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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山市 천성산(千聖山.922m)을 가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1월25일 반월당, 반고개, 서남시장, 죽전사거리를 경유하여 칠곡IC를 최종 벗어나니 오늘따라 앉을 자리가 모자란다(48명). 乙未年(2015년) 첫 산행이라 구윤서 신임회장님을 비롯하여 벽송대장(최영수)님, 윤갑용 부회장님(수석총무), 김미소(여성총무)님, 운영위원장에 능선(신동승)님, 윤상복(부산대장)님 등 많은 임원들이 새로 구성되어 그 출발부터 산뜻합니다 그려!
평사(坪沙) 휴게소에서 간단히 조식(朝食)을 할 동안 작은 동산을 둘러보니 원효(元曉 617~686)스님의 고향(경산)과 가까워서 인지 스님에 관한 정보와 그의 아들 설총(薛聰)에 관해서 간략하게 서술해 놓았으며, 또 그 옆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일연스님에 관한 정보도 소개 되어있다.
당시 원효스님은 서라벌(신라수도:경주) 궁궐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라고 외치고 다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태종 무열왕이 듣고 “이는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겠다는 것이니, 나라에 큰 성현이 있으면 그보다 이로움이 없으리라”하고 원효를 맞아 과부가 되어 홀로 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의 궁(瑤石宮)에 들게 하였다.
이리 하여 태어난 아들이 설총(薛聰. 대략 655~740)이며, 그는 훗날 “이두(吏讀, 吏道, 吏頭, 吏吐라고도 함.)문자”를 만들어 후세에 전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영, 정조 때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연하여 일연(一然.1206~1289)스님은 속명이 김견명(金見明), 14세에 출가하여 22세에 승과에 합격하고, 비슬산 유가사, 청도 운문사, 남해 정림사(定林寺), 군위 인각사(麟角寺) 등을 거쳐 수행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완성하였다.
오늘날 학계에서 정사(正史)라고 일컫는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없는 “단군설화(檀君說話)”가 삼국유사에 최초로 언급되어 있으니... 한민족의 자긍심을 한 껏 높여주는 저서라 하겠다.
차는 신나게 달려 통도사IC를 벗어나 내원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계는 10시를 조금 지나있다. 단체로 간단한 기념촬영을 마치고 A코스(종주산행:22명), 나머지(26명)는 B코스(하산기점 역산행)를 선택하여 진행합니다.
극락교 옆의 안내문에는 노전암, 성불암, 금봉암, 안적암, 조계암, 대성암, 내원사, 금강암, 원효암, 미타암, 홍룡사, 용주사 등 끝없이 이어지며 몇걸음을 나아가니 왼쪽 산기슭에는 자그마한 산신각(山神閣)이 모셔져 있다.
안내문에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원효스님이 척판암(擲板庵:長安寺 俗庵)에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 있는데... 당(唐)나라 태화사(泰和寺) 뒷산(태화산)이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아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하다.)”이라 써서 날려 보냈다.
이를 본 태화사 선방(禪房)에서 수행중이 던 스님들이 밖으로 뛰어 나오자 뒷산이 무녀져 내렸다. 이 후 1천명의 대중들이 원효스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었으며, 원효가 그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山神)이 마중 나와 지금의 산신각(山神閣) 자리에서 사라졌다.
인하여 원효스님은 내원사를 비롯한 89암자를 지어 그들을 머물게 하였으며, 오늘날 “화엄벌”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화엄경(華嚴經)”을 강의 하였으므로 “화엄벌(습지대)”이라 하며 북을 친 곳을 “집북봉”이라고 한다. 또 1천명의 제자들이 모두 성불(成佛)하여 성인(聖人)이 되었으므로 “천성산(千聖山)”이 되었다고 한다.
보통은 山神閣이 대웅전 좌우쪽 약간 높은 곳에 있는데~ 이 곳은 특별한 이유가 있슴니다 그려! 원효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을 상기(想起)하면서 내원사 10리 계곡을 오름니다.
若人欲了知(약인욕료지)(만약 나를 알기를 바란다면)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삼세가 모두 부처일세. 삼세:과거 현재 미래)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법계의 모든 성품을 바라보니)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일체가 오직 한 마음에 달렸더라)
성인(聖人)의 오도송(悟道頌)에 하찮은 범부(凡夫)가 현토(懸吐)를 한다는 것이 개구즉착(開口卽錯)이요, 사족(蛇足)이로다!
계곡은 갈수록 깊어만 가고, 흐르는 물소리는 천연(天然)의 고향악(交響樂)이로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차도(車道)는 고요하고도 한적하여서 걷기에 편안하며, 굽이 굽이도는 개울따라 옥류교(玉流橋), 세진교(洗塵橋), 해탈교(解脫橋) 등을 건너니 하나 같이 피안(彼岸)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30여 분을 걸어 천인단애(千仞斷崖)한 협곡(峽谷)을 따라드니 우측 산 기슭에 내원사(內院寺:비구니 도량)가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슴니다. 도량(道場)은 정갈하고 2층으로 지어진 전각(殿閣)들이 여러채 보인다.
대부분의 전각들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禁)하고 있으며, 감로수(甘露水)도 불유각(佛乳閣:부처님 젖)과 방문객을 위해서 죽림원(竹林院) 맞은편 언덕 위에 따로 설치해 놓았다. “佛乳閣(부처님 젖)”의 이름이 특이하며, 비구니(比丘尼) 도량에 잘 어울리는 기발한 발상이라 생각된다.
선나원(禪那院:大雄殿) 아래 놓여 있는 ‘기와장’에 ‘禪是佛心 一切唯心造’라 써서 간단한 불사를 하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주산(主山)은 웅장하고 수려하며 청룡(靑龍)은 허(虛)하여 죽림원(竹林院) 건물을 2층으로 지어 비보(裨補)하였고, 백호(白虎)는 웅장하고 아름답게 휘감아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연꽃이 반쯤 피어있는 “연화반개형(蓮花半開形)”이다.
선나원(禪那院)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이고 근래에 지은 건물이라 고색어린 멋은 없으며, 이 밖에도 죽림원(竹林院), 정려헌(靜慮軒), 불유각(佛乳閣), 심우당(尋牛堂), 원화당(圓華堂), 선해일륜(禪海一輪) 등 크고 작은 전각들이 즐비합니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도량을 벗어 나오니, 오고가는 여승(女僧)들이 간간이 보입니다. 세속(世俗)의 인연(因緣)을 멀리하고 무엇을 찾아 오셨는고~? 파르나니 깎은 머리에 연화(蓮花)가 피어나소서!
입춘(立春)이 가까워 서 인지 언땅이 녹아 질척 질척하여 걷기에 조심스럽다. 올 겨울은 비교적 포근한 날씨였지만,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포근하여서 20여 분을 오르니 온몸에 땀이 솟는다.
모두들 잠시 휴식하면서 겉 옷을 벋어 가방에 챙겨 넣는다. 입안도 팍팍하여 준비해 온 과일을 나눠드시니 한결 기분이 새롭슴니다. 후미에서 필자를 비롯하여 서부장님, 김해진님, 황고문님, 벽송대장님, 김명숙 부회장님 그 일행들(3명)과 사진촬영도 해 가면서 쉬엄 쉬엄 오름니다.
날씨는 포근하여 봄 내음을 느끼게 하나 잎 떨어진 나목(裸木)에는 아직도 싻눈이 단단하여 겨울 정취 그대로다! 원효스님 당시에 제자들이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는 위험이 있어 산신령(山神靈)에게 부탁하여 없엤다드니... 다래넝쿨은 가끔씩 보이나 칡넝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인(聖人)의 신력(神力)을 내 어찌 다 알겠는가 마는, 오늘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기분이 듬니다. 그럭 저럭 ‘천성산2봉(비로봉)’의 8부 능선쯤 올랐을까? 앞서 오르시 던 꼬추까루 서부장님(79)은 등산이 힘에 겨우신지 오늘도 그 특유의 노래를 부르면서 ‘에너충전’에 여념이 없으시다!
드디어 정상이 가까워 지는가? 경사(傾斜)도 완만하고 시계(視界)도 넓어져서 천하(天下)가 서서히 열리며 펼쳐지는데~ 이 맛에 산을 오르는 기라! 잠시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한 두 곳에 벼락맞은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어 알맞은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오르니, 김해진님도 보시고는 그런 것 같으다고 고개를 끄덕이신다.
속설에 “벼락맞은 마가목을 지팡이로 쓰면 굽은 허리가 펴진다.”라고 하던데... “꿩 대신 닭 쓴다.”고 비록 ‘상수리나무’일망정 행운은 행운이제! 전례 없이 김해진님과 황고문님께서 여러장의 사진을 찍어주시니... ‘행운목(幸運木)’이 틀림 없는가 봅니다!
한참을 웃으며~ 신나게 정상에 올라서 “태극기 문양이 새겨진 옛 표석(標石:천성산 818m)”을 배경으로 오랜만에 독사진도 찍슴니다. 연하여 바로 옆 봉우리에 새로 세운 자연표석(自然標石)에는 “천성산2봉.855m, 비로봉”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서로 다른 높이에 의문이 갑니다.
여러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주위의 적당한 곳에서 모두들 중식을 드심니다. 앉은 자리는 ‘상수리나무’들의 낙엽이 어찌나 많이 쌓여 있는지... 푹신 푹신하여 따뜻한 온기(溫氣)를 느낌니다.
필자를 비롯하여 황고문님, 벽송님, 여울목님, 김광남님, 김명숙님 일행(4명) 등이 빙 둘러 앉아 함께 드시니~ 밥은 한 그릇에 반찬은 20여 가지도 넘슴니다. 그 중 이경숙님은 오늘 새벽 4시에 일어나 반찬을 만들어 오셨다면서 어찌나 솜씨가 좋으신지, 찌짐이나 새우튀김이 가히 일품이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능선님은 어느새 집에서 담근 더덕(沙蔘)주를 가져와서 애주가(愛酒家) 분들에게 한작씩 돌리신다. 이래 저래 山 인심은 언제나 푸근하고도 따뜻합니다 그려!
점심 후 갈길이 멀어 서둘러 ‘천성산 정상(1봉)’으로 나아가니, 능선길은 완만하여 편안하고 점심후라 배도 든든하여 걷기에 한결 수월합니다. 3~40여 분을 걸었을까? 천성산 ‘화엄벌(늪지대)’이 가까워 질수록 기이한 소나무들이 많아 모두들 사진촬영에 바쁘고, 포근한 날씨에 언땅이 녹아 어찌나 질척 질척거리는지~ 진행이 더딤니다.
정상 부근에 이르니 옛 ‘통신부대’는 철수하고 ‘정상(천성산.922m)’으로 가는 등산로만 좁다랗게 개방하고 양쪽으로 철쪼망을 세워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안내문에 군부대 철수 이 후 ‘지뢰제거’를 하였으나 미확인 지뢰가 있을 수 있으니 출입을 통제한다고 되어있으며, 아울러 ‘화엄벌(습지대)’을 보호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철책으로 둘러 놓았다.
“화엄늪(산지습지)”은 신라 때 원효대사가 천여명의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했다는 유래가 있는 곳으로 습지가 형성되어 이탄(泥炭 : 늪에 살던 식물들로 만들어진 흑갈색의 퇴적물)층이 형성되어 있고, 앵초, 물매화, 잠자리난, 흰제비난, 끈끈이주걱, 이삭귀개 등의 다양한 습지식물(濕地植物)이 서식하고 있으며, 2002년 2월 1일에 ‘자연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 면적이 ‘124,000제곱미터(2만8천평)’라 한다.
토질이 이탄(泥炭)층으로 되어 서 인지 이 곳 주위는 더욱 질어서 정상봉은 가지 못하고 후미에 7~8명은 옛 우회(迂廻) 등산로를 따라 나아갑니다. 20여 분을 걸어 정상봉 옆의 바위를 배경으로 간단한 기념촬영을 하고 잠시 주위를 둘러 봅니다.
이 곳 천성산(千聖山. 922m)은 백두대간의 강원도 매봉산 부근에서 동남쪽으로 한지맥이 흘러나와 응봉산, 백암산, 청송의 주왕산, 포항의 내연산, 경주의 단석산을 거쳐 영남의 알프스(가지산, 신불산, 천황산, 제약산, 영취산) 일대를 지나 ‘천성산’에 이르고 다시 그 잔여지맥은 부산의 금정산, 구덕산을 거쳐 몰운대에서 남해바다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낙동정맥(洛東正脈)’이라 한다.
人生은 유한(有限)한데 화엄벌은 여여(如如) 하구나
성인(聖人)은 간데없고 華嚴의 진리는 무궁하여서
범부(凡夫)가 곧 聖人이요, 聖人이 곧 凡夫로다!
20여 분을 걸어나려 원효암(元曉庵)에 당도하니 우람한 범종각이 첫 눈에 들어온다. 현판에 “호국사자후종각(護國獅子吼鐘閣)”이라 새겨져 있어 특별하고, 도량내 전각(殿閣)의 수는 비교적 단촐하다.
심우당(尋牛堂)앞에 놓인 기와에 간단한 불사(佛事)를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국세(局勢)가 웅장(雄壯)하고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산 첩첩, 물 겹겹 그야말로 중중포리(重重袍裡)다!
과시(果是) 대장부의 기상이 넘쳐나고 천하의 도인(道人)이 머무를 만한 곳이로다! 얼마를 쉬면서 도량을 거닐다가 아쉬운 발걸음으로 홍룡사로 하산합니다. 홍룡사 가는 길은 경사도 완만하고 땅도 꼽꼽하여 걷기에 한결 수월합니다.
30여 분을 걸어나려 홍룡사에 도착하니 멀리서도 그 유명한 “홍룡폭포(虹龍瀑布)”가 첫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찌를 듯 한 울창한 소나무숲 옆에는 ‘가홍정(駕虹亭)’이 2층으로 지어져 있는데, 정면3칸 측면2칸의 누각(樓閣) 규모이다.
안내문에 양산 대석에 살던 석은(石隱) 이재영(李宰榮)이 1918년에 죽우(竹友) 권순도(權順度)와 같이 정자를 세웠으나, 중간에 허물어져 없던 것을 2011년 양산시에서 새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홍룡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무지개 다리에서 올려다 보는 경치가 좋고, 그 옆으로 벼랑 끝에 산신각(山神閣)이 제비집 모양으로 지어져 있다. 몇 계단을 더 오르면 우측 벼랑 끝에 근래에 조성됀 “약사대불”을 모셔 놓았고, 폭포 바로 옆 좌측으로는 관음전(觀音殿)이 지어져 있다.
관음(觀音)보살님은 세상의 모든 중생들의 소리를 다 들으시고, 여기서는 폭포의 아름다운 소리까지도 들으시는 가 봅니다! 폭포는 어찌나 높은지~ 카메라에 담기도, 올려다 보기에도 힘듬니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이 포근한 날씨 덕에 빙벽(氷壁)이 녹아서 가느다란 물줄기라도 내려 주시니... 절반은 만족합니다 그려! 몇 몇 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도량을 한바퀴 휘~ 돌아 봅니다.
다시 돌아 나와 대웅전 옆으로 여러계단을 오르니 ‘무설전(無說殿)’이 진좌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大雄殿) 보다 더 높은 곳에 모셔져 있는 것도 드문일이 거니와 경주 ‘불국사의 무설전’은 텅 비어 있는 전각인데, 현판(懸板)의 글씨와 내부의 관음보살님이 서로 다르게 모셔져 있다.
선채로 간단한 예(禮)를 드리고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백호(白虎)는 그만 그만하고, 청룡(靑龍)은 우람하고도 장엄하게 뻗어나려 상당한 거리에서 안산(案山)의 역할 까지 겸하고 있도다! 개울은 폭포에서 흘러 내린물이 좌에서 우로 감아 돌아서 지근한 거리에 수구(水口)쪽이 열려 있어 비보림(裨補林)을 조성하여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옛 선인들의 지혜와 안목에 새삼 감탄하면서 돌계단을 내려오니, 안내문에 홍룡사(虹瀧寺)는 신라 30대 문무왕 13년(673)에 원효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조선 제14대 선조대왕 때까지 ‘영남제일선원’으로 천불전(千佛殿), 천불선전(千佛禪殿), 관음전(觀音殿)을 비롯하여 20여 동(棟)의 전각이 있었는데, 임란병화로 소실되고 오늘날은 관음전, 산신각, 약사대불, 무설전, 범종각, 대웅전 등 비교적 단촐하다.
개울을 건너 송림(松林)숲을 지나 오니 연이어서 편백나무가 잘 조림되어서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언덕 아래는 푸른 녹차나무가 한밭 가득하여서 일주문(一柱門) 주위를 상록수(常綠樹)로 가꾸어 놓았다.
황고문님과 옛 얘기를 나누면서 주차장에 당도하니, 처음오신 낯선 회원님(만백산악회) 한분이 ‘섹소폰연주’를 하면서 한판 신나게 놉니다!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드니... 전례 없던 흥겨움에 신명이 절로 납니다! 남산이여! 영원하소서!! 홧~팅!!!
단기 4348년(서기 2015년) 1월 25일
양산시(梁山市) 천성산(千聖山. 922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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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든님들! 잘 계시죠? 등산후기가 많이 늦었슴니다.
당일 산행에 동참하셨던 모든 회원님들(48명)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아울러 진행에 수고 하셨던 구윤서 회장님을 비롯하여, 벽송대장님,
윤갑용부회장님(총무), 김미소(여총무)님, 능선(운영위원장)님, 윤상복(부산대장)님 등
많은분들의 수고에 깊은 감사를 드림니다. 연하여 황고문님, 김해진님, 김서방님의
좋은 사진자료를 활용한 것에도 감사 감사를 드림니다.
님들! 이제 2월1일 입니다. 입춘(2/4)이 내일 모래 앞으로 다가 왔슴니다.
봄맞이 잘하시고 2월은 더욱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
천성산에서 많은 역사와 모르던 것을 배우고 갑니다.
스처가는 산행에서 몸과 마음까지 건강을 챙길수 있으니...감사 합니다.
항상 수고하심에 고맙습니다.
황고문님이 다녀 가셨군요!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대자연도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늘 보이지 않게 남산을 위해 노력하심에 감사드림니다!
천성산산행에 동참하지 못해서 아쉬웠었는데 고문님 후기글을 읽고나니 예전에 천성산 산행땐 그냥 눈으로만 산행을 한것같습니다 한권의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고문님!존경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박회장님과 함께하지 못해 몹시 아쉬웠슴니다.
편히 잘 계시죠? 다음 산행때는 꼭 함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변변찮은 장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 드리며~
남산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실 것을 바람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