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카터(Kevin Carter)라는 사진기자가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백인 남자였지요. 20대 초반에 사진을 찍기 시작해 주로 고국의 정치적 갈등에 대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케빈 카터는 동아프리카의 극심한 기근을 취재하기 위해 수단으로 갔습니다. 수단 아요드의 한 식량배급소에서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상을 찍고 있었던 그는 옆 수풀 속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작은 소녀가 구호소로 걸어갈 힘조차 없어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먹잇감이 죽길 기다리듯 소녀를 조용히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카터는 사진을 찍은 후 독수리를 쫓아내고 나무 아래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1993년 3월에 찍힌 이 사진은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주요 신문들에 실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기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부터 케빈 카터는 분노에 찬 편지와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아야했습니다. “당신은 왜? 그 아이를 구하지 않았느냐!”라는 질타의 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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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 케빈 카터 촬영 1994 퓰리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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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기근 지역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당시 전염 가능성 때문에 희생자들을 만지지 못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도 카터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친한 친구들에게 “그 아이를 안아주지 못해 너무나 미안해”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는 카터는 퓰리처상을 받은 그 이듬해 인생의 정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사진을 찍은 비참한 순간과는 별도로, 중요한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 데 대해 잠깐이나마 느꼈던 직업적 기쁨(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이 두고두고 엄청난 죄책감으로 되돌아와 견디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나이가 33살. 한 장의 사진이 불러온 파장 치고는 비극입니다.
지금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는 저널리즘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퓰리처상 보도사진展>이 열리고 있습니다. 1942년 수상작부터 지난해 수상작까지 전시되고 있는데, 이렇게 대규모로 사진이 모인 것은 1998년 이후 두 번째입니다.
최첨단 영상의 시대에 사진 한 장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상은 한번 흘러가면 그 뿐이지만, 사진은 찍는 순간이 영원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사진 속 인물의 표정과 눈빛, 동작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노라면 때로는 인류의 이성이란 이름아래 벌어지는 온갖 흉악한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 하나가 지니는 온 우주만큼의 무거움을 찬찬히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들이 들려주는 제각각 기막힌 사연들을 조용히 귀담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첫댓글 누나 저도 보러 갈려구요..
같이 감 좋은데 내가 이제 일을 해야 할것 같다. 낼부터...
보건이가 이사진을 보더니 자기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네요. 많이 컸죠.
그러게 우리는 아이들을 단순히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어렸을적 생각해보아도 그들도 생각을 하는 하나의 인격체인거야 그치???
하나의 기사를 보고 느끼는 점이 참으로 다양하네.. 난 이기사를 보며 사진 배울때 들은 말이 떠올라 올린거였는데. 총을 맞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사가 있는데 ... 사진사가 총을 맞는 사람을 촬영해야하는지 총을 쏘는사람을 막아야하는지 ???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르침을 받을땐 진정한 사진사라면 사진을 찍어야한다고 배우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수 있는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난 과연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