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부여된 권리 또는 정의의 체계를 뜻하는 철학 용어.
사회의 규율이나 실정법이 아니라 자연에서 유래한다. 이 개념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자연법의 의미와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의견 차이가 있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정의'와 '법의 정의'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의 정의는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효력을 갖고서 존재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실정법에 불만이 있으면 자연법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이 남성에게, 노예가 시민에게, 이방인이 그리스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등 자연법의 실례를 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관찰에서 끌어냈다.
반면 스토아 학파가 생각한 자연법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올바른 이성' 또는 로고스에 따르는 완전히 평등한 법이었다. 그래서 키케로도 '진정한 법은 모든 인간 안에 편재한 영원불멸의 올바른 이성'이라고 했다. 로마의 율법가들은 자연법 개념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많이 했는데, 이 점은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교도의 '가슴에 씌어진 법'(로마 2:14~15)이라고 한 말에 잘 드러나 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 바울로의 말을 받아들여, 인간이 타락하여 죄와 실정법에 얽매이기 전까지는 자연법에 따라 자유롭게 살았다는 생각을 펼쳤다.
11세기에 그라티아누스는 단순히 자연법을 신법, 즉 〈신약성서〉·〈구약성서〉에서 계시된 법과 특히 황금률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과 동일시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법에 관해 체계적인 사상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적 이성의 영원한 법은 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가 아니더라도 이미 계시를 통해서나 우리의 이성작용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법은 '영원한 법이 이성적인 피조물에 관여한 것'이므로, 자신의 선한 면을 보존하고 '자연이 모든 동물에게 가르쳐준 욕구'를 채우며 신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등 인간이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는 교훈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의 법은 자연법의 특수한 응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 던스 스코터스, 오컴의 윌리엄,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등 다른 스콜라 철학자들은 법의 원천으로 신의 이성 대신 신의 의지를 강조했다. 이러한 '주의주의'(主意主義)는 종교개혁을 반대한 가톨릭 법리학에 영향을 끼쳤으나, 훗날 토마스주의가 다시 부활·강화되어 레오 13세 이후 교황청의 사회강론에서 자연권을 설명하는 중요한 철학적 근거가 되었다.
휘고 그로티우스가 자연법의 권위를 호소한 것은 법학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동료인 칼뱅주의자 요하네스 알투시우스(1557~1638)가 예정설을 근거로 모든 인간을 구속하는 법이론을 정립하려 한 데 비해 그로티우스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신이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연법은 효력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몇 년 뒤 토머스 홉스는 성서의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누리던 '순결한 상태'에서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닌 인간들 각자가 서로에 대해 외로운 전쟁을 벌이던 야만적 '자연상태'에서 인간사회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홉스는
자연권(jus naturale)을 '인간이 자기 본성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하면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각자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라고 인식한 뒤, 자연법(lex naturalis)을 '인간이 자기 생명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이성을 통해 발견하는 일반규범의 가르침'이라고 정의했다. 그 다음에 홉스는 평화와 사회를 확립할 수 있는 기본 규범들을 열거했다. 그로티우스와 홉스 두 사람은 함께 '자연법학파'를 주도했다. 이들은 계몽주의 사조에 따라 사회계약 이전의 자연상태라는 가공상태로부터 합리적인 추론을 거쳐 완전한 법체계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영국의 존 로크는 홉스의 비관주의와는 달리 자연상태를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 이미 자연법을 준수하고 있는 사회상태로 묘사했다. 프랑스에서는 몽테스키외가 자연법이 사회보다 앞서며 종교와 국가의 법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고, 장 자크 루소는 홀로 덕을 지키면서 자기보존과 동정(타인을 해치는 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는 것)이라는 '이성에 앞선' 두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원시인을 가정했다.
미국의 '독립선언'은 평등권과 그밖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자명한' 것으로 열거하기에 앞서 자연법에 대해 아주 간략히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자유권·소유권·생존권·저항권 등을 '절대적 자연권'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은 자연 그 자체를 인식하려는 시도는 포기했지만, 실천이성 또는 도덕이성이 순수형식적인 골격을 갖는 타당한 권리체계를 도출해낼 수 있다고 여겼다. 칸트의 이러한 형식주의는 20세기에 이르러, 자연주의적 법리학이 부활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에 국제정치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인권선언은 자연법에 관한 명쾌한 이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경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노력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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