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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시 화북면 늘재-> 청화산(984m)-> 갈림길(805m)-> 전망바위 -> 갓바위재-> 조항산(953.6m)-> 충북 괴산군 입석리 백악산 쉼터 ( 15km, 13km, 9km )
오지 속의 대간인 청화산(984m)~조항산(953.6m) 줄기를 밟아 보았다.
늦가을에 접어든 늘재에는 낙엽들이 찬 바람에 휘날린다. 나지막한 높이에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언덕 정도로 느껴지지만, 고갯마루에 세워진 낙동강, 한강 분수령 팻말과 맞은 편 당집과 수백 년생 음나무가 예사 고개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잔솔이 무성한 능선을 따라 오르면 곧 된비알. 엊저녁 제법 매섭던 날씨가 오늘은 많이 풀리고 햇살도 따뜻하다. 능선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파일재킷을 벗어버린다. 대간 종주객들이 많이 다닌 까닭에 길이 잘 나 있다. 간혹 가파른 바위지대가 나타나 팔다리를 다 사용케 하지만, 그래도 바위턱에 올라서면 조망이 터지곤 하며 눈을 즐겁게 해준다.
등뒤로 관음봉에서 문장대를 거쳐 천황봉으로 뻗는 속리산 주능선이 펼쳐진다. 암봉이 들쭉날쭉 솟구쳐 올라 메우 기운차다.
그 산줄기가 밤재로 떨어지면서 힘을 잃고, 또 늘재로 떨어지며 끊어질 듯하다 다시 솟구쳐 청화산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질긴 생명력은 산줄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산자락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해 놓았다.
저 아래 용유리 일원(상주시 화북면 소재지)은 우복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속리산, 청화산, 도장산(827.9m)에 둘러싸인 이 일대는 예로부터 지리산 청학동과, 경기도 가평 어디에 있다는 유교사회의 이상향 판미동과 더불어 이상향으로 꼽히던 곳이다.
어재 오후 늘재 북쪽 청화산농원을 찾았을 때, 마침 동네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도시 아이만큼이나 깨끗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얼굴 표정에는 도시 아이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것 역시 청화산의 아늑한 산세 덕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청화산에 대한 인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바뀌어갔다. 중턱까지 농가와 비닐하우스가 들어섰을 정도로 편안하던 산세는 높이를 더해가면서 가팔라지고 거칠어졌다.
이래서 풍수가들이 청화산을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라 표현했는가 보다.
상주쪽 속리산의 힘찬 바위 연봉이 용이 약동하는 형세라면, 눌재는 용이 승천하기 전 힘을 모으기 위해 못 속에 몸을 감춘 잠룡 형상이고, 청화산은 용이 하늘로 솟구친 형상이라는 것이다.
용머리께에 이르자 정상 남동 사면에 위치한 원적사와 그 아래 쌍룡계곡이 내려다보인다. 원적사는 신라 무열왕 7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전하는 고찰로, 도장산 북록의 심원사와 더불어 수도처로 이름나 있다.
청화산과 도장산 사이의 쌍룡계곡은 골이 깊고 아름다워 두 마리 용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하는 명소다. 청화산 주변에는 유난히 용과 관련된 명소가 많다.
청화산 정상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30분. '해발 984m, 늘재 3.5km 1:20, 조항산 10.3km 3:30' 이라 적힌 안내판과 문경군청등산회가 세운 정상표지목, 상주시청산악회의 표지석이 서 있다. 청화산 정상은 상주시, 문경시, 괴산군의 경계점이다.
정상에서 동릉을 따라 살짝 내려앉았다 올라서자 수많은 리번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고, 그 옆에 '청화산 0.8km 30분, 조항산 9.5km 3시간' 이라 적힌 안내판이 서 있다. 대간은 여기서 왼쪽(북쪽) 내리막 사면으로 이어지는데, 시루봉(976.2m)으로 이어지는 동릉이 워낙 뚜렷해 대간 길을 놓치기 쉬운 지점이다.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다 살짝 솟구친 무명봉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자 그야말로 떡시루를 뒤집어 놓은 듯한 시루봉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간보다 훨씬 뚜렷하게 뻗어 있다.
대간은 혼자만 힘을 과시하지 않고, 양옆으로 흘린 곁가지도 힘을 실어주어 한반도를 흐트러지지 않도록 얽어매고 있는 것이다.
오늘이 11월 8일, 날짜로는 아직 겨울이라 하기에는 뭣하지만 산은 벌써 겨울 문턱을 들어서고 있다. 잠깐잠깐 쉴적마다 땀 식은 몸으로 파고드는 산기운이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따뜻한 아랫목을 생각케 한다.
산 아래 골짜기는 아직도 단풍빛으로 버티려고 안간힘을 다하지만, 역시 곧 잿빛, 그리고 흰빛으로 변하고 말리라.
산아래 도로에서는 조망이 전혀 없을 듯하던 청화산~조항산 줄기는 곳곳에 전망대를 얹어놓고 있었다. 살짝 솟은 턱과 거무튀튀한 절벽 위가 모두 조망대였다.
특히 갓바위재 직전, 청화산 정상과 두어 시간 거리에 솟은 무명봉에선 모처럼 조항산 어깻죽지 너머로 대야산과 희양산(998m)으로 뻗은 대간 줄기를 바라볼 수 있었다.
뿐 아니라 서쪽 골짜기에 들어선 의상저수지는 삼라만상을 모두 빨아들일 듯 맑고 짙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전망대는 조망 외에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무명봉을 내려서자 잘록한 갓바위재다. 왼쪽으로 난 뚜렷한 길은 의상저수지를 거쳐 입석리로 내려서는 길이다. 갓바위재를 지나면서 조항산 오르막이 시작된다.
조항산 남사면은 다가설수록 범접키 어려워 보였다. 신선이 도를 닦기 위해 머문 듯 신비롭고도 기묘한 형상의 기암절벽이 앞을 가린다. 겉모습 만큼이나 오름길 역시 만만치 않다. 가파른 바윗길을 올라서면 거친 바위 능선이 나타나 애를 먹이곤 한다. 길도 벼랑으로만 나 있을 뿐이다.
벼랑길을 따르는 산짐승이 된 기분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정상에 올라서는 사이 등뒤로 속리산으로 뻗은 산줄기가 눈에 든다.
정상에 올라서자 이번에는 알바위산인 대야산과 그 뒤로 장성봉(916.3m)을 거쳐 구왕봉(879m)과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대간이 한눈에 든다.
육산과 바위산이 번갈아 솟구쳐 힘차고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비록 대간을 벗어난 지능선이지만 군자산(827m) 능선도 눈길을 끌어당긴다.
"웬 비행기 소리?" 대간을 비롯, 주변의 산세에 입이 벌어질 즈음 갑자기 "쉑~, 쉑~" 하는 마찰음이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한다.
마귀할멈통시바위(899m) 남사면의 채석장에서 압축기를 이용해 돌을 깨는 소리다. 조항산과 대야산 사이 무명봉인 887m봉 좌우는 채석장으로 형편없이 훼손돼 있었다. 887m봉 서쪽 굴바위 아래쪽 채석장과 고모치 북동쪽 사면의 채석장은 작업이 끝났지만, 887m봉 동쪽 마귀할멈통시바위 남쪽 사면의 채석장은 한창 돌을 캐내는 중이었다.
"통시' 란 뒷간이란 말이니, 마귀할멈통시바위는 마귀할멈이 변을 보던 뒷간이다. 그 동쪽 암봉(827m)은 손녀바위통시바위다. 그리고 대야산 다래골의 떡방아바위는 마귀할멈 변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특히 통시바위 일원은 기암 괴봉들과 남사면의 바위능선이 한데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돌을 캐내겠다고 절경의 바위능선을 깎아내고 있는 것이다. 봉암사의 일반인 출임금지 방침이 늘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로 인해 돌산이 희양산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싶어진다.
모두들 어이없는 듯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산행에 나섰다. 조항산을 지나 능선은 고모치로 뚝 떨어진다. "옛 고개" 라는 뜻의 지명인 고모치에서 동쪽 골짜기를 따라 폐광쪽으로 내려섰다. 마귀할멈통시바위 갈림목인 887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서서히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완경사 능선길을 따르다 853m봉에서 되돌아서자 구름이 걷히면서 조항산이 날개짓하며 솟아오른다. 남사면의 험난한 모습과 달리 바가지를 뒤집어 놓은 부드러운 형상이다.
887m봉을 지나 줄곧 떨어질 듯하던 능선은 한동안 오르내림을 거듭하다가 굴바위(850m)를 지나면서 뚝 떨어진다. 정오를 조금 못미처 도착한 밀재는 등산인들이 많이 다니는 곳답게 길이 잘 닦여 있다. 밀재에서 서쪽으로 내려서면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 동쪽으로 내려서면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다.
밀재에서 대야산 정상까지 약 1.5km 구간은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아기자기한 산길을 만들어 놓고 있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20여 분 오르자 대문바위, 코끼리바위 갈림지점. 곧장 오르는 대문바위 길을 따랐다. 갈림목 바로 위에 있는 대문바위는 암봉과 그 왼쪽에 약 4m 높이의 기둥바위를 말한다.
대문바위를바져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작은 바위에 얹혀 있는 절묘한 형상을 보여준다.
그 바위는 뒤편의 암봉과 더불어 또 다른 대문바위를 만들어 놓고 있다. 여기서 보이는 대야산 서릉도 예사롭지 않다. 기암괴봉이 줄지어 솟구치고, 낙랑장송이 바위틈에서 자라는 것이 전형적인 산수화 모습이다.
대문바위를 지난 다음 암릉 곁으로 아슬아슬하게 길게 이어지다 짧은 된비알을 올려치면 대야산 정상부. 이후 잘막한 내리막과 오르막을 두 번 반복하자 드디어 정상이다.
대야산 정상은 가히 백두대간 최고의 조망대라 불릴 만한 곳이다.
남으로 우리가 걸어온 청화산~조항산 줄기뿐 아니라 그 뒤로 톱날같은 속리산 주능선도 한눈에 들어오고, 북으로 장성봉에서 구왕봉과 희양산을 거쳐 백화산(1,064m)으로 뻗어나간 대간도 바라보인다.
뿐인가, 괴산군 청천면과 문경시 가은읍 일원의 높고 낮은 산봉과 아늑하게 멀어진 벌판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마음 편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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