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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상읍이 4월 1일자로 행정출장소 설치와 함께 서창동ㆍ소주동ㆍ평산동ㆍ덕계동 등 4개 행정동과 9개 법정동으로 나누어지면서 이제 웅상읍이라는 행정명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행정출장소의 명칭이 웅상출장소가 되고 웅상초등학교와 웅상중ㆍ고등학교, 금융기관의 지점명칭에는 여전히 웅상이라는 이름이 남아있어 앞으로도 '웅상(熊上)'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정서 속에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양산시 사진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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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熊上)의 유래
웅상읍이 4월 1일자로 행정출장소 설치와 함께 서창동ㆍ소주동ㆍ평산동ㆍ덕계동 등 4개 행정동과 9개 법정동으로 나누어지면서 이제 웅상읍이라는 행정명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행정출장소의 명칭이 웅상출장소가 되고 웅상초등학교와 웅상중ㆍ고등학교, 금융기관의 지점명칭에는 여전히 웅상이라는 이름이 남아있어 앞으로도 '웅상(熊上)'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정서 속에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북으로 울산광역시와 남으로 부산광역시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는 이곳이 '웅상'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울산군 서면(西面<坊>)을 웅촌면(熊村面<坊>)으로 명명(命名)했다가 한말(韓末, 1896년)에 웅촌면을 웅상면(熊上面)과 웅하면(熊下面)으로 분할하면서부터다.
삼한시대(三韓時代) 우시산국(于尸山國)에 속했던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우풍현(虞風縣), 고려시대(考慮時代)에는 흥려부(興儷俯), 조선시대에는 경상남도 울산군의 행정구역이 됐다.
1906년(광무10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울산군의 관할에 있던 웅상이 양산군에 편입되면서 비로소 이곳이 양산의 관할에 들어왔다.
1991년 11월 20일, 웅상면이 웅상읍으로 승격됐고 1998년 4월 1일 덕계출장소가 설치됐다.
▶지리적 특성
우리나라의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웅상지역은 대한난류의 영향을 받아 온난하고 한서의 교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적절한 기후조건을 지니고 있다.
서쪽에 남북으로 뻗어있는 천성산의 정산인 원효산이 992.2m의 산세를 뽐내고 있는가 하면, 동쪽으로는 배읍봉(백일봉)을 시작으로 대운산이 742.0m의 위용을 이루고 있고 신라시대부터 소사에 24개의 명산을 책정하여 제사를 지냈던 명산 중의 한 산인 우불산이 터를 잡고 있다.
웅상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에서 흐르는 개울물은 모두 회야천으로 합류하며 이 회야천은 부산, 울산을 연결하는 7호국도를 따라 북으로 흐르면서 그 폭을 넓혀 회야강이 되어 울산의 식수원인 회야댐에 다다른다.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발상지가 강의 유역이나 분지였듯이 우리고장 웅상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찍이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린 우리 조상들도 이 회야강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촌락을 형성했다.
토질이 영농에 알맞아 예로부터 쌀, 보리를 비롯한 5곡의 산출이 풍성한 농경사회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남부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해발 200m의 고랭지대(高冷地帶)라 하절식물 성장의 촉진시기에 냉조풍(冷潮風)이 불어 농작물 성장에 필요한 적정량의 온도가 부족한 탓에 인근 북부지방보다 오히려 농작물의 결실이 늦은 편이다.
▶회야강(回夜江)은?
길이가 약 30㎞에 달하는 회야강은 평산동의 원효산(元曉山) 남록이 발원지다.
원효산과 천성산, 대운산의 세 지류를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 검단분지(檢丹盆地)의 곰내를 받아들인 후 석천리(石川里)에서 물 구비를 동쪽으로 돌려 청량산(靑良山)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물의 흐름이 남쪽으로 틀어져 대운산에서 흐르는 남창천(南倉川)과 합류하여 온산면과 서생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강이 회야강이다.
조선 초기의 기록을 보면 회야강은 본디 '곰내'또는 '곰수'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광무6년(1902)판 울산읍지에는 공계원(公界院)이라 적혀 있고, 흥려승람 역시 공계(孔界)로 표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계(公界)라고도 부른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이 공계는 '곰계(熊溪)'에서 연유된 말로, 웅촌ㆍ웅상지방은 삼한시대의 우시산국(于尸山國) 고토(古土)로 예로부터 감터(神鄕)로 알려져 왔던 곳이다.
곰 토템 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 선조들은 신성지를 곰내(熊川)ㆍ곰말(熊村)이라 불러왔는데 웅촌ㆍ웅상지역이 곧 그와 같은 신성지였던 것으로 공계(孔界)라는 지명도 바로 곰내를 이두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회야강(回夜江)에 얽힌 야담
회야강의 이름은 논배미를 돌아 흐르는 강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회야(回夜)'의 回는 '돌아서 흐른다'의 돈다는 데서 취한 말이고 夜는 '논배미'에서 따온 말이다.
회야강은 바로 '돌배미내'가 줄어서 '돌밤내'가 되고 이것을 한자식으로 쓴 것이 바로 '회야강(回夜江)'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회야강이라는 이름에는 그럴듯한 야담이 하나 전해 오고 있다.
옛날 강 건너 마을에 두 아이를(또는 일곱 아이라고도 한다) 키우며 살아가는 과수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잠에서 깬 아이들이 엄마를 찾았으나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밤이 되면 엄마는 어디론가 마실을 나갔다가 아이들이 깨기 전에 되돌아오곤 했다.
궁금증을 못 이긴 아이들은 자는 척하고 누워 있다가 엄마가 방문 밖을 나간 다음 살금살금 엄마의 뒤를 밟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아이들은 그만 강 건너편 마을에 어머니의 숨겨놓은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았던 것이다.
밤이면 남몰래 사내를 만나고는 날이 새기 전에 돌아오는 부정한 과수댁…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어둠이 걷히기 전에 돌아온다는 뜻의 '회야(回夜)'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회야강을 '일승강(一勝江)'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왜군을 꺾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