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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마태복음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해마다 12월이 시작되기 무섭게 상가에서는 성탄의 캐럴들이 울려 퍼져 성탄의 분위기를 돋웁니다. 언제부턴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성탄의 주인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리 믿는다고 자부하는 성도들마저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성탄의 의미를 간과한 채 성탄을 무의미하게 보내버리고 맙니다. 성경구절 중에 성탄의 의미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성경구절이 어느 구절이겠습니까? 바로 마태복음 1: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고 하였습니다.
성탄절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시고, 독생자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찾아오신 날이 이 기쁘고 즐거운 날이 성탄절입니다.
첫째로,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대부분의 세상의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신처럼 되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신에게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성경을 읽고서 우리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뻔히 따먹을 줄 알면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나요?”하고 그 책임 전가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돌려버리십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무엇이든 자유의지를 따라 할 수 있는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신의 의지를 통제하고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네킹이나 로봇처럼 만드시지 않으시었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과 지혜를 따라 판단하여 하나님께 찬송하고 예배하며 경배하도록 최고의 영장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대표요,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인간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범죄 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렸습니다. 범죄 한 인간은 그들의 눈이 밝아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인류에게 불행이 다가온 것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서로 범죄의 행위를 전가했습니다. 그들은 아예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행한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 여인에게는 해산의 고통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시고, 남자에게는 저주받은 땅에서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원시복음이라고 불리는 창세기 3: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에게 다가와 감언이설로 결국 선악과를 따먹게 했던 그 악의 뿌리가 바로 사탄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심판받을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동생을 살인한 가인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다윗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이나 받고, 위문품을 가지고 보호시설을 찾아가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그런 선행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아닙니다. 성탄이란 소외되고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은혜, 더 큰 사랑,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맞아들이지 아니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탄은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에 축복이요, 최고의 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은 바로 ‘떡집’이란 뜻입니다. 곧 탄생하신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빌2:6).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포기와 헌신을 말합니다. 존귀와 영광 그리고 명예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다 포기하시고 우리와 같이 되신 것입니다. 스스로 자원하여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은 또한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풍성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영접할 때에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은 떠나시지 않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잠시 함께 하다가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거하십니다.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함께 하십니다. 병들고 실패했어도 함께 하십니다. 내가 고독한 중에 있어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함께 하십니다. 어디 있든지 거기 계십니다.“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둘째로, 우리게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시 104:24-35).
시편 103편과 104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라는 시구로 시작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찬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찬양하도록 권고하고서 스스로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릇된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도록 요청 받았을 때 게으름을 부리고, 입을 다문다면 우리는 어느 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로 알고 온 정성을 다해 찬양으로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신 그분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①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1절에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04편 1절부터 26절까지의 내용은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심히 광대하신 하나님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이란 크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주보다도 크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큰 사랑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온 세계를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성탄절에 이 세상을 찾아 오셨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더렵혀진 인간의 양심을 십자가의 피로 씻어 새로운 양심,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로 더렵혀진 우리를 깨끗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을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으로부터 성탄 카드 한 장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은총으로 성탄을 축하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얀 눈 위에 그려진 보혈의 은총의 그림이야말로 제게는 상상도 못했던 말씀이었거든요. 찬송가 200장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 “1절 : 주의피로 이룬 샘물 참 깊고 넓도다./ 구원하는 크신 능력 다 찬송할지라./
<후렴> 찬송하세 주의 보혈 그 샘에 지금 나아가/ 죄에 깊이 빠진 이 몸 그 피로 씻어 맑히네.// 2절 : 죄악세상 이김으로 거룩한 길가는/ 나의마음 성전삼고 주께서 계시네./ 3절 : 주예수를 깊이 아는 놀라운 그 은혜/ 하늘나라 즐거움이 매일 새롭도다.// 할렐루야!
② 또한 그분은 온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04편 27-29절 말씀에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27-29절).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보살핌에 의존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위해 때를 정해 두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온 세상 만물들을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자상하신 경영자입니다. 만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운 일과 당황하는 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새 한 마리도 정확한 계획을 가지고 돌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찬송가 79장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 “1절 :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③ 성탄절에 오신 그분은 성령으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04편 30절에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30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하나님, 나의 주인으로 믿는 사람에겐 성령 하나님이 그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십니다. 회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회개하면 용서를 체험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절망과 좌절 속에 살던 마음을 희망과 용기 가득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찬송가 493장에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 “1절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그렇습니다.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기 쉬운 우리 마음을 고쳐주시고, 새롭게 창조해 주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곧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 기쁜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온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령으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입니다. 그 주님을 날마다 나의 구세주, 나의 주인,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므로 승리하는 동산의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탄절이 기다려지는 것은 교회에 와서 선물이나 많이 받고, 따뜻한 온풍기 밑에서 맛있는 과일과 생크림 케이크를 잘라 먹으면서 즐기며, 귀여운 어린이들의 성탄찬송, 성극, 재롱을 보는 재미에 빠져보는 그런 것입니까? 살다보면 그런 재미도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는 임마누엘로 찾아오신 그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 그분 하나님께 동방의 박사들처럼 예물을 드리며,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만든 컴퓨터로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하고 검색해 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컴퓨터보다 인간의 두뇌는 대단한 기억창고입니다. 포도 열매 절반 크기의 뇌 세포 덩어리 하나가 75년 동안 쉬지 않고 1초당 800가지의 정보를 저장합니다. 뇌가 보관하는 정보는 100억에서 1,000억 가지에 이른다.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라 해도 단지 몇 백만 가지 아이템만을 저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뇌는 받아들인 정보들을 모두 보존한다. 우리가 그 모든 정보를 의식 속에 모두 다 떠올려 보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두뇌 속에 존재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두뇌 능력과 동등한 수준을 가진 컴퓨터를 만드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컴퓨터라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만한 크기가 될 테고, 작동시키는 데만 해도 10억 와트의 전력이 필요하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뇌가 가진 능력 중에서 겨우 2퍼센트만을 일생 동안 사용할 뿐이다. 두뇌가 가진 이 놀라운 능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음악적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휘 때마다 그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그는 250가지 교향곡과 100개의 오페라 악보에 나오는 모든 악기 파트를 다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벌거숭이로 왔지만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래도 우리 인간은 불평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온 세상 그 무엇보다 크기 때문이며,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보다 귀하고 귀하신 그분을 소유하면 우리는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엇 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까? 요한복음 10:10절에 보면 주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읽고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혜빈이는 백혈병으로 투병하다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런데 혜빈이가 선교 저금통을 여섯 개나 남기고 갔습니다. 혜빈이는 병상에서 늘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에게 보낼 선교 헌금을 모았습니다.
‘어린이 성경 마을’에서 지구본 모양의 선교 저금통을 어린이들에게 나눠 주고 헌금을 모으기 시작한 이후에 많은 어린이들이 기쁨으로 선교 헌금을 모아서 드렸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부모님에게서 헌금을 받아 오는 어린이도 있었습니다. 선교 저금통을 가득 채워서 오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혜빈이는 선교 저금통을 여섯 개나 가득 채웠습니다. 혜빈이는 문병 온 친지나 이웃들이 주는 용돈을 가지고 선교 헌금을 모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혜빈이는 선교 저금통을 채우면서 이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예수님, 제가 드리는 이 선교 헌금이 예수님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쓰여 지게 해 주세요.”
혜빈이가 하늘나라에 간 후에 선교 저금통이 ‘어린이 성경 마을’에 전달되었습니다. 선교 헌금 저금통이 담겨 있던 가방을 받아든 순간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선교 헌금보다도 이 헌금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 헌금에는 혜빈이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순수한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헌금은 혜빈이를 오랫동안 믿음으로 키우시다가 태국으로 선교를 떠나신 서양숙 선교사님 가정에 전달될 예정이랍니다. 메마른 대지위에 단비처럼 느껴지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 무슨 저금통을 마련하고 사십니까?
프랭크 크레인은 이런 시를 써서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이분이 쓴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선교 저금통에 감격하면서/ 가장 무서운 죄는/ 두려움// 가장 좋은 날은/ 바로 오늘// 가장 무서운 사기꾼은/ 자기를 속이는 자// 가장 큰 실수는/ 포기해 버리는 것// 가장 치명적인 타락은/ 남을 미워하는 것// 가장 어리석은 일은/ 남의 결점만 찾아내는 것// 가장 심각한 파산은/ 의욕을 상실한 채 텅 빈 영혼//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실행하는 사람//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는/ 기쁨과 온유함// 가장 나쁜 감정은/ 질투// 그러나 가장 좋은 선물은/ 용서// 그렇습니다. 용서! 우리가 지은 죄, 먹보다도 더 검은 죄악을 용서하시고, 흰눈보다 더 희게 하시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러 오셨습니다. 용서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구원과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감사할 조건들이 제목들이 많이 있겠지만 영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용서와 십자가의 사랑을 주신 주님! 구원과 생명을 주신 주님께 할렐루야! 찬양을 드려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몸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간주> /주님이 당하신 고-난/ <간주> 이 죄인을 위함이니/<간주> 범죄 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간주> / 나 무엇으로서 그 은혜 보답-하리까 무한하신 주-의 사랑 고맙고도- 크도다/ <간주> 내 평생 사는- 동안은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평생 살리라.// 할렐루야! 아멘!
어떤 나라 도시 한복판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종탑에 종은 있었으나 종을 치는 줄이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종은 성탄절 날 아기 예수께 가장 값진 선물을 드릴 때 저절로 울린다는 것입니다. 많은 부자와 왕과 귀족들은 종소리를 듣기 위해 값진 선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해 성탄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장 귀한 보석을, 어떤 사람은 값진 금화를,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장 아끼는 책을, 왕은 최고의 자존심인 자신의 왕관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종탑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전해 내려오는 종소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가대가 마지막 찬송을 부르려 할 때 여태까지 침묵했던 종이 은은하게 소리를 발했습니다.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한 것은 눈길에 쓰러진 사람을 구해주느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형을 대신해 동생이 드린 은전 한 닢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왠지 성탄절이 점점 시들해 지는 것 같습니다. 왜 일까요? 주님의 사랑이 뜨겁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요? 찬란한 태양이 비추면 밤새 얼었던 눈과 얼음들이 녹아지듯이 주님의 사랑의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얼어붙었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종이 울려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탄절에 주님은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저와 여러분들의 맘속에 찾아오십니다. 그분께 찬양과 예물을 드려 큰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 성탄절에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찾아와주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찾아오신 주님께 내가 먼저 용서하고, 찬양과 예물을 주님께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