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에 보이는 바위가 대왕암이고 파도가 멋진 바다~~~~~~~~~~~~~
우리가 저녁 먹은 식당
와우...저녁 메뉴는 갈비탕......왕왕 신나라............
저녁을 먹고 첨성대 가는길에 예쁜 조명 아래서 사진을 찍었는데...후레쉬가 잘 못됐는지...멋진 사진을 쌤이 못건졌단다 ㅠㅠ
아쉽아쉽,,,ㅠㅠ
첨성대
첨성대는 천문관측대로 보는 의견과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 단순히 천문대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으로 나누어진다.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야외에 홀로 서 있으나 본래는 담장 안에 둘러싸인 건물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각형의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으며, 꼭대기에는 우물 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 놓았다. 아랫부분에서 중간부분으로 원형이 줄어들다가 꼭대기에서는 일자 모양을 하고 있다.
창을 중심으로 아래 12단 위로 12단은 1년 12달 24절기를 상징한다. 창문3단까지 합하면 27단으로 선덕여왕이 27대 임금임을 나타내고, 정자석을 합하면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하며, 기단을 합하면 29단으로 한 달의 길이를 나타낸다.
사용한 돌 362개 정도로 1년의 날수를 나타낸다. 기단석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맨 위 정자석은 중앙 8방위에 맞추고 창문은 정남향을 향하고 있다. 햇빛의 길이로 춘하추동을 측정하였다. 기단의 네모는 땅을, 몸통의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는 천원지방을 의미한다.
첨성대를 세운 이유는,
1. 농사를 짓는 데 가장 중요한 날씨를 알 수 있기 때문.
2. 별자리의 움직임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점을 치기 위해.
3. 백성들에게 날씨를 미리 알려 주어 왕이 하늘의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 해.
4. 왕이 하늘의 이치를 잘 알고 있으면 백성들이 그만큼 왕을 믿기 때문.
첨성대 답사를 마치고 안압지(월지)에 등불축제하러 갈려구 우리는 차안에서 예쁜 등을 만들었단다...
만든 등에 소원도 적고...
안압지
안압지는 조선시대부터 부르기 시작한 이름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은 연못가에 기러기[안雁]와 오리[압鴨]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를 지어 부른 것이다.
신라시대에 태자가 머물던 동궁으로 그 중심건물이 임해전임으로 ‘임해전 터’라고 불러야 한다.
동궁이면서 외국사신과 국빈들에게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임해전이란 바다에 접해있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신라인들은 연못을 바다라고 느끼며 생활했다.
통일 시기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많은 부를 축적한 왕권은 극히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누리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추는데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통일 직후 674년에 안압지를 만들고 동궁을 비롯한 화려한 궁궐을 지었다.
입 수구는 물을 끌어들이는 장치를 한 곳으로 못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으며 물을 수조에 모은 다음 인공폭포를 통해 연못 속에 들어가도록 했다. 배수구는 동북쪽으로 나 있으며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했다. 연못 안에는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있는데 물은 입 수구를 통해 들어와 못 안에 있는 세 개의 섬을 돈 다음 출수구로 빠져 나간다.
연못 속에서 신라 시대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
첫날의 마지막 답사지 안압지까지 보고 우리는 늦은 시간에 숙소에 와서 씻고...자료집도 쓰고,,,
같은방 친구끼리 오손도손....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지............
황룡사지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새 궁궐을 지으려는데 황룡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선덕여왕 12년에는 자장국사의 권유에 따라 구층 목탑이 완성되고, 경덕왕 때는 황룡사 대종을 만들어 완성했으니 가람 배치의 마지막 완공은 총200년이 걸린 셈이다.
황룡사는 신라인의 모든 정성이 들어 간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이다. 신라에서 가장 큰 절이었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광활한 터만 남아 있다.
경덕왕 때는 성덕대왕신종보다 무려 4배나 크고 17년이나 앞서 주조된 종을 만들었는데 고려 때 몽골군이 가지고 가다 대종천에 빠뜨리게 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그것을 보고 새들이 진짜 나무인줄 알고 앉으려다 미끄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분황사
분황사란 ‘임금의 향기’라는 뜻이다. 황룡사 바로 옆에 위치하며. 선덕여왕 3년에 세운 절로서 원효가 머물러 불교 풀이 책을 써 낸 곳이기도 하다. 원효가 세상을 떠난 후 화장하여 그 재로 아들 설총이 만든 상을 모시기도 하였던 곳이다. 많은 유물들이 전해지나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때 제작 된 것 중 가장 오래된 탑이다.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현재는 3층이나 원래는 7-9층으로 추측된다. 모전 석탑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흡사 벽돌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한 탑을 말한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4면에 문이 있고 그 앞을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으며 기단위에는 육지 쪽으로 돌사자 두 마리, 동해 쪽으로 물개 두 마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