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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화)
모든 교회에는 리더쉽이 있다. 지도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리더쉽은 교회의 최악의 악몽이 될 수도 최상의 자산이 될 수 도 있다.
장로, 목자, 감독자들
“장로”(prebuteros) -“성숙한 사람” 단순히 형제들이며 더 나이든 사람들. 인격과 관련됨.
“감독자” - 교회 사무를 관장하던 그들의 기능을 묘사하는 것
“목자” - 영적 약탈자로부터 양떼들을 지도하고 보호하는 책임이 있음을 보여줌.
이들의 주된 책임은 위기의 때에 신자의 공동체를 관리하는 것
** 리더쉽에서의 여성의 역할**
신약은 사역과 감독을 구별하고 있는 것 같다.
초대교회의 여성들은 각기 받은 성령의 은사에 따라 자유롭게 기능을 발휘했으나 교회의 감독은 형제들이 하고 여성들은 하지 않았다.
공동 감독의 원칙
신약에 나타난 감독의 모습- 복수(plural), 토착적(indigenous). 일세기에는 단일 지도자만 있는 교회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영속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의 홀로 머리되심을 보호.
** 구약성서의 단일 지도자들의 존재**
1. 한사람의 단일 지도자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2. 감독에 대한 모범
역할인가 지위인가?
장로들은 한 교회가 생기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드러난다. 성령이 장로들을 먼저 선택하시고, 후에 사도적 사역자들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소명을 인정했다. 감독의 신약적 개념은 “역할”이지 “직위”가 아니다. 진정한 영적 권위는 영적 삶에 기초한다. 예수는 당대의 권위적인 계층구조를 거부했다. 영적 권위란 지위에서가 아니라 수건과 대야에서 발견하는 것이다.(마 23:8-12)
도덕적 특징
신약의 장로들:
종된 지도자, 영성과 믿음이 증명된 사람들
양무리에게 본을 보이는 자, 돕는 자, 아버지처럼 감독
진리를 권면하는 자, 양육자, 영적 감독자, 하나님 왕국을 추구하는 자
자격-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옴
훈련- 실천적이고 기능적(교회 생활 자체의 환경에서 계발 되었기 때문)
일세기 장로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대가를 받지 않고 그들에게 봉사했다.
양무리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역할 (prostemi: 사람들 위에서 다스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람들 앞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뜻)
성경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일 뿐. 하나님이 어떤 은사를 부여하여 선택하신 지체들.
현대 성직제도
오늘날의 “목사”:
영적 기업을 경영하는 영적CEO
“안수받은 성직자”란 개념은 성직 계급적 기준을 반영. 초대교회의 정신과 대립되는 것임. 예수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깊게 표현하는 성숙하고, 관계적이고, 기능을 발휘하는 교회의 생장을 방해.
**사역에 대한 신약의 원칙**
모든 신도들의 제사장직과 성령의 은사에 기초를 둠. 다양한 종류의 사역 사이에 기능적인 구별은 있지만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계층적 구분은 없었다.
교회의 감독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현대 개신교의 목사제도는 단일 지도자에게 과도하게 의존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을 청중으로 위축되게 한 종교적인 인공적 제도이다. 성직은 인간의 문화와 역사의 결과물이지 결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님.
교회의 리더쉽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라는 하나의 기본적인 논점으로 귀착된다.
누가 머리가 될 것인가(예수 그리스도 혹은 인간?)
주권을 가진 머리되신 주님의 유일한 지위를 교회 안에 회복하고 지키도록 하자.
(윤정화)
현대의 성직조직과는 달리 일세기의 장로들은 교회에서 가장 높은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신약에서는 리더쉽의 문제가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챤 모임에서와 달리 작은 비중을 차지한다. 바울 서신의 주요 요지는 온 교회가 양떼들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위계적, 지위적, 영적 권위
권위에 대한 개념의 차이
*이방인의 개념: 고정되고, 명령계통을 따르는 위계질서를 통해 성도들 위에 군림
*유대인들의 개념: 외부로부터 주어진 명령, 관직, 직분, 지위, 직함, 의례 들과 연결시킴
*신약의 개념: 종으로 섬기는 리더쉽 모델에 근거, 영적 기능과 성숙에 결부시킴.
겸손, 친근성, 섬김, 거룩한 본보기 등을 특징으로하는 귀중한 자원.
빌려온 리더쉽 패러다임
현대 교회의 리더쉽 모델:
법인 실업계에서 끌어온 것, 경영적 패러다임, 능률위주의 조직주의에 사로잡혀있음.
초대 교회의 리더쉽: 기능적, 관계적, 집합적, 교회를 조직이 아닌 유기체로 봄.
권위를 재고하라
리더쉽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개념:
사회학적 구조물로 인식, “관직을 차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명백한 권위가 생겼다고 생각하게됨.
신약의 리더쉽 개념: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배타적 지위. 훌륭한 리더쉽은 결코 권위적이지 않음. 그리스도의 의지를 표현할 때에만 권위를 행사. 과두정치의 독재자나 절대 독재자나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다수결의 법칙)을 따르지 않음.
하나님의 합의 법칙
교회의 지도와 의사결정에 관한 신약적 방식:
전체모임의 합의에 의함. 교회가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의 의도와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초대 교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장로들의 역할은 어떤 사안에 대해 교회가 합일된 의견에 이르도록 돕는 것.
합의의 의미
합의란 만장 일치를 의미. 교회가 합의로 움직이게 될 때, 결정은 충분한 동의가 이뤄질 때까지 유보된다. 이러한 과정은 모든 지체들이 주어진 문제에 대한 주님의 의도에 다다르는데 똑같이 참여하며 책임을 수용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빠르고 쉬운 결정들보다 연합, 사랑, 상호이해, 참여 등이 그리스도인 조직에서는 더 중요하다는 믿음이 필요함.
우리 앞에 놓인 도전
초대 교회에서는 각 지체들이 은사의 활용을 통해 성령으로부터 인도하심을 받았다. 바울은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은 자신들이 받은 특별한 통찰(insights)을 알릴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바울의 공동체 이상)
초대교회의 리더쉽은 각 지체들이 자신들의 은사를 사용하도록 격려, 신자들간에 영적인 결속을 이루도록 도움, 교회 안에 공동체 의식, 단결, 연합 등을 조성.
신약은 리더쉽이 온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보여준다. 지도와 의사결정은 형제들과 자매들의 합의로 이루어진다. 감독의 역할을 경험 많은 형제들이 수행한다.
성경적 리더쉽은 신약에 열거된 많은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는 예속적인 성직제도 아래에서 보다는 서로 복종하는 환경에서 길러진다.
(권순재)
하나님의 지고한 의도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은 그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우주에 만유를 충만하게 하시고 만유가 그분 안에서 통일되게 의도하셨다는 것이다. 이 영원한 목적을 표현하고 실현하시기 위한 그릇으로 교회를 택하셨다. 따라서 교회의 중심 목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도를 실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이 땅에 알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 땅에서 수행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처소로 완성되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바로 그 현존을 구현한다. 한 마디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체적 인간으로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로 추구하시는 건물은 각각의 살아있는 돌이 함께 적절히 맞춰지고 다른 살아있는 돌들과 잘 접합되어 있을 때만 형성이 된다. 이것이 교회이다. 교회는 단지 남자들과 여자들의 삶속에서, 그 자신을 집합적으로 재생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Hal Miller는 개인주의와 독립은 몸 된 생활(Body life)의 적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의 개인적 특성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각 지체들의 독특한 은사들과 기질은 환영하면서 우리 자신을 공동체 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로 보려는 개인주의와 동료 형제들과 무관하게 살고 행동하려는 독립은 거부해야 한다. 신자들과 밀접하고 상호의존적인 교제 안에서 살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공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알맞게 뼈대를 갖춘 성전
제도적 교회는 우리를 서로에게서 보호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리가 동료 형제들과 친밀한 접촉을 하게 하여 우리의 자아를 제거하도록 계획되었다. 초대교회는 관계가 깊이 맺어져 있어 신자들은 끊임없이 함께 엮어진다. 한 몸으로서 살기를 추구할 때 서로 관계 안에서 자주 십자가에 부닥치게 된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여서, 서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러한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의 도구이고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계획되었다. 관계 안에서 십자가에 부닥칠 때, 우리 자신에 대해 죽으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단체적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놀라운 과정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목적의 중심적 특징은 그리스도를 단체적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생활환경이다.
영광스러운 신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한 신부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이 중심 주제로 나와 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하와(Eve)를 아담에게 그의 완벽한 배필이 되도록 주셨는데, 그리스도의 신부를 예시한다. 계시록에서 이 신부는 하나의 영광스러운 도성으로 발전하였다. 이 신부는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위해 취하고자 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신부는 결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가 될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필이다. 처음부터 그분 안에(in) 있었고, 그분에게서 나와서(out of) 시공(space-time)안으로 들어왔다. 미래에 그분 안으로(into) 돌아갈 것이다. 교회는 그의 주님과 분리될 수 없다. 도성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그분의 주권적 통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적은 ‘자신을 예비하여’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해 돌아오시게 하는 것이다.
황금 촛대
계시록에서 각 교회는 순금 촛대로서 묘사된다. 순금 촛대는, 1) 일곱 가지가 있어 중간의 줄기에서 양측으로 세 가지씩 붙어있다. 이것은 하나이면서 다수임을 말한다./ 그 일곱 가지 하나마다 꽃 세 개와 살구꽃 모양의 잔 세 개가 있다. 살구꽃 모양의 잔에서 나온 꽃들은 죽음에서 나오는 생명을 나타낸다./ 삼 이라는 숫자는 부활을 상징화한 것이다./ 촛대는 삼위 하나님 중 모습을 지니신 유일한 인격체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 촛대에는 기름과 빛이 있는데 기름은 성령을, 빛은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의 그림자이다. 3) 금은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촛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함으로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초상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그를 알리는 것이다. 교회는 이 신성한 증거를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훈련의 망치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형성되어져야 한다. 진정한 몸의 생활(Body life)의 열매는 단체적인 질그릇(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표현된 것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단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은 교회를 접촉할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
교회의 목적의 다른 측면은 “하나님의 나라”에 요약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좌에 모실 때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의 사역의 중심은 주로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하는데 있었다. 교회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단체적 표현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촉진하며 사탄의 역사를 멸하도록 부름 받았다. 간단히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 안에서 구체화된다. 그리고 교회는 이 땅에서 그분의 표현을 위한 도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날 이 땅에 실제로 눈에 보이게 임할 것이지만 현재는 신비에 싸여 영적으로 현존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능을 행사하고 그의 임재를 나타내실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미래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천상적이면서도 지상적이다. 그리고 숨겨져 있으면서 드러나 있다. 미래적이면서 현재적이다. 그 나라의 대리자로서, 교회는 눈에 보이는 대항문화(countercultural)의 공동체로서 이 땅에서 운행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행사하고 그의 형상을 지닌 새로운 사회적 실재이다. 그 나라의 목표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가 통일되게 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한 우리 주님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영원한 목적“이란 바울의 장엄한 비전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포도주와 가죽부대 사이의 긴장
초대교회의 모든 실행은 그의 영원한 목적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확립하셨다.
그러므로, 포도주(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할 정도로 가죽부대(교회 실행)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는 말자. 올바른 가죽부대를 가져도 포도주가 없다면 하나님의 지고한 의도를 놓치는 것이다. 지나친 가죽부대의 강조는 죽은 정통주의, 성경에 대한 무미건조한 학자적 접근의 특징인 교회를 생산한다. 하나님의 영이 제도화된 시스템에 포로가 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항상 성령과 생명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교회는 “신령한” 집으로서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살아있는” 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동시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은 가죽부대를 무시할 정도로까지 포도주를 강조하지도 말자. 가죽부대가 무시되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은 어떤 구체적인 표현도 따르지 않는 추상적 가르침에 불과하게 된다.
현안 논제의 재정리
그러면 교회의 목적은 예수의 증거를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또 인간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영적인 훈련장이다. 또 모든 지체가 주님의 진정한 성전을 구성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변화되고, 변형되어 함께 맞추어져가는 성스러운 건물이다.
교회는 주님의 의도를 알아내고 표현하는 생활공간이다. 장차 임할 나라에 속한 식민지의 전진기지이다. 하나님의 걸작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혼녀이다. 새로운 인류이다. 장차 임할 나라의 생활양식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연스러운 생활환경이다. 신랑과 그의 신부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면하는 영적인 환경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충만함에 대한 살아있는 증인이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가 함께 모일 때마다, 교회를 인도하고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원리는 단순히-그리스도이시다.
(최준애)
생명 - 하나됨의 유일한 기초
교회는 예수님이 받으신 일정 거주지역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같은 교회의 일부이다. 교회는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에 동의하지만 그 실행에 있어서는 이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조건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혹은 뺀다. 상당수의 현대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을 위한 성경적 기초를 넘어섰거나 아니면 제한했다. 성경은 교리적인 차이 때문에 다른 성도로부터 나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선 교리적인 이유로 인한 분열을 금하신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속해있다면, 그는 교회의 일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교제 가운데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를 교제에 받아들이기 전에 그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교회가 아니라 이단적인 당파가 된다.
당파심의 문제
당파는 분열 또는 분리를 뜻한다. 그것은 좀 더 큰 전체로부터 그들 자신의 교의를 따르기 위해 분리해 나온 사람들의 단체를 의미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배제시킬 때 교제에 관한 성경적 기초가 허물어지며, 그들은 당파가 된다. 요한 계시록의 언어로 말하면, 그런 모임들에는 촛대가 없다. 이 말은 이단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인 척 세운 그 단체에는 영적인 실재가 부족함을 의미한다. 믿는 이로서 우리들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하신 교회이다. 그것은 지역적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범위를 좁혔으며, 다른 이들은 그것을 넘어섰다. 이들은 모든 사람을 포함시키려는 의도에서 불신자들과도 하나됨을 추구해 왔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됨은 성경에서는 낯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사람들만이 그의 몸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만이 그분의 교회를 이룬다.
조직을 통한 일치
당파심의 문제를 겪으면서, 조직적인 일치를 해결책으로 내 놓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에큐메니칼(교회일치)운동은 상위의 문제들에 관해서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다. 다양한 교회의 목사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모이며, 목사들의 협회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몸의 단편(성직자들)만을 건드릴 뿐이며 당파심이란 문제의 뿌리에 닿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인이 신학적인 문제, 종교적 방식, 예배하는 방법, 혹은 영적인 습관 때문에 서로에게서 분리를 계속하는 한, 그들은 여전히 당파적인 입장에서 모이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와 신조가 일치하는 사람들과만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고 교리, 성격, 예배 방식, 영적인 습관등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어려워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안락한 지대를 어느 정도까지는 기꺼이 떠나려고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이 우리의 타협을 눈감아주시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좋은 것(good)이 가장 좋은 것(best)의 적이 되었다. 하나님의 온전한 하나됨 대한 요청에는 귀를 막는 동시에 부분적인 일치에 만족해 버렸다.
교리를 통한 일치
교리의 일치는 어떤 사람들이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는 해결책으로 내놓은 또 다른 생각이다. 이것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과 다른 전통을 지닌 형제들을 심히 수상쩍게 여기며 살아간다. 영적인 분별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장 절박한 필요들 중의 하나라고 믿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적이지 못하며 비판적인 눈으로 형제들을 유심히 조사하는 것은 매우 비기독교적이다. 성경은 교만하며, 흠을 잡려는 영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한다. 이 영이 바로 형제들을 송사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받으셨다면, 당신에게 빛이 아무리 부족하다 해도 나 또한 당신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당신도 동일한 기초에서 나를 받아야만 한다.
유기적 조직을 통한 일치
성경은 조직적이거나 교리적인 일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유기체적인 일치만을 알 뿐이다. 교제와 하나됨에 관련된 중대한 문제는 내적인 생명의 문제이다. 우리의 교제에 마땅한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받으셨는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내주하는가?
속지 말라
오늘날은 교회의 하나됨의 실제적 표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찢어서 서로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뿔뿔이 흩어진 집단, 관계 없는 회중들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우리 주님을 슬프게 한다.
우리가 자신들의 당파적인 구별(침례교파, 오순절파, 은사주의, 칼빈주의 등)을 주저함 없이 내세울때,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인들의 이러한 태도를 호되게 책망했던 사실을 편리하게 잊는다. 대다수의 소위 비교파적(non-denominational), 교파를 넘어선(post-denominational), 교파 상호간(inter-donominational)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현대의 교파적 체계는 신약 성경과는 모순된다.
적의 계략
사탄의 주 계략은 형제들의 교제를 파괴하는 것에 맞추어져있다. 사탄은 이러한 분열을 통해 교회를 연약함 가운데 묶어 둔다. 지난 오백년 동안, 적은 분열을 통해 주의 증거를 파괴하려고 전면적으로 공격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증거가 우리의 하나됨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깨어있어야 한다. 분열을 막는 유일한 안전장치는 우리 안에 견고히 뿌리 박고 있는 타고난 모든 것(우리의 의견, 좋은 것, 싫은 것 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전체의 요약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몸이 그렇듯이 포괄적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받아야만 한다. 영적인 일치는 조직적이지도 않고 교리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유기체적이다. 몸의 범위에 못 미치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모임들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교회는 전 세계를 통해 지역적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일치된 한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단어를 종족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자.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교파, 상명하달식 권위의 위계 구조, 프로그램 위주의 기관, 성직자가 이끄는 기업체 등과 “교회”를 동일시 하게 된다.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나누이지 못하게 하자.
(이재완)
지역의 의미
신약에서 교회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경우에 교회는 그 도시와 동일시 되었다.신약에서 교회들 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곳에서 그것은 특정한 지방 혹은 지역이 존재하는 다양한 교회들을 언급했다. 성경에 교회의 경계는 도시이다. 요한계시록으로부터 예수님께서는 각 도시에 오로지 한 개의 교회만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있다.(계1:11-13, 20) 성경은 신약 시대에는 각 도시마다 단지 한 개의 교회가 존재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우리의 하나됨의 실제적인 표현
지역에 따른 경계는 몸의 하나됨을 실제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믿는 자들이 수많은 논쟁들을 근거로 서로 분리된 교회들 로 나누어져 있다.
어떤 한 주어진 지역에 수 없이 많은 분리된 교회들이 있다면, 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예수그리스도가 나뉘어졌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려주는 것 밖에 아니다.
반면에, 어떤 믿는 이들의 모임이 지리적인 이유 이외 다른 어떤 것으로도 분열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달리 말해서, 그들이 서로 만날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함께 모이기 불가능할 정도로 멀리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믿는 자들은 사랑 안에 서로에게 헌신 되어있다. 그러한 만큼, 신학이나,영적지도자, 예배 방식 ,기도방식,특별한 사역, 인종, 사회경제적 지위, 기타 어떤 이유로도 그들은 분리되기를 거절한다.
그들이 나뉘어져야 한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다른 도시로 이주하기 때문이다.그러한 사람들을통해 세상에 전달되는 꾸밈없는 증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정말 하나 라는 것이다.
율법주의의 위험
지역을 논하는 것은 위험스럽다. 이 진리를 알게된 몇몇 사람들은 거주지를 정확하게 구체화 하는데 불필요하게 전문적이거나 (그 정의에 대해) 율법적이 되어 버렸다.
기독교 인구의 거대한 규모와 다양성을 생각해본다면, 어느 정도 상황화가 필요하다.
워치만 니는
<우리는 사람들이 행정단위로 간주하는 그것을 하나의 교회단위로 봐야 할 것이다. 도시라는 용어로 기술되지 않을 시골지역 역시 단위지역들로 간주될 것이다. 이 땅에 계셨던 주님에 대해, 주께서 '도시들과 촌락마다' 들어가셨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이로부터 우리는 마을들 뿐 아니라촌 지역들도 분리된 단위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장소도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하나의 단위로서 자격이 있다. 그 교회는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 모이는 곳이며, 독립적인 이름이 있는 곳이며, 가장 작은 정치 단위이다. 그러한 곳이 바로 성경적인 도시이며 지역 교회의 경계이다.>
니의 관점은 타당성이 있다. 현대의 많은 도시들의 크기를 생각해 본다면, 지역사회라고 불리는 지리적인 단위는 성경적인 관점의 도시와 더 잘 부합한다.
교회 안에의 당파심
신약 교회는 한 지역에 하나의 교회가 있는 예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한 하나의 도시에 자신들이 지역 교회라고 권리를 주장하는 수백 개의 다른 당파들이 있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현재의 무질서는 목사/평신도 계급 간에 구별이 전개되면서 시작되었다.이 구별은 3세기 후반즈음, 교회 안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무제한 계속될 수 있는 교회 조직을 수두룩하게 낳았고, 이것이 후에 각 세대마다 수많은 당파들을 재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당파들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대신, 자신들이 선호하는 인도자(혹은 원리)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평신도 Bob이 목사과 되는 과정의 예)
하나됨을 위한 성령의 탄원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됨이 실제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가장 마음을 쏟고 계신다. 몸의 비유를 사용해서 보면, 만약 내 손과 팔이 모두 머리에 순종한다면, 그 둘은 일치된 방식으로기능을 할 것이다. 그 안에 분열은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분열과 불일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머리에 단단히 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안에서 온전히 머리가 되실 때, 사람들은 서로서로 분리하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외부적으로 교회의 경계는 지역이다.
일세기의 교회 성장
일세기에 하나님이 한 교회를 세우셨다면, 으레 가에서 시작되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여러 가정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각 지체들은 자신을 같은 교회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여러 가정에서 모였음에도, 집합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라고 불렀다. 교회는 같은 설립자들을 갖고 있었다. 그 감독의 역할은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 그리고 "전체 교회"가 정기적으로 모였다. 집이 교회 모임을 위한 성경적인 장소라고 하더라도, 교회의 경계선이 결코 가정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지역이다. 현대 가정 교회들에게 계속되는 도전은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독립적이고 분리된 교회를 길러내는 위험이다. 만약 가정교회가 각 지역사회마다 하나의 교회를 두는 성경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모이지 않는다면, 실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깰 것이다. 동일한 지역 안에서 서로 간에 교제가 없는 수많은 가정 교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칙으로부터 떠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 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물리적인 모임을 의미한다.
로버트뱅커스-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임 그자체이거나 혹은 한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공동체로서 생각되거나 정의되는 그리스도인을 언급
이것은 교회가 정적인 성격보다는 역동적이라는 두드러진 특징을 갖음을 의미한다. 계속되는 실재라기보다는 정기적인 사건이다.
워치만니- 믿는 자들이 함께 물리적으로 모이는 것이 핵심적이다. 그들이 서로 영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육체적으로도 함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예배와 기도, 교제와사역을 위해 한 곳에서 모여 있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렇게 함께 모이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떤 지역에 흩어져있는믿는 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교회가 없는 것이다.
현재의 분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한 몸안에 끝없이 일어나는 분열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재의 무질서에 대한 주님의 대응은 진실한 일치를 갈망하시는 성령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믿는 자들로 모여진 대표성이 있는 무리들을 길러내는 것이다.주님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당파들은 그냥두고, 일세기 교회의 기초 위에 새롭게 모이라고 명한신다.
Gene Edwards-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위치를 취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경험하기를 갈망하는 작은 무리들과 함께 행진하는 것이다.교회를 경험하는 것, 아무에게도 분을 내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향해 자비를 품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유기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제 전통적인 교회로부터 발걸음을 돌렸다.
Stephen Kaung- 우리는 일치로 돌아가기 위해 분열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고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우리는 머리되신 주님을 단단히 붙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과 팔을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활짝 열고 있다. 우리가 당파에서 나온 것은 당파 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파심의 영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함이다.
(윤정화)
종교개혁 시대의 유명한 교회들은 각자 제멋대로의 전통을 발전시켜왔는데, 그 전통은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를 공식화하는데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체 모양과 방향에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들의 교회구조들은 전통이 실행과 절차를 통해 성장하여 화석화한 것을 드러내며, 그것들이 이미 자기 정당화를 하며 너무 딱딱해져 버려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좀체로 그것들을 부수고 열 수 없다.( Thomas F. Torrance)
사도들의 전통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분파들은 그들의 영적 조상들이 전수해 준 몇가지 역사적 전통들에 근거하여 일한다. 이에 반하는 많은 신생교파들은 “전통”이라는 단어의 기미만 보여도 아주 싫어한다. 이들은 사람들의 굳어진, 성직 전통들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해 이어져 온 하나님의 전통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도적 전통이 아닌 것
사도들의 전통은 사도들이 만들어낸 공식적이고 체계화된 정해진 규칙들이 아니며, 교회의 실행을 위한 상세한 안내서도 아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경을 일종의 교회 성직 체계로 만들어버렸다. 사도적 전통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성경에 명시된(성령의 인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향 즉, 영적 원리들이다.
전통의 위치를 회복하자
전통에 해당하는 신약 성경 단어는 ‘전수되는 무엇’을 뜻하는 “paradosis"
1.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과 사역에 관한 이야기들(복음서)
2. 사도들로부터 모든 교회들에게로 전승된 명령과 실행들(고전 11:23, 15:1-3, 벧후 3:1-2)
사도들의 전통은 성경에 담겨있다. 그러므로 성경 외에 권위있고 무오한 전통이 신비스런 본체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지지할 수 없다.
사도적 전통은 사도들이 1세기에 각 교회에 보여주었던 영적 원리들과 유기적 실행들을 구현한 것.
제 자리에서 출발하자
우리가 교회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교회의 목적이신 그리스도의 소멸하는 계시에 사로잡혀야 한다. 우리는 항상 주 예수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가죽부대(교회 체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함을 담아내고 표현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교회에서 유기체와 체제의 위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체제와 생명-형태와 기능-양쪽이 모두 존재한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함.
오류에 빠진 현대 복음주의의 현주소
*두가지 오류들
1. 성경에 “명쾌하게 명령된”것들만이 구속력이 있다. 그러나 실행에 있어서는 이것을 부인.
2. 초대교회의 “실행들”은 낡고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초대교회의 “원리들”만은 중시되어야한다는 개념-영적 원리에 위배되는 인간이 고안해 낸 실행들을 받아들이도록하는 결과를 가져옴.
사도들의 규범적인 명령들은 현대교회에도 구속력을 지닌다.
*규범이 지니는 특징들
1. 모든 원시 교회들에 사도들이 세운 것들일 것
2. 문화적이라기보다는 생명적인 것들일 것
3. 영적인 의도를 지닌 것들일 것
사도적 전통에 속하는 것은 어제와 오늘의 모든 교회에 규범적인 실행이 된다.
전통과 가르침의 교차
사도적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경험에서 신학적으로와 영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적 전통은 사도적 가르침을 구체화한다. 사도들의 전통의 일부를 이루는 원리는 모두 성경적인 확고한 가르침에 결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도적 전통의 중요성
하나님의 진리는 교훈뿐 아니라 모범을 통해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유기적 원리와 성경의 모범들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이다. 교회가 사도적 전통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세운 형태를 취하면서도 여전히 얼마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곧 그분의 인정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속아서는 안된다.
거짓 없는 순종의 도전
‘진정한 복음주의의 특징은 오래된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통을 비록 옛것이라도 새롭게 성서적으로 조사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기꺼이 개혁하려는 것이다.’ 여러분 교회의 실행들이 신약성경의 계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여러분은 기꺼이 그것들을 바로잡겠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지으시게 하자.
성경에 명백한 논지는 하나님은 자신의 집에 관한한 인간이 결정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셨다는 것. 그리스도의 집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식대로 건축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분이 명령하신 방식에서 떠날 때마다 영적인 죽음을 우리 가운데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실용주의의 영향력을 분쇄하려는 노력이 필요함.
우리가 세우는 것은 누구의 집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주인의 의견도 묻지 않고 영적 가구를 재배치하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아왔다. 우리는 그처럼 어리석지 않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정당한 체제”를 지키도록 도와주신다.
(권순재)
교회를 하나의 이슈로서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에서 실제적 적용이라는 도전적 분야로 옮겨보자. 즉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교회 갱신을 추구하는 현대의 몇몇 운동을 살펴보자
1) 대형 쇼핑몰에서 쇼핑하기
이벤트 위주의 쇼핑몰 교회들은 각각의 사회적 부류를 위해 특화된 매점들을 창출해왔다. 예를 들면, 편부모들, 트웰브스텝(정신치료) 참가자들, 주택건설업자들, 혼전 동거 커플들, 십대 부모들, 일하는 X세대 엄마들, 사업가들, 배우들, 댄서들 등등을 위한 교회들 등등. 그들은 최신의 교회성장 전략, 조직 방법론, 마케팅 기법들을 활용하여 교인수를 부풀리고, 멀티미디어 예배, 소비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세분된 취미집단들이 있다. 즉, 거대교회들은 최소한의 헌신, 낮은 투명성, 적은 비용으로 이러한 종교적인 자원들을 대중에게 대량판매하는, 시장지향적 접근법을 사용하는 법인 사업체의 패러다임에 근거한다!
이 교회의 약점은 1) 그리스도의 몸의 ‘흩어진 교회’의 차원을 강조한 나머지 ‘모인 교회’의 차원은 큰 손실을 피할 수 없다 2) 불신자를 ‘얻기 위해’ 그들을 편하게 해주데 모든 주의력을 집중하여, 새로운 회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훈련시키는데 실패해왔다. 3)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연합된 공동의 관계를 양성하는데도 실패해왔다. 4) 이러한 사업적 방법들은 교회의 유기적인 성격을 모호하게 한다.
2) 물결에 휩쓸리다
‘제 3의 물결 운동’과 그 사촌격인, ‘회복 운동’ 등의 관련 운동들을 간단히 제3의 물결 회복 운동이라 한다. 이 운동들은 사도적 권능의 회복에 중점을 두는데, 이는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십자가가 성령의 능력을 위한 유일한 기초인데, 십자가가 아니라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덕성이 결여된 채 능력만을 쉽게 추구하도록 이끌 수 있고, 경건이 빠진 신비체험, 건전한 분별력이 결여된 억제할 수 없는 혼적 흥분상태, 그리고 영적 실재가 빠진 마귀적 위조품 등 등의 위험으로 이끈다.
제3의 회복물결 운동은 다음과 같은 많은 공헌을 해왔다. 1)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대한 순수한 갈망과 열린 마음을 촉진, 2) 복음주의와 은사주의 신학의 건전한 조화를 산출. 3) 놀랍게 기름 부으신 경배와 찬양음악의 엄청난 축적을 창출. 그러나 근본적인 결함들로는, 신비체험의 지나친 강조, 은사인 능력을 은사를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보다 은사인 능력을 보좌에 올리는 경향, 그리고 현대 성직 제도에 대한 열렬한 지원 등 이다.
하나님의 충만을 열망하지만 일세기의 교회생활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갱신을 약속하는 무언가를 시도하며, 제3의 물결 회복 운동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모호함을 향해 곤두박질해왔다.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이상한 현상들을 전심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적 장점으로 넘치는 교회생활의 모델에는 냉소를 보내왔다.
그러나 이들 다수가 추구하는 바는 에클레시아 생활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몸의 생활’을 경험하면, 그들은 가장 새로운 갱신의 ‘뜨거운 현장’을 찾아다니는 대신에, 그들은 교회 안에서 참되고 오래 지속되는 상쾌함과 안정성을 발견할 것이다.
3) 셀에 감금되다
갱신을 위한 다른 시도로서 셀 교회들은 양 날개 접근법에 근거한 것이다. 즉, 매주 (가정에서 모이는) ‘셀 그룹(cell group)’모임과 주일의 (건물에서 모이는) ‘예배(celebration)’모임을 갖는다. 작은 셀 모임은 교제, 사역, 기도, 전도 등을 위해 고안된 것이고, 큰 그룹 모임은 설교와 단체적 예배를 위한 것이다.
셀 교회의 장점은 관료체계의 수렁에 빠져있는 ‘프로그램 위주의’교회들을 규탄하는 것이다. 반면, 엄격하고, 다층적이며, 위계적인 리더십 구조는 성경적 원리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각 셀을 목사의 비전과 부담의 연장으로 만들고 신자의 제사장직을 겹겹의 인간적인 위계조직 아래 파묻어버린다. 따라서, 셀 교회모델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원리, 즉 교회는 개개의 ‘영적인 셀들’로 이루어진 유기체라는 원리를 위반한다.
올바른 태도를 취하자
하나님이 제도적인 교회를 사용해오셨으며 지금도 사용하고 계신다. 주님은 자비로우셔서, 자신을 향해 열린 마음만 있다면 그 어떤 구조들을 통해서라도 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셀 교회, 거대 교회, 제3의물결회복 교회들을 차별 없이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미 들은 이상 그것을 따를 책임을 지도록 하셨다. 교회의 실행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성경에 이미 드러내신 것에 조금이라도 감한 것은 그분의 충만하신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원인으로 가장하는 증상
참된 교회 갱신은 문제의 증상과 뿌리를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엘튼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는, “제도적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치유책이라고 제시된 것이 질병과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성직자/당파적 제도가 공동체의 재발견, 그리스도의 머리 역할, 모든 신자의 완전한 사역을 억제한다. 결과적으로, 성직구조와 교파적인 체제가 지역 모임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갱신을 위한 모든 시도들은 근시안적일 수밖에 없다. 즉, 제도권 교회 내부로부터 예수님의 충만한 간증을 회복시키려는 시도는 소용없는 짓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적 원리들을 제도적인 토양에 단순히 이식하는 갱신운동은 하나님의 충만한 목적을 실현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성직자가 지배하는 기독교를 떠나라는 부르심
성직에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검토해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쉽게 타버릴 인화성이 강한 주제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좋은 의도를 가진,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 직업에 부르셨다고 믿는,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전형적인 자비로운 독재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식 권력욕을 지닌 영적 폭군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회중들의 생명을 감금하고 얼어 죽게 만든다.
성직자들이 권위를 악한 형식으로 사용해서 주의 몸의 생활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위계적 리더십이 존재하는 것만도 상호 사역은 억제되고 회중을 수동적이며 영구히 의존적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성직자 개념은 우리의 사고 속에 너무 깊이 박혀서 이에서 벗어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신자들은 성직자를 없애려는 생각에 성직자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저항하게 된다. 교회의 이 만성병들에 대한 책임은 ‘성직자들’과 ‘성직자 아닌 자들’ 모두에게 다 같이 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지 말자
이스라엘의 포로기 역사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집을 다시 세우시려고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타국 땅에 포로로 잡혀있으면서도, 여전히 제국 각처에 퍼져있던 여러 회당에 모여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은 주님의 참된 성전을 다시 세우기 위해 그들이 바벨론에 세워놓은 편안한 집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그 땅으로 돌아갔고 대다수는 이미 익숙해진 편한 예배 형식을 떠나는 대가를 치르기를 원치 않았다.
바벨론을 떠나라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오늘날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현대적 요청의 전조이다. 하나님의 집을 다시 세우기 위해 겉보기에 보잘것없는 소수의 남은 자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질책하며 도전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겉으로 보기에는 그 애씀이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성공은 자연적 척도에 달려있다. 숫자, 정도, 크기, 무게 등.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위대한 것들이 사람의 눈에는 몹시도 작게 보인다.
일세기 교회 생활의 최초의 단순성을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전적으로 새로운 토대에서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타락한 인간이 구축해놓은 종교적 체계와 관습과는 다른 토대인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우리의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은 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세기 형태의 교회를 세우는데 미리 준비된 어떤 방법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지극히 충만하신 의도를 회복하고자하는 사역을 위해 우리에게 몇 가지 필수적이고 개략적인 원리들은 제공해준다. 그것들은 다음 과 같다.
(1) 신선한 계시
잠언 29:18은 “계시(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NIV)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모이려고 어떤 시도를 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교회에 대한 신선한 비전을 받는 것이다.
이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새롭게 보는 데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란 바로 그리스도의 단체적 표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표현한 것처럼, 이러한 “하늘의 비전”은 주님의 집을 세우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행 26:19)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 자신의 계시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마16:15-18)
우리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보이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계속적이고도 완전한 비전에 달려있다. 우리가 그분의 사역을 위한 비전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영광 가운데 우리 마음이 예수의 계시에 사로잡힐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계시, 곧 땅을 뒤흔드는, 성령에 감동된, 비길 데 없는 계시를 절박하게 필요로 한다. 하늘의 보좌로부터 주어진 이러한 계시는 바로 도약대이며, 그 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위하시는 그분의 지극히 충만하신 의도를 나타내시는 간증을 일으키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된 갱신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2) 패러다임의 전환
우리는 교회를 바르게 세울 수 있기 전에 교회와 관련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새 패러다임”은 신약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패러다임이다. 느헤미야의 시대의 이스라엘은 수년 동안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지냈고 율법이 발견되자 그것은 재설명되고 재해석되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그리스도인들도 교회에 관련된 성경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교회,’ ‘사역자,’ ‘목사,’ ‘하나님의 집,’ ‘사역,’ ‘교제’ 등과 같은 무수한 성경적 용어들이 원래 의미를 대부분 잃어버렸다. 이러한 단어들에는 제도적인 권력이 덧입혀져있다. 이러한 권력은 이 단어들을 처음 쓴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 시급한 필요는 성경적 언어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우리 시대의 관념이 인간의 사고 속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일세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았던 방식대로 교회를 보기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교회를 성경적 맥락에서 재고하는 필연적인 과업만이 우리로 교회의 성경적 개념과 교회인 체하는 저 제도들 사이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 차이들 중에 몇 가지를 간단하게 구분해보자.
간단히 말해서, 성령의 새로운 빛을 받아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면 지속적인 변화가 산출될 것이다. 낡은 가죽부대를 재조정하는 것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근본적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밖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교회는 갱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회복(replacement)이다! 제도적 교회를 갱신하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를 완전히 해체하여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세우는 일이다!
(3)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지상권
일세기 양식의 교회가 생겨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지상권을 지극히 엄격하게 받아들이는 한 무리 사람들의 산고를 필요로 한다. 그분의 궁극적인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을 머리로 삼는 열심 있는 한 백성을 필요로 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기초와 구조물이 되셔야만 한다(고전 2:2; 3:11; 엡 2:20). 그분이 교회의 중심이 되셔야만 한다.우리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게 엮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머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몸을 세울 수 없다.
(4) 대가를 계산하기
우리가 그분의 몸의 한 새로운 표현에 요구되는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결코 그것을 태어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마음에 밝히신 것들에 우리의 순종을 관련짓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보이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 것에 응답해야할 책임도 맡기신다. 하늘의 비전에 전적으로 순종하면 성령께서 그분의 몸의 지역적 표현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신약을 잘 아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주님을 회피하였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다. 뭔가 큰 일이 일어날 때까지 나는 그냥 제도적 교회를 지지하겠다.”
이러한 숙명론적 사고방식은 우리 자신의 거역을 감추는 것이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실 것이다“라는 사실이지만 부적절한 확신으로 도피하기가 쉽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응답하는 힘든 일을 행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이러한 태도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순종하는 것을 볼 때까지는 순종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실,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주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하자. 주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규정하신 길을 순종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한 이들에게 고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몸 안에서 사는 것의 영광스러운 보상금은 그 대가를 훨씬 능가한다.
혹독한 시험아래서도 교회를 함께 지탱하게해줄 필수적 요소들은 1)생명의 방식으로 예수의 머리되심을 단단히 붙드는 것, 그리고 2)주님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아를 비우는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십자가의 실제적인 역사가 없다면, 에클레시아의 삶은 원대한 이상에 불과하게 된다.
(5) 해산하는 기도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해산하는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것을 배운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가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유기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자연인의 성급한 충동으로 세워질 수 없다. 해산하는 기도도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일세기 교회가 사도적 사역을 통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신약 전체를 통해 일관된 실행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성경에 언급된 모든 교회는 순회 사역자가 직접 세워졌거나, 아니면 그들의 막대한 도움을 받아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보기이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기도에 들어간 신자들은 새로운 교회위한 기초를 놓을 사도적 사역자(또는 “교회 세우는 자”)의 도움을 구해야한다. 사도적 사역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알리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들은 기초를 놓는 일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과 은사를 받은 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신약의 원리에 충실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역할을 받아들일 것이다. 사도적 사역이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집이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종적 부르심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교회에 대하여 그분의 궁극적인 의도를 받아들인 자기 백성을 손짓해 부르시고 계시는 시점에 살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그분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신부가 되고자 자신을 준비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하나님의 성령의 새 포도주로 충만해진 한 백성이 일어나게 하는데 달려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교회 실행이라는 낡은 가죽부대를 재검토하도록 요구하신다.
이 글을 마치면서, 이 책에서 설명하고자 시도해온 내용이 여러분을 더 이상 영적인 생명의 포도주에 물을 타지 않으며 낡은 가죽부대에 그것을 담아두지 않도록 자극하리라고 확신한다. 오히려, 여러분이 에클레시아의 매혹적인 비전에 의해 불이 붙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