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서민 한끼 '갱죽 (羹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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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나 나물을 넣어 끓인 죽'을 경상도에서는 갱죽이라 한다.
'갱죽(羹粥)'이란 일부지방에서는 무시래기 따위의 채소류(菜蔬類)를 넣고 멀겋게 끓인 죽이라고 하지만,
우리들의 고향 안동에서는 식은 보리밥에 '무청김치', 즉 '무시이파리' 김치를 대충 썰어 넣고, 끓인 죽을 말한다.
무시래기를 넣고 끓인 죽은 '갱죽'이 아니고, '시래기죽'이다.
일부지방에서는 '갱시기', '갱식이', '김치죽'이라고도 한다. 재료는 옛적 안동 서민들의 경우 보리밥 덩이와
소금에 절인 '무청'에 고춧가루 조금 뿌린 '무청김치'뿐이었으나, 지금은 쌀, 김치, 콩나물, 멸치, 참기름, 실파,
소금, 간장 등 고급재료를 사용한다. 경상도(慶尙道) 북부지방에서 주로 '갱시기'라고 부르는 이 '갱죽'은
산골 출신인 노태우(盧泰愚) 전대통령이 좋아하는 식단(食單)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었다.
청와대에서 즐겨먹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갱시기' 상차림
1940~50년대 안동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의 저녁식사는 '갱죽'이었다. 당시의 '갱죽(羹粥)'에 식은 보리밥을
넣은 것은 무슨 맛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넣을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갱죽'에 쌀밥을 넣을 정도면 지겹도록 먹기 싫은 '갱죽'을 끓여 먹을 바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꿀맛 같던 쌀밥을 그냥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여유(餘裕)가 있는 집에서는 각양 '별미 죽'을 끓여 먹기도 했고, '갱죽'을 끓이는 경우에도 최소한 멸치 국물에
갖은 양념을 하여 푹 익은 김장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콩나물과 쌀밥을 곁들여 끓여 먹었지만, 대다수
서민가정(庶民家庭)에서는 시퍼런 무청김치와 식은 보리밥덩이를 삶은 '갱죽'을 겨울과 봄 동안 거의 반년동안
먹고 살았다.
당시의 서민(庶民)들이 날마다 '갱죽'을 끓여 먹은 것은 부잣집에서나 어느 전직 대통령(大統領)과 같이 그것이
무슨 별미(別味)여서 끓여 먹은 것이 아니었다. 밥 대신 '갱죽'을 끓여 먹으면서 한 톨이라도 양식(糧食)을 아껴
태산같이 높다랗게 다가 올 보릿고개를 살아서 넘기 위한 생존(生存)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면 당시에 그런 '갱죽'을 끓여 먹고, 얼마만큼의 양식을 절약(節約), 즉 얼마만큼 생명(生命)을 연장할 수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해 절반 이상의 양식(糧食)을 절약할 수 있었고, 그 것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보다
배 이상 생존기간(生存期間)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
다섯 식구의 경우 저녁식사로 밥을 먹을 경우 보리밥이라도 다섯 그릇이 필요하지만, '갱죽(羹粥)'을 끓여 먹을
경우 식은 밥 두어 그릇에다 '무청김치'를 많이 넣고, 물을 많이 잡으면(부으면), 다섯 식구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물투성이의 죽이었지만, 밤에는 농사일을 하거나 학교(學校)에 가지 않고 잠만 자면 되기
때문에 밥배든 죽배든 배만 부르면 되었고, 밤 동안 살아 있기만 하면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반년동안이나 '갱죽'을 먹고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아침밥으로
쌀이라도 많이 섞인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풀투성이나 마찬가지인 '시래기밥'이나 '꽁보리밥'을 먹고 살던
시절이라 아무런 양념도 없이 소금에 절인 '무청김치'만 넣고 끓인 '갱죽'을 매일 같이 저녁식사로 먹는 것은
너무나 지겨운 일이기도 했다.
건건한 소금 맛뿐인 '갱죽'에다 그나마 '건더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님의 몫이었고, 아이들과 어머님은
언제나 보리밥알이 둥둥 떠다니는 국물위주의 '갱죽'이었다. 자식들에게 '건더기'를 건져 주는 가정(家庭)도
있기는 했으나, 이 경우는 '외동아들'이거나 무남독녀(無男獨女) 등의 경우에나 해당되었다.
아들, 딸 합해서 7~8명 이상이거나, 아들만 대 여섯 명을 넘어가면 갱죽 '건더기' 배식(配食)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기근과 영양실조(營養失調)로 한두 명 정도 잃는다 해도 대(代)를 이을 자식이 남아 있을
것이기에 굳이 특례제도(特例制度)를 운영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갱죽' 국물이 '건더기'보다 더 영양가(營養價)가 높아 건더기만 먹고 자란 '도련님'이나 어른들보다
국물만 먹고 자란 어린이들과 어머니들의 건강(健康)이 더 좋았다는 것은 경이(驚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질긴 '무청김치'를 치아(齒牙)가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쉽게 먹을 수 있도록 곰국을 끓이다시피 끓이고 보니
보리밥과 '무청김치'에 함유된 영양성분(營養性分)들이 상당량 국물에 용해(溶解)되어 그만큼 칼로리를
높여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옛적에는 많은 며느리들이 얼토당토않은 누명(陋名)을 쓰고 고된 시집살이를
하기도 했었다. 어려운 집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시집온 첫날부터 죽을 끓여야 했다. 그리고 끓인 죽의 '건더기'는
모두 시부모(媤父母)와 남편에게 건져주고, 자신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국물로 배를 채웠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상반(相反)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건더기'만을 먹은 시부모(媤父母)와 남편은 고된
노동 탓도 있었지만, 점점 야위어 가고, 국물만 먹은 며느리는 점점 뽀얗게 살이 쪄가고 있었다. '건더기'에서
영양분(營養分)이 국물에 빠져나갔고, 이 국물은 언제나 며느리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며느리는 억울한 누명(陋名)을 쓰고 고된 시집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죽을 끓일 때
며느리가 몰래 '건더기'를 건져 먹었거나, '갱죽'의 재료(材料)인 밥덩이를 몰래 훔쳐 먹었을 것이라는, 그래서
뽀얗게 살이 찐 것이라는, 시어머니로부터의 누명(陋名)과 구박을 받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난 시절에 죽지 않기 위해 먹고 살았던 '갱죽'의 내력(來歷)이고,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겪고
살아온 고된 시집살이로서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그들 선대(先代)들의 고된 삶을
되돌아보지는 못할망정, 방송국(放送局)마다 철부지들을 내세워 호들갑을 떨면서 무슨 '별미'니,
'웰빙식'이니를 외치게 할 그런 음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너무나 먹을 것이 귀했던 당시에는 며느리들이 사사건건 누명을 쓰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 '금낭화', 즉 '며느리 밥풀꽃'에 얽힌 전설까지 만들어져 전승되고 있었다.
*자료출처.. 안동농고28 동기회
첫댓글 제일 정이가는 죽을 소개해서 고맙고, 그 까마득한 어린시절로 돌아가게하네. 동무들과 땅거미가 질때까지 놀다가 집에오면 허기진배를 채우는 것은 반드시 갱죽이였다네.그것도 큰 형수가 끊여준 갱죽이 제일 맛이 있었다네. 어디 우리동기회나 사랑방 모임이나 밥계나 그 맛 한번 보았으면 어떨런지 침넘어간다. 침넘어가... 내가 우리카페에서 읽은 것 중에 제일 정감이 가는 글이다. 정태 하이팅,,,,
너무나 괴로웠던 어린시절의 생활이 떠오른다. 설을 쇠고나면 마을에 양식 떨어졌다는 누구집 소문이 온 동네에 피지곤 하던 시절, 우리 조상들이 춘궁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몸무림치던 모습이 생생하다. 가을에 김치를 담글 때 배추무으로 김치를 담그고, 무우청은 하나라도 버리지않고 그것만으로 큰둑에 담그어 겨울철 푸성귀로 활용했고 겨울 되면 무청 담근것을 건져서 낮에 식은 밥 한그릇에 넣어서 끓여먹던 갱죽, 거기에다 김치넣고 멸치넣어서 끓이면 그 당시에는 고급죽이지? 골목길에 나가보면 죽때문에 아이들은 모두가 맹꽁이 배가되어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웃지못하고 서글퍼지는 아이들의 배 모습!! 죽은 가난한 사람들의 상징
이지? 요사이는 죽 전문점의 간판과 메뉴를 보면 가나한 집의 상징인 죽이 부자들의 메뉴가 되었음에 격세지감이 든다. 우리 조상들의 생명을 잇게한 죽, 그 죽의 향수를 느껴본다.
갱죽 이름만 들어도 정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