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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학초정(鶴樵亭)은 원래 한양 조씨 문중에서 건립한 삼수당(三秀堂)이었으나, 근래에 소유자가 밀양 박씨로 바뀌면서 학초정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삼수당은 조규(趙頍 1630~1679)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와 살림집이었다. 이곳은 갓등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반변천이 흐르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서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
건축 특징 |
학초정은 3칸 반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 뒤에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침(正寢)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로,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조선 중기의 400년된 고식을 담은 ‘중간설주’라는 문짝 중앙을 구획하는 중갓부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건축 구성 |
학초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누각형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좌측칸 전체를 온돌방으로 구성한 뒤 우측 2칸을 대청으로 꾸몄다. 정자의 네 면에는 모두 툇마루를 둘렀고, 전면과 우측면에 계자난간을 세웠다. 특히 대청의 후면과 오른쪽의 판벽 사이의 문틀 가운데에 문설주를 세운 고식의 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고방과 외양간, 온돌방을 두었고, 좌측에는 사랑 공간을 배치하였다. 전면의 좌측, 우측 2칸은 좌우로 돌출하여 양날개집[양익사兩翼舍]의 형상을 이루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건너방과 웃방을, 우측에는 안방과 웃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안대청은 개방된 구조로 정면 3칸이 안마당 폭과 같으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이러한 출입구는 독특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소슬문이 달린 대문채는 대문칸의 좌측에 마구간 한 칸이 설치되었고, 우측에는 부엌과 방이 들어있다. |
현판 |
학초정(鶴樵亭) |
영지동천(英芝洞天) |
학초정창운계원록(鶴樵亭唱韻契員綠) |
차학초정 : 김두철 등 4인(次鶴樵亭 : 金斗喆) |
몽증학초정주인 : 용초 조병일(夢贈鶴樵亭主人 : 蓉樵 趙秉馹) |
누정 이야기 |
- 누정이야기 |
학초정은 한양 조씨 문중에서 건립한 삼수당(三秀堂)에서 이름이 바뀌게 된 정자이다. 현재 소유자는 밀양 박씨 문중이다. 그러나 학초정이 된 과정을 참고할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삼수당기」를 가지고 누정 이야기를 얽어본다. 밀암(密菴) 이재(李栽)는 <삼수당기>를 써서, “산을 등지고 물과 가까운 곳에 여러 가지 화초를 심었고, 높고 맑으며 앞이 탁 트인 밝은 땅이라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삼수三秀’라고 이름 붙인 의미를 풀어 놓았다. ‘금단은 한 해가 저물도록 소식이 없네’라는 구절을 지어 참동계(參同契) 뒤에 붙였다. 이것이 또 어찌 굴원(屈原)이 지은 <원유>부에 느낌이 있어 세상에 오래도록 살아 있겠다는 설에 뜻을 부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저 ‘빛나는 영지(靈芝)는 1년에 세 번 줄기를 뻗도다. 덧없이 빠른 백 년 인생 그 얼마나 되느냐. 뜻을 가지고 이루지 못하였네.’라는 구절에 여기에 느낀 바가 깊었을 것이다. 이제 만약 다만 이로 인해 이름에 뜻을 부쳤다는 것은 알되 주자가 쓴 <'운당포'를 지나며 지은 시>에서 느낌은 알지 못하고, 비록 운당포 벽에 지은 시에서 뜻을 취했다는 것을 알아도 참동(參同)의 설에 거듭 느낌이 있어 지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만 오히려 선생께서 당시에 품은 뜻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이재, 「삼수당기」 다만 건물과 풍광이 남아 요란하지 않으면서 빼어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학초정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나름의 멋으로 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
관련인물 |
- 조규(趙頍 1630~1679) |
자는 자면(子冕)이고, 호는 삼수당(三秀堂)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석문(石門) 조정환(趙廷瓛)의 아들로, 1630년(인조8)에 임천동 (지금의 연당리)에서 출생하였다. 조규(趙頍)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읽은 내용을 곧장 암송하였다. 1660년(현종1)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여러 생도들이 그를 아끼고 존중하며 ‘남주거사(南州居士)’로 불렀다. 중년에 집안이 부유하여 감천리에 땅을 사서 정자를 짓고 이거하니 빈객이 끊이지 않았다. 만년에 주자와 퇴계를 즐겨 읽고, 유유히 스스로 즐거워하며 일생을 보냈다. |
주변경관 |
- 주변경관 |
학초정[구 삼수당]은 반변천이 휘감아 돌고 햇볕 좋은 곳에 고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정자와 살림집이다. 문 앞을 지키는 소나무 또한 그 세월을 보여주며 눈길을 끈다. 정자 앞을 흐르는 반변천은 늘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경치가 좋은 곳이다. 반변천 자락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감천마을에는 이밖에도 역사적 시간을 되볼아 보기 좋은 공간이 산재해 있다. 하고 있다. 측백나무 숲은 석벽에 붙어사는 희귀종으로, 현재 천연기념을 제114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연소정이 있는데, 소沼 위에 뜬 연꽃 봉우리[蓮沼]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반변천이 흐르는 밭두둑 경계지점에 세워져 있어 잠시 들러 소요하기에 좋다. 또한 항일시인이었던 오일도(吳一島)를 기리기 위해 1899년에 세운 시비가 국도변에 조성되어 있어 감천1리 마을 안에 자리한 오일도 생가와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채의 문중 재실이 있고, 최근에 마을 안쪽에 오일도 시인의 비석 공원을 조성하여 아름다운 쉼터로 탈바꿈하였다. 건립한 재실이다. 오일도 생가 뒤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약 5백여 년 동안 화수촌을 이루고 있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송산재도 낙안오씨 문중 재실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아담한 팔작기와집이다. 운곡서원은 1780년(정조 4)에 주자와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였고, 서원의 품격을 갖추며 지방의 풍교에 공헌을 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뒤로, 터만 남게 되었다. 이에 2007년에 표지석을 세워 간략한 내용을 기록하고, 기념하고 있다. |
마을이야기
영양 > 영양청기권 > 영양읍 감천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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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읍 감천리는 뒷산이 청기리와 연접해 있고, 31번 국도에서 맞은 편 산기슭에 자리한다. 큰 시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기 때문에 감들내 혹은 감내,감천(甘川)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영양읍 읍내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남면의 지평동과 하풍동을 합쳐 감천동이라 하였다. | |
이 마을은 오일도 시인의 시비(詩碑)와 범바위 위에 있는 폭포, 근처의 절벽과 천연기념물인 측백나무 숲이 어우러진 곳이다. 오일도 시비는 국도 앞 동산에 마련되어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폭포는 마을의 서편 산 위, 백여 척 되는 범바위 안에 있다. 또한 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바위 절벽 주위에는 측백나무가 무리지어 숲을 형성하고 있다. 이 측백나무 숲은 절벽의 바위틈에 신기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절벽 아래에는 깊은 소가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5개의 자연 마을이 감천리 한 동으로 묶여 있다. 한양조씨 문중의 조규(趙頍)가 입암면 연당리 임천에서 이곳으로 집을 옮겨와 가짓들을 사서 집과 묘우를 세워 삼수당(三秀堂)이라고 하였다. 조규趙頍가 삼수당을 지은 뒤부터 마을 이름을 지평이라 불렀다고 한다. 모양에서 이름을 땄다. 처음에는 지곡이라 불렀는데, 4백년 전 오시준(吳時俊, 1527~1613)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동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뒤 산기슭에 맛이 단 물이 솟는다고 하여 감천(甘泉) 이라고 부르다가 감천(甘川)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골짜기로, 현재 대여섯 가구가 흩어져서 살고 있다. 이곳에 깨밭이 많아서 ‘깨’가 ‘개’나 ‘괘’로 비슷하게 발음한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도 전해온다.
있는 산성에서 마을명이 유래한다.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바람도 이곳에 머물렀다 가는 좋은 산세를 지녀 합풍이라도 한다. 높은 산기슭에 자리하면서 샘이 풍부하여 하풍으로 부르기도 한다.
학초정 및 정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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