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불교의례, 민간화 과정서 간소화
<26> 원성취진언과 보궐진언
시간적 경제적 여건으로 의식 간략화
발원 찬탄 생략…진언만 염송하게 돼
공양진언과 지금 올린 공양의 공덕을 회향하는 회향진언 염송으로 공양 올리기가 끝났다. 공양 올리기가 끝난 이후 의식은 원성취진언과 보궐진언 염송이다. 그런데 이 원성취진언과 보궐진언에 대한 저간의 이해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원성취진언이라고 할 때 이 원은 무엇일까. 혹자는 대원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오늘 공양하는 시주 재자의 소원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원성취라고 하면 일단 발원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앞은 보회향진언만 있지 발원도 축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원을 성취하는 진언이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치’에서 축원을 했지 않았느냐 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유치에서 한 것은 축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치에서의 축원과 같은 모습은 이러이러한 축원을 위해 부처님께 공양 올리게 되었다는 것을 아뢰는 것이지 축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축원은 현재와 같이 공양 이후에 하는 게 옳다. 그렇다면 보공양진언과 보회향진언 이후 별도의 발원도 없이 염송하는 원성취진언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한국불교 역사와 함께해온 의식서적들을 뒤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 사용되는 의식집의 어디에도 원성취진언 앞의 발원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수륙재 의식문의 원성취진언 앞에는 발원이 나타난다. 사홍서원이 그것이다. 중생을 다 건지고 번뇌를 다 끊고 법문을 다 배우고 불도를 다 이루겠다는 서원이니 대서원이다. 그러고 보면 대원성취진언이라고 설명하는 의견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발원은 하지 않고 원성취진언만을 염송할까. 이 점은 다음의 보궐진언과 그 맥을 같이하므로 함께 살피기로 한다.
둘째,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채워지고 고쳐지게 하는 진언’이라고 이해하는 보궐진언의 의미는 과연 합당한가. 보궐진언은 뭔가 부족해진 것을 채워 넣는 것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족해졌는가. 혹자의 이해처럼 혹시 공양을 올렸는데 빼먹고 못 올렸다거나 정성이 부족해서일까. 하지만 그 같은 문제는 보공양진언으로 이미 해소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궐은 무엇을 보궐하겠다는 것일까.
공양의식에서 전통적으로 공양 이후의 의식은 경전을 염송하는 풍송의식이었다. 이때 주로 염송되는 경전은 <법화경>과 같은 대승 경전이었다. <법화경>도 그렇고 대승경전은 분량이 적지 않다 보니 한정된 시간에 전권을 염송하기 어렵다. 해서 특정 부분을 염송한다. 특히 7일 수륙재의 경우 매일의 영산법석에서 <법화경> 1권씩을 읽는다. <오종범음집>(1661)에는 ‘시간이 촉박해 경전을 다 염송하지 못하고 경전을 거두게 되었을 때 어산 스님은 서품 제일 등등이라고 염송하고 보궐주를 읽으라’고 협주하고 있다. 경전을 다 염송하지 못했을 때 보궐진언은 염송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유통되는 법요집의 편제에 의하면 보회향진언 원성취진언 보궐진언을 연이어 염송한다. 심지어 조계종 <통일법요집>에는 앞의 보공양진언과 합해 ‘사대진언’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구분하고 있다. 법회 현장의 설행적인 입장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의미론적인 측면에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보궐진언 앞에서는 풍송의식 경전 염송의식이 진행되었다. 이같은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소수의 법요집의 사대주(소능엄주, 관자재보살여의륜주, 관세음보살모다라니, 소재길상다라니) 편제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국불교의 공양의식에 원을 발원하지 않고 원성취진언을 하고, 경전염송도 하지 않고 보궐진언을 하는 모습이 등장하게 되었을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이는 국가불교의례의 시원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수륙재 등의 잔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불교의례가 민간화 되는 과정에 시간 및 경제적 여건 등 여러 제약으로 인해 소문이나 발원 찬탄은 간략해지거나 생략되고 진언만 염송하던 것이 현재 의식으로 정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신문3123호]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