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8월 19일 주일설교
제목: 표류하지 않도록 들은 것에 유념하라.
본문: 히2:1-4
I. 들어가는 말
친구 중에는 좋은 친구도 있고, 나쁜 친구도 있겠죠? 도박을 하며 서로의 돈을 따먹으려 하는 모이는 사람들을 친구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아는 친구들이 도박을 하다가 그 중에 큰돈을 잃은 친구가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어떻게 알리나’하고 고민을 하다가 그 중 잔머리를 가장 잘 굴리는 친구가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죽은 친구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개가 도박을 하다가 큰돈을 잃었습니다.’ 화가 난 아내가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인간 집에 들어오지 말고 나가 뒈지라고 하세요!’ 그러자 소식을 전한 친구가 정중하고 경건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부인의 소원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가정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그리고 배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의 특징은 잘되면 함께 잘되고, 못 되도 함께 고통을 겪게 되는 공동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정신을 못차린다면 가족 모두가 고통을 겪습니다. 손가락 끝에 가시 하나만 밖여 있어도 온 몸이 괴롭지요. 배가 침몰하면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본문1절을 보면, 히브리서를 기록하신 분은 교회를 배에 비유해서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 중에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란 구절이 있지요? ‘흘러 떠내려가다(παραρειν)’라는 헬라어 단어의 원 뜻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기본적인 뜻은 ‘잘못된 방향으로 미끌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로 배가 항해 도중에 폭풍을 만나거나, 지도를 잘못 보아서 항로를 이탈하여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쓰입니다. NIV는 'drift away' 즉 표류하다는 말로 번역을 해 주고 있습니다.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특등석에 타고 있던 귀족들도, 저 아래 배 밑바닥 엔진실 옆에서 쪼그리고 새우잠을 자던 가난한 노동자들도 모두 같은 운명에 처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를 이 짧은 구절 안에 4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배가 표류하여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무엇입니까? 배를 표류하지 않도록 “우리” 함께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라는 배가 언제 항로를 이탈하여 표류하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언제 교회가 방향을 잃고 위험에 빠지게 되겠습니까?
II. 하나님의 말씀에 유념하지 않았을 때에 교회는 표류하게 됩니다.(1)
교회를 배로 비유하여 설명하는 방법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나타납니다. 가장 큰 배는 물론 창6장이하의 노아의 방주지요. 가장 작은 배가 등장하는 곳은 출2:3에서 갈대로 엮어 만들어 모세를 태워 나일강에 띄웠던 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마8:23-27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폭풍우에 휘말리는 장면에서 등장하죠.
방주에는 온 인류의 미래가 실려 있었고, 갈대로 엮은 배에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타신 배에는 믿는 자들의 미래가 있었던 것이죠. 이 세 종류의 배가 가지는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배와 구분하여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는 특징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운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방주와 갈대 상자는 엔진도 없었고, 배를 젓는 사공도 없었습니다. 그럼 누가 배를 움직였습니까? 그분은 물론 하나님이시죠. 마8장의 배는 사공들이 배를 저어갔습니다만, 폭풍을 만났을 때, 인간의 기술과 노력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폭풍 속에서 표류하지 않고 배를 안전하게 보존하여 지키신 것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두드러진 특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라고 하는 배의 선장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죠. 이 배에 타고 있는 성도는 그 역할이 무엇이건 간에 그 누구도 선장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위기가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세상의 배가 표류하게 되는 원인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선장의 명령을 듣지 않고, 선원들이 멋대로 배를 움직여 간다면 배가 곧 위험에 빠지는 것과 같이 교회가 선장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할 때, 교회는 표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선원들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유념하지 않습니까?
III.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가 교회를 표류하게 합니다.
배가 항구를 떠나서 일단 바다로 나아가게 되면, 규모가 어떻든 간에 국가나 사회의 법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그리고 선장의 명령이 곧 법으로 인정되는 하나의 작은 나라가 되는 것이죠. 선장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합당한 지식을 쌓고, 훈련을 받아서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사람이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굉장히 힘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장의 말 한마디에, 작은 판단 하나에 배와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도 선장의 실수로 침몰하는 배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배가 표류하지 않고 항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선의 방법은 선장의 말을 따르는 것이죠.
그러나 교회라고 하는 배의 선장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류도 없으시고, 실수도 없으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보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교회운영의 방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오류가 생길 때,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될 때, 교회는 표류하게 되는 것이죠. 성경과 역사를 보면, 교회에 이 오류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물론 그 때마다 교회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되고요. 왜 이런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 걸까요? 본문은 교회라는 배가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항해하게 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명심해야할 핵심적 사항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참고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따라도 되고, 안 따라도 되는 참고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들어야만 되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큰 배의 선장 밑에는 항해사가 있고, 기관사가 있고, 주방장이 있으며, 갑판장이 있고, 통신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장의 명령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경로고 전달이 됩니다. 그러나 목표는 한 곳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명령은 결국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2절 말씀처럼 천사를 통하여 명령을 전달하기도 하셨고, 3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을 통하여 전달되기도 했고, 그 제자들을 통해서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2절의 “천사를 통하여 하신 말씀”의 의미는 출애굽하여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유대인의 고대 문헌에는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율법을 주셔서 천사가 모세에게 전하여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를 기록하신 분은 유대인 출신인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어째든, 2절의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을 “범죄”와 동일시하고 있고, 그 순종하지 아니함은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명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지키지 않았고, 어떻게 벌을 받았습니까? 가장 처음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는 현장은 에덴동산이라는 배였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세계를 움직여가던 두 사람의 선원을 충동질하여 선장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게 만들었잖아요? 출32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말씀을 받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 하고 애굽식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요.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규정하셨고, 그들을 진멸하시고 새로 시작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간곡한 기도로 뜻을 돌이키셔서 간신히 그 벌을 면하죠.
그런데, 이러한 반역은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끝도 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벌이 내리고, 회개하면 또 용서하시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하는 벌까지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배가 파선해 버린 것이죠.
3절을 보면, 더 무겁고 더 중한 명령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은 주, 즉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세상 법에도 형벌이 큰 조항이 있고, 작은 조항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큰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법이 중한 만큼 벌도 클 뿐만 아니라, 용서받기도 힘든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선장의 말이 무시되는 배와 그 배에 탄 선원들이 받게될 가장 큰 벌은 아마도 파선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순종하려면 귀를 기울여 듣고, 들은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留念, 좀 어렵지요? NIV는 "pay more careful attent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 마디를 듣더라도 최대한 집중에서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지한 자세를 견지할 때, 교회는 항로를 이탈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서 순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닻이 아니라 스크류입니다.
닻은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두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항구에 정박을 할 때나, 항해중 임시로 배를 세워야 할 때에 닻을 내립니다. 바람이나 파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배를 꽁꽁 묶어 두는 것이죠. 그러나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울 때, 항구에 묶어 둘려고 만든 배는 없을 것입니다.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는 목적은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천사들에게 받아서는 율법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즉, 사람들을 옭아매어 꼼짝 못하게 만들고, 이스라엘을 제사장 삼아서 다른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스라엘 영토 안에 묶어 두었던 것이죠. 창12:1-3에서 아브람을 부르셔서 복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복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역할을 맡기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배가 선장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을 꽁꽁 묶어 두었던 것입니다.
슥8:2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크게 질투하시고, 크게 분노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7-8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
결국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더 중하게, 더 무겁게, 더 신중하게 다시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마21:33이하를 보면, 이 상황이 비유로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타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때가 되어 그 열매를 거두려고 종들을 보냈더니 종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 포도원을 자기가 가지려고 한 것이죠. 심지어 아들을 보내도 죽여 버렸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결국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그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라(41)”고 선포하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받은 말씀을 우리는 율법이라는 명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분 2절을 보면, 율법(νομος) 가 아니라 말씀(λογος)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5:12이하에서 율법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 안에서 왕 노릇(롬6:6하)”하게 한다는 것이죠.
말씀은 우리를 가둬두려는 율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생명을 풍성히 누리고,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스크류를 힘차게 돌려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바다를 지나야 목적지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야 성도가 살고 교회도 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그림이 아니라, 지도입니다.
그림은 벽에 걸어두고 분위기를 변화시키거나, 정서를 함양하기 위한 것이죠. 물론 재벌회사 사장님 회장님들은 그림을 투자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만, 어째든 그림은 감상용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라는 배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인 것입니다.
바다에서 쓰는 지도를 해도라고 하지요. 해도에는 배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가지 않으면 암초를 만나서 파선을 당하기도 하고, 엉뚱한 항구에 도착하는 낭패를 겪기도 합니다.
올 1월 13일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호화관광 여객선 크루즈호가 그만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한 섬을 지날 때, 선장이 섬에 사는 친구에게 인사하겠다고 섬 가까이 배를 몰다가 그만 암초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해도를 무시한 것이 대 참사를 불러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도인 것입니다(3절). 지도를 보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표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하는 배를 지으시고 우리를 승선시키신 것은 구원의 항구에 이르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제시되어 있는 지도를 무시하게 되면 구원의 항구가 아니라, 멸망의 항구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세 카톨릭은 하나님의 말씀을 라틴어 속에 감추고도 부족해서 도서관 깊은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꺼내 보기만 해도 마귀라는 누명을 쒸워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뜻과 사람의 이익을 위해 교회를 운영해 나가려고 했기 때문이죠. 그 결과 중세 카톨릭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패와 타락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관상용 벽걸이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재벌 회장님 부인들이 창고에 깊숙이 숨겨두는 투자용 그림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밝히 보여주는 지도인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의 항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요1:1-4절을 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한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IV. 결론
배가 언제 표류하지 않고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습니까? 선장의 말을 듣고 유념할 때 평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안전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 교회와 성도가 집중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온 권위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또한 무지한 자들이 억지로라도 순종하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추가로 동원하셨습니다. 4절을 봅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생명을 지키는 명령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스크류를 돌리는 동력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올바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지도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첫댓글 늘 열정적으로 말씀 준비하시고 가르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강목사님 힘내세요^^ 아내도 건강관리 잘하고 있습니다.
아~~, 임목사님! 정말 오랫만이네요^.^ 사모님이 건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언제 한 번 뵈어야 하는데, 오히려 한국에서의 생활이 더 여유가 없군요ㅠ.ㅠ 제 집사람은 생각날 때마다 사모님 건강을 염려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항상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