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화재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경기 기념물 182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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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장인이며, 정희왕후의 친정 부모인 파평윤씨 중시조 윤번과 부인 인천 이씨 묘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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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정공 윤번 묘소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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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의 제6차 능원묘 답사시에 버스로 이동하면서 길이 좁아서 포기했던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을 제24차 능원묘 답사시에는 승용차로 들어 갔습니다만, 승용차도 겨우 한 대가 지날 정도로 길이 좁았습니다. 묘역은 주변의 산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일반인들이 많이 아는 인물 위주로 몇 곳의 묘역만 둘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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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번 묘소 측경 및 묘비와 석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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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번(尹璠, 1384[우왕
10] ~ 1448[세종 30])은 조선의 문신. 자는 온지(溫之), 승례(承禮)의 아들.
이름을 번(磻)으로 쓰기도 한다. 세조의 장인이며, 고려말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이다.
뒤늦은 나이에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긴 후에
신천현감을 거쳐 1428년(세종 10) 군기시판관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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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번 묘소를 둘러보는 답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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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7녀가 후일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가례를 올리자 군기시부정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 공조와 이조의 참의에 이르렀고, 2년 뒤에는 공조와 호조의 참판을
지냈다. 1436년(세종 18) 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1438년 경창부윤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경기도도관찰사로 나가 민심을 돌보았고, 이어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40년 우참찬을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에 이어
지중추원사가 되는 등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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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번 묘소 앞에서 바라 본 윤번의 부인 인천 이씨 묘역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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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년(세종 24) 풍병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왕은 시의를 보내
병을 돌보게 하였다. 1447년 병중임에도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임관하고 판중추부사를
더하였다. 이듬해 7월 65세를 일기로 죽었다. 부음을 들은 왕은 부의를 보내고 2일간 철조를 명하기도
하였다. 법도있는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관직에 나가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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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이씨 묘역 측면 및 석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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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조에서 사헌부로 자리를 옮긴 후,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면서도 엄격하게 처리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455년 6월 세조가 즉위하고 딸이 정희왕후(貞熹王后)에
책봉됨에 따라,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 파평 윤씨 카페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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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이씨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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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이씨 묘비와 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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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이씨 묘역 하단에 서 있는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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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청 이윤희
문화재전문위원은 “윤번은 딸이 왕비(정희왕후)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떴지만 인천이씨는 그 뒤에 사망해서 국장(國葬)을 치렀기 때문”이라며 “국내의
장명등 가운데 최대 규모”라고 설명했다. - 신문기사에서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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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단의 묘가 윤번의 묘, 하단의 묘가 부인 인천 이씨 묘(민묘는 대부분 남편 묘가 앞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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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조선 청화백자 발견
한겨레 | 기사입력 2003.10.26 09:01
[한겨레] 1456년 제작된
세조 장모 인천이씨 묘지석
전문가들 "도자사 다시 써야할 국보급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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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연대가 확인된 조선시대 백자 가운데
가장 시기가 이른 15세기초의 청화백자 묘지석이 600여 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고려대 박물관은 지난해 10월부터 올 5월까지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 유물을 조사・정리하다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장모인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1383~1456) 의
무덤에서 나온 청화백자 묘지석을 찾아냈으며 이 묘지석이 세조 2년(1456년) 만들어진, 국내 최고의 청화백자로 확인되었다고 26일 밝혔다.
푸른 코발트 안료로 무늬, 글씨를 넣은 청화백자는 <세조실록><용재총화> 등의 문헌기록 등으로 미뤄 세조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해왔으나 그동안 동시대 유물들은 발견된 바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묘지석은 문헌기록을 실증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자
조선 청화백자의 뿌리를 찾는 결정적 실마리로 평가된다. 박물관쪽이 최근 펴낸 조사보고서를 보면 묘지석은 2001년 5월 문중 후손들이 교하면
당하리 인천 이씨의 묘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회청색 빛을 띠는 묘지석은 가로 27~28cm, 세로 36~37cm, 두께
1.5~1.7c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덮개 구실을 하는 순백자 지석 1장과 청화글씨가 새겨진 4장의 백자판으로 이뤄져 있다. 발견 당시 무덤과
상석 사이에 묻힌 돌 상자(합)속에 나란히 포개진 채 들어있었다. 이들 묘지석에는 경태 (명나라 황제 연호)7년 병자년인 1456년7월14일
대부인 이씨가 별세했으며 10월8일 예를 갖춰 매장했다는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 및 후손들 현황 따위 기록을 청화안료를 입힌 해서체
한자로 반듯하게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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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6년 제작된 세조
장모 인천 이씨 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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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이씨는 세종때 중신으로 세종과 사돈지간이자 세조의 장인이 되는 정정공 윤번(1384~1448)의 부인이다.
보고서는 이 청화백자가 현존 청화백자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르며 양질의 흙과 유약으로 구은 최상급 백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편년이
확실한 조선 백자 가운데 가장 오랜 것으로는 경남 진양군 영인정씨묘에서 나온 ‘백자상감 묘지석’(1466년・국보 172호・호암미술관 소장)이,
청화백자로는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한 홍치2년 연대가 쓰인 소나무・대나무 무늬 청화백자 항아리(1489년・국보 176호)가 있으나 인천 이씨
무덤의 묘지석은 제작시점이 그보다 10~30여 년 앞서는 것이다.
앞서 묘지석을 살펴본 윤용이 명지대 교수(도자사)는 “국내 청화백자의 첫
제작시기가 최소한 1450년대까지 올라갔음을 확인시켜준 국보급 유물”이라며 “발색 등이 뚜렷하고, 구워낸 방식이나 보존상태 등도 좋아 1467년
관요(왕실전용 가마)설립 이전 이미 높은 수준의 청화백자 제작기술이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강경숙 충북대 교수도 “도자사를 다시
써야할 획기적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박물관쪽은 11월6일~22일 열리는 파평윤씨 묘역 출토유물 특별전에 이 묘지석을 공개하기로 했다.
노형석 기자 3Dnuge@hani.co.kr">nuge@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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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사흔의 묘역 앞에서 바라 본 건너편 능선상의 윤번 묘역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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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尹士昕·1422~1485)의 묘역 입구엔 화려한 문양의 2.5m 크기 신도비가 서 있었다. 이 위원은 “윗부분을 연꽃잎처럼 말아올린 화관석(花冠石) 양식으로서 불교의 영향이 남아있던 조선시대
초까지만 유행하다 사라졌다”며 “윤사흔 신도비는 현존하는 화관석 양식 중 가장 걸작”이라고 말했다. - 신문기사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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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사흔의 묘역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의 4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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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흔(尹士昕, 1422[세종 4] ~ 1485[성종 16])은 조선 초기의
척신이자 문신. 자는 필보(弼甫). 판중추원사를 지낸 (贈) 영의정 번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풍채와 재질이 범상치 않아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 1444년(세종 26) 음보로 세자세마가 되었다가 많은 관직을 지낸 후
내자직장을 역임하였다. 직장으로 있으면서 몸가짐과 법도에 어굿나는 일을 보면 누구라도 반드시
지적하곤 하였다. 1455년 6월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후의 지친이라서가
아니라 그 인품과 역량을 인정받아 군기감정으로 출사하였고, 이어서
정랑으로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예문사가 되었으며, 형조참의·이조참판을 거쳐 1460년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때 의정부의 전리를 마음대로 문책한 탓으로 탄핵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 다음해에 다시 등용되어 인순부윤에 임명되었으며 한성부윤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1462년 숭정대부로 승계하면서 중추원사에
등용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공조판서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임하였다.
1466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성종이 즉위하던 1469년 12월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가 되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종을 옹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로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훈척공신으로 총병의 직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하였다 하여1473(성종 4)년 대사헌 서거정(徐居正)으로부터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1475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지경연사를 겸직하였다가 다음해 영경연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종진(腫疹)에 걸렸는데 왕이 직접 진귀한 약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 결국 1485년 죽음에 이르렀다. 부음을 들은 성종은 몹시 애통해하며 철조를 명하여 조의를
표했다. 파주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 파평 윤씨 카페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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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의 묘(윗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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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원로의 묘(아랫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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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로(尹元老, ? ~ 1547[명종 2])는 조선 전기의 문신.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지임(之任)의 아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자, 원형(元衡)의
형이다. 왕실의 외척으로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오빠라는 기반을
등에 업고 동생인 원형과 함께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경쟁자였던 김안로가 권세를 부리자
대윤·소윤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싸움은 尹任이 김안로의 세력을 배경으로 후일 인종이 될 東宮을 보호한
다는 명목으로 중종에게 아뢰어 동생 원형과 함께 자신을 내쫓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번은 김안로와의 대결로 1537년(중종 32)
좌사어로 있을 때 안로에 의해 파직, 유배되었다가
이해에 안로가 사사된 뒤 풀려나왔다.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릴 적에 동궁(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윤임이 중종에게 아뢰어 원형과 함께 그를 외직으로 내쫓았을 때부터 소위 대윤·소윤의 싸움이
비롯되었다. 동궁이 장성하도록 아들이 없이 병약하였는데, 그는 세자를 바꾸어 세운다는
소문을 만들어 길거리에 전파시키기도 하고, 또는 후에 명종이 되는 대군(大君)이 위태롭다는 말을
퍼뜨려 대윤·소윤의 대립은 격화되어갔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함으로써 대윤의 세력이 확대되어 파직당하였으나, 이듬해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한 뒤 군기시첨정으로
등용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7월, 윤인경 등의 탄핵으로 또다시
파직당해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명종 1년에 석방, 귀환되었다. 돈녕부도정에
기용되어 윤원형과 권세를 다투었으며, 공신에 참여되지 못함을 분히 여겨 자주 불평을 말하다가
윤원형의 족질이며 심복인 병조좌랑 윤춘년의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어 배소에서
사사되었다. 파주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다. - 파평 윤씨 카페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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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원형과 정난정(우측의 작은 묘역)의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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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형(尹元衡, ? - 1565년[명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파평(坡平). 자(字) 언평(彦平).
판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아들이며,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1528 년 중종 23 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3 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37년 권신 김안로에 의하여 파직, 유배되었다가 이해
김안로가 사사되면서 풀려났다. 뒤에 수찬, 교리, 지평,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세자(뒤에
인종)를 폐위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경원대군(慶原大君) 환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모의를
진행함으로써 세자의 외숙되는 윤임과 알력이 생겨 1543 년에는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하여 외척간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좌부승지,
좌승지, 공조참판이 됐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윤의
송인수의 탄핵으로 삭직 당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8 개월 만에 죽고, 11 세의 어린나이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이를 계기로 하여 예조참판에 복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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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원형의 묘역 정면과 후면에서 바로 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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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윤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이기, 정순명,
임백령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난정(蘭貞)이라는 자기의 첩을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비와 임금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다. 이기는 병조판서가 되려할 때 유관이 이를 방해하였고,
임백령은 기생첩 때문에 윤임과 다툰 일이 있어 원한을 품었으며, 정순명은
평소부터 사람들을 미워하여 언제든지 분풀이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이들과 결탁하여
윤임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관, 유인숙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음모를 꾸몄다.
그 음모의 내용은 『 "임금(仁宗)의 병환이 위중할 때 윤임이 장차 제몸이 보존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임금의 아우(명종)을 추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계림군(桂林君)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유관과 유인숙도 이에
협력하였다." 』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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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난정의 묘와 묘비 뒷편에 새겨진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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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문정왕후는 윤임, 유관, 유인숙을
처치하려는 밀지를 예조참의였던 그에게 내렸는데, 이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아 세인의
의혹을 피할 길이 없고, 또 신하로서의 의리는 자기가 섬기는 분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는 것인데
이제와 그 당시 대행왕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심한 죄를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하느냐 하는 점과, 왕실 외척간의 문제로 왕의 덕에 누가 될 것을 들어 처벌에
반대하는 공론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8월 29일 궁중에서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하였다.( *을사사화 ), 권력을 장악한 그는 4, 5명의 악한 무리를 심복으로 삼아 평소
원한이 많았던 이들을 유배 또는 삭직하여 적대세력을 도태하였다. 을사사화후 그 공으로 보익공신 3등으로 개봉되어 서원군(瑞原君)에
봉하여졌다.
위력과 세력이 높아지자 뇌물이 폭주하여, 성내에 집이 열여섯채요, 남의 노예와
전답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것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 아내를 내쫓고 기생첩 난정을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하니,
권력을 탐하는 조신들은 그 첩의 자녀와 혼인하였다. 생살의 권한을 잡은지 20년에 사람이 원한을 품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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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난정의 묘역 뒷편에서 바라 본 윤원형의 묘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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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 년 명종 1년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었으나, 윤원로가
유배됨으로써 더욱 세력을 굳게 하고,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 벽서의 내용인즉 『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라는 것으로 이로 인해, 봉성군(鳳成君)과 참판 송인수 및 이조좌랑 이약해는 사형되고,
이언적, 정자, 이염, 임형수, 노수신, 장황,
유희춘 등 잔존 인물도 숙청하였다.
한편, 동지춘추관사로서 <중종실록> 및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48 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551 년 영중추부사로써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1557 년
영중추부사 이듬해 다시 우의정이 되었으며, 1560 년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63 년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리다가 1565 년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실각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리(田里)로 방귀(放歸)되었으며,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 파평 윤씨 카페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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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윤씨의 아버지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묘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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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묘역 후경과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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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임(尹之任, ? ∼ 1534[중종 29])은 조선 중기의 외척. 자는 중경(重鄕), 내자판관을 역임한
욱(頊)의 아들이며 문정왕후와 소윤의 원로 원형(元衡)의 아버지이다. 장원서의 별제로 처음 벼슬길에 나섰으나, 딸이 1514년(중종 9)
중종의 둘째 계비로 간택되자 정치적 입지가 넓어졌다.
이후 여러 자급이 뛰어 돈녕부의 도정을 거쳐,
1519년(중종 14) 영돈녕부사에 이어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나갔다. 여기에 1522년 坡山府院君으로 봉군되었다.국구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농번기에 매사냥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처첩을
빼앗기도 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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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부인 이씨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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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임의 묘역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는 답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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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한나라 문제(文帝)가 국구 두광(寶廣)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한
고사를 들면서 외척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정작 자신의 아들인 원형은 소윤의 영수가 되어 대윤
윤임 일당을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왕실의 외척으로서 전횡을 일삼았다. 자신의 지론을 아들이 어긋나게 했지만, 그 덕에 純忠積德輔祈功臣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됐다. 시호는 靖平이다. - 파평 윤씨 카페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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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임의 아들인 윤원필의 묘역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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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평 윤씨 재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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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필(尹元弼, 1496[연산군 2] ~ 1547[명종
2])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다. 자는 인재(隣哉). 추산부원군 지임(之任)의 아들이다. 상의원정을 역임하였으며, 1564년(명종 19)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으로 녹훈되면서 대호군 겸 내승을 제수받았다. 후에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 파평 윤씨 카페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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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원필의 묘역 전경과 향로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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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하단에서 바라 본 전경(앞의 묘가 윤원필, 뒤의 묘가 윤지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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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母子 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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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서 발견됐던
430년 전 모자 미라가 긴 잠에서 깨어나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7일부터 고려대학교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22일까지 ‘파평 윤씨 모자 미라
및 특별유물전’이 열려 미라와 유물들을 전시한다.
발굴된 수의와 얼레빗, 바늘꽂이 등 부장품과 누비장옷, 화려한 금박의 겹
단저고리와 겹 단치마 등 사대부 집안 부인의 복식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1566년 매장된 미라는 수의 홑바지 허리끈에
‘병인윤시월’이라는 한글묵서가 적혀 있어 정확한 사망연대를 알 수 있고 부장된 화려한 색상의 복식이 쏟아져 나와 언론과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2002년 9월 파평 윤씨 종중에서 미라를 기증받아 고대 의과대학에 정밀조사를 의뢰했다. 조사 결과,
고대 의과 대학은 '출산 과정에서 자궁 파열로 인한 과다 출혈'이 미라의 사망 원인이라고 밝혔다. 남아로 밝혀진 태아도 자궁에서 미라상태로
남아있었다. 이에 미라를 ‘파평 윤씨 모자(母子) 미라’로 명명했다.
모자 미라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라는 희귀성과 완벽한
보존성, 출토된 많은 복식류와 언문편지, 쪽지 등으로 인해 어떤 신분의 누구인지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고대박물관이 이를 조사해 공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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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가 입고 있던 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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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 모자 미라는
누구일까?
미라의 주인공은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타 집안으로 출가했다가 친정에서 출산 도중 사망한 20대
중반의 젊은 여인이다. 친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친정인 파평 윤씨의 종산에 묻혀 있는 것이다.
파평 윤씨 종중 무연고 묘역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모자 미라는 묘석이나 묘표가 발견되지 않아 '병인윤시월'(병인년 윤시월에 사망)이라는 습의의 기록과 파평 윤씨
족보기록, 한글편지 등으로 추정한 것이다.
또 인종의 후궁인 숙빈이 쓴 한글편지도 출토돼 미라의 신분 확인에 한 역할을 했다.
숙빈은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량(1495-1569)의 딸이다. 따라서 윤원량 집안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윤원량의 자식인
윤소(1515-1544)의 첩실 외동딸일 것이라고 정호섭 고대박물관 학예사는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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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가 발견된 목조 내관. 위에 칠성판이 얹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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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 관에서 발견된 4품 단령과 흉배는 미라
남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미라의 아버지(윤소)나 할아버지(윤원량)의 것일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친정에서 출산도중
사망한 손녀딸에 대한 애틋한 애정으로 할아버지가 넣어주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문정왕후 오빠인 윤원량은 미라가 사망할 때까지
살아있었고, 손녀의 장례를 주도했을 것으로 보여 미라의 관속에서 발굴된 부장품은 모두 윤원량과 관계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관속에서 발견된 언간(言簡)과 시신의 머리카락에서 참빗을 싸서 발견된 편지 등은 모두 부장품을 싸는데 사용된 것이다. 망자가 애지중지하는 편지를
염을 하는 과정에서 정식으로 넣은 게 아니라 단순히 부장품을 싸는데 이용했다. 그래서 보낸 사람과 받은 사람이 분명하지 않고 훼손이 심해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인종의 후궁 숙빈 윤양제의 언문편지는 윤원량의 부인인 친정 어머니에게 보낸 것으로 아들인 윤소의 첩녀(妾女)인
미라의 염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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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과 겨울용 누비장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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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희 | 피부의 탄력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미라의 피부는 이집트 미라와는 달리 탄력성과 촉감이 부드러운 것으로 밝혀졌다. 이집트 미라는 만지면 부서지는 딱딱한
형태지만 모자 미라는 사지를 벌리면 벌어질 정도로 탄력과 살아 있는 피부 같은 부드러운 촉감을 유지했다.
키는 153.5cm이고
몸은 비교적 영양상태가 좋은 비만체형이다. 처음에는 암으로 사망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고대의과대학의 복부해부 결과 난산으로 인한 사망으로
밝혀진 것. 음모가 그대로 있고 미라의 외음부는 쉽게 벌어져 태지에 둘러싸인 태아의 머리와 머리카락도 관찰됐다.
43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미라의 장 속에서 선충류로 추정되는 기생충이 발견돼 신분이 상류층에 속하는 미라가 음식을 설익혀 먹거나 날로 먹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로 식물성 섬유소와 꽃가루가 장에서 발견됐고, 위샘세포 역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존되어 학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발견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왜 미라가 됐을까?
우리나라는 산성토양이고 기온 특성상 온대
습윤지역이라 미라가 되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모자 미라가 발견된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와 와동리 파평 윤씨 분묘주변에서는 1980년대 농수로
공사 때 예상하지 못한 무연고 묘지가 상당수 발견됐고, 이때 미라가 5-6기 발굴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1999년 국지도 공사 때도
처녀미라가 발굴돼 이 지역은 미라의 발굴이 빈번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20만 평에 이르는 파평 윤씨 정정공파 종중묘역은 오랜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누구의 묘인지 모를 무연고 묘역이 많은 편이다. 모자 미라도 문인석과 상석과 향로까지 갖춘 묘역이었다고 한다. 파평 윤씨
묘역은 비석의 역사적 가치로 현재 도(道)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미라가 되려면 시신이 들어 있는 목관을 에워싸고 있는 회곽에
공기 유입이 차단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미라가 되는데 토양보다 주요한 원인일 것이라는 게 고대 생태공학부의 판단이다.
우리나라는 미라
발견도 드물지만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 미라가 발견돼도 화장하는 관례 때문에 단국대에서 처음으로 남아 미라를 발굴보존하여 최초로 전시회를 가진
이후로 이번 고대박물관 '특별전시회'가 두 번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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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파평윤씨 母子 미라 종합연구논문집'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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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박물관이 파평 윤씨 종중의 모자
미라 기부로 학술종합연구를 하고 전시회를 하게 된 것은 매우 큰 성과로 평가받는다. 역사학, 국어학, 복식학 등 인문학과 의학, 자연과학,
법의학 등 여러 학문을 총동원하여 연구를 진행했고, 전 과정을 영상화하여 자료를 남겨놓았다.
고고학자들은 고대박물관이 이번 모자
미라 연구로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발돋움했다는 극찬을 하고 있다. 고대박물관은 그동안의 연구 결과로 '파평 윤씨 모자 미라
종합논문집(고려대학교박물관 발행)'을 출간했다.
모자 미라 발굴부터 전시회까지 관계했던 김우림 박사(고대박물관 학예과장)는
"이번에 전시된 미라의 보존을 위해 특수제작한 전시관이 마련됐고, 미라 신체부위마다 습도와 온도가 다르게 조절되었다"며 "미라를 기증해주신 파평
윤씨 종중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2003-11-0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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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산4-20외 화살표 ↑ 주변의 넓은 권역에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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