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소경 계임(陳少卿 季任)에게 보낸 대혜 선사의 답장 1-13
邪師輩가 敎士大夫로 攝心靜坐하야 事事莫管하고 休去歇去라하나니 豈不是將心休心하며 將心歇心이며 將心用心이리요 若如此修行인댄 如何不落外道二乘의 禪寂斷見境界며 如何顯得自心의 明妙受用과 究竟安樂과 如實淸淨解脫變化之妙리요
삿된 스승의 무리들이 사대부들에게 가르치기를, “마음을 거두어 드려서 조용히 앉아 모든 일을 관계하지 말고 쉬고 또 쉬어라.”라고 합니다. 그것이 어찌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그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떻게 외도와 이승들의 선적과 단견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떻게 자기 마음의 밝고 미묘한 수용과 구경의 안락과 여실하게 청정한 해탈변화의 묘용을 드러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강설 : 불교는 마음을 깨닫는 공부다. 그런데 마음을 깨달아 알기란 좀처럼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에는 본래 주관과 객관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면서 또한 편의 따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쓰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나누면 그것은 마음을 바로 안 것이 못된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쉰다고 하는 것이나,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고 하는 말은 모두가 하나인 마음을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보는 경우가 된다. 여기에 마음의 본질을 잘못알고 모순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렇게 마음을 알고 있으면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단견(斷見)이나 또는 영원하다고 보는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마음을 위시하여 모든 유형무형의 존재들을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견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중도적 견해를 확립하게 되면 있음과 없음에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마음의 밝고 미묘한 작용을 마음껏 누리게 되며, 완전한 안락과 청정과 해탈변화의 미묘한 작용을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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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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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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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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