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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남악정(南嶽亭)은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창건 당시에는 초당이었던 것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기와집으로 탈바꿈하였다. 1685년에 2칸의 초당을 완성하여 ‘남악초당(南嶽草堂)’이라는 편액과, 영양 수비(首比)에서 지낼 당시에 지은 『갈암기(葛庵記)』를 걸어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南嶽亭重修顚末記)』와 이숭일의 7대손인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의 『남악정기(南嶽亭記)』에는 1761년에 건물이 없어진 남악초당 터에 5세손인 인재(仁齋) 이광주(李光澍)가 족제인 이광실(李光實)등과 합의하여 중건을 했었는데, 건물이 퇴락하자 1821년(순조21)에 다시 주손인 이수억(李壽?)과 이수악(李壽岳) 등이 중심이 되어 중수를 한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남악정중수기(南嶽亭重修記)』를 살펴보면 현재 주남에 있는 건물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퇴락한 건물을 문중과 유림이 힘을 합해 1980년에 중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건축 구성 |
남악정은 정남향을 한 정자와 진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 1미터 가량 돌을 쌓아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시멘트로 마감하였다. 건물의 정 중앙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그 계단 위에 섬돌을 놓았다. 자연석 주초를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놓고, 방 측면에 구들을 깔았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고, 이 퇴칸의 주위에는 정 중앙의 반 칸 규모만 남기고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설치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다. 중앙의 통로에는 두 짝의 판문을 달았고, 양 쪽에 있는 1칸에는 각각 장판각과 창고로 이용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정자와 진입문은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다. 정자의 동북쪽 담장 귀퉁이에는 화장실이 있다. 정자의 동쪽과 서쪽 담장 아래는 화단을 조성하였다. |
현판 |
홍도문(弘道門) |
남악정 진입문의 현판이다. |
남악초당(南嶽草堂) |
남악정 어칸에 위치하고 있다. 남악정의 초창기는 초가였기 때문에 초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
남악정중수기(南嶽亭重修記)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10대손인 간송(澗松) 이장호(李長浩, 1905~1981)가 쓴 중수기문이다. |
누정 이야기 |
- 학이 아무리 깊은 숲에서 울어도 그 소리는 하늘까지 들린다. |
남악정은 갈암 이현일(李玄逸)이 만년에 도를 강론하던 곳이다. 이현일이 이곳에 자리 잡고 처음 창건했을 때는 초가를 얽었기 때문에 ‘남악초당(南嶽草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중수를 거쳐 기와집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검소함을 숭상하는 군자의 기상을 갖고 있었던 초당이었지만, 선조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후손들의 정성으로 초당 역시 위풍이 있는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부르게 되었다. 영해와 석보의 사이에 위치한 남악초당은 당시 새로운 학문의 장이 되어 학자들의 방문이 이어져 남악골의 위상도 더욱 높아졌다. 지어 살다가 바로 부친상을 당해 안동에서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어 모친상도 당하자 계속해서 여묘살이를 해야만 했다. 장례가 끝난 뒤에 59세에 남악골로 돌아와 남악초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학문을 연마한지 5년 째, 이현일은 사업(司業)에 임명된다. 사업이란 재야에 있으면서 학덕과 인품으로 이름난 산림(山林)에게만 제수되는 자리인 만큼, 남악정의 산천초목도 그 광명을 입게 된 것이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려고 했지만, 그의 학덕과 인품은 이미 조정에 까지 울려 퍼진 것이다. |
관련인물 |
- 이현일(李玄逸, 1627~1704) |
자는 익승(翼昇)이고, 호는 갈암(葛庵)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1627년(인조5) 영해(寧海)에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과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여식인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646년(인조23)과 1648년(인조26)에 초시에 모두 합격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서 복시를 단념하였다. 26세(1652년) 중형 이휘일(李徽逸)과 함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편찬하였고, 27세(1653년)에 부친과 영양현 수비(首比)로 이거하였으나, 종종 형제들과 함께 전에 살았던 석보초당으로 와서 강학하였다. 40세(166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한 영남 유생들의 연명 상소에 참여하였다. 47세(1673년)에 석보의 동쪽 골짜기인 남악실[南嶽谷]에 집을 짓고 48세(1674년)에 이거하였다. 이해 8월에 부친상을 당하자 안동 두실원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당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자 허목(許穆) 등의 추천으로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 등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54세(1680년) 모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향리에서 3년 상을 지냈다. 이후 59세(1685년)에 남악초당을 완성하여 그곳에서 지내자, 사람들이 ‘남악선생(南嶽先生)’이라고 불렀다.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때 인현왕후 폐비의 부당함을 논하고 사직서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어 성균관좨주를 거쳐 대사헌에 올라 인현왕후의 보호를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용납되지 않자 낙향하였다. 64세(1690년) 이조참판, 세자시강원찬선,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66세(1692년) 다시 대사헌, 병조참판, 우 참찬,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68세(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조사기(趙嗣基)를 구원하려다가 함경도 홍원으로 귀양을 갔다.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자칫 목숨을 잃을 지경에 빠지기도 하였던 이현일은 같은 해 다시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종성으로 귀양을 갔다. 3년 뒤인 71세(1697년) 전라도 광양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74세(1700년) 풀려나기까지 이현일은 7년에 걸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유배 생활이 풀린 뒤 이현일은 안동 금소(琴韶)에 정착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열정을 다하였다. 78세(1704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주변경관 |
- 남악정(南嶽亭)과 주사골[做士谷]으로 이름난 주남리(做南里) |
석보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키로 가다보면 삼의리와 요원리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요원리를 향해 3키로 정도가면 주남리 남곡의 남악정을 볼 수 있다. 남악정의 풍경에 대해서는 이장호의 『남악정중수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맑은 물줄기가 그 앞을 지나가고 경치가 그윽하여, 아련히 때 묻은 세상과 멀러 떨어져 있는 듯하니, 운곡(雲谷)에 있는 주자(朱子)의 회암초당(晦庵草堂)이나 도산(陶山)에 있는 퇴계(退溪)의 암서헌(巖棲軒)만 어찌 유독 역사적으로 아름다운 곳이겠는가? 둘려 있고, 만 겹의 숲이 좌우에서 정자를 끼고 두르고 있다. 정자의 서편으로는 마을 쉼터가 있고, 산을 등진 북쪽을 제외한 3면에는 농지와 가옥들이 에워싸고 있다. 정자의 남쪽 2차선 도로 너머에는 산비탈을 개간한 농지가 눈에 들어온다. 농지 아래로 암벽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오래된 소나무가 암벽과 어우러져 있다. 암벽 아래에는 요원에서 흘러나오는 냇물이 흐른다. 남사골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고,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 입지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정자 역시 앞뒤에 산으로 빙 둘러싼 마을 가운데서도 북쪽에 있지만 남향을 하고 있어 따뜻한 기운을 잔뜩 머금을 수 있는 위치이다. 함께 이름난 곳이다. 남악정과 주사동의 이 숲은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있다. 주남교에서 홍계리 쪽으로 꺾어서 700미터를 가면 주사골에 도착한다. 이곳은 이현일의 종질인 주곡(做谷) 이도(李櫂, 1636~1712)와 주계(做溪) 이용(李熔, 1640~1693)형제가 이곳에 이거하면서 조성한 숲이다. 시무나무와 비슬나무 등 59그루의 아름드리나무들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오래된 수해방지 숲으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큰 곳이다. 마을이름은 이도와 이용 형제의 호인 주곡, 주계에서 따온 것이다. |
마을이야기
영양 > 석보입암권 > 석보면 주남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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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보면 주남리는 석보면 소재지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주남리에는 11개 자연부락이 있다. 먼저 주남리의 입구에 있는 인마리[仁旨] 마을은 옛날 안동에서 영해로 가는 통로의 중간 지점인데, 이곳의 마방에서 행인들의 말이 쉬어 갔다고 한다. 특히 어떤 어진 선비가 이곳을 지날 때 그의 말이 마방에서 쉬어 갔다고 해서 인말이라고 했는데, 음이 변하여 인마리 또는 인마루로 불리다가 8,15광복 이후부터 인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
골마리는 인마리 서쪽 산골짜기에 위치한 곳으로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모서리 마을이라고 하여 음지몰, (음지말 , 음지마)라고 불린다. 요원(腰院)으로 길이 나뉘어져서 삼거리라고 불린다. 이곳은 갈암 이현일의 종질이자,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재종형제인 주곡(做谷) 이도(李櫂, 1636~1712)와 주계(做溪) 이용(李熔, 1640~1693) 형제가 영해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개척한 마을이다. 이 두 선비의 호를 따서 이주 했던 곳이 현재의 주사동[주사골]이라고 불렀다. 시작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게 된 새마[新村]가 있다. 주삿골의 북동쪽에는 마을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어서 이름이 붙은 가래골[楸谷]이 있다. 마을이 자리 잡은 골짜기가 따뜻하고 산수가 아름다워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하여 가곡(佳谷)이라고도 했다. 남악초당이 있었다고 하여 남악실로 불린다. 한편 마을의 위치가 따뜻한 곳이라 하여 남곡으로 부르기도 한다. 응달진 쪽에 있는 음지마가 있다. 양지마는 주남리의 동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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