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생애에나 결단의 시기가 있다. 결단은 커다란 부정과 긍정으로 구성된다. 결단이란 나의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나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자아가 죽고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다. 철학에서는 그것을 자각이라고 하고 종교에서는 그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부정되는 낡은 것이 있고, 긍정되는 새로운 것이 있다. 내가 죽는 동시에 내가 태어난다. 그것은 혼의 혁명이요, 자아의 혁명이요,
인격의 혁명이다. 파스칼의 생애의 최고봉은 1954년의 결정적 회심(conversion definitive)이다. 이 회심을 경계선으로,
그 이전의 파스칼과 그 이후의 파스칼은 완전히 달라진다. 결정적 회심 이후 그는 커졌고, 깊어졌고, 높아졌다. 그것은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었다. 파스칼의 결정적 회심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한 오랜 준비의 시기가 있었고, 영혼의 어두운 밤의
고뇌가 있었다. 신음하면서 탐구하는 정신의 악전고투가 필요했다. 새 생명을 낳으려면 산모가 열달 동안 뱃 속에서 키우다가 해산이라는 목숨을 거는
마지막 진통의 고비를 겪어야 했다. 우리는 진지하게 구해야 하고 오래 진통해야 했다. 그는 회의의 밤과 방황의 어두운 골짜기를 불안 속에서
헤매이기도 했다. 파스칼의 경우 세속적 생활의 혐오와 공허감의 체험이 그것에 해당된다. 파스칼은 1654년 9월말의 어느 날 뽀르
로와이알 수도원으로 수녀가 된 여동생 쟈끄리느를 찾아갔다. 그는 맑은 행복 속에 있는 쟈끄리느를 보았다. 자기는 과학적 천재로 온 프랑스의
명성을 누리면서도 불안과 비참 속에 방황하는데 쟈끄리느는 이름도 없이, 돈도 없이, 그러나 신앙속에서 행복한 생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파스칼은 동생에게 (그 여자의 수녀명은 쌍뜨 에우페미였다.) 내심의 고뇌를 고백했다. 쟈끄리느가 언니인 삐리에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오빠는 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자기 심정을 고백했습니다. 그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였습니다.
오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훌륭하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세속의 흥겨운 유희가 이제는 싫증이 났고,
나의 양심은 밤낮 가책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속에서 아주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은 상태다.
하나님에게 끌리는 마음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이 고백은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후 블레즈는 가끔 쟈끄리느를 면회했다. 그는 성녀와 같은 동생한테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전에는
오빠가 동생을 신앙의 생으로 이끌었지만, 이번에는 동생이 오빠를 결정적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게 되었다. 그녀는 오빠의 영혼상태를 깊이 이해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였다. 쟈끄리느는 오빠를 설득하거나 지도하지는 않았다. 쟈끄리느에게는 오빠의 마음 속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역력히 보였다. 그는 온순해지고 겸허해졌다. 자기를 태산 같이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사람들의 존경이나 칭찬으로 우쭐하고
기뻐하는 태도가 사라졌다. 옛날의 블레즈 파스칼이 아니었다. 그는 한없이 겸허해졌다.
『겸허한 마음』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성격이다.
성 바울처럼 겸허한 심정의 소유자, 이것이 곧 결정적 회심 전의 파스칼의 마음이었다. 『겸허』
이것이야말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마음이요, 종교가 깃들일 수 있는 정신의 자세이다. 겸허의 그릇 속에 신앙의 열매가 담겨진다. 1654년
결정적 회심전에 쓰여진 파스칼의 소품 중에 〈죄인의 회심에 관해서〉(Sur laconversion du pecheur) 란 글이 있다. 이 글은
회심 전의 그의 심경을 말해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거기에는 탄생 전야의 고뇌와 진통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영혼은 하나님 앞에 겸허해지고
깊은 종교의 영을 품는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비우게 한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한다. 벌레와 같은 자기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그는 감사한다. 많은 허영을 택한 것을 그는 깊이 뉘우친다. 참회와 가책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뜨거운 기도를 드린다. 옳은 길로 인도해 주소서 하고 기도를 한다. 그의 소원은 진지하다. 그는 자기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예찬해야 하고, 빚진 자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고, 궁핍한 자로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결정적 회심 직전의 파스칼의 마음의 그림이다. 낡은 내가 새로운 나로 바뀌고, 마음속에 회심이
일어나는 과정을 그린 예리한 글이다. 그는 한없이 겸허한 마음으로 신앙의 세계를 구하였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파스칼처럼 진지하게 하나님을 구한 자가 또 있을까. 신음하면서까지 구한 이 겸허한 구도자의 영혼을 하나님은 드디어
받아들였다. 파스칼은 하나님의 빛이 자기의 마음을 환하게 비쳐 주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의 은총이 통한 것을 느꼈다. 1654년 11월 23일
깊은 밤 중에 그는 드디어 경험하였다. 은총의 불을 자기 마음 속에 분명히 느꼈다. 파스칼은 이 감격을 놓칠세라 한 장의 종이에 적고, 나중에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양피지 천에 정서하여 상의 안쪽에 바늘로 꿰매었다. 파스칼은 결정적 회심이 있은 그 때부터 죽을 때 까지 8년
가까이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고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이 양피천을 옷에 꿰맨 채 몸에 지니고 있었다. 파스칼이 죽은 뒤에 비로소 하인이 그 종이
조각과 그 양피지를 발견했다. 이것이 유명한 파스칼의 메모리알(le memorial) 즉 각서이다. 양피지 원본은 오늘날
없어졌지만 파스칼의 조카 루이 뻬리에가 기록한 것과 파스칼 자신이 종교적 감격을 적은 원지가 지금도 남아 있어 둘 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파스칼의 가장 깊은 종교적 경험을 생생하게 전하는 이 귀중한 문장을 그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교황이면서 순교자인 성 끌레망 및 순교자
명부에 나타난 다른 인사들의 제사 날, 순교자 성 끄리소곤느 및 다른 인사들의 제사 날 전야. 밤 열시 반에서 열두시 반경까지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 및 식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확실, 확실, 감지, 환희,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즉 너희들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및 모든 사물에 대한 망각 하나님은 복음에 표시된 길에 의해서만 발견된다.
인간의 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운 아버지시여 세상은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여도 저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환희, 환희, 환희, 환희의 눈물 나는 그에게서 떠나 있었다. 생수의 원천인 나를 버렸도다. 나의 하나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원컨대 나는 영원히 그에게서 떠나지 않겠다. 영원한 생명은, 유일의 진정한 하나님이신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에게서 떠나 있었다. 나는 그를 피하고,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다. 원컨대 나는 절대로 그에게서 떠나지 않겠다. 그는 복음에 표시된 길에 의해서만 보존된다. 일체를 결연히 포기할
것. 예수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 대한 완전한 복종. 지상의 시련의 하루에 대한 영원의 환희. 나는 당신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파스칼의 하나님
체험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39세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 뜨겁게 살았던 사람이다. 세계사에서 손꼽을 정도의 천재 중의 천재였던 그는 물리학자로 수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그에 못지않게
신학자로, 뜨거운 영적인 사람으로 그 이상 값어치가 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관습에 젖은 신앙이나 형식에 젖은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끊임없는 고투와 추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기를 구하였다
드디어 그가 31세 되던 1654년 11월 23일 밤 10시 30분에서
0시 30분 사이에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자신이 그릇 살아 온 세월을 눈물로 돌이켰다. 그는 그날 밤의 감격을 적어
자신이 즐겨 입던 옷의 안쪽에 꿰매어 간직하였다. 그 글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철학자의 신이 아니요, 수학자의
신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셨도다. 이 확신, 이 감격, 이 기쁨... 이 평화”
“하나님 외의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나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인간 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블래스 파스칼(B. Pascal)과 칼 바르트(K. Barth)의 신(神) 인식 방법2
-“Credo, ut
intelligam”와 “Fiedes Querens Intellectum”에 관하여 이 논문은 2002년 2월 23일 독일 출신
학자들의 춘계신학토론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 토론회에서 예리한 질문을 제기해 주신 김균진 교수님 외, 정종훈, 박숭인, 신준호,
조현철 박사에게 지면을 통하여 감사를 드린다.- -김재진/연세대학교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조직신학
II. 블래스 파스칼(B. Pascal)의
“Credo, ut intelligam”
1. Deus
absconditus(숨어계신 하나님)
블래서 파스칼은 「팡세, Pensees」에서 이사야서 45장 15절을 근거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Deus absconditus”(206/242;
489/585) B. Pascal, 팡세(Pensees), 朴順萬 역, 暝想錄(뽀올 로와이얄 판), 서울: 集文堂 1974,
206(242)(이하 본문의 쪽수 제시는 「팡세,Pensees)<뽀올 로와이얄 판>의 Fragment<단편>을 표시하는
숫자임) 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숨어 계신 하나님”은 자연 속에 내재(immanent)해 있는, 혹은 자연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조화(造化)에 내재되어 있는 신성(神性)을 입증하려는 것은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토익(Stoic) 철학이나 키케로(Cicero) 혹은 세네카(Seneca) 저서 속에서도 많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숨어 계신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인식할 수 없는 하나님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길(방법)은 마태복음 11장 27절: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206/242)는 말씀을
근거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인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과의 일체의
교제는 제거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성서가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나(神, 필자 주)를 만나리라”(렘 29:13, 206/242)고 말하고는
있지만, “만나리라”는 것이 인간이 자기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해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성서가 “신(神)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연을 인용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207/243)고 말한다. 이와 같이 파스칼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타락한 인간 이성에
대하여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을 통한 하나님 인식, 곧 자연신학을
거부한다.
파스칼이 자연을 통한 하나님 인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더 나아가 피조물과의 존재론적 유비(Analogie) 내지 연관(Zusammenhang)을 거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을 통한 신 인식은 하나님과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간의 존재론적 연관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자연신학적 하나님
존재 증명이나 신 인식론은 존재론적 논증과 우주론적 논증 그리고 자연과학적 논증에 귀착되기 때문이다. 즉 세계의 질서와 합목적적인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원인과 결과의 원리(Kausalgesetz)에 따라서 ‘최초의 원인(prima causa)’으로 소급하는 추론방식은 최초의
원인자(原因者), 혹은 ‘최초의 동인자(prima movens)’와 역사 속에 실존해 있는 피조물과의 존재론적 연관성이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신학은 인과율(因果律)에 준거하여 세계라는 한 결과의 원인을 찾는 우주론적 논증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역(逆)으로
우주론적 논증은 존재론적 연관성을 전제로 한 논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론적 논증은 모든 유한한 사물들의 종속성에 근거한 논증이기도
하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들은 각각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우주의 사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을 하나님으로 규정하는 논증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 내지 추론
방식은 결국 사물 자체가 실제로 서로 의존해 있고, 인과(因果)의 원리에 의해서 실제로 상호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상은 인간의 이성이
그렇게 이해하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파스칼은 신(神)의 존재를 인간 이성을 통하여 존재론적으로 추론(推論)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거부한다:
“우리는 이성(理性)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정에 의해서 진리에 도달한다. . . 그러므로 거기(심정, 필자 주)에 관여하지 않는
추리(推理)가 그 원리를 반박하려고 하더라도 소용없다. . . . 왜냐하면 공간, 시간, 운동, 수(數)가 존재한다는 기본원리에 대한 인식은
추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 어느 인식보다도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심정의 인식, 즉 본능의 인식 위에 이성이 근거를 두어야 하며,
심정의 인식이(필자 주) 그 모든 논리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 . . 그러므로 . . . 우리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이성 밖에 없다는 듯이
우리의 (심정의, 필자 주) 확실성을 반박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반대로 이성을 필요로 하지 않고,
만사를 본능과 직관(直觀)에 의해서 사물을 알게 되는 것이다. . . .
그러므로 신(神)으로부터 심정의 직관을 통하여 신앙을 받은 사람들은 . . . 정식적으로 납득을 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신이 그들에게 심정의 직관에 의해 신앙을 갖게 해주기를 기대하면서도, 우리는 추리에 의해서만 신앙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239/282)(필자가 진하게) 협성대 박숭인 교수는 “파스칼이 ‘심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면,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감정’과 동일한 것이 아니냐?”는 예리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파스칼에게 있어서 “심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동, 곧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전제한 반면에,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감정(Gefuell)은 우주의 원리를 직관함을써 생기는 인간의 종교-심리적 동요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종교적 감정은 “우주의 영원하고 이상적인 내용과 본질에 대한 경건학 직관 내지 느낌”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생기는 이성적 깨달음으로 인한 수용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최신한, 종교론. 한들 1997, 55ff. 이밖에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적 감정에
관하여: 목창균,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 한국신학연구소 1991, 67, 235. 그리고 보다 자세한 것은, Fr.
Schleiermacher, Der christliche Glaube, §36-42: “Das Verhaeltniss der Welt zu
Gott wie es sich in unserm die Gesammtheit des endlichen Seins repraesentirenden
Selbstbewußtsein ausdrueckt”). 따라서 파스칼에게 있어서 “심정”은 아마도 엠마오로 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눅 24:32)고 고백한 것과 같은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점에 대하여는 보다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렇듯 이성의 추론에 의한 하나님 인식
거부는 파스칼이 주장하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질서(Trois ordres) 이점에 관하여: 김광식, Pensees
안에 나타난 B. Pascal 의 그리스도 중심사상, 카톨릭 신학과 사상 4(1990/겨울),
175ff.
: “육체의 질서”, “정신의
질서” 그리고 “사랑의 질서”에 대한 언급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파스칼이 Potestatum Numericarum Summa 에서
설명하듯이 이들 세 가지 질서 사이에는 그 어떤 유사점이나 공통점이 전혀 없으며, 그래서 결코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Potestatum
Numericarum Summa, OC, J. Ch eval ier, ed., pp. 166-171; B233 C451: “무한에 하나를
더하여도 무한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는다. 무한한 거리에 1피드를 더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유한은 무한 앞에서는 없어지는 것이고, 순수한 무(無)가
되고 만다. 우리의 정신도 하느님 앞에서는 이와 마찬가지이다”(김광식, Pensees 안에 나타난 B. Pascal 의 그리스도 중심사상,
176, 각주 17에서 재인용) 이 세 가지 질서는 각각 자기보다 하위의 질서를 무한히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하위의 질서에서
상위의 질서로 스스로 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즉 “육체의 질서”는 “정신의 질서”로 그리고 ”정신의 질서“는 ”사랑의 질서“로
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세 질서 사이에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나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물체와 정신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거리는 정신과 사랑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거리보다 더 먼 거리“(B793/C829) B.
Pascal의 Text를 인용하는데 있어서 괄호 속의 첫 번째 번호(B)는 L. Brunschvicg가 편집한 Pensees의
fragment(단편) 순서의 번호이고, 두 번째 번호(C)는 J. Ch eval ier 가 편집한 것의 단편 순서의 번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편의 번호 제시는 김광식 신부님의 제시에 따랐다. 의 영상(影像)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랑의 질서“는 다른 질서들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김광식 신부는 ”하위에 있는 질서는 자기보다 무한히 상위에 있는 질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위의 질서가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는 상위의 질서 앞에서 자기 스스로를 부인해야 한다“
김광식, Pensees 안에 나타난 B. Pascal 의 그리스도 중심사상, 177. 고 이 세 가지 질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런데 파스칼에게 있어서 ”사랑의 질서“가 ”위력, 찬란함, 승리, 광채“(B793/C829)를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질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질서“라면, 하나님과 인간 내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유비나 연관성을 전제하여 물질적인 자연의 세계로부터 이성적 혹은 정신적 추론을 걸쳐
하나님의 세계에 이르는 인식 방법은 파스칼에게 있어서는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파스칼에 있어서 단지 “자연은 스스로 신(神)의
영상(影像)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가 다만 영상에 지나지 않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어떤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기”(484/580) 때문이다.
이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파스칼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나, 하나님 인식에 있어서 인간 이성에 의한 존재론적 추론방식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그 어떠한 존재론적 유비가 없으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상승할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이성에게는 철저히 숨어 계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세 가지 질서: “육체의 질서”, “정신의 질서”
그리고 “사랑의 질서” 사이에는 아무런 존재론적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하위의 질서에서 상위의 질서에로의 스스로 상승(上昇) 내지
승화(昇華)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전제 때문에 파스칼은 신앙에 의한 하나님 인식, 바꾸어 말하면 Credo ut
intelligam 이라는 새로운 인식방법을 제시하고있는 것이다.
2. Credo ut
intelligam(인식하기 위해서 나는 믿는다)
파스칼은
“육적인 것에 있어서는 욕망이 지배하고,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는 호기심이 지배하고, 지혜에 있어서는 오만함이 지배한다”(B460/C698)고
말한다. 이 말은 “육체의 질서”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만 전념하고, “정신의 질서”에 속하는 사람은 “자연에 대한
심오한 탐구”(B72/C84)와 “영혼의 본질과 그 기원, 그리고 그 존속기간”(B73/B189)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와 호기심에 따라서 진리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그는 평한다(B525/C392;
B353/C323).
그러므로
“육체의 질서”와 “정신의 질서”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육적인 사람은 “무한히 이해
불가능한”(B233/C451) 하나님만 알고 있으며, 지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제한된 이성활동을 통하여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의 하나님‘, 곧
’죽은 하나님‘만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주 세련된 이성활동일지라도, 인간 이성 자체의 힘만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인식을
제공” Op. cit., 178 해 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이성을 부인하는 것만큼 이성에 적합한 것은
없다”(231/272)라고 까지 말한다.
그러나 파스칼이 신앙을 강조한다고
해서, 신앙에는 이성이 결여되어도 된다는 맹목적인 복종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이성의
순종(soumission)”을 강조한다. 이 말은 하나님과 성서와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음을 통한 순종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이성에 반대되지 않기”(B187/C1) 때문이다. 오히려 이성은 신앙의 도구가 된다. 그렇지만 이성이 신
인식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이나 전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 이성의 힘만으로는 이성을 초월하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이 세상에는 논증될 수 있는 사물이 얼마나 적은가”(214/252)라고
말한다.
즉 이 세상에는 인간 이성으로 논증되고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즉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단호하게 “신(神)을 직감하는 것은 심정(心情)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은 곧
신앙”(236/279)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앙은 신(神)의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추리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237/279)고 강조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신앙은 논증과는 다르다. 논증은 인간적인 것이고,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 .
. 이 신앙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나는 안다’가 아니라, ‘credo 나는 믿는다’라고 말하게
한다.”(B248/C471) 그는 “하나님을 느끼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이성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하나님”(B278/C481)을 우리는 신앙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파스칼에게서 신앙을 통한 하나님 실존 인식은 인간 이성의 활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 통한 하나님 존재 인식의 불가능성을 절감하였을 때, 결과적으로 ‘나는 믿는다 credo’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된 이성의 깨달음은 이성의 한계성을 깨닫는데 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성의 마지막 단계는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무한히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그 이성은 아직도 박약(薄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적 사물이 이성을 초월하고 있다면, 초자연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227/267)라고 그는 역설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파스칼은 역(逆)으로 이성의 올바른 사용은 오히려 자신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명령을 이성적으로 순종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성의 올바른 순종,
이성의 올바른 사용”(B269/C469)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파스칼에게 있어서 인간 이성은 하나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 이성의 한계점을 절감하는 데서 인간은 자기의 이성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된 신앙으로 전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인간 이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포괄하면서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인간
이성을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을까?
3. 타락한 인간 이성의
한계성
파스칼이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 근저에는 그의 인간이해가 전제되어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현존하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여 최초 본연의 인간 본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현재 가지고 있는 본성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첫 번째
본성이 아니라, 그 영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은 육신과 안목과 삶의 자랑(요1서
2:16)(379/458) 이 세 가지 욕망과 신 인식에 커다란 장애물인 정념 그리고 자기애(I’amour-propre)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本性)에 관하여: 364-382(440-461) 따라서 타락하여 더렵혀진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고 할지라도 이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참고 사 43:8: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 .
. .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청결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거룩하신
신(神)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553/737)
(참고.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지, 이성이 아니라고 파스칼은
말한다. 즉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하고 겸손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깊은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영감(靈感)을 주시기 때문에 그 영감의 도움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마음의 청결함과 겸손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신앙은 인간의 이성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는 것이지,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B265/C459)
이상 앞에서 기술한 내용을 고려해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파스칼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때문에, 인간 이성만으로는 진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그 어떠한 것도 인식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청결하고, 겸손하며,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영감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 영감에 의해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고, 그 신앙을 통하여 -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하나님 존재 인식은 인간 이성의 능동적인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겸손하고 청결한 마음에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영감에 의한 - 말씀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신(神)을 나타내 보여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또한 모든 것이 신을 감추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신을 시도(試圖)(인간이 신을 자기의 지혜나 힘으로 알려고 하는 것)하는 자에게는 신이 자기 자신을 감추고, 신을 (신앙으로, 필자 주)
구하는 자에게는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을 알 수 없는 자인 동시에 신을 알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그
본성의 부패함으로 인하여는 신을 알 수 없고, 그 최초의 본성에 의해서는 신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466/557).
그렇다면 여기서 또 다시
질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에 누가 과연 하나님의 영감을 받을 만큼 청결한 마음과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이점에 대하여
파스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Mediator)되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진술로 답변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혈육을 취하신 하나님이시며, 사람들 사이에 살아 계셨던 한 인간으로서 생활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비록 타락하여 초월하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인간 이성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한다.(B862/C788)
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은총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앞 절에서 파스칼에게 있어서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이성이 아닌, ‘신앙을 통한 인식’임을 보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타락한 인간 이성이
숨어 계신 하나님(Desus absconditus)을 어떻게 신앙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점에 대하여 파스칼은 우선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의 도움으로 답변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이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 말씀을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e) 전망 내지 약속과 성취의 구도(Schema)에서 해설한다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을 한꺼번에 증명하는 것 - 이 양자를 한꺼번에 증명하려면, 한쪽 예언이 다른 쪽에서 이루어져 있는가를 보면
된다.”(523/642)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쟌센느즘(Jansenimus)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쟌센니우스 공식에 의하면
“신약은 구약 속에 숨어 있으며, 구약은 신약 속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Augustinus의 「구세주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하여」(3권 8장)에도 동일한 사상이 나타난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성적
논증이나 추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증거를 통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의 중심으로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두 개의 성서, 즉 구약은 그
희망으로서, 신약은 그 모범으로서 각각 그 중심에 놓았다”(556/740).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증언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과 성취로
다음과 같이 자세히 해석한다:
“인간의 기억이 계속 작용하기 시작한
후로, 여기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앞서서 존속한 한 민족이 존재하면서, 인류를 향하여, 너희들은 전반적으로
부패하였지만, 이윽고 구세주가 올 것이라고 언제나 예언해 왔었다. 그 구세주가 오기 전에 한 민족이 그의 일에 대하여 예언하고, 그 가 온 후에
한 민족이 모두 그를 숭배하게 된다는 것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이 한 민족 전체가 4000년 동안이나 예언해 왔다는 것 - 이
모든 일은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책(성경)은 400년 동안이나 산란해 있었다. . . . 이리하여 나는 나의 구세주에게
두 팔을 내민다. 그(예수 그리스도 필자 주)는 4000년 동안 예언된 후에, 그 예언한 대로의 시기와 정상(情狀)대로 나를 위해 괴로움을
당하시고, 또한 죽음을 당하기 위해서 지상에 오셨다”(553/737)(필자가 진하게)
이러한 진술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파스칼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예언을 하시고,
하나님의 시간이 차면 그 예언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역사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신의 때가 이르면 자신을 영원히 숨기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이라는 뜻이다. 즉 파스칼에 의하면 숨어 계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Feuillet는 파스칼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고 강조한다(A. Feuillet, L’agonie de Gethsemani, Paris, 1977,
299).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신(神), 곧 하나님이다.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오만하게 되지 않고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절망하지 않고 그 밑에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신(神)이다.”(440/528)(필자가 진하게) 이상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파스칼은 예수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숨어 계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내지
자기 현현(Selbsterscheinung)으로 보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인식 이외에 다른 어떤 이성적 추론방식을 통한
하나님 존재 인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파스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인식을 다음과 같이 명백하고도 분명하게 진술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유일하게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는 우리의 삶도, 우리의 죽음도, 하나님도,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다.” (458/548). 이 밖에: “Nemo
novit Patrem nisi Filius et cui voluerit Filius revelare”(457/547); 459/549.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파스칼은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 하셨도다”를 제시한다.(457/547)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태어남이 구약 성서적 예언의 성취이며, 예수의 나타남은 숨어 계신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유일하게 하나님을
인식 할 수 있다면, 그러한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파스칼의 답변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을 하나님 존재
인식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참 모습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전거(典據)로 보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메모리알,
Memorial」의 1/3은 성서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점에 관하여: N. Viatte, Le Memorial de Pascal, Nova et Vetera(avril-juin, 1961),
102. 김광식 신부는 「메모리알」을 순수한 역사적 문헌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잘 못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문서는 파스칼이 자신의 신앙
체험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 것을 잘 이해하려면 신앙의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김광식, 플래즈 파스칼의 「메모리알,
Memorial」, 121, 각주 33).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목적으로 하고 있는 성경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도, 우리의 본성에 대해서도, 어두움과 혼동만을 보게 될 뿐이다.”(B548/C729) 그래서 파스칼은
성경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책이고, 가장 진정한 책”(501/601)이라고 평가한다.
이제 여기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파스칼의 신
인식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는 인간의 이성을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이성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인간 이성만으로는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이성에, 바꾸어 말해서 인간의 심정(心情)에 하나님의 영(靈)을 부어 주면, 그 영감(靈感)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된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감동된 신앙에 의해서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성경의 증언에 힘입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비참함과 본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나는 인식하기 위해서 믿는(credo, ut intelligam)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