한다고 그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은 없다.
예술과 철학과 종교의 모든 양면성을 몸소 깨닫게 하고
조언해준 분이 황 교수님이다.
황필호 교수께서 얼마나 사실지 알 수 없다.
많은 이들은 좋아하고 또 그만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 분이 좋다.
일산에 살 때 나 혼자서 밥을 사 먹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식사 시간되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가라던
뭉클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인생의 정답이 없듯이
철학자도 삶의 매뉴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불교철학과 위빠사나 수행, 명상에 심취했던 나에게 황 교수님은
“너는 예술과 철학과 종교를 ‘알려고’ 든다.
진정으로 사람을 만나려거든 그것들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는 것’, 그것이 삶이다.”고 일러주었다.
내 삶도 이제는 정오를 넘겨 오후의 그림자가 점차 길게 드리우는 시각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에 비해서 균형점을 넘긴 이즈음,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노년의 말기쯤, 황황한 공(空)의 대면에서
한바탕 혼란스러웠던 삶의 울음을 토해낼 수 있으리라....
첫댓글 오랫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했지만, 후배는 늘 어리게만 생각되는 선배의 입장이 아니라면 존경의 뜻을 전할 만큼 좋은 글에 감사하고...연락없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시간이 지나 오후의 그림자라는 말에 공감이 가네.
황교수의 건강이 무척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게는 무척 안타까운 일 일듯 싶다. 그러나 나름 수행에 입문한 너로서는 그저 흘러가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불과 4개월만의 만남이었지만 그 사이 더 좋아진 것 같아 좋았다. 어쩌면 너는 이제 새로 태어난 생명과 그 꺼짐의 사이에서 희비를 동시에 담고 있겠군.
무어라 딱히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안타까우면서도 저런 좋은 분을 멘토로 두신 선배님이 또다른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먹먹해지는 가슴만 쓸어안고 갑니다...^^;;;
태평양이 시작되는 서귀포항에서 뵐때의 맑은 황교수님 모습이 떠올라집니다.....세상의 모든 드러남을 기꺼이 당신을 통하게 하시는 "사실"을 사시는 교수님께 큰 절 올립니다.
그때 서귀포항에서 네가 잔뜩 싣고온 감자랑 홍당무....황교수님이 그렇게 격의없는 선물을 받아본적이 없다고 했는데....
선배님...교수님 원하시면 언제든 가득 선물 보내드릴 수 있답니다...평화와 사랑의 기운을 보냅니다.
알려고한다.....하는 사람..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선배님... 이 글을 퍼가도 괜찮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