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가는것이나 귀농과 연관되어있는 카페에서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은 누구나가 많이 올려지어
어찌 시작하는지와 성공한 이야기도 가끔은 볼수 있으나
실폐한 이야기는 전혀 볼수가 없는데~
그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전원이야기나 귀농말만 나와도 멀미(?)가 나고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사실적으로 너무도 필요한 산지식인데 말입니다
지금 자연의 품에 자리를 잡으신 우리님들도
그 동안에 어려웠거나 혹은 좋지않은 경험을 많이 올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실 꿈을 꾸고 계신분은 다행이지만
그 꿈을 이루기위하여 시작한 자연으로의 길이 결코 꿈만으로는
안된다는것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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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좋지 않은 일은 꼬리를 물고 온다~
제가 모시고있던 혼자되신 어머니는
막내가 일본으로 사업차 떠나고
부모의 이혼으로 혼자가된
초등학교 재학중인 손녀 때문에
서울 막내 집으로 가서
아이를 키우시며 계시던중
손녀가 미술실습을 간 사이에
뇌졸증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것은........
1998년 후반기 한참 외환위기로
모두가 불안한 직장 생활을 하던중
대전공장도 공원부지로의 수용을 면하기 위하여
부지를 건설회사에 팔아 아파트를 짓는다고
공장은 문을 닫고
그자리에 있던 모든 직원은
모두 가정으로 돌아가고
마즈막을 봉사하는 마음보다는
어찌하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대구 공장의 정리를 위하여
대구공장 부근에 작은 집을 하나 얻어
공장 정리를 하던중이 었습니다
어느날 대구로 찻아 내려온 집사람과 하루를 보내고
경산역에서 떠나는 차창안에서
혼자서 너무 고생한다며
눈물을 훔치는 그 사람을 보내던~~~
그 서글품에 술의 힘에 취하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던 그날이 가고....
몇일이 지난후 였습니다
모 대학 병원에 여동생이 근무를 하여
어머니는 그곳으로 실려가셔서 수술을 하셨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저를 담당의사는
포기를 권유 하였습니다
완쾌는 불가능하고 약간의 차도가 있어도
치매가 상당부분 진행 되엇다고 하네요
코로 숨쉬기도 어려워 기도 를 열지 않으면 돌아가신다며...
결국 여동생을 설득까지 하였지만
차마 그리 보내드릴수는 없었습니다
누구 하나는 항시 자리를 지켜야 해서
내가 토요일 오후에 서울에 병원으로 가면서
일주일동안의 빨래만을 대전에 내려 놓고는
바로 서울 병원으로 가면
집사람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어머니 병간호를 하고
토요일에 서로 잠시 얼굴만 보고는 고생했다는 말만 남기고
대전집으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그곳릏 떠나고....
나는 월요일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대전에서 새탁한 한주일 입을 옷을 찻아 대구로 향하면
집사람은 이미 서울 병원으로 떠났고
제가 올때 까지 그곳에서
힘든 간병의 병원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다행이 그당시 중학생이된 딸애가 집일일과 오빠를 챙기는등
엄마 노릇을 대신하여 잘 해주더군요
어머나의 병은 차도는 전혀 없고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서로가 날카러워지고
별거아닌일에 다투고 하더군요
궁여지책으로 할수없이 간병인을 24시간 쓰기로하고
조금은 시간에서 자유로울수 있었으나......
남겨진 조카딸과
기약없는 병원비와 간병비.....
병원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
지쳐버린 몸과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어머니쪽 식구들의 무차별적 폭언까지.....
그 지친 가슴하나 못 감싸주는 남편을
아내는 또 얼마나 많은 원망을 하엿을까?
결국 회사에서는 조기퇴출이 결정되고
아직 아이들은 중학교를 다니는데.....
일년만을 애원도 하였지만
이미 20년을 몸 바친 조직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회사도 어려움에 봉착하여 다른 회사로 넘어가는 와중에
퇴직금조차 제때 수령을 못하였는데
대기업에서 퇴직금이 안나올리 없다는둥
마치 병원비를 저에게 전가 시키려고 하는지 알고는
여동생에게서 병원비 독촉을 저와 집사람에게까지 수차레 받고보니
그리 야속하기만한 새상에
돌팔매라도 던지고
생의 포기따지도 생각하였지만~
차창뒤에 숨어 눈물을 훔치던
아내의 얼굴이 떠 올라 차마 그리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추석을 몇일 앞둔 어느날
수령한 퇴직금의 일부를
병원비로 여동생의 눈앞에 내 던지고
목에 생명유지 호수를 낀체
아무 생각도 없이 물끄러미
나만 처다보는 어머니에 손을 꼭잡고
"어머니 이제 우리집으로 가서 편이 쉽시다~"
앰브란스에 모시고 출발하려는데
동행하려는 여동생을 차에 타지도 못하게 하고는
오누이의 모든 인연까지
그곳에 묻어놓고는 대전으로 돌아 왔습니다
-너무 아픈 기억이라 지금도 가슴이... 잠시 쉬겠습니다 -
첫댓글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언제가 모닥불앞에서 들을 이야기인데...쩝~미리 듣는군요.
그리 되엇네요~
너무 슾프다 !촌장님도 그런시련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