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의 생애(生涯)와 차문화
(1)초의선사의 생애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의 사상과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점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할 것이다.
첫째는 차(茶)에 대한 이해이며, 둘째는 선(禪)에 대한 이해이며, 세째는 시(詩)에 대한 이해이다. 차에 대한 이해는 한국 차문화사(茶文化史)에 대한 이해이며 차정신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고 선에 대한 이해는 곧 초의스님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진수를 이해하는 길이며, 조선시대 말 삼종선(三種禪)과 이종선(二鍾禪)의 논쟁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에 대한 이해는 조선조 말의 시풍(詩風)에 대한 이해이다. 초의스님을 가리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라고 하니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초의선사를 말할 수 없으리라. 우선 초의선사의 생애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선사는 1786년 조선 정조(正祖) 10년 병오(丙午) 4월 5일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務安郡 三鄕面)에서 태어났다. 속성(俗姓)은 장(張)씨이며 흥성(興城)이 본관이다. 자는 중부(中孚) 법명(法名)은 의순(意恂), 초의(艸衣)는 염화지호(拈花之號)이다. 또다른 호(號)조서는 해옹(海翁), 해양후학(海陽後學), 해상야질인(海上也窒人) 일지암(一枝庵) 우사(芋社) 자우(紫芋)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초사(艸師)라고도 했다.
스님의 출생과 생애에 관해서는 신헌(申櫶)이 편찬한 ‘사호보제존자초의대종사의순탑비명(賜號普濟尊者艸衣大宗師意洵塔碑銘)’과 이희풍(李喜豊)이 찬술한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 그리고 구계화상(九階和尙)이 저술한 「동사열전(東師列傳)」 중 ‘초의선백전(艸衣禪伯傳)’, 유경도인(留耕道人)이 저술한 ‘초의대선사운(艸衣大禪師韻)’ 등에 보이고 그 외로 진도(珍島) 사람 우당(愚堂)이 쓴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庵序)’와 허소치(許小痴)의 ‘몽연록(夢緣錄)’과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에 잘 나타나 있다.
스님의 가계(家係)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고, 어머니가 큰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다섯살(1790년)이 되는 해에 강에서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건져준 사람덕분에 살아난일이 있었고, 열다섯살이 되던 해에는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운흥사(雲興寺)로 찾아가 벽봉민성(碧蜂敏性)스님께 의지하여 출가 하였다.
이곳에서 불경(佛經)을 익히고 있다가 열아홉(1804년)이 되는 해에 영암(靈岩)의 월출산(月出山)에 혼자 올라가 산세가, 기이하고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취해 있던중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깨친 바 있어 가슴에 맺힌 것이 시원하게 풀리니 가는 곳마다 별로 꺼릴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후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와서 완호(琓虎)스님을 뵙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초의(艸衣)라는 호(號) 역시 이때 받은 것이다.
완호스님은 연담(蓮潭)스님의 법손(法孫)으로 조계문인(曹溪門人)이다. 그리고 초의의순(艸衣意恂)으님은 완호윤우(琓虎尹佑)스님에게서 법율이 이어받았다.
이때부터 대흥사를 떠나지 않고 불경을 배우면서 틈틈이 범자(梵字)를 익혀 범어의 뜻을 통하고 또한 탱화(幀畵)를 잘 그려서 당나라 오도자(吳道子)의 경지에 이르렀다. 스님께서 남기신 신상(神像)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현재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는 영정신상(影幀神像)은 거의 대부분이 스님께서 손수 금어(金魚)가 되어 그리셨거나 증사(證師)가 되었던 작품이다. 유독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과 준제보살상(準提菩薩像)을 좋아하여 그리셨다. 지금도 대흥사 유물관에는 사십이수십일면관세음보살상(四十二手十一面觀世音菩薩像)이 두 점이나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단청(丹靑)도 잘 해서 조사(祖師)스님들을 모신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짓고 손수 단청을 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여(禪餘)에 익힌 글씨는 일가를 이루어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쓰셨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일생의 지음(知音)이 되었으나 추사체에 영향을 받지 않은 별개의 글씨를 썼다.
24세(1809년)에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와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과 만나 깊이 사귀면서, 다산에게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워 유학에도 정통하였고, 선경(禪境)에 들어 운유(雲游)의 멋도 누렸다. 2년 후 26살(1811년) 되던 해에는 대흥사 천불전에 불이 나서 가람 아홉동이 하룻밤새에 다 타버렸다. 더구나 가까이 지내던 도반 아암혜장(兒菴惠藏)스님이 입적하시니 스님의 쓸쓸한 마음은 다산 선생과 더욱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이듬해 가을에는 다산선생과 그의 제자 윤동과 함께 월출산 백운동(白雲洞)에 들어가 놀다가 월출산 외경을 그렸다. 이때 그린 그림이 백운도(白雲圖)이다. 다산선생이 그린 것을 다산도(茶山圖) 또는 청산도(靑山圖)라 하였고 그 말미에 시(詩)를 지어 붙이고, 다시 윤동이 발문을 지어 한폭의 시축도(詩軸圖)를 만들었다. 이 유품은 최근까지 강진 사람이 소장하고 있다가 서울 사람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30세(1815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갔는데, 가는 도중 전주(全州)에 들러 명필 이삼만(李三晩) 등과 사귀어 한벽당(寒碧堂)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즐겼으며 서울에 올라가 두릉(杜陵)에 사는 다선선생의 아들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과 만나서 같이 두해 동안을 놀았다. 이때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산천 김명희(山泉 金命喜), 김상희(金相喜)와도 사귀었다.
2년 후 32세(1817년) 봄에는 추사와 동로 김재원(東老 金在元) 등과 함께 시회를 하고 헤어져 경주로 내려가 불국사(佛國寺)를 구경하고 기림사(祇林寺)에 가서 천불(千佛)을 점안(點眼)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천불을 모실 천불전상량문(千佛澱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千佛記)를 지어서 모시었다.
이때 경주에서 대흥사로 옮기던 천불 중 300분을 모신 배가 폭풍을 만나 표류해서 일본에 갔었다. 이듬해 다시 모시고 귀국하여 돌아와 천불전에 함께 모셨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이때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다신계)를 만들고 그 절목(節目)을 손수 써주시고 가셨다.
38세(1823년)에는 대둔사지(大芚寺誌) 간행사업에 가담하여 사지편찬을 도왔다. 본래 대둔사지는 그 행방을 알 길이 없고 다만 죽미기(竹迷記)와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에 기록이 전하고 있었다. 이를 기초로하여 의견을 첨부해서 사지를 편찬했으니 초의, 수룡(袖龍)스님이 편집하고 호의(縞衣), 기어(騎魚)스님이 교정하고 완호(玩虎), 아암(兒菴)스님이 감정(鑑定)을 해서 대둔사지를 편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지를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필사했다.
이듬해 39살(1824년) 때에는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했다. 이 암자는 스님께서 일생동안 은거하셨던 곳으로 스님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곳이요. 차문화를 펴던 자리이기도 하다. 스님은 이곳에서 선(禪)의 논지(論旨)를 바로 세워 초의선과(艸衣禪課)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를 저술하였고, 차문화를 부흥시키고저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저술 하였다. 이 외로 많은 시(詩)와 잡문(雜文)들이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스님께서 일지암을 짓고서 읊은 시 한 수가 있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었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45세(1830년)에는 다신전(茶神傳)을 펴내서 차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도록 했다. 이는 차를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만 완독하면 차를 만들어서 끓여 마실 수 있도록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차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다신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해 가을에 스님께서 두 번째로 서울에 가서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에게 스승님(완호스님)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해거도인께서 겨울 내내 선비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즐기다가 보니 비문을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훗날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에게 부탁해서 짓고 추사 김정희의 아우 금미 김상희(金相喜)가 써서 비를 대흥사비전에 세웠다.
46세(1831년)에는 스님께서 그동안 화운(和韻)하거나 지으신 시(詩)들을 한데 모아서 초의시고(艸衣詩藁)라고 제명하여 시집 한 권을 만들었다. 이 시집의 서문은 당시 유가(儒家)의 사표(師表)라고 하는 연천거사(淵泉居士) 홍석주(洪奭周)와 조선조 시의 명인(名人)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맡아 썼다. 이때 스님은 시작법(詩作法)에도 완숙하여 생애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시를 지었다. 이듬해에도 서울에서 머물다가 가을이 되었을시 일지암으로 돌아왔다.
스님의 나이 48세(1883년) 때에는 조용히 일지암에서 지내면서 뜰에 대나무를 심었다. 이때 추사의 아버지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선생이 일지암으로 스님을 찾아오셨다. 유당 선생은 이곳에서 가까운 완도 고금도(古今島)에서 와서 4년여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때 자기의 아들 추사 김정희와 친숙하게 지내는 초의스님의 인물됨을 한 번 보고 싶어 유배지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일지암에 들러 하룻밤을 묵은며 초의스님을 만나보니 그 덕행이 지고(至高)함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유당 선생은 초의스님의 인격에 반해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또 초당 뒤에 있는 유천(乳泉)의 물맛이 수락보다도 좋다고 극구 예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일지암을 방문한 유당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 관악산 밑에 은거하다가 4년 후(1837년) 숨을 거두었다.
50세(1835년) 봄에 진도사람 허유(許維)가 일지암으로 스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치(小痴) 허유는 재주는 있으나 견문이 부족하고 스승이 없어 화법(畵法)을 몰라 망설이다가 스님을 찾아온 것이다. 이로부터 삼년 동안을 꾸준히 화법과 시학(詩學), 그리고 불경과 차(茶)를 배웠다. 훗날 스님의 소개로 추사의 제자가 되어 한국 남종화(南宗畵)의 선구자가 되었다.
52살(1837년) 봄에 일지암에서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 하였다. 동다송은 해거도인 홍현주가 부탁을하여 저술한 것인데, 동국(東國)에서 생산되는 차를 게송(偈頌)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모두 31구송(句頌)으로 되어 있는데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나라 차의 우월성 등을 말했다. 또 각 구마다 주(註)를 달아 자세한 설명을 첨가해서 알아보기 쉽도록 해놓았다.
동다송은 한국차의 성전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으며 차의 전문서로는 유일한 것으로, 다만 아쉬운 것은 스님의 친필본 동다송이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발굴 소개된 동다송은 모두 4종류로써, 신헌구가 필사한 다예관본(茶藝館本)과 석오 윤치영(石梧 尹致英)이 필사한 석오본(石梧本)과 대흥사의 법진(法眞)스님이 필사한 법진본(法眞本)과, 송광사의 금명(錦溟)스님이 필사한 금명본(錦溟本)이 있다.
이듬해 53살(1838년) 되던 해 봄에 일지암을 출발하여 서울을 거쳐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갔다. 처음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러 간 것이다. 두루 둘러본 뒤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구경하고 돌아올 때는 다시 한양(서울)에 들러서 해거도인의 시집(詩集)에 발문(跋文)을 지었다.
해거도인은 순조의 부마로서 시에 능하고 학문이 깊어 존경받아오던 분인데, 사문(沙門)의 몸으로 그의 시집에 발문을 쓰게 되었음은 참으로 고금에 드문 일이다. 더욱이 동다송 역시 해거도인의 부탁을 받고 지었다는 점에서 스님과 해거도인의 친분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조선조 사회에서 천대 받던 승려의 신분으로 유가의 빼어난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나눈 것은 오직 스님의 깊은 학문이 그들로 하여금 존경하게한 것이다.
스님이 55세(1840년) 때에는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사호(賜號)를 받았다. 스님은 호남팔고(湖南八高) 중에서 한 분으로 그 학덕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헌종이 소치(小痴)에게 묻기를 ‘호남에 초의라는 승(僧)이 있다는데 그 지행(持行)이 어떠한가?’ 하였다. 소치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고승(高僧)이라 일컫습니다. 내외전(內外典)에 정통하며 사대부와 종유(從遊)가 많습니다’ 라고 했다.
이처럼 스님의 학덕이 널리 알려져 많은 선비들과 교유했으며, 왕사나 국사제도가 폐지된 조선시대에 헌종으로부터 사호를 받았다는 것은 오로지 스님의 학덕과 지행이 널리 모든 선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왕사제도가 폐지된 조선 중기 이후에 사호를 받은 사람은 스님 외에는 없었다.
이듬해 여름에는(1841년) 두륜산 마하연에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새로 짓고, 보련각에 서산대사를 위시하여 12대 종사(十二代 宗師)스님과 12대 강사(十二代 講師)스님, 역대조사(歷代祖師) 고승대덕(高僧大德)스님 등 172분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이때 추사는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 가서 있었는데, 소치편에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다실(茶室)의 현판을 써서 보내왔다. 이 현판은 지금도 대흥사 동국선원(東國禪院)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이후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도 써서 보내왔으며,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걸작의 경문(經文)도 써보내 주었다. 이런 것들은 추사 당대의 최고의 절필로서 세상의 진귀한 보물이다. 애석하게도 그 원본은 하나도 없이 수집가들의 손에 흘러들어가 버렸다.
58세(1834년)에는 스님께서 고향에 찾아간 감회를 시로 옲었다.
‘멀리 고향을 떠난 지 사십여년 만에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네.
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 데 없고,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욱마다 수심에 차네.
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아서라 수구(首邱) 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遠別鄕關四十秋 歸來不覺雪盈頭
新基草沒家安在 古墓笞荒履跡愁
心死恨從何處起 血乾淚亦不能流
孤箜更欲髓雲去 已矣人生傀首邱
사십여 년만에 찾아간 고향. 늙은 몸으로 백발을 이고 찾은 고향, 어린 동몽의 기억으로 옛 집을 그리워하다 찾아간 고향이 이미 거덜난 쑥대밭이란다. 누가 슬프지 않으랴 돌보는 이 없어 옛 묘에는 이끼만 가득 끼었고, 소식조차 물을 사람이 없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고향 언덕쪽으로 향하고 죽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고향을 쉽게 잊으랴, 마음은 죽고 상했는데 한은 뼈 속 깊이 사무치고 눈물이 앞을 가려 먹장삼만 적신다.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수구한다는 말 하지 말라 부끄럽구나.
62세(1847년)에는 진묵조사유적고(震黙祖師遺蹟攷)를 찬술(撰述)했다. 예전에 전주에 갔을 때 진묵조사에 대한 실기를 은고(隱皐) 김기종(金箕鍾) 선생으로부터 자세히 들었는데, 전주 봉서사(鳳棲寺)의 스님이 찾아와 진묵조사의 기문(記文)을 청했다. 이에 스님께서 전에들은 바를 기록하여 상하 두권으로 묶어 진묵조사유적고를 저술 하기에 이른 것이다.
66세(1851)에는 석오 윤치영(尹致英)과 위당(威堂) 신관호(申灌浩)가 초의스님 시집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에 발문(跋文)을 썼다. 이때 석오 윤치영은 일지암을 방문하고 스님이 새로 창건한 대광명전신건기(大光明殿新建記)를 짓기도 했으며, 또 동다송 석오본을 필사하기도 했다. 이 동다송은 서울의 이일우(李一雨)씨가 소장하고 있다.
71세(1856년)에는 금란교계(金蘭交契)를 사십이년간이나 깊게 나누던 추사 김정희가 서울 관악산 아래서 숨을 거두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을 때 대정(大靜)까지 찾아가 반년 동안을 함께 유배지에서 살면서 위로하였고, 용호(蓉湖:서울)에 있을 적에는 같이 두해를 지냈다. 방외청교(方外淸交)를 나누던 이들은 항상 외롭고 한적한 곳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정담을 나누었다. 이처럼 지내다가 홀연히 추사가 먼저 떠나니 스님은 그의 영전에 제문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지어 올리고 눈물로 작별을 하고 산사 일지암(一枝庵)에 돌아온 뒤로는 쓸쓸하게 지냈다. 그토록 좋아아던 시도 짓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오직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산문 밖에는 일체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생각 밖에서만 이루어 놓았고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의 풍체는 범상(梵相)으로 위엄이 있고 뛰어나서 옛날 존자(尊者)의 모습과 같아 여든이 넘어서도 소년과 같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대교(大敎)를 간포(刊布)하는 일이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으나 곧바로 암자로 돌아오셨고,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에서 무량전(無量殿)을 짓는 모임에도 주선(主禪)의 자리에 모셨지만, 어디든 잠시 응했을 뿐 곧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리하여 줄곧 일지암에 주석(住錫)하셨는데, 하룻밤에는 몸져 누우셨다가 시자(侍者)를 불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跏趺坐)를 하시고 앉아 홀연히 입적(入寂)하시니, 그때 세수(世壽)는 81세요 법랍(法臘)은 65세로서 조선 고종(高宗) 3년 8월 2일이었다. 스님이 입적하신 지 오래되도록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며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다비(茶毘)를 마친 뒤에 제자 선기(善機) 범인(梵寅) 등이 영골(靈骨)을 받들어 대흥사 비전에 부도(浮屠)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이때가 고종 8년 신미년(辛未年) 4월로 입적하신 지 5년째 되던해 봄이다. 이때 송파거사(松坡居士) 이희풍(李喜豊) 선생이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을 찬술했다. 그후 병조판서를 지낸 의금부사(義禁府事) 신헌(申櫶)에게서 비명(碑銘)을 얻어 그 옆에 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문은 신헌이 추금(秋琴) 강위(姜瑋)에게 부탁해서 대신 지은 것이다. 이 비를 세우기는 스님이 입적하신 뒤 75년만인 1941년 4월에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泳)스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스님께서 남기신 저서로는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초의집(艸衣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 초의선과(艸衣禪課),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진묵조사유적고(震黙祖師遺蹟攷),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등이 있다.
(2) 초의선사의 차사상(茶思想)
선사의 차사상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으리라. 먼저 동다송(東茶頌)을 통해 본 선사의 다도관(茶道觀)과 다신전(茶神傳)을 통해 본 차생활과 그리고 다시(茶詩)를 통해 본 차정신일 것이다.
동다송은 초의선사가 차를 알고자 해서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海居道人 洪顯周)에게 지어서 보낸 차의 전문서이다. 동다(東茶)라는 말은 동국(東國) 또는 해동(海東)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를 말한다. 이 차를 게송(偈頌)으로 읊었다고 해서 동다송이라 했다.
이 동다송의 대의(大意)를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가 있는데, 첫째로 차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시도록 해라. 둘째로 우리나라 차는 중국차에 비교해서 약효나 맛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육안차의 맛이나 몽산차의 약효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셋째로 차에는 현묘(玄妙)하고 지극(至極)한 경지가 있어 다도(茶道)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초의선사의 다도관(茶道觀)이란 무엇인가. 선사는 그의 동다송 제29송에서 말하기를, 다도란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을 함께 얻는 것이라고 했다. ‘평해서 말하기를 채다(採茶)는 그 묘(妙)를 다해야 하고, 조다(造茶)는 그 정성(精誠)을 다해야 하고, 물(水)은 그 진(眞)을 얻어야 하고, 포법(泡法)은 중정(中正)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체(體)와 신(神)이 서로 고르고 건(健)과 영(靈)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을 일컬어 다도(茶道)에 이르렀다고 한다.(評曰 採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與神相和 健與靈相倂 至此而茶道盡矣)’
선사의 다도관을 알고자 한다면 문(門) 행(行) 득(得)의 길을 거쳐야 한다. 대저 문이 있어서 들고 행(行)해서 얻는() 법이다. 4문(四門)이 있으니 채(採) 조(造) 수(水) 화(火)가 그것이며, 행에는 4행(四行)이 있으니 묘(妙) 정(精) 근(根) 중(中)이 그것이며, 득에는 4득(四得)이 있으니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이 그것이다.
4문의 채란 채다(採茶)를 말하며 조란 조다(造茶)를 말하며, 수란 수품(水品)을 말하며 화란 화후(火候)를 말한다. 4행의 묘는 채다의 현묘(玄妙)함을 말하며 정은 조다의 정성(精誠)스러움을 말하며, 근은 수품의 근본(根本)을 말하며, 중은 화후의 중화(中和)를 말한다.
4득은 진다(眞茶)와 진수(眞水)를 얻어야만이 얻을 수 있는데, 차(茶)는 물(水)의 신(神:정신)이요 물은 차의 체(體:몸)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이 나타나지 않으며 진다(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볼 수가 없다.
체와 신이 비록 온전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잃으면 안된다. 중정을 잃지 않으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는다. 그러므로 신(정신)이 건(健:건전)하면 기(機:기틀)가 이(理:이치)하고, (神)이 영(靈:신령)하면 (機)가 묘(妙:현묘)하고, 체(體)가 건(健)하면 용(用:작용)이 이(理)하고, 체가 영(靈)하면 용(用)이 묘(妙)하다.
신과 체는 기(機)와 용(用)과 같아서 불이(不二)해야만 건과 영을 얻는다. 건과 영이 불이(不二)하면 묘리(妙理)하고, 묘리하면 묘경(妙境)하고, 묘경하면 묘각(妙覺)한다.
채다(採茶)란 차를 따는 일을 말한다. 차나무에서 차잎을 따는 것은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너무 빠르면 맛이 온전하지 못하고 늦으면 싱그러움이 흩어진다. 곡우와 입하 사이가 적기인데 일창일기(一槍一旗) 이기(二旗)의 잎이 자주빛이 나거나 쭈글쭈글하거나 돌돌 말린 것이 좋다.
차잎을 딸 때 밤새 구름이 끼지 않고 이슬이 흠뻑 내린 후에 딴 것이 좋으며, 비온 후나 구름이 끼었을 때는 따지 않는다. 그리고 계곡이나 암석 사이에서 자란 것이 좋다. 이처럼 채다는 현묘함을 다 해야만 된다.
그 묘(妙)를 다해서 채취한 차잎을 가지고 조다(造茶)를 하는데 솥이 매우 뜨거워졌을 때 급히 차를 넣어 덖어야 한다. 차가 익어서도 안되며 태워서도 안된다. 차가 익으면 빛깔이 검고 타면 노랗고 흰 반점이 생긴다. 이렇게 적당한 열기로 대여섯 번 정도 덖으면 차가 잘 건조된다.
불은 연기가 나지 않아야 되며 불의 기운이 고르게 되어야만 한다. 양질의 차잎과 고르고 순수한 불과 만드는 사람의 정성스런 마음이 합쳐져서 진다(眞茶)가 나오는 것이다.
수품(水品)은 차를 끓일 물을 말하는데, 산마루에서 나는 석간수가 좋고 우물물이 다음이며 강물은 나쁘다. 물에는 8덕(八德)이 있으니, 가볍고 경(輕) 맑고 청(淸) 시원하고 냉(冷) 부드럽고 연(軟) 아름답고 미(美) 냄새가 나지 않고 부취(不臭) 비위에 맞고 조적(調適) 탈이 나지 않는 것 무환(無患)이 그것이다.
물은 그 근본(根本)을 구하지 않으면 상하거나 오염되기가 쉬워서 고여 있는 우물물이나 강물은 쓰지 않는다. 바로 그 근원지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어야 한다. 이 샘물을 구하여 체성이 튼튼한 불로 끓이면 좋은 탕수(湯水)가 된다. 만약 대나무나 썩은 나무가지나 낙엽같은 연료는 불의 체성이 허약하여 탕 또한 체성이 약해진다. 이런 탕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연기가 나지 않고 체성이 튼튼한 불을 구하여 가볍게 빨리 끓여야 한다.
이때 문(文)이 지나치면 수성(水性)이 유약하게 되고 수성이 유약하면 차가 뒤지고 쳐지며, 무(武)가 지나치면 화성(火性)이 극렬해져서 차를 위해 물이 억제되며 성근 기가 위로 뜬다. 이것을 문무화후(文武火候)라고 하는데 지나치면 모두 중화(中和)를 얻지 못한다. 그 적절함을 다하여 중화를 얻어야 진수(眞水)가 나오는 법이다.
진수와 진다를 얻었을 때 비로소 중용(中庸)의 덕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진다와 진수가 아니면 신과 체를 규명할 길이 없고, 신과 체를 규명하지 못하면 건과 영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다와 진수를 얻어서 신과 체를 규명하고 신과 체가 불이(不二)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포법(泡法:차 울궈내는 법)을 하는데 포법은 중정(中正)을 지켜야만 하고 그요 체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차가 많아도 안되고 물이 많아도 안된다. 차가 많으면 빛깔이 노랗고 빨가며, 맛은 쓰고 떫으며 향내도 좋지 않다. 반대로 차가 적고 물이 많으면 맛이 온전하지 않고 빛깔도 엷고 향내도 미숙하게 된다. 적당한 양의 차와 물을 넣어야 한다.
둘째 다관에서 차를 울구는 시간이다. 너무 빨리 따르면 맛이 미숙하고 향내도 약하며 빛깔이 엷고 좋지 않다. 반대로 너무 오래 울구면 빛깔도 탁하고 맛도 쓰고 떫으며 향내도 지나치게 된다. 알맞게 울궈야 한다.
세째 차를 잔에 골고루 나누어 따를 때, 너무 급히 서둘러 따르는 것을 급주(急主)라 하고, 게으르고 완만하게 따르는 것을 완주(緩注)라고 한다. 완주나 급주를 해서는 안된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이 적당한 양의 차를 넣어 알맞게 울궈서 적당한 시간에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서 마시는 것이다. 이것을 중정법(中正法)이라고 한다. 중정법을 잘 지키는 길은 마음 속에 중용(中庸)의 덕을 품되 그 팔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적의함을 다하면 중정을 얻게 된다.
중정을 얻게 되면 자연히 신과 체를 규명하게 되고 신과 체를 얻으면 건과 영을 얻게 되는데, 신과 체가 불이하고 건과 영이 불이하면 기용(機用)이 불이하고 기용이 불이하면 묘리(妙理)가 불이하고 묘리가 불이하면 이치가 현묘한 경지에 들어 뜻한 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생각으로 헤아릴일이 아니로다. 오직 체득하는 데 그 진체(眞諦)가 있으니 진정으로 구해볼 일이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다도관(茶道觀)을 완성한 선사의 차생활과 정신은 어떠했는가. 선사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번거로움은 피하고 자유스럽고 검소하게 즐기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좋은 차와 좋은 물, 잘 끓여서 중정을 잃지 않은 차를 원했다. 그렇다. 진다와 진수, 그리고 중정을 잃지 않은 차, 이것이면 족한 것이다. 이 외에 더 구할 것이 있다면 거들먹거리는 사람이나 행세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에서 선사의 제자인 허소치(許小痴)가 말하는 초의선사의 차생활을 들어보기로 하자.
‘바로 그 노장님(초의)이 내 평생을 그르치게 만들어 놓았다고나 할까요. 아주 젊은시절 내가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하고 담적하게 살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을미년(1835년)에 나는 대흥사에 가서 초의선사를 뵈었습니다. 선사가 거처하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두어 칸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지요. 수양버들은 처마를 스치고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려 뜰 복판에 파둔 상하 두 연못 속에 비치어 아롱졌습니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차 절구를 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선사의 자작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못을 파니 허공 중에 밝은 달이 담궈지고
간짓대를 이어 구름샘을 얻었네.
눈앞을 가리는 나뭇가지를 잘라내니
석양 하늘에 아름다운 산이 많구나.
이와 같은 시구들이 생각나고 있습니다. 선사의 그 청고하고 담아한 경지는 세속인들이 입으로 말 할 수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새벽이나 달 뜬 저녁이면 선사는 고요에 잠긴 채 시를 읊으면서 흥얼거렸습니다.
향불을 피워 향내가 은은히 퍼질 때에 차를 반쯤 마시다 문득 일어나 뜰을 거닐면서 스스로 취흥에 젖어들곤 했습니다. 정적에 잠긴 작은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새들과 상대하고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손님이 찾아올까봐 살며시 숨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초암에 있는 선사의 서가에는 서책들이 가득했었는데 그 모두가 다 연화와 패엽(貝葉)이었습니다. 상자 속에 가득찬 구슬 같은 두루마리는 법서와 명화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초암(일지암)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며 시를 읊고 경을 읽으니 참으로 적당한 곳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더구나 매일매일 선사와의 대화는 모두 물욕 밖의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비록 평범한 세속의 사람이지만 어찌 선사의 광채를 받아 그 빛에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빛을 받고서 어찌 세속의 티끌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노장님이 나를 그르치게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소치의 말처럼 물욕 밖에서 청고하고 담아하게 살다간 선사의 차생활은 한폭의 신선도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한생을 걸림없이 살다가신 선사의 차정신은 무엇인가. 선사는 그의 다론(茶論)에서 말씀 하시기를 ‘8덕(八德)을 겸비한 진수(眞水)를 얻어 진다(眞茶)와 어울려 체(體)와 신(神)을 규명하고 거칠고 더러운 것을 없애고 나면 대도(大道)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옛부터 성현님네가 즐겨 마시게 되었고 그 성품은 군자를 닮아 사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악하지 않은 차, 이 차는 묘한 근원을 가지고 있어 그 근원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라밀(婆 羅密)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바라밀이란 일체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으므로서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른것을 말한다. 차를 마시면서 신과 체를 규명하여 건과 영을 얻어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바라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현묘(현묘)한 경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차이다.
선사는 이와 같이 바라밀에 이르는 길에서 모든 법이 불이(不二)하니 선(禪)과 차(茶)도 불이하고 제법(諸法)이 일여(一如)하다고 했다. 그래서 선사는 차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이같은 선사의 차정신은 ‘모든 법이 둘이 아니니 선과 차도 한 경지니라(諸法不二禪茶一如)할수 있다.
이러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모든 면에 나타나 선과 차가 둘이 아니고 시(詩)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고, 차와 시가 둘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선의 여가에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며 글씨를 썼으니 세인들은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선사는 차를 마시다가 흥얼흥얼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세상사를 잃어버리기도 하며, 정적에 잠긴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기도 하며,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송림에 걸린 달을 보기도 하고, 향을 사루어 은은히 퍼질 때 차 한잔 달여놓고 무심히 앉아 있으니, 선사의 청고하고 담적한 차생활은 참으로 쉽고 편안하다.
이러한 선사의 사상은 다산(茶山)과 추사(秋史)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니 추사가 선사께 보낸글귀 가운데 이런 사상을 내포한 글이 많이 있다. 명선(茗禪)과 선탑다연(禪榻茶烟) 그리고 정좌 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 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가 그것이다. 이는 모두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경지를 천명한 것이다.
여기에 선사의 게송 한 구절을 소개한다.
대도(大道)는 지극히 깊고도 넓어
가 없는 바다와 같고
중생이 큰 은혜에 의지함은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는 것과 같네.
오묘한 이치는 밝고 역역한 것이라.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는 것.
어찌 감히 불근(不根)으로써
일찍이 해조음(海潮音)을 듣고서
황망히 군자의 방에 들어가
함께 진리를 말할 수 있으랴.
달빛도 차가운 눈 오는 밤에
고요히 쉬니 온갖 인연이 침노하네
그대는 아는가 무생(無生)의 이치를,
옛날이 곧 오늘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