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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말 달인 - 재미있는 말의 어원
언어의 성질 중에 자의성(恣意性)이란 것이 있다. 말이 처음 생길 때, 사물과 이름, 뜻과 말소리의 결합이 누군가 자의적(= 임의적)으로 붙여서 되는 성질을 말한다. 그러나 거기엔 필연적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의적으로 시작한 언어가 언중들의 동의를 얻어 사회성을 얻게 되고, 역사적으로 변천하는 것(역사성)이 언어가 걷는 길이다. 그런 과정에서 문명의 발달로 새 말이 자꾸 생기고, 새로 생긴 말에는 어떤 필연적 이유도 있게 된다. 이를 말의 어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말의 어원을 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어원을 정확하게 추론한다는 것 또한 지난한 일이다. 그래서 말의 어원에는 많은 이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질 때가 많이 있다. 말의 어원을 아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또한 그런 어원을 통해 그 말 속에 담긴 선인들의 얼을 엿볼 수도 있다. 부분적이지만 이 장에서 다룬 말의 어원들을 통해 재미있고 윤택한 언어생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
가게
작은 규모의 물건을 파는 집을 뜻한다.
‘가게’는 원래 한자어 ‘가가(假家: 임시로 지은 집)’에서 온 말이다.
큰 것은 어물전처럼 전(廛)이라 하였고, 다음은 점방처럼 방(房)이라 하였으며, 구멍가게처럼 규모가 작은 것을‘가가(假家)’라 하였다. 그 ‘가가’가 변음되어 ‘가게’가 되었다.
가물치
‘-치`는 물고기를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천자문에서, `하늘 천, 따 지, 가물 현` 그 ‘가물 현’의 ‘가물’이 오늘날 `검다`의 뜻이다. 고어에선 `검다`를 `감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가물치`는 결국 `검은 고기`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字가 붙는 물고기는 비늘이 있는 물고기이고, ‘치’자가 붙은 물고기는 비늘이 없는 물고기다. (오징어, 문어, 고등어 등은 예외).
또한 '치'로 끝나는 것들은 고유어(꽁치, 넙치, 준치, 멸치 등)이고, '어'로 끝나는 것들(붕어, 잉어, 숭어, 방어 등)은 한자어이다.
가을
사계절의 세 번째 계절을 뜻하는 ‘가을’은 ‘벼가을’, ‘보리가을’, ‘밀가을’처럼
본래는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을 뜻하였다.
이로부터 ‘가을’은 농작물을 주로 수확하는 계절로서의 ‘가을철’을 뜻하게 되었다.
갈매기살
고깃집에 웬 갈매기인가 하고 ‘갈매기살’하면 바다 갈매기를 떠올리면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다. 갈매기살‘은 돼지 내장의 ‘횡격막(橫膈膜)’에 붙어 있는 고기다. ‘횡격막’은 폐의 호흡을 돕는 근육성의 막인데 우리말로는 ‘가로막’이라고 했다. 뱃속을 가로로 막고 있는 막이란 뜻이다. 이 ‘가로막’에 붙어 있는 살을 ‘가로막살’이라고 한다. ‘가로막살’은 얇은 껍질로 덮여있는 근육질의 힘살로 다른 부위의 고기보다 질기기 때문에 이 부위를 기피해 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가로막살’을 모아 껍질을 벗긴 뒤 팔기 시작하였다. 그 담백한 맛과 저렴한 가격 때문에 갑자기 인기가 많아졌다. 이 ‘가로막살’을 상품화하여 팔면서부터 ‘갈매기살’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가로막살 → 가로마기살 → 가로매기살 → 갈매기살
이런 언어적 유추 과정을 거쳐 오늘날 ‘바다 갈매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재미있고 엉뚱한 ‘갈매기살’이란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갈보
‘갈다’는 ‘교체交替’의 뜻이다. 여기에 ‘울보, 먹보’하듯이 어떤 행동을 천할 정도로 자주한다는 뜻의 ‘ -보’ 라는 접미사가 붙어 된 말이다. 즉 이 사내 저 사내 갈아 치우기를 잘 하는 여자란 뜻으로 웃음과 몸 파는 여자를 ‘갈보’라 하였다.
오늘날, ‘매춘부(賣春婦)’니 ‘창녀(娼女)’니 하는 한자어가 이에 해당하는 말이다.
감쪽같다
우리 민담에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곶감이다. 우는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칠 만큼 달고 맛있는 게 곶감이다. 그 곶감을 누가 빼앗아 먹거나 나누어 달라고 할까 봐 빨리 먹어 치우고 말끔히 흔적이 없게 한 데서 생긴 말이다.
오늘날, `(고치거나 꾸민 것이) 표가 나지 않게 완벽하다`의 뜻으로 쓰인다.
강강술래(강강수월래)
전라도 해남 지방에서 여자들이 한가위 밝은 달밤에 손에 손을 잡고 큰 원을 그리며 뛰노는 우리 고유의 민속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인 강강술래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대 시대부터 있었다는 주장과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적을 속한 위한 전술에서 비롯되었다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첫째, 이순신 장군 관련설에서 나온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 强羌遂月來, 江江水越來, 羌羌水越來, 强强須來) 등이 있다. 대체로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니 경계를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둘째, 강강은 단순한 여음이거나 두드리는 악기의 의성어라는 주장이다.
셋째, ‘강’은 전라도 방언으로 원(圓)을 뜻하며, ‘술래’는 순라(巡邏)를 의미하는 것으로, 술래잡기를 하듯 원을 그리며 돈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는 주장이다.
넷째, 수레바퀴처럼 감고 감으라는 뜻의 ‘감감수레’가 ‘강강술래’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이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이순신 장군 관련설은 역사적 사실과 정황에 맞춘 민간어원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표준어는 ‘강강술래’다.
해남 지방 강강술래 민요의 노랫말은 이렇다.
달 떠온다 달 떠온다 강강술래
하늘에서 달 떠 온다 강강술래
달 우에는 별도 총총 강강술래
구름 속에 숨은 달은 강강술래
혀만 삐쭉 물었구나 강강술래
꽃도단포 화단 치마 강강술래
맵시 좋게 잘라 입고 강강술래
마당 좋고 동무 졸(좋을) 때 강강술래
신명털이나 하고 가세 강강술래
개차반
‘차반’은 예물로 가져가는 맛 좋은 음식이란 뜻으로, 흔히 새색시가 근친하고 시집에 올 때에 정성껏 잘 챙긴 음식이다. 똥이 개에게는 차반과 같다고 비유한 말로, ‘하는 짓이나 마음씨가 더러운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접두사 ‘개-’가 결합한 말은 진짜보다 좋지 않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와 같은 단어로 ‘개떡, 개죽, 개꿈, 개나리, 개살구, 개머루, 개꽃(철쭉)’ 등이 있다.
개평
조선 중기부터 조선 말엽까지 쓰이던 ‘상평통보’라는 엽전이 있었는데, ‘상평(常平)을 줄여서 `평`이라 하였다. 그러니 `평`은 곧 돈을 뜻했다. 주로 놀음판에서 딴 것 가운데 조금 얻어 가지는 일, 또는 그렇게 가진 공것을 뜻하는 말로 딴 돈 중에서 대개는 낱돈으로 주기 때문에 낱 `개(個)` 자를 써서 `개평(個平)’이라 했다.
‘개평’이 경기도 ‘가평의 떡’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발음의 유사성으로 유추한 민간어원설일 뿐이다.
거덜나다
조선시대에 사복시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거기서 말[馬]을 맡아보던 종을 ‘거덜’이라 했다. 궁중에서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물렀거라’하며 큰소리로 길을 비키라고 사람들을 몰아세우다 보니 자연히 우쭐거리며 몸을 흔들고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잘난 체 거드름 피우는 것을 ‘거덜거리다’라고 하게 되었다.
또, 이렇게 ‘흔들흔들 한다’는 뜻이 더욱 발전하여 ‘사업(살림)이나 물건이 흔들리어 결딴이 나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자고로 거드름 피우는 것은 망조다. 경계할 일이다.
거울
거울이 없던 시절엔 냇물이나 우물을 거울로 삼았다. 얼굴을 물에 비춰보면 거꾸로 보였을 것이다. ‘거꾸로’의 옛말이 ‘거구루’였다. ‘거구루’가 ㄱ이 탈락하고, 동음이 생략되어 ‘거구루 → 거우루 → 거울’로 된 것이다.
건달乾達
‘건달바`는 수미산(須彌山) 남쪽 금강굴에 살면서 하늘나라의 음악을 책임진 신(神)의 이름이었다. 이 ‘건달바’는 향내를 맡으면서 허공을 날아다니며 노래와 연주를 하고 살았다 한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악사(樂士)나 배우까지 ‘건달바’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 한동안 ‘건달’을 ‘광대’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건달바’는 ‘건달’로 어형이 축소되었고, 의미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돌아다니며, 남의 일에 트집 잡기를 잘하는 사람’ 또는 ‘밑천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흔히 주먹 세계에서 ‘건달’과 ‘깡패’는 다르다 하며, 건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건달바’가 노래나 하며 한가롭게 지내는 신이라는 어원에 근거하여 ‘한량’쯤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更을 치다
옛날에 밤 시간을 알리는 한 방법으로 경(更)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점(點)에는 꽹과리를 쳐서 시간을 알렸다.
경은 하룻밤을 초경, 이경, 삼경, 사경, 오경 다섯으로 나누었는데, 삼경은 지금으로 치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고, 이 때에는 북을 28번 쳤다. 이것을 인정(人定)이라 하며, 인정이 되면 도성의 사대문을 걸어 잠그고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수상한 사람이 인정 이후에 돌아다니다 순라군에게 잡히면 순포막으로 끌려가서 여러 가지 심문을 받은 후 죄가 없으면 오경(五更) 파루(罷漏)가 친 뒤에 풀려났다. 이런 사실에서 인정 이후 끌려갔다가 파루 친 뒤까지 순포막에서 경을 치르고 나왔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호되게 혼쭐이 나다’ 뜻으로 `경을 치다`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또 다른 ‘경’의 어원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자자(刺字)’라는 형벌이 있었다. 자자란 고대 중국에서부터 행해졌던 형벌의 하나로, 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흠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까지 행해졌다. 이 형벌을 경(黥)이라 했다. `경을 친다`는 것은 곧 도둑이 관아에 끌려가서 `경`이란 형벌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 호되게 꾸중을 듣거나 심한 벌을 받는 것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고구마
고구마는 원래 중미 지역이 원산지로 일본 대마도를 통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며, 고구마란 이름도 그 때 함께 들어왔다.
대마도에서는 고구마를 `고오꼬오이모`라고 했으며, 여기서 `고오꼬오`는 효행(孝行)의 뜻인 일본말이다. 그리고 `이모`는 `감자` 종류다. 대마도의 가난한 백성이 병약한 부모를 고구마로 봉양했다고 하는 전설에서 생겨난 이름이 `고오꼬오이모`이며, 이 말이 바다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지금의 `고구마`라는 말이 되었다.
고리짝
`옛날 옛적 고리짝에 한 사람이 살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는 으레 이렇게 시작되곤 하였다.
`고리짝`이 `고려 적(고려 때)`이 오랜 동안 구전되어 오면서 그 뜻을 잃어버린 단어임을 알았더라면, `옛날 옛적 고려 적에`로 말하였으리라.
옛날이야기는 말 그대로 오래된 이야기다. 그 오래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고려 시대`를 언급해야 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고소설이 `조선 숙종대왕 즉위 초에` 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숙종 때는 우리의 고대소설이 발아한 초창기 시대다.
이처럼 옛날이야기를 조선 시대에서는 `옛날 옛적 고려 적에`로 시작했던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 `옛날 옛적 고리짝에`로 변화된 것이다. ‘고리짝’은 ‘고려적’이 변한 말이다.
고수레
원래 무당이 굿을 할 때,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귀신에게 먼저 바친다는 뜻으로 음식을 조금씩 떼어 던지는 짓, 또는 그때 내는 소리를 뜻한다.
고수레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중 숙종 때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었다는 『규원사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신시 시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준 고시(高矢)씨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답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불을 얻는 방법과 농사짓고 수확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에 이르러 들에서 농사짓고 산에서 나물을 캐던 사람들이 고시 씨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음식을 먹을 때면 `고시네`라고 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고시네 → 고시레 → 고수레` 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근방을 다스리는 지신(地神)이나 수신(水神)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무사하게 해 달라는 기원의 뜻도 들어 있어 근처의 잡귀나 동물들에게 너희들도 먹고 물러가라는 주술적인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추
고추가 조선 중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이름은 고초(苦草)였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쓴 풀`이라고 하겠는데, `고초`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소리의 변화(이화 작용)를 일으켜 `고추`가 되었다. 고추의 그 길쭉하고 뾰족한 모양에 착안하여 그와 비슷한 남자의 상징을 ‘고추’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오늘날 매운 고추를 ‘청양고추’라 하는데, 이는 매운 고추로 유명한 경상북도 ‘청송’과 ‘영양’에서 한 글자씩 따서 ‘청양고추’라 부르게 되었다. 충청남도 ‘청양’에서 비롯되었다 함은 잘못이다.
곤죽
밥이나 땅이 몹시 질퍽질퍽한 상태, 일이 엉망이 되어 갈피를 잡기 어려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곤죽은 곯아서 썩은 죽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밥이 몹시 질거나 땅이 질척질척한 상태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나아가 사람의 몸이 몹시 상하거나 늘어진 상태를 비유하는 말로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술을 곤죽이 되도록 퍼 마셨군`과 같이 쓰인다.
골탕먹다
`크게 곤란을 당하거나 손해를 입다`는 뜻이다.
골탕이란 원래 소의 머릿골과 등골을 맑은 장국에 넣어 끓여 익힌 맛있는 국물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골탕을 먹는 것은 맛있는 고기 국물을 먹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곯다`라는 말이 골탕과 음운이 비슷함에 따라 ‘골탕’이라는 말에 `곯다`라는 의미가 더해지고, 또 `먹다`라는 말에 `입다`, `당하다`의 의미가 살아나서 `골탕먹다`가 `겉으로는 멀쩡하나 속으로 남모르는 큰 손해를 입게 되어 곤란을 겪는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곶감
‘곶감’의 ‘감’은 물론 과일의 하나인 ‘감’을 뜻한다. 그리고 ‘곶’은 ‘곶다’의 어간 ‘곶-’이다. ‘곶다’는 현대국어에서는 된소리가 되어 ‘꽂다’로 되었다. 그래서 일부 방언에서는 ‘꽂감’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곶감’은 꼬챙이에 꽂아서 말린 감을 말한다.
과메기
과메기는 청어를 말려서 만드는 ‘관목(貫目)’에서 유래했다. 관목의 ‘목’이 포항 지방의 방언으로 ‘메기’라고 발음되어 ‘관목’이 ‘관메기’로 변하였고, 다시 ‘ㄴ’이 탈락되어 ‘과메기’로 굳어졌다.
과메기는 음력 동짓날 추운 겨울에 잡힌 청어를 배도 따지 않고 소금도 치지 않은 상태로 그냥 온마리를 엮어 그늘진 곳에 말려 만드는 것이다. 곧 냉훈법으로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한 동결 건조 식품이다. 지금은 모양에 따라 배를 따서 뼈만 발라낸 ‘배진 것’, 통째로 짚으로 엮은 ‘엮걸이’ 두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그 정도면 약과藥果
과줄이라고도 하며, 밀가루를 꿀물이나 설탕물에 반죽하여 과줄판에 박아 찍어낸 것으로 주고 제사에 쓰이는 다과가 약과(藥果)다.
그 맛이 달고 고소하며, 딱딱하지 않아서 누구라도 수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래서 `그 정도면 약과`라는 말은 어떤 일의 정도가 약과를 먹는 일처럼 수월하고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때 쓰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그 정도면 식은 죽 먹기다`가 있다.
‘약과는 누가 먼저 먹을지 모른다’는 말은 약과는 제사에 쓰이는 음식이므로 누가 먼저 죽어서 약과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다.
글
‘글’은 동사 ‘긋다’의 어간 ‘긋’에 그 어원이 있다.
지난날 ‘긋’은 ‘귿’으로 표기되다가 ㄷ - ㄹ의 교체 현상(듣고 - 들으니, 묻고 - 물으니 등 오늘날 ‘ㄷ’불규칙)에 따라 ‘글’이 되었다. ‘금’, ‘그림’도 같은 어원에서 된 말이다. 결국 ‘글’은 어떤 도구로 그어서 된 것 이라는 뜻으로 된 말이다.
김치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를 ‘지(漬)’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김치무리 담그기를 ‘염지(鹽漬)’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漬)’가 소금물에 담근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소금을 뿌린 채소 등을 재워두면 안에 있는 수분이 빠져 나와서 채소가 국물에 침전되는 것을 보고 ‘ㅣ(沈菜)’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菹를 ‘딤ㅣ 조’라 하였다. (후에 ‘저’로 읽힘)
결국 ‘ㅣ → 딤ㅣ → 짐치(방언) → 김치(부정회귀 현상. 대체로 역구개음화. 질 → 길 등)로 변하였다. 결국 김치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 것을 뜻하였다.
꼬마
중세어에서의 우리말 ‘고마’는 아내 있는 남자의 사랑을 받고 사는 여자로 시앗, 첩(妾)을 이름이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마’는 오늘날처럼 ‘키 작은 어린 사람’이 아닌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 ‘고마’가 된소리되기와 의미 변화를 일으켜 오늘날 ‘꼬마’가 되었으며, ‘꼬마둥이’, ‘꼬맹이’라고도 부른다.
꼬투리
`꼬투리`는 콩과 식물의 씨가 들어 있는 껍질을 뜻하는 말로, 씨앗의 모태가 된다는 면에서 어떤 이야기나 사실의 실마리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꼬투리를 잡다`는 남의 잘못이나 문제가 되는 실마리를 틀어쥐다 는 뜻이다.
꼭두각시
꼭두각시는 원래 우리나라 고대 민속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에 나오는 인형을 말한다.
꼭두각시에서 ’꼭두‘는 ’꼭뒤‘라고도 하는데 뒤통수의 한가운데나 꼭대기를 가리키는 말이고,’각시‘는 젊은 색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꼭두각시는 머리 꼭대기에 기괴한 탈을 쓰고 노는 여자 광대를 가리켰다. 그러던 것이 점차 그 뜻이 넓어져 나무로 깎아 만든 젊은 색시 인형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상야릇한 탈을 씌운 이 인형은 그 자체로 움직이지 못하고 반드시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오늘날 무조건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나 정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괴뢰(傀儡), 망석중이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을 꾀하던 날 밤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연산군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소홀한 채 술과 놀이만 일삼던 임금이었다.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자 나라는 점점 어지러워졌다.
"허어, 왕께서 허구한 날 술과 계집의 치마폭에서 헤어날 줄을 모르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오."
"그러게 말이오. 옳은 말을 하는 신하는 멀리하고 간신들의 아첨에만 귀를 기울이니 원!"
"뜻 맞는 사람끼리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임금을 몰아내든지 해야지,"
"쉿! 누가 듣겠소. 자, 사람들 눈을 피해 조용한 데서 얘기합시다!"
연산군의 그런 행동을 보다 못한 몇몇 신하들이 비밀리에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희안, 박원종 등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고자 뜻을 모은 사람들이었다.
"오늘 밤 모두들 박원종의 집으로 모이시오. 마지막으로 내일 할 일을 점검해 보아야겠소."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다 모이자 성희안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각자 어떤 일을 맡겠으며, 준비에 차질은 없는지 돌아가면서 말해보시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모두 다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오직 구석에 앉은 한 사람만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달빛도 없는데다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촛불도 켜지 않은 터라,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성희안은 가만히 모인 사람들을 세어보았다. 놀랍게도 모이기로 한 사람보다 한 명이 더 많은 게 아닌가.
"박 대감, 엄탐꾼이 들어와 있소."
박원종도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염탐꾼이 있다면 내일 벌이기로 한 큰 일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 모인 사람들도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염탐꾼은 보이지 않았다.
"성 대감, 대체 누굴 보고 그러시오?"
성희안은 말없이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성희안이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던 박원종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성 대감, 그건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내일 큰일을 위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요."
정말 자세히 보니 보릿자루였다. 그런데 거기에 누군가 갓과 도포를 벗어 놓아 영락없이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허허, 내가 너무 긴장했나 보군. 꿔다놓은 보릿자루를 사람으로 착각하다니...!"
그 뒤로 어떤 자리에서 있는 둥 없는 둥 말없이 그저 듣고만 있는 사람을 가리켜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 하게 되었다 한다.
끈 떨어진 망석중
의지할 곳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이나, 물건이 못 쓰게 되었거나, 일이 그만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쓰는 말이다.
‘망석중이’는 나무로 다듬어 만든 인형으로 팔다리에 줄을 매달아 그 줄을 당겨 춤을 추게 하는 ‘망석중이놀이’에 나오는 인형이다.
옛날에 주로 음력 4월 초파일 연등 행사에서 무언 인형극인 ‘망석중놀이’를 하였는데, 망석중, 노루, 사슴, 잉어, 용 따위의 인형이 사용되었다.
이 ‘망석중놀이’는 송도의 유명한 기생인 황진이가 당시에 30년 동안 면벽수도를 했다는 명승인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킨 일을 풍자하기 위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망석중은 끈을 매달아 움직이기 때문에 끈이 끊어지면 움직일 수가 없다고 하여 생긴 말이다. 남을 지나치게 희롱한다는 뜻으로 `망석중 놀리듯 한다‘라고 쓰기도 한다.
나
나쁘다
`나쁘다`는 본래 `낮+브다`로 이루어진 말로서 `높다`의 반대로 낮은 상태를 뜻하였다.
오늘날은 ‘나쁘다’는 높고 낮음의 고저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어떤 가치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는 뜻으로 전이되어 `기준에 못 미친다`, `질이 낮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으로 두루 쓰이고 있다.
난장
`시골에서 정한 장날 외에 특별히 며칠간 서는 장‘, 또는 ’한데다 난전을 벌여 놓고 물건을 파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에는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를 거쳐야 했다. 그래서 과거를 볼 때가 되면 오로지 급제를 위해 수년 동안 공부를 한 양반집 자제들이 전국 각지에서 시험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렇듯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질서 없이 들끓고 떠들어 대던 과거 마당을 `난장`이라고 했다. 과거 시험장의 난장에 빗대어 뒤죽박죽 얽혀서 정신없이 된 상태를 일컬어 ‘난장판’이라고 한다.
날샜다
‘날샜다’라는 말은 원래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이 쓰던 말이었는데, 차츰 일반 사람들도 이 말을 쓰게 되었다.
영화를 촬영할 때 밤이 나오는 장면은 꼭 밤에만 찍어야 했는데, 찍고자 하는 내용을 미처 다 찍지 못하고 날이 새면 할 수 없이 하루를 기다려 그 다음날 밤에 다시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거나 잘못되거나 예상처럼 되지 않고 빗나갔을 때를 가리켜 ‘날샜다’라고 하게 되었다.
남방셔츠
`남자들이 여름에 양복저고리 대신 간편하게 입는 웃옷`을 가리킨다.
`남방(南方) 셔츠(shirts)`가 줄어서 된 말로, ‘남방’은 동남아 지역을 가리키며, 그 곳은 날씨가 덥기 때문에 옷 모양을 소매가 짧고 통풍이 잘 되도록 헐렁하게 만들어 입는다. 날씨가 더운 남방 지방 사람들이 주로 입는 모양의 옷이라는 뜻으로 된 말이다. 줄여서 ‘남방’이라고도 한다.
남산
‘남산’이라 하면 남쪽의 산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원래 `남(南)`은 `앞 남`이었다. 즉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로 `앞에 있는 산`이 곧 `남산`이다. 그러므로 ‘남산’은 그 고을의 주산(主山)이 된다. 그래서 대체로 어느 고장이나 ‘주산’인 ‘남산’이 있다. 서울의 ‘남산’은 경복궁이나 여러 궁궐에서 보면 조선시대 한양의 ‘주산’였던 것이다. 그리고 좌청룡우백호 배산임수가 명당자리인 것이다. 한편 `북’은 `뒤 북`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 `북망산`에 간다는 것은 뒷산의 묘지로 간다는 뜻이었다.
애국가 중의 `남산 위에 저 소나무` 할 때 남산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많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주산인 남산의 의미를 새로이 새겨 볼 일이다.
남산골 샌님
살림이 궁핍하여도 살아갈 궁리를 못하고 글만 읽는 가난한 선비를 비웃어 이르는 말이다.
옛날 서울 남산 밑에는 몰락한 구차한 ‘생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생원’은 소과에 급제한 선비 또는 나이 많은 선비에 대한 존대어였다. 그 ‘생원’이 ‘샌님’으로 되었다.
남산골 샌님을 ‘딸깍발이’라 했는데, 샌님들이 나막신을 신고 다닌 데서 나온 말이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의 허생도 남산골 샌님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국어학자 이희승의 <딸깍발이>란 수필도 남산골 샌님들의 가난한 가운데 지조를 예찬한 글이다.
낭만浪漫
낭만은 논리적이거나 현실적이기보다는 주로 정서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낭만의 원래 말은 프랑스의 로망(roman)이다. 그것이 일본 사람들이 낭만이라고 한 것이다. 로망이라는 말과 비슷한 한자음을 찾아 쓴 게 낭만(浪漫)이었다. 음을 빌려 쓴 가차인 셈이다. 그 일본식 외래어가 우리말에 그대로 들어와 굳어진 것이다.
너스레
`떠벌려 늘어놓는 말솜씨`를 뜻하는 말이다.
흙구덩이나 그릇의 아가리 또는 바닥에 물건이 빠지지 않도록 걸쳐 놓은 막대기를 ‘너스레’라고 한다. 너스레를 늘어놓듯이 그럴 듯하게 떠벌리는 말을 ‘너스레’라 하게 되었다. 흔히 `너스레를 놓다(떨다, 부리다)`라고 쓴다.
넋두리
`불만이 있을 때 주절거리는 소리`을 뜻한다.
원래는 죽은 이의 넋이 저승에 잘 가기를 비는 굿을 할 때, 무당이 죽은 이의 넋을 대신하여(빙의 상태) 하는 말을‘ 넋두리’라 하였다. 무당이 하는 넋두리가 차차 뜻이 확대되면서 그냥 일반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푸념'도 같은 유래의 말이다.
넋걷이: 굿을 하여 죽은 사람의 넋을 거두어들이는 일, 또는 그 노래.
넋대: 무당이 물에 빠져 죽은 넋을 건지는 데 쓰는 장대.
넋반: 무당이 넋을 담는 데 쓴다고 하는 소반.
노가리
명태의 새끼를 말한다.
명태는 한꺼번에 매우 많은 수의 알을 깐다 한다. 명태가 많은 새끼를 까는 것과 같이 말이 많다는 것을 빗대어 쓰기도 한다. 노가리의 수만큼이나 말을 많이 풀어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가 된다. `노가리 풀다`, `노가리 까다`라고 하는 것은 말이 많거나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노다지
바라던 광물이 막 쏟아져 나오는 광맥, 또는 그 광물을 뜻한다.
구한말(舊韓末), 한국을 다녀간 한 외국인 루벤초프가 그의 탐험기(探險記) 속에서, "이 나라는 금이 노출되어도 캐지 않는 나라이며, 특히 북방 연해는 금의 고지였다"라고 씀으로하여, ‘은자(隱者)의 나라(Nation Hermit)’ 는 ‘황금의 나라(Nation of Gold)’로 이미지가 바꾸기 시작했다. 외국 여러 나라들이 눈독을 들였던 한국의 산야(山野)에 깔린 광맥은 외국 사람에 의해 개발되고, 그래서 한국의 금덩이는 외국으로 흘러나가게 된다. 그와 같이 금광에서 외국으로 흘러나가는 상자에 쓰인 글씨가 "NO TOUCH"(노 터치: 손대지 마시오)
라는 것이었다. 이 ‘노터치’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아가는 사이 와전(訛傳)되어, 드디어는 지금의 ‘노다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다지 캐려는 사람이, 다른 데 정신은 없고 오직 한 군데에만 신경을 쓴 데서 이 ‘노다지’는 ‘늘’ 혹은 ‘언제나’와 같은 뜻으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노들강변
‘노량’의 한자는 백로 로(鷺)에, 징검돌 량(梁)이다. 그래서 `노량`은 `노돌`이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노들`로 변했다. 거기에 `강변`이 덧붙은 것이다.
이 `노들강변`은 옛날에 서울과 남쪽 지방을 잇는 중요한 나루였다. 그래서 이 `노들강변`은 애환이 많이 깃든 곳이요, 민요로까지 불려진 것이다.
‘노들강변’ 민요는 중국의 신모(申某)가 가사를 지었고 문호월(文湖月)이 곡을 붙였다는 노래로, 한국에 들어와 완전히 한국 민요로 토착화하였다. 9박자의 세마치장단에 의한 맑고 경쾌한 노래이다. 가사는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無情歲月)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어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로, 세상의 한(恨)을 물에 띄워 보내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노래, 놀이 , 놀음
`놀다`의 어간 `놀-`에서 온 말들이다. 각각 `놀 + 애`, `놀 + 이`, `놀 + 음`으로 분석될 수 있다. `사람`, `삶` `살림`이 모두 `살다`에서 온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노래, 놀이, 노름`이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놀이`는 그럴 듯한데, `노래`나 `노름`이 `놀다`에서 나왔다는 인식은 들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안 드는 단어일수록 대개는 그 단어가 만들어진 역사가 오랜 것들이다.
녹초가 되다
`아주 맥이 풀리어 늘어지다`라는 뜻이다.
녹초는 `녹은 초`를 뜻한다. 초가 녹아내린 것처럼 흐물흐물해지거나 보잘 것 없이 된 상태를 빗대어 나타낸 말이다.
누비옷
누빈 옷감으로 지은 옷으로 주로 겨울에 추위를 막기 위해 입는다.
본래는 스님들이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넝마의 헝겊 조각을 기워서(納) 만든 옷(衣), 즉 `납의장삼(納依長衫)`에서 나온 말이다. 납의가 `나비`로 소리 나다가 이것이 다시 `누비`로 정착된 것이다. ‘누비’의 원형은 `납의`로서 누덕누덕 기워 만든 옷을 말한다. 여기에서 `누비다`라는 새로운 바느질 양식이 나오게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종횡무진 거침없이 나아간다는 뜻으로까지 쓰이게 되었다.
눈시울
눈의 언저리의 눈썹이 난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울’은 원래 고깃배 가장자리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길게 타원형으로 된 배의 가장자리 모양이 눈과 입 모양을 연상시켜 `눈시울` `입시울`이라 했던 것이다.
님
‘니마’ 는 태양신을 뜻하는 말에서 제사를 지내는 군왕을 뜻하는 말로, 상대방을 높이는 접미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상응하는 ‘고마’는 물과 땅의 신으로서 생산을 맡는다. 니마는 단군의 아버지 신, 고마는 어머니 신에 해당한다 하겠다.
‘님’은 따지고 보면 태양신 곧 광명의 신으로 숭앙되었으며 따라서 ‘-님’ 이라고 부르는 우리 언어 관습의 밑바탕에는 상대방을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 본다는 의식이 깔려 있는 셈이다.
‘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명사로 쓰일 때는 아직까지 두음법칙이 적용되어 ‘임’이 표준어로 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이 ‘님’으로 쓰고 있음으로 표준어 사정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다
단골집
늘 정해 놓고 다니는 집을 말한다.
무당을 ‘당골’ 또는 ‘단골’이라 불렀다. 늘 정해 놓고 거래하는 집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단골집’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났다.
우리의 민속신앙은 전통적으로 귀신이나 자연물을 섬기는 샤머니즘이었다. 이런 무속신앙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미신이라 하여 많은 배척을 받았으나 아직도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지금도 동네마다 대나무에 깃발을 꽂아 놓은 집을 더러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무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옛날에는 가족 중에 병이 들거나 집안에 재앙이 있으면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거나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굿을 하는 것을 ‘푸닥거리’라고 하며, 병이나 재앙의 원인이 되는 살(煞)을 푼다는 뜻에서 ‘살풀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굿을 할 때마다 늘 정해놓고 불러다 쓰는 무당을 ‘당골’ 또는 ‘단골’이라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무당이 그만큼 가까운 존재였음을 말해 준 것이라 하겠다.
담배
담배는 1492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상륙하여보니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처음으로 서구에 알려진 것이 오늘날 담배의 시초이다. 그러나 담배는 이미 기원전부터 중남미 대륙에 야생종으로 분포되어 있었고,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 이전부터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전래된 연대와 경로에 대해서는 고정된 설이 없지만, 국내 문헌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1608년부터 1816년 사이에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지금의 신대륙에 처음 상륙했을 때, 그 곳의 원주민들이 마른 담배 잎을 선물했다고 한다. 콜럼버스 일행은 처음에는 그 용도를 몰랐으나 원주민들이 불붙은 잎 뭉치를 들고 다니며 피우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한두 번 피워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여송연(Cigar)의 기원이다.
그로부터 20∼30년 후 담배의 원산지인 멕시코의 아즈텍족 추장이 유럽에서 온 탐험가에게 선물한 갈대 담배가 궐련(Cigarette)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길이는 한 뼘이 훨씬 넘었고 갈대 줄기에 담배와 향기 나는 식물을 섞어 만든 것으로 바깥 부분은 목탄을 발랐고 입에 무는 부분이 움푹 파인 모양으로 만들어 졌었다 한다. 그 이후로 갈대를 구하기가 힘들었던 스페인 사람들은 갈대 대신 종이로 싸는 방법을 개발하여 오늘날의 궐련과 거의 유사한 모양의 담배를 만들었는데 이런 방식은 수백 년 동안 주로 스페인 사람들이 사용하였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파이프 담배와 여송연이 유행하였다 한다.
오늘날과 같은 필터 담배는 처음에는 비싼 터키산 담배 잎에 필터를 부착하여 ‘러시아식 담배’로 불리며 1850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1854년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포로로부터 빼앗은 이 담배 맛을 본 영국군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러시아식 담배’ 를 찾게 되었고,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국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제조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일본에 최초로 담배를 소개한 사람은 포르투갈 사람인데, 입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 사이에 급속하게 번져나가서 2년 만에 금연령이 선포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초창기에는 주로 양반 계급과 고관대작 등 부유층 중심의 기호품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담배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인조실록」(仁祖實錄)에 나온다.
지봉 이수광(芝峰 李粹光)의 「지봉유설」(芝峰類設)에는, 벌써 오늘날 쓰이고 있는 ‘담배’비슷한 말이 나온다. ‘담바고는 남령초(南靈草)라 하는데 근년에 일본에서 온 것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밖에도 인조 때의 명신이자, 우리나라 담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계곡 장유(谿谷 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담배 피우는 법은 본디 일본에서 온 것이니, 일본 사람은 이를 ‘담박괴(淡泊塊)라 하였다’라고 써 있다. 윤기진(尹起晉)의 대동기년」 (大東紀年)에는 장유(張維)가 처음 피우기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痰破塊(담파괴)’라는 표기가 나온다.
그 이후, 민요에서 보이는 ‘담바구타령’ 같은 것도 보이니, 포르투갈어 ‘토바코’가 일본의 ‘다바코’를 거쳐서 우리나라로 건너오는 사이 ‘담바구’가 변음 되어 ‘담배’로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담배’는 오늘날 외래어라는 의식이 들지 않은 귀화어 집합에 드는 말이다.
대포
`큰 잔 또는 큰 잔으로 마시는 술`을 가리킨다.
커다란 탄환을 멀리 내쏘는 화기(火器)를 뜻하는 대포에서 크다는 뜻을 빌려와서 다른 뜻으로 쓰게 된 것이다. 크다는 것을 강조해서 ‘왕대포’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일식집에서 ‘정종 대포’라는 것도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댕기풀이
`관례나 혼인을 하고 나서 동무들에게 한턱내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자가 관례를 치르면 그 동안 땋아서 늘어뜨리고 다니던 머리를 틀어서 상투를 올리게 되고, 혼인을 하면 마찬가지로 여자의 머리를 올려 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총각, 처녀가 모두 어른이 되는데, 이 때 땋은 머리를 묶고 있던 댕기를 풀게 된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도깨비
도깨비의 어원은 ‘돗’ (종자)과 ‘아비’ (아버지. 남자)의 합성어이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도깨비는 원래는 사람에게 재물을 가져다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다. 귀신도 사람도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의 도깨비는 강시 같은 중국의 ‘귀(鬼)’나 혹 달린 일본의 ‘요괴’와는 차원이 다르다.
도깨비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된 것은 장난기와 심술이 많고, 도깨비불로 나타나 사람들을 현혹했기 때문이다.
도깨비는 씨름을 좋아하며 숲이나 바다. 강처럼 물기가 많은 곳에 산다. (과학적으로 이를 인燐이라는 원소로 보기도 한다)
도루묵
`은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을 맞아 피난하던 도중에 처음 보는 생선을 먹게 되었는데 그 맛이 별미였다. 그래서 이름을 물어보니 `묵`이라고 하므로, 그 이름이 맛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다 하여 그 자리에서 `은어(銀魚)`라고 고치도록 했다. 나중에 궁중에 들어와 `은어` 생각이 나서 다시 청하여 먹었으나 예전과 달리 맛이 없었다. 그래서 선조가 ‘은어’를 ‘도로 묵’이라고 하라 했다 전한다. 이런 유래로 인해 `도로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가 발음이 변해 `도루묵`이 되었다 한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허사가 되었을 때 흔히 `말짱 도루묵‘이라 한다.
도무지
‘아무리 해도, 전혀, 아주’라는 뜻의 부사로 쓰이는 말이다.
구한말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고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보면 엄격한 가정의 윤리 도덕을 어그러뜨렸을 때 아비가 눈물을 머금고 그 자식에게 비밀리에 내렸던 `도모지(塗貌紙)`라는 사형(私刑)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글자 그대로 얼굴에 종이를 바른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자식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고 물을 묻힌 한지(韓紙), 즉 창호지를 얼굴에 몇 겹이고 착착 발라 놓으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말도 못하는 상태에서 종이의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되어 죽게 하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도무지`는 이런 끔찍한 형벌에서 비롯하여 ‘전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의미인 `도모지’가 변음(이화작용) 되어 ‘도무지`가 되었다.
도토리
‘돝[猪돼지 저]’ 이 ‘도톨’로 여기에 명사화 접미사 ‘이’가 결합하여 ‘도토리’가 된 것으로, ‘돼지(멧돼지)가 먹는 밥’의 뜻이었다. ‘상수리’와 구별하지 못하면서 19세기 말부터 ‘도토리’가 ‘상수리’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음식 중 도토리묵은 사실은 상수리묵이다.
독도
독도’와 관련된 명칭은 시대에 따라 문헌에 아주 다양하게 나온다. 성종 때의 ‘삼봉도(三峰島)’, 정조 때의 ‘가지도(可支島)’, 19세기 말 이후의 ‘석도(石島)’, ‘독도(獨島)’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런데 지금 울릉도 현지 주민들은 ‘독섬(즉, ‘돌섬’)’이라는 조금은 색다른 명칭에 익숙하다. 이 ‘독섬’은 ‘石’을 뜻하는 ‘독’과 ‘島’를 뜻하는 ‘섬’이 결합된 순수 고유어이다. 지금도 전라도 지역에서는 ‘돌’을 ‘독’이라 한다. 조선조 말(1883년) 울릉도에 대한 개척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을 때 전라도 사람들이 대부분 이주하였다는 점에서, 울릉도와 인접한 돌로 된 섬을 자기 지역 말로 ‘독섬’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문헌에 보이는 ‘석도(石島)’는 바로 우리말 ‘독섬(돌섬)’을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자어 ‘독도(獨島)’는 ‘독섬’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독’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자 그저 음이 같은 ‘홀로 독(獨)’ 자를 이용하여 엉뚱한 ‘외로운 섬’이 되고 말았다. 이로 보면 ‘독도’는 ‘외로운 섬’이 아니고 ‘돌로 된 섬’일 뿐이다.
한편, 일본 사람들은 17세기 이후 ‘울릉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 ‘독도’를 ‘송도(松島, 마츠시마)’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아마 울릉도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독도에는 소나무가 많아서 그러한 명칭을 부여한 것일 터인데 지금도 울릉도에는 대나무가 많기에 그러한 명칭이 제대로 어울리나, 독도에는 소나무는커녕 어떤 나무도 없어 ‘송도(松島)’라는 명칭이 무색하다.
그런데 19세기 말 이후 일본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명칭에 아주 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울릉도를 ‘죽도’ 또는 ‘송도’라고도 하고, 독도를 ‘송도’ 또는 ‘리앙쿠르島’라고도 하다가, 1905년 이후에는 독도를 ‘죽도’로, 울릉도를 지금과 같이 ‘울릉도’로 부르게 되었다.
울릉도를 가리키던 ‘죽도=다케시마’가 돌연 독도를 가리키게 되어 실제 독도에 대한 명칭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독도’에 대한 자기네 이름(즉, ‘송도=마쓰시마’)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땅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니 역사적 사실을 들추지 않더라도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가를 알 수 있다.
우리도 엉뚱한 외로운 섬이란 뜻의 ‘獨島’보다는 ‘독섬’이라는 순수 우리말로 표기함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팔이
`전문 지식이나 기술 없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을 뜻한다.
아는 것이나 실력이 부족해서 일정한 주소가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기술이나 물건을 파는 것을 `돌팔이(돌다+팔다)`라 했다. 돌팔이 무당, 돌팔이 의사, 등의 말이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동냥
`거지가 돈이나 물건을 구걸하는 일`을 뜻한다. 한자말인 동령(動鈴)에서 온 말이다.
원래 불가에서 법요(法要)를 행할 때 놋쇠로 만든 방울인 요령을 흔드는데 이것을 동령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중이 쌀 같은 것을 얻으려고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며 문전에서 동령을 흔들기도 했다. 지금은 동령대신 목탁을 두드리지만 동냥이라는 말은 이렇듯 중이 집집마다 곡식을 얻으러 다니던 ‘동령’에서 비롯한 말이다.
한편 `가을 중 싸대 듯`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가을이 되면 농민들이 곡식을 수확하게 되고, 그러면 중들은 때맞춰 시주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는 데서,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닌 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 되었다. 동냥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동냥아치’라고 부르는데, 이는 ‘거지’와 같은 뜻으로 속화된 것이다.
동티
`잘못 건드려 스스로 재앙을 사다`의 뜻이다.
원래 흙이나 나무를 잘못 다루다가 지신(地神), 목신(木神)의 노여움을 입어 재앙을 당한다는 뜻의 민속 용어였던 것이 일반적인 뜻으로 확대되었다. ‘동티’는 ‘동토(動土)’라는 한자말이 변해서 된 말이다.
돼지
접미사 ‘-아지’가 붙으면 ‘새끼’의 의미가 된다.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도야지 등이 이렇게 된 말이다. ‘도야지’가 축약되어 ‘돼지’가 되었다.
고어에서 `돝`은 어미 돼지이고, `도야지`는 새끼 돼지였는데, 후에 `돝`이 사어가 되면서 ‘도야지’가 축약된 `돼지`가 `돝` 대신 표준어가 되고, `도야지`는 방언이 되었다. 그래서 가축 중에 `돼지`만은 새끼 돼지의 명칭이 따로 없다. 본래는 새끼 돼지를 일컫던 말이 돼지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어의가 확대되어 쓰이게 된 것이다.
사람 중에 가망성이 없다 할 때 ‘싹아지 없다’의 ‘싹아지’도 ‘싹’에 ‘아지’가 붙은 말이다.
두레
부락 단위로 조직된 집단적 노동 형태를 이르는 말이다.
‘두레’는 ‘두르다’에서 유래한 말로 어간 ‘두르’의 ‘ㅡ’가 탈락하고, 접미사 ‘-에’가 결합한 말이다.
민속놀이 두레도 이와 같은 뜻으로 빙 둘러서서 논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딴따라
노래, 악기, 춤 따위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요즘 연예인에 해당한데 천시하여 ‘딴따라’라 불리던 시대가 있었다.
`딴따라`는 영어의 `tantara`의 음을 빌려 온 것으로 나팔이나 뿔나팔 등의 소리를 말한다. 그래서 이 소리를 빌어 와서 `딴따라`라고 하였다. 국어의 의성어가 아닐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국어에 `딴따라`라는 의성어는 없다.
떡
고어 동사 ‘ㅂ디다(찌다)’의 어간에 명사화 접미사 ‘-기’결합되어 이루어진 말이다.
‘ㅂ디기 → 떼기 → 떠기 → 떡’으로 변화된 것으로 ‘찐것’이란 뜻이다.
뚱딴지
엉거시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풀이름으로 일명 ‘돼지감자’라 불린다.
생김새나 성품이 돼지감자처럼 `완고하고 우둔하며 무뚝뚝한 사람`을 빗대어 가리키는 말로 쓰이다가, 오늘날은 본래의 의미는 거의 없어지고, 상황이나 이치에 맞지 않게 엉뚱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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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오꼬오이모에게 고구마 한관 사다 줘야지 동티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