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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정시대 우리말 지키고 빛내기(서기 1910-1945)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갈고 닦는 본부, 조선어학회
주시경선생이 활동한 국문동식회(1894년) 정신을 이어 1907년 국어강습소(강사 주시경)가 싹트고 1908년 국어연구학회(회장 김정진)를 조직하고 우리말과 한글을 살리고 빛내려는 일을 열심히 했으나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면서 1911년에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까지 활동하다가 1914년에 주시경선생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김두봉이 주시경선생의 뒤를 이어 활동했다. 그 뒤 김두봉이 상해로 망명하게 되어 활동이 좀 시들하다가 1921년 12월 3일 국어학과 국어운동의 선구자인 주시경(周時經)선생의 문하생 임경재(任暻宰)˙최두선(崔斗善)˙이규방(李奎昉)˙권덕규(權悳奎)˙ 장지영(張志暎)˙신명균(申明均) 등 10여 명이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였다.
1921년 서울의 사립학교 교사들과 교육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는 강습회와 강연회 개최, 회보 발간, 한국어 학자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글의 통일,연구,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가갸날(뒤에 한글날로 고침)을 제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함으로써 민족문화유산(民族文化遺産)과 그 보존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하여 전국 각지에서 한글보급운동을 적극 전개하였으며, 동시에 우리말을 연구한 성과로 『훈민정음언해본(訓民正音諺解本)』(1932), 『한글맞춤법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1936), 『계몽야학회속수독본(啓蒙夜學會速手讀本)』(1938), 『외래어표기법통일안(外來語表記法統一案)』(1941) 등을 발간하였다.
일제시대에 국내에서 우리말과 글을 갈고 닦고 보급하면서 한글날을 만들고 한글맞춤법을 제정한 것은 중대한 민족독립운동이고 광복 뒤 나라를 세울 건국준비운동이었다. 일제는 이 민족독립운동단체를 1942년에 탄압한 일이 있는데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42년 10월부터 8˙15광복까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학회의 관계자 33인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겪었으며, 이윤재(李允宰)˙한징(韓澄) 두 분은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이 학회는 광복 뒤인 1949년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사전을 만들면서 한글만 쓰기운동 국어순화운동 한글기계화운동을 계속했다. 특히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학생과 시민, 한글단체가 모여 한자파와 50년 동안 싸웠는데 한글학회 역사는 바로 한글운동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 겨레의 최초 우리말 사전 ‘ 말모이’
나는 일제가 이 나라를 먹은 뒤 민족주의자들 모임인 조선광문회에서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를 만든 것은 매우 뜻깊고 중대한 일이라고 본다. 그 사전 만드는 일을 주도했던 주시경님이 돌아가시고 또 함께 도운 김두봉이 중국으로 망명해서 완성되지 못해 아쉽지만, 사전 이름을 낱말을 모은 거라는 ‘말모이’라고 한 것이 아름답고 멋있다. 지금이라도 ‘말모이’라는 말을 살려쓰면 좋겠다. 백과사전에 나온 ‘말모이’ 설명을 옮긴다.
“개화기 이후 국한문 또는 국문 중심의 문자생활이 이루어지면서 국문의 정리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언어생활의 규범이 될 만한 사전을 편찬해야 한다는 요구가 증대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 등의 4인이 참여하여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1911년부터 〈말모이〉의 편찬에 착수했다.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고 〈말모이〉 편찬의 바탕이 되는 〈조선말본〉을 간행했던 김두봉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말모이〉 편찬은 거의 완성 단계에서 중단되어 책으로 발간되지 못했다. 현재는 그 첫째권으로 보이는 'ᄀ~걀죽'까지의 표제어가 포함된 1권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말모이〉는 〈알기〉․〈본문〉․〈찾기〉․〈자획찾기〉의 4부분으로 짜여져 있으며 각 표제어는 '외래어 표시부호-표제어-한자․영자-문법용어-전문용어-의미풀이'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모이〉 편찬자는 용언의 어미와 체언의 조사를 포함하는 이른바 '토'를 독립된 품사로 설정했기 때문에 용언의 표제어는 체언의 표제어처럼 그 어간만이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가다', '까다' 등은 '가', '까'로 올라 있다. 현재 고본(稿本)으로 전하는 〈말모이〉에는 고유어 및 외래어, 전문용어가 표제어로 올라 있는데 어원의 제시 등이 없는 실용적인 성격의 사전이라 할 수 있다. 〈알기〉와 〈본문〉은 1986년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문화〉 제7집에 소개되었다.“
한글날(가갸날)을 만들고 한글 지키고 빛내다.
일제 때 우리말과 한글을 빛내는 일 가운데 한글날을 만든 건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한글이 태어난 지 480년이 되는 1926년 음력 9월 29일에 조선어학회는 가갸날(처음에 가갸날이라 함) 기념식을 신민회와 함께 서울 시내 식도원에서 4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했다. 일제 때 국어학자와 애국운동 단체 회원들 400여명이 모였다는 건 매우 뜻있고 큰일이었다. 이 날은 우리 한글을 자랑하는 날이고 우리 겨레의 우수성을 알리는 날이고 겨레 독립과 나라를 되찾을 다짐을 하는 날이었다. 이 날 기념식에 대해 만해 한용운 독립운동가 시에 그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가갸날
한 용 운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와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이', '시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이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 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검이여,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소리쳐 가갸날을 자랑하겠습니다.
검이여, 가갸날로 검의 가장 좋은 날을 삼아 주세요.
온 누리의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을 노래하게 하여 주세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이여.
-동아 일보 제2247호(1926.12.7)에서
한글맞춤법 제정하고 국어사전 만들기
우리는 수 천 년 동안 한문으로 말글살이를 해왔다. 한문만으로 말글살이를 하자니 매우 불편해 우리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중국 눈치를 보느라고 훈민정음을 나라 글자로 인정하고 연구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1894년 중국 청나라 지배를 벗어나면서 주시경은 국어문법책을 만들고 국어사전을 만든다. 그러나 완전한 국어사전을 완성하기 전에 나라가 일제에 먹힌다. 그 뒤에 왜정시대에 여러 분이 한글 연구를 하고 사전을 만들려고 애쓰지만 제대로 된 사전이 나오지 못한다.
마침내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제대로 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그 맞춤법을 토대로 말글살이를 한다. 또한 국어사전도 조선어학회가 수십 년 동안 만들다가 완성될 즈음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 되었다.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만들어 관련자들을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때 만든 것을 기초로 광복 뒤 1947년 한글학회에서 ‘큰사전’ 첫판을 내놓았다.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큰사전은 국어연구와 발전에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일찍부터 조선어학회는 우리말을 살리고 한글을 빛내려면 국어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사전을 만들려면 먼저 정서법, 표준말 들을 해결해야 함을 깨닫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고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나오고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과 함께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 작업이 완료되고 사전 초고가 다 되었으나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해 사전 만들기와 관련된 조선어학회 회원과 후원자를 감옥에 가둔다. 그 때 죄목을 ‘민족 독립운동을 한 반역죄’로 처벌했다.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일이 민족독립운동임을 일제가 인정한 사건이다.
일본제국이 우리 겨레말과 겨레얼을 죽이려한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일본제국은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갈고 닦는 일을 하는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들을 돕는 이들을 잡아가 감옥에 가두었다. 그 때 이윤재, 한징 두 분은 그들의 고문에 감옥에서 돌아가시기도 했다. 일제는 우리를 영원히 자기들 식민지로 만들려고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말 죽이기 정책을 세워 일본어만 쓰라고 강요하는 정책을 강행했다. 조선어학회가 하는 조선어사전 만들기는 그에 반대하는 일이었기에 탄압한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조선민족 말살정책 실천이었으며 민족자주독립과 국권회복운동을 가로막는 못된 짓이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또한 중국침략을 앞에 놓고 조선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 강화하여 나갔다. 그리하여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領)을 공포하고,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회원을,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회원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 문맹퇴치운동을 하는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었고, 1941년 4월에는 문예지인 〈문장〉과 〈인문평론〉도 폐간되었다. 그리고 조선민족사상(朝鮮民族思想)을 꺾고 나아가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선어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한편,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함으로써 언제든지 독립운동가를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그 과정에 민족운동, 조선말 지키기 운동본부인 조선어학회를 짓밟은 것이다.
처음에 함흥 영생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정태진 선생을 잡아가 꼬투리를 잡은 뒤 10월 1일에, 이중화(李重華), 장지영(張志暎), 최현배(崔鉉培) 들 학자와 재정을 도와준 애국자 등 33인을 치안유지법과 내란죄로 잡아가두고 증인으로 취조를 받은 사람도 48명이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편찬에 직접 가담하였거나 재정적(財政的)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이에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의 내란죄(內亂罪)로 몰아, 이극로(李克魯), 이윤재(李允宰), 최현배, 이희승(李熙昇), 정인승(鄭寅承), 김윤경(金允經), 김양수(金良洙), 김도연(金度演), 이우식(李祐植), 이중화, 김법린(金法麟), 이인(李仁), 한징(韓澄), 정열모(鄭烈模), 장지영, 장현식(張鉉植), 이만규(李萬珪), 이강래(李康來), 김선기(金善琪), 정인섭(鄭寅燮), 이병기(李秉岐), 이은상(李殷相), 서민호(徐珉濠), 정태진 등 24명은 기소, 신윤국(申允局), 김종철(金鍾哲), 이석린(李錫麟), 권승욱(權承昱), 서승효(徐承孝), 윤병호(尹炳浩) 등 6명은 기소유예에, 안재홍(安在鴻)은 불기소, 권덕규(權悳奎), 안호상(安浩相)은 기소 중지하자는 의견서를 담당검사에게 제출하였다.
이후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검사에 의하여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한징,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등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유예 되었으며, 기소자는 예심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의 목숨까지 빼앗은 일제
일본제국 놈들이 우리말을 연구한 죄로 학자들을 얼마나 짓밟았는지 외솔 최현배선생이 쓴 ‘나의 학문의 길’이라는 책에 쓴 글을 옮겨 살펴보련다.
“ 나는 삼십 여 명의 동지들과, 한 일 년 동안 흥원 경찰서에서 비행기를 타고 기절하였고, 물을 먹고서 까물어졌으며, 목총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고 유혈이 낭자하였고, 곤장을 맞아 등과 궁둥이가 터졌으며, 발길로 종아리를 채여서 워낙 상하였기 때문에 40도의 신열이 나고 앓았으며, 이러한 찰초에 짝하여 갖은 모욕과 천대를 받았다. 이것이 나 하나만의 겪음이 아니라, 삼십여 동지들이 똑같이 겪은 바이며, 그밖에 우리들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불려 와서 모욕과 박해를 당하였다.”
이런 고문에 이윤재, 한징 두 분은 추운 겨울 함흥형무소 감방에서 돌아가시기도 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목숨까지 빼앗겼을까! 왜 이 분들이 이 죽음과 아품을 겪었나? 겨레말을 연구한 죄였다! 이 분들 판결문에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며 내란죄로 감옥살이를 시켰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겨레를 도와서 1945년에 일제가 망하고 이 분들이 살아나 사전을 만들고 한글을 가르치고 온 국민이 쓰게 해 오늘날 우리가 우리말글로 편리한 말글살이를 하게 되었다. 일제 때 이분들이 한글을 갈고 닦지 않았다면 일제가 물러간 뒤 우리 말글로 공문서를 쓰고 국민 교육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보다 더 중대한 독립운동과 건국준비운동이 또 있겠는가! 고마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때 홍원경찰서에서 한글학자들을 고문 수사한 이가 1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6명이 조선인이고, 더 심하게 고문한 자가 오오하라(주병훈), 야스타(안정묵), 시바다(김건치)란 고문 기술자였는데 모두 조선인이었단다. 아마 이 놈들과 그 후손들은 일제 때나 지금도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세 앞잡이가 겨레와 동포를 더 괴롭히고 있다는 건 부끄럽고 슬픈 일이다. 한글이 태어날 때나 지금이나 같은 겨레붙이가 우리말과 한글을 짓밟고 있는 게 부끄럽다.
왜정시대에 우리말글로 좋은 글을 쓴 분들
일본말이 국어요 일본말만 알고 우리말은 모르는 조선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던 왜정시대에 우리말과 한글로 시와 소설을 쓰고 노랫말을 짓고 글을 쓴 분들이 있다. 한용운님의 ‘님의 침묵’, 아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해 이육사, 윤동주 시인이 우리말글로 쓴 시,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와 또 다른 여러분들이 우리말글로 쓴 소설과 최현배가 동아일보에 쓴 ‘조선민족의 갱생의 도’ 같은 글, 방정환과 윤석중의 동요들이 모두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리말글로 글을 써서 우리 말글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제에 빌붙어 관리를 하고 앞잡이 노릇을 하며 떵떵거리고 살면서 같은 민족을 짓밟을 때, 이 어른들은 일제가 우리 말글을 못쓰게 할 때에도 우리말글로 일제에 저항하는 시와 글을 쓰셨다. 여기서 한 가지 1931-34년에 민간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브나르드 운동과 한글강습회를 열고 한글보급운동을 한 것은 잘 한 일이다. 춘원 이광수와 함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 말기에 일제에 굴복하고 친일 행위를 한 건 잘못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 때 한글을 빛내는 일을 했다는 건 알아주고 이들 행위를 교훈으로 삼아야겠다.
일제는 1884년부터 이 땅에 일본말 씨앗을 뿌리고 1894년부터는 일본말을 뿌리내리게 하고,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뒤 1906년부터 조선말과 일본말을 함께 병용하게 하다가 1937년부터 일본말만 쓰게 해서 1945년 10세 미만 아이들을 제외한 총인구의 일본어 해득률을 41%에 이르고 일본말만 알고 조선말을 모르는 조선인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제가 십년만 더 이 땅을 지배했다면 우리말과 우리 겨레도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일본 말글만 쓰지 않고 우리 말글로 글을 쓰고 신문을 만든 이들은 모두 우리 말글이 살아남는 데 이바지했다고 본다.
일제 교육에 일본 혼이 든 안확이나 박승빈은 주시경과 신채호 주장을 반대한 것은 왜정 때엔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광복 뒤에는 민족 자주정신이 살아나면서 빛이 죽었는데 최근에 서울대 출신 한자혼용파가 득세하면서 문화인물로까지 뽑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더욱이 안확은 주시경의 한글만 쓰기와 한글사랑 태도를 언어학을 모르는 자라고 비판하면서 말본 용어도 왜말 용어를 주장했는데 그 정신이 오늘날 경성제국 대학 출신인 이희승과 그 제자들이 중심인 한자혼용파에 이어져서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이들은 우리 글자인 한글만으로는 학문이 되지 않고 한문과 한자말이어야 한다며 일본이 한문 혼용해서 강국이 되었으니 우리도 그 일본 말글살이를 본받자고 한다. 이렇게 일본 혼이 든 일제 한자혼용파들에 견주면 왜정시대에 한글로만 좋은 문학작품을 낸 분들은 우러러 받들 한글 지킴이요 국어독립 운동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