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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성령과 설교
1. 성령과 성경말씀
설교학에서 설교에 대해서 자세히 배웠을 것이다. 여기서는 설교 사역에 성령께서 어떻게 도우시고 역사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겠다. 성령과 설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과 영감으로 씌어졌다. 그리고 성령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씌어진, 계시된 성경은 또 성령의 감동으로만 우리가 깨달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고,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 단회적으로 성령의 영감으로 계시된 이 말씀은 또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이해되고 깨닫게 되고 해석된다. 이것을 편의상 inspiration(영감)과 illumination(조명)으로 나눈다.
Reformed orthodox(객관주의) - Schleiermacher(주관주의) - Barth
▪ Calvin - 칼빈은 특별히 성령과 성경의 긴밀한 연결성을 강조했다. 성령의 감화와 함께 할 때만 성경말씀이 듣는 자와 읽는 자에게 효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항상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해야 한다. 이 말씀은 성령의 새로운 역사로 듣는 자에게 효력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성령과 성경 말씀은 항상 같이 간다. 그래서 복음의 external calling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effectual calling이 된다.
▪ Reformed Orthodox - 칼빈의 후예인 개혁정통주의는 칼빈의 이런 강조점이 온전한 의미에서 전수되지 못했다는 비판과 지적을 받고 있다. 개혁정통주의는 성경 말씀의 객관적인 완전성, 충족성(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을지라도 성경말씀 자체가 객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 너무 역점을 기울인 나머지, 객관적으로 완전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완전히 살아있는 말씀으로 주관화 되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그만큼 온전하게 강조하지 못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완성된 성경의 내용을 교리적,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 터득하고 계시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는 교리주의적인 경향에 치우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교리주의로 치우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적인 조명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주관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신앙생활과 기독인의 삶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초대 자유주의는 이 경건주의에서 파생된 사생아다. 한편 슈라이어마흐는 너무 객관에 치중하는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 진리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관점에서부터 기독교를 새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신앙의 방법론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객관적 진리의 축 위에서 건축했는데, 이제는 주관적 체험에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려고 했다.
▪ Karl Barth - 이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바르트는 너무 주관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주관주의를 배격한다.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 진리인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바르트 신학은 kerygmatic 신학이다. 그래서 정통주의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정통주의의 경직된 성경관, 그로 인해 교리주의로 흐르는 정통주의의 방법론을 따르지 않았다. 성령의 주관화하는 사역을 너무 강조하지 못해서 칼빈의 주장과 같은 긴밀한 역동성을 강조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칼빈의 강조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르트의 문제점은 말씀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시도 속에서 reformed Orthodox이 그토록 중시했던 말씀의 객관적인 완전성, 충족성을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neo-Orthodox라고 한다. “말씀을 어떤 이벤트, 명제적인 지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교리적으로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다 소유했다고 할 수 없다. 말씀의 계시는 우선적으로 proposition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격을 계시해 주신다. 말씀과 계시는 명제적이 아니라 personal하다.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실존적으로 역사함으로써 말씀하는 인격으로 다가 와서 만나주시고 실존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계시의 사건이다. 그 때 성경 말씀은 참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바르트는 강조했다. 말씀의 역동성을 새롭게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문제는 기존의 전통주의의 입장을 따라서 Scripture is the word임을 인정하나,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더 진정하고 은밀한 의미에서는, 이 성경이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우리에게 적용되고 살아있는 말씀으로 와 닿을 때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 Scripture becomes the word. 실제적 사건으로 하나님의 인격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줄 때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바르트의 성경관과 계시관의 문제점은, 바르트가 말씀의 역동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려는 의도는 인정할 수 있으나 그의 계시관과 성경관은 말씀의 객관적인 완전성과 충족성을 놓쳤다고 본다. 말씀이 실제로 적용되어서 효력이 있지 않아도 이 말씀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양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는 바탕 위에서(칼빈처럼), 이 말씀은 성령의 새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능력과 효력 있는, 실제를 변화시키는 말씀으로 와 닿는다는 것을 새롭게 강조해야 한다. 바르트의 신학을 교정하면서 다시 칼빈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항상 함께 해야 복음 사역에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2. 성령과 설교자
성령께서는 이 말씀이 효력 있는 말씀을 전파되게 하기 위해 성령의 도구로 설교자를 사용하신다. 말씀의 선포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성령의 부르심과 기름부름을 받은 사람만 감당할 수 있다. 성경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학위가 많아도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의 문제 중 하나는 성령의 부르심과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신학교라는 제도를 거쳐서 목사가 되고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calling을 받은 사람은 신학교에서 다듬어지고 훈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calling과 기름부임이 없는 사람이 목사가 되면 안 된다. 만약 이것이 없는 사람은 울부짖어야 한다. calling은 내적, 외적 부르심으로 나타난다. 로이드 존스는 자기에게 끊임없는 갈망이 있는 것으로 내적 부르심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지속적인 갈망. 그러나 이런 내적 소명이 아무리 강해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될 수 있다. 외적 calling은 교회에서 분명히 내가 설교자의 자실을 갖춘 사람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주위에서 인정해야 한다. 신학교에 오는 사람은 교회와 노회에서 분명한 자질을 갖춘 사람임을 점검해서 책임 있게 추천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르신 사람을 훈련을 통해서 은사를 개발하고 자질을 갖추게 하신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영적 분별, 통찰, 논리적 사고, 언변 등이다. 설교자가 꼭 유창할 필요는 없다. 말을 뛰어나게 잘하는 스펄젼, 크리소스톰 같은 설교자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말의 유창함이 오히려 설교사역의 거침돌과 약점이 될 수 있다. 설교의 능력은 말의 탁월함이 나 지혜, 웅변에 있지 않다. 말이 유창한 사람은 자신의 말의 탁월함에 의존하려는 심리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럼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오히려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말 잘하는 목사님 중에서 설교를 못하는 목사님도 많다. 너무 못해서도 안 되지만... 보통 정도면 된다. 수수하게. 어떤 목사님은 말을 보통 때는 조금 더듬는데, 설교와 기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는 분이 있다. 요즘 세상은 말에 질린 세상이다. 말이 번지르르한 사람이 많아서 오히려 거부감을 느낀다. 말도 잘 못하는데 그 실력으로 그래도 뭔가 열심히 전하려고 하니까 메시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자가 말도 약간 못해야 매력 있다”고 했다. 너무 말을 잘 하면 말쟁이처럼 가볍게 보일 위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 잘하는 능력을 주셨다면 그것을 온전히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하도록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바탕 위에서 사역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에게 은사를 주시고 계발하게 하시고 열매를 갖추게 하신다. 설교 사역을 잘 감당할 합당한 인격자로 우리를 빚어 가신다. 성령의 열매가 있는 설교자가 참 설교자이다. 전인적인 설교자가 되어야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참된 말씀으로 인식이 된다. 강단 밑의 삶이 그 설교와 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이다. 삶과 설교의 괴리 때문에 강단의 권위가 떨어진다. 에머슨이라는 사람은 특히 어떤 사람이 종교적, 윤리적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빙빙 떠올라서 그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설교자들이 설교를 잘 하려는 만큼 바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을 내 죽음으로 전하리라는 심정으로, 강대상 밑에서도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강단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국 교회가 산다. 은사와 열매는 꼭 있어야 한다. 은사만 있고 열매가 없으면 버림받은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열매를 보아 알리라고 했다. 열매가 있고 은사는 없을 수는 없다. 은사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어떤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매우 잘 해준다. 그러나 설교의 은사는 없다. 그러니 교인들을 괴롭히고 자신도 힘들다. 원래 사람이 좋아 평신도였으면 성령의 열매를 가득 맺을 텐데 목사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설교자로서의 열매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심각한 약점을 알기에 항상 자격지심, 피해의식에 잡혀 있어서 열매가 없다. 은사와 함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인격이 성숙할수록 설교가 성숙한다. 설교는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메시지다. 설교에서 우리의 전인격이 묻어나온다. 인격, 열정, 영성, 경건의 모습이 베어 나온다. 그래서 설교는 종합예술이다. 몇 편 반짝 설교로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김남준 목사는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깨뜨림 속에서 흘러나오는 진액과 같다.”고 했다. 멋진 말이다. 성령의 은혜로 자기를 부인하고 변화되어 나오는 진액이다. 양심이 전달되어야 한다. 양심이 양심을 찌른다. 어떤 목사님께 성도가 “목사님 설교 준비하는데 몇 시간 걸려요?”하고 묻자, “40년 걸렸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열매와 은사가 나타난다. 따라서 기름부음이 있어야 한다. 설교자로서의 성령충만을 간절히 사모하라.
3. 설교 작성하는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사
설교학에서는 “나의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조화 있게 강조되어야 한다. 설교를 작성하는 노력, 준비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성령의 은혜만 의지하는 초경건파도 문제가 있다. 성령의 은혜만 적적으로 의존해서 성령께서 강대상에서 말씀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목사들이 있다. 종교개혁 시에도 이런 목사들이 있었다. 루터는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 게으른 놈아”라는 메시지를 주신다고 했다. 철저히 준비하되, 성령을 의존하면서 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준비할 것은 마음이다. 기도를 깊이 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과 막힌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이 하나님의 감동, 성령의 조명을 받을 상태가 되도록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청결하심을 청결한 자에게 보이시고,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 마음이 온전히 성령의 감동을 받을 상태가 되면 메시지는 쉽게 주어진다. 도무지 갑갑했는데, 마음이 성령의 조명을 받을 준비가 되면 하늘이 열린다. 말씀이 확 열린다. 하늘에서 메시지가 주어진다. 은혜 받을 마음의 상태가 주어질 때까지 깊이 기도하고 회개하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것이 시간을 save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만든 설교는 효력이 없다.
설교 작성할 때도 계속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한 문장 한 문장 쓰라. 글이 그래서 계속 이어져야 한다. 박윤선 목사는 막히면 “하나님이여 막혔습니다!”하고 외치며 설교를 작성했다고 한다. 설교는 전달할 때 다시 감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설교학 교수 한 분은 “자기도 감동받지 못한 설교를 누가 감동받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설교 초기 몇 년 동안은 설교문을 완벽하게 쓰라. 그리고 가능한 원고에 의존하지 말고 완전히 소화해서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 올라가서 다시 그것을 끌어내서 뿜어내라. 전달도 매우 중요하다. 완전히 소화해서 마음으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문을 만들 때 구어체로 쓰라. 내가 실제로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서 쓰라. 스펄젼은 아주 말에 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 원문을 하지 않고 아웃라인만으로 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달란트에 따라서 적합하게 해야 한다.
본문을 충실하게 석의하고 연구하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본문의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지적으로만 연구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 때 제대로 알고 적용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말씀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청중의 수준에 맞게 할 수 있다. 성령을 의지하면 지혜를 주신다. 성령은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에 적중한 메지시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어떤 점에 적용할 것인가, 어떻게 눈높이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신다. 적용이 부족하면 효과적인 설교가 되지 못한다. 어떤 분은 본문 주석에 다른 책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치고 진리로 인도하실 때 꼭 직접적으로만 감화하시는 것은 아니다. 선생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들을 감동하신 그 진리로 우리도 감동하신다. 그들에게 주신 영감을 우리에게도 주신다. 다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이 오는 것이다. 우리는 영감을 공유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다른 사람을 감화하신 진리로 똑같이 나를 감화하는 것이다.
4. 선포하는 과정에서의 성령의 역사
우리가 설교를 준비하고 작성하는 과정만 아니라 전달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스펄젼이 설교한 메트로폴리탄 강단에는 설교단이 높이 세워졌다. 그는 그 계단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기도를 계속 하면서 올라갔다. 성령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우리가 설교 준비를 철저하게 의존하되, 완벽한 설교문을 의존하고 성령을 의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해서 불완전한 원고로 올라갈 때 더 성령을 의존해서 설교할 수 있기도 하다. 양면성이 있다. 완벽한 설교문을 만들고, 철저히 의존하고... 스펄젼은 “설교문을 잘 만들어라. 그리고 올라갈 때는 설교문을 불태우고 올라가라.”고 했다.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의존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선포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assist하는 은혜는, 먼저 설교자 안의 죄 성, 부패성을 제어하셔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어떤 것이 문제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설교하
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설교하려는 것. 자기의 탁월성,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쪼개고 강해하는가, 유창함과 학식을 드러내려는 부패성이 막 나타난다. 성령께서 충만히 역사하셔서 이런 부패성을 제어해 주셔야만 복음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설교할 때 조급하다. 성령보다 앞서가는, 성령이 할 일을 우리의 열심히 해치워버리려는 것이 있다. 나의 설교를 조금 무력화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부패성을 성령께서 제어하신다. 또 하나는 담대함을 주신다. 베드로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복음을 전한 것을 보라. 복음 전파에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장로나 교인들 눈치 보느라 움츠러들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대중 앞에 서기에 대중에 대한 공포가 있다. 우리 신학교 다닐 때 어떤 전도사는 처음 교회에서 설교 시작하면서 오후 예배 설교하는데 너무 긴장해서 설교 전에 먹은 것 다 토해서 창백한 얼굴로 섰다. 그런데 떠듬떠듬 기도하고 나서는 은혜를 받아서 유창하게 설교를 잘 했다. 인천 주안장로교회 나겸일 목사도 이런 대중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고 한다. 신경 안정제를 먹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먹어도 떨려서 준비한 원고를 읽다가 긴장해서 두 폐이지를 넘겨서 주저 앉아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설교를 잘 한다.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이 잘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다. 내 명성에 흠집나면 어떻게 하나 등 욕망과 함께 결부되어 우리 안에 작용한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신다. 성령이 충만케 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성령은 우리에게 건전한 긴장감을 갖게 하신다. 어느 정도의 긴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대개 우리는 내가 잘해야겠다는 긴장감이 있는데, 그 때문에 잘 못한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케 해서 주님을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긴장을 하게 하신다. 어떤 목사는 오후 예배 설교하는 중에 졸립더라고 하더라. 어떤 지방교회에서 오후 예배를 드렸는데, 피곤한데 장로님이 기도를 아주 오래했다고 한다. 목사가 깊은 잠에 빠졌다. 갑자기 일어나서 설교 안 한 걸 모르고 축도하고 끝내버렸다고 한다. ㅋㅋㅋ 설교를 많이 하면 긴장감이 없어진다. 경험이 많은 목사님들이 조심해야 한다. 초년병일 때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순수하게 긴장을 가지고 20년 전에 전했을 때보다 지금 못할 때가 많다.
설교자의 정신적, 영적 기능을 새롭게 해 주신다. 생각을 윤활하게, 기억력을 새롭게 하신다. 영적 통찰과 직관을 주신다. 메시지를 아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하신다. 로이드 존스는 logical fire와 같다고 했다. 이해되기 쉽게 쏙쏙 들어가게... 설교 작성 때 도저히 풀리지 않았던 것이 풀리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생각들이 나기도 한다. 성령은 말의 자유를 주신다. 혀를 풀어주시고 말이 잘 되게 하신다. 말의 표현이 적절하게 하신다. 육체에 힘을 주신다. 피곤할 때도 은혜로 말씀을 전하고 나면 새로운 힘이 생긴다. 날아갈 것 같은. 어떤 때는 그 여파가 며칠을 간다. 우리 설교자의 건강의 비결은 은혜스럽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뱀탕이나 개고기 먹어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목사님은 주일 설교를 하고 그 여파를 몰아서 저녁에 다음주일 설교를 준비한다고 하는데, 상당히 지혜롭다. 좋은 착상과 지혜가 그 때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령은 설교를 전달할 때 우리의 음성, 제스처, 표정을 자연스럽게 하신다. 자유함을 주셔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도 그것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하신다. 성령의 은혜가 없으면 뭔가 부자연스럽다. 설교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 은혜스러워야 한다. 우리의 음성이 너무 신경질적이거나 혈기에 차서도, 너무 경직되고 당황하고, 조급해도 안 된다. 그러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적 메시지인 자유를 우리의 모습으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 느긋한 자유함의 모습 속에서 복음의 핵심적인 의미를 온전히 보여주어야 한다. 태도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과 자유함을 내 메시지를 듣는 자가 감지할 수 있어야 은혜스러운 설교라고 했다. 은혜가 있으면 음성도 부담스럽지 않다. 설교하면서 음성을 바꾸지는 마라. 말을 굴리거나 말을 꼬거나 조용기 목사 흉내는 내지 말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기 음성으로 하라.
5. 회중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
성령은 설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말씀하는 인격으로 찾아오신다. 설교 시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시듯 온 회중에 성령의 은혜를 내리신다. 말씀하는 인격으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로 찾아오신다. 음침한 골짜기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세계가 활짝 열리게 하신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와 파워로 임하기에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영적 결박에서 자유케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말씀으로 찾아오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파워와 실재를 맛보게 하신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고 우리를 통치하심을 경험하고 삼위를 접하게 된다. 폴 틸리히 말처럼, 심연에서 영적인 만남이 있어서 근본적이고 전인적인 치료가 있을 수 있다. 과거에 항상 예배 시에는 전인적인 치유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개혁교회에서는 은혜의 가장 큰 수단이 말씀 전파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너무 말씀에 능력이 없고 변화와 치유가 없다. 로이드 존스는, “강단이 쇠약해지니 상담이 설교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고 했다. 설교사역을 능력으로 감당할 때 개인을 일일이 상담할 많은 문제가 설교에서 해결된다. 그 역할을 못하니 설교보다 상담이 더 유행한다. 내적 치유들... 그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상담의 역할이 있다. 근본적 치유와 역할은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근본적인 역할을 말씀이 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말씀이 강단과 교회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 개혁교회는 커다란 자기 모순에 빠져있다. 어떤 교회는 설교 순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교인들이 인내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 설교는 열이 받친다. 개혁교회가 아니다. 강단에 말씀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체험을 못했다. 그러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신학공부하고, 교회 역사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전파되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신학적 연구를 하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한다.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해야 한다. 삼위하나님을 접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실존이 변화되고 근본적 치유가 일어나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 안의 안식의 축복을 누리고... 교인들이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교인들이 세상에서 죄악에 꽁꽁 매여 왔다가 교회에서 전혀 결박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계속 묶인 채 돌아가는 악순환이 되니 어떻게 능력 있는 삶을 살수 있나? 현대교회가 성령충만의 은혜를 상실했는데, 그 상실의 일차적인 단계가 우리 강단의 메시지이다. 이 설교를 통해서 교회에 성령충만의 은혜가 회복된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성령충만한 설교자가 될 때 교회가 새롭게 된다. 설교에 야심을 가지라. 이런 특권과 능력이 약속되고 보장되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설교사역을 하게 해 주옵소서.” 맥없고 잔소리 같은 도덕적 내용이 얼마나 많이 전파되고 있나?
주일에 이런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맛보아 죄에서 자유하고 안식을 경험하고 나가면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설교의 은혜를 못 받고 나가면 발걸음이 무겁다. 반대로 은혜 받으면, 한 주간의 삶이 자유함을 누리고 복되다고들 얘기한다. 설교사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무력하고 형식적인 사역을 하려면 관두어야 한다. 강단이 얼마나 쇠약해졌나? 성령의 불이 임해야 한다. 지금 젊은 설교자들은 신학적 지식이 많다. 성경강해 잘 한다. 그 내용도 짜임새 있고 논리적, 기발한 아이디어나 유창함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능력이 부재하다. 뭔가 빠졌다. 과거 능력 있던 목사님들의 메시지를 보면 매우 단순하다. 강해설교도 모르고 아이디어, 재미도 없다. 그러나 능력 있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였다. 지금은 인간의 탁월함이 너무 과시된다. 그것이 성령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택일을 할 필요는 없다. 신학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 위에 성령의 불이 떨어지면 능력이 나타난다. 우리가 신학적 준비를 잘 갖추었으니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된다. 로이드 존스의 책이 문제가 있으나 그가 강조하는바, 그 능력을 끊임없이 추구하라는 도전을 깊이 새기라. 한 번의 극적 은혜체험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구하라. 간절한 심령과 기도와 함께 말씀사역 해야 한다. 무디나 피니의 설교도 매우 단순하다. 무디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 똑같은 설교를 해도 그 결과가 다르다고 했다. 에드워드의 일화, 그의 유명한 설교 ‘하나님의 진노하는 손 안에 든 죄인’이라는 설교를 했을 때 그는 원고를 단조로운 음성으로 읽었는데도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을 다 알 것이다.
6. 이상한 은혜
우리가 설교할 때 성령이 함께 하셔서 자유롭고 감화 있고 능력 있게 전하게 되는 것은 은혜이다. 어떤 경우에는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지 않고 맥없이 설교할 때에도 있다. 모든 설교자에게 간혹 나타나는 현상이다. 로이드 존스도 이점을 말한다. “어떤 주일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유롭게 은혜스러운 설교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교인들이 많이 오겠지’ 했는데, 안 오는 경우가 있다. 어떤 때에는 맥없이 설교를 했는데도, 그 다음주에는 더 많은 교인들이 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설교자의 로멘스이다” 나 홀로 버려둔 것처럼 힘들게 설교할 때가 있는데, 그것도 이상한 은혜이다. 왜 이상한가? 자유케 하는 은혜를 간혹 거두어 가시는 것도 은혜이다. 그것으로 설교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을 의존하지 않고 성령을 의존하게 하신다. 그것은 교인들에게도 유익이다. 미국에 아주 능력 있는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가 능력 있게 설교해도 전혀 변하지 않던 강퍅한 교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강퍅한 교인이 어느 날 능력 있는 설교자가 죽 쑤는 설교를 듣고 변화되었다. 그 설교자의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던 것이구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간혹 이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경우가 있다. 설교를 항상 잘해버린다? 그러면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고 겸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간혹 일어나야지, 거꾸로 되면 보따리 사야 한다.
7. 설교를 위한 성도의 기도와 성령의 역사
설교를 위해 설교자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에 선지자적 사역이 주어졌다. 목사는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은 기도로 선지자적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성도의 기도를 통해 목사는 설교를 한다. 목회자는 ‘성도의 기도’를 부탁하고 명령해야 한다. 신약에서는 전략적으로 직접적인 전도보다 전인적인 전도를 강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강단의 능력을 위해서는 평신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한다. 성도들이 기도를 해야 설교자들을 더 사랑하고 더 큰 은혜를 받게 된다. 또한 담임목회자는 부교역자들과 설교에 대해서 나누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설교 횟수가 너무나 많기에 강단의 권위가 떨어진다. 소총 백발 쏴 봐야 소용 있나, 대포를 날려야지! 설교를 너무 개인이 독점하면 교인들의 기대감이 사라진다.
8. 성령과 설교자의 인내
설교자의 가장 큰 은혜는 오래 참음의 은혜이다. 성령의 열매가 빨리 나타나지 않을 때 쉽게 지치기 쉽다. 열매가 금방 나타나기 원하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주 답답하다. 왜 맥없는 말을 주시는가? 불을 내려 주시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성령을 따르는 설교사역은 인내와 함께 가는 사역이다. 이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가? 너무 설교에 대해서 쉽게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소모품이다. ‘하나님의 무한히 낭비하는 사랑’을 설교자 안에서 증거하신다. 탕자를 오래 참으시며 낭비한 그 하나님의 사랑에 탕자가 돌아오듯, 설교자의 오랜 인내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박영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