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3. 불립문자 ․ 교외별전과 간화선
불립문자 ․ 교외별전이란?
황벽선사는 말한다.
여기 이르면 조사께서 서쪽에서 와서 바로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고 깨닫게 하심이 말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傳心法要]
마음을 바로 보아 깨닫는 것이 선이다. ‘直指人心 . 見性成佛‘은 이런 도리를 잘 보여준다. 선은 모든 언어와 문자를 떠나 있다(不立文字). 진정한 불법은 경전으로도 담을 수 없다. 경전 언어를 뛰어 넘어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견성성불) 실천행 바로 선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보이는 직지인심이다. 그 마음을 보면 견성성불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견성성불 네 구절은 선의 참면목을 드러내는 공통된 기반이기 때문에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 네 구절이 하나의 정형화된 구절로 나타난 것은 목암 선향 선사가 엮은 ‘朝廷事苑’이란 어록에서이다.
여러 조사께서 법을 전할 때, 처음에는 경․ 율․ 론 삼장의 가르침과 함께 했지만 달마 조사께서는 오직 ‘마음’ 만을 전한 뒤 집착을 깨뜨려 근본 뜻이 드러나게 했다. 이른바“가르침 밖에서 따로 가르침을 전하고(敎外別傳), 문자에 기대지 않고(不立文字), 바로 마음을 가리켜(直旨人心). 성품을 보게 하여 깨닫게 (見性成佛)” 한 것이다.
“경전 밖에 따로 전하며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교외별전 · 불립문자의 가르침은 선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는 수행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기에 선 수행자는 ‘손가락’에 얽매어 ‘달’을 보지 못하는 한계를 뛰어넘어 그 핵심으로 바로 질러 들어가야 한다.
단하丹霞 선사가 불상을 불에 태운 일이나 덕산德山 선사가 경전을 불태워 버린 일등은 다만 선 수행의 전통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사유의 틀을 뛰어넘은 격외格外의 경지이다. 그러나 경전 밖에서 따로 전했다고 하여 경전을 무시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여기서 말하는 경전 밖이란 경전상의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참으로 달을 본 사람에겐 모든 것이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전을 보는 목적은 경전이 알리고자 하는 뜻을 바로 알아 그 생생한 진리를 밝게 깨닫는 데 있다. 처음에는 문자라는 손가락을 통해 접근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 문자라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진리인 달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길은 직접 체험하는 길 외에 다른 수가 없다.
선은 문자 이전의 참 생명인 마음의 본래 자리를 깨치는 일이다. 설명이나 이해의 방법이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의 실상을 여실히 보는 일이다. 보면 그 자리에서 깨닫는다. 바로 마음을 가리켜 그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이 도리를 말한다. 직지인심의 방법으로 역대 조사들은 선문답을 하고 코를 비틀고 뺨을 때리고 고함을 치고 방망이로 때린 것이다
간화선과 불립문자
敎宗에서는 오랜 시간 공들여 수행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깨닫는 데에는 한량없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교종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마음을 바로 보면 그 자리에서 깨친다는 頓悟를 말한다. 그것은 전등을 켜면 방 안이 몰록 환해지는 이치와 같아.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간명직절하다.
정상좌 定上座라는 스님이임제 선사에게 물었다.
“불교란 무엇입니까?”
임제 선사는 벌떡 일어나 정상좌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리며 밀어 젖혔다.
정상좌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옆에 있던 스님이 한 마디 거들었다.
“정상좌,문답은 끝났제. 절 하고 내려가야지.”
정상좌는 이 말을 듣고 절 하는 순간에 대오했다.
“불교란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정상좌는 임제 선사로부터 호되게 당하고 멍하니 서 있다. 그것은 커다란 의심의 현전이다. 안팎이 크나큰 의심 덩어리가 되어 절하는 순간 정상좌는 자신의 본래 마음을 깨친 것이다.간화선은 이러한 조사선의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다. 간화선에서는 말길이 끓어진 화두를 통하여 몰록 불립문자의 세계로 들어선다. 화두를 단박에 타파하여 그 자리에서 견성한다. 간화선이야 말로 교외별전,불립문자의 세계로 가장 정확하게 빠르게 들어가는 문 없는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