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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다듬음.
출처 : 아시아 연방론
= 일본의 역사 =
B.C. 8000 繩紋(죠몽)시대
일본열도는 아시아 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약 6만년 전에 대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동물이나 물고기를 잡아 먹거나 식물을 채집하는 수렵채집경제였다.
가옥은 땅을 얕게 파내고 거기에 기둥을 세워서 풀 등으로 지붕을 덮은 수혈식 주거였다.
주거 근처에 먹고 난 조개껍질을 버렸고, 그것이 쌓여서 생긴 패총이 지금도 일본 각지에 2000여개 이상이 남아있는데, 패총에서 석기나 죠오몽식토기(새끼줄 무늬가 있는 토기)가 나오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죠오몽인들은 돌·나무·동물 등 모든 자연물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주술로써 그 영혼을 달래어 생활의 안전을 기원했다.
이와 같은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약 만년 전부터 8000년간 정도 계속되었다. 이 시대를 죠오몽토기의 이름을 따서 죠오몽시대라고 부른다.
죠오몽 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호두·밤·도토리 등이 출토되고, 그것들이 식량으로 이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토리는 쓴 맛을 가진 탄닌이나 사포닌 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6000년쯤 전(B.C.4000년경)의 죠오몽시대 전기에 도토리의 떫은 맛을 제거하는 물표백법이 개발되었다. 즉, 모든 도토리를 햇볕에 말려 건조시킨 다음 껍질을 벗기고 열매를 빻아서 흐르는 물에 담구어 둔다. 다음에 그것을 뜨거운 물에 담구고 잿물을 중화제로 넣기도 하여 물을 바꾸어 주면서 끓인 다음, 말려서 분말상태로 만든다. 그 가루를 풀상태로 하거나 경단과 떡으로 만들어 먹는다. 이 기술은 식량의 대량 보존을 가능하게 만들어, 계절에 좌우되지 않는 안정된 식량공급이 이루어졌다.
물표백 기술의 개발에 의해 죠오몽 시대는 급속한 발전을 하였으며 정착성이 높은 대규모의 취락이 생겨났다.
토우 등의 의례유물이 늘어나고 계급발생을 나타내는 돌로 만든 귀걸이나 조개로 만든 팔찌도 발견된다. 교역도 성행했는 듯, 원산지에서 멀리 운반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죠오몽시대는 약 4000년전(B.C.2000년경) 최성기를 맞이하고 동일본이 그 중심지였다. 유적으로 추산한 당시의 인구는 27만명이고 그 후 화전과 벼농사 기술이 대륙으로부터 들어왔지만, 큰 사회적 혼란없이 이를 받아들여 한층 더 문화적 발달을 보였다. 그것은 나무열매의 이용을 중심으로 한 삼림경제의 충실로 인해, 고도의 농업경제를 별 저항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식물재배의 지식이나 기술의 발달, 계층화된 사회 등 문화적 전제조건이 이미 정비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B.C. 300 彌生(야요이)시대
기원전 3세기경 벼농사가 시작되고 동이나 철 등의 금속기가 사용되었다.
쌀은 수 천년 전 열대아시아에서 재배화된 것으로, 일본에는 중국남부로 부터 직접, 혹은 한반도 남부를 경유하여 전해졌다고 말해지는데, 벼농사의 전파에 의해 일본은 수렵채집경제에서 농경시대로 본격적으로 이행해 갔다.
당시의 농사짓는 모습은 동탁에 그려진 그림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동탁은 이 시대의 유적에서 수많이 출토되고 있고 제사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사람들은 벼농사 때문에 저지에 살게끔되고, 거기에 촌락을 형성했다. 이 시대의 모습을 전해주는 시즈오카시에 있는 토로 유적에는 수전이나 주거 유적과 함께 쥐가 들어가지 못하게 바닥을 높게 만든 고상식 창고 유적이랑 목제 농구가 남아있다.
이 때의 토기는 전시대의 것보다 튼튼하고 모양도 더 세련된 것으로 바뀌었다. 이들 토기는, 토오쿄오 분쿄오구의 야요이쵸오(彌生町)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야요이식 토기라고 부른다. 또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약 600년간을 야요이시대라고 한다.
1~3세기경이 되면,
벼농사 기술의 발달에 따라 촌락이 점차 커져 나라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유력한 지도자가 나라의 왕이 되고 강한 왕은 약한 왕을 복속시키고 더욱 큰 나라를 만들었다.
이 때의 일은 거의 알 수 없지만, 중국의 『후한서』속에 1세기경, 왜인의 나라에서 사신이 왔기 때문에 후한의 황제가 금인(金印)을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약 200년전 후쿠오까현에서 한 농부가 우연히 땅속에서 그 금인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漢倭奴國王]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나라는 후쿠오카시 부근에 있었던 작은 나라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 중국 『위지』의 「왜인전」에 의하면, 왜인의 나라는 30개 정도의 소국들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여왕 히미꼬(卑彌呼)의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이 가장 강력하고, 히미꼬는 3세기초 위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 야마타이국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는 상태이다.
A.D. 300 大和(야마토)시대
4세기경, 야마토지방(지금의 나라현)의 호족세력이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야마토정권을 성립시켰다.
야마토정권은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중앙의 정치조직을 정비하고 야마토라는 국가를 세우고 지배자를 대왕으로 불렀다. 이 때의 유력자들의 고분이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사까이시(堺市)에 있는 닌토쿠천황(仁德天皇)의 고분이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당시의 고분은 앞이 4각형이고 뒤가 원형인 전방후원분이 많으며, 고분 주위에 인간, 동물, 집, 배 등의 모양을 한 토기(하니와)를 배치하고 있다.
5~6세기에는 한반도나 중국대륙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일본에 살게 되었다. (국제 일본문화센터의 하니하라 카즈오 교수는 야요이-나라시대에 걸친 천년동안에 한반도로부터 백만명에 가까운 이주민이 있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통상 도래인(渡來人), 혹은 귀화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토목, 양잠, 직물 등의 전문적인 일에 종사 하거나, 관청에서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이나 계산, 외교문서 작성 등을 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이나 지식을 통하여 일본인의 생활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보여진다.
유교가 서적과 함께, 불교가 경전이나 불상들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에 전파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이것들이 모두 일본인의 학문, 사상, 종교, 예술등의 초석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593 飛鳥(아스카)시대
6세기 중엽 가장 유력한 호족 세력이었던 모노베씨(物部氏)와 소가씨(蘇我氏)가 정권쟁탈전을 벌인 결과,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인 소가씨가 보수적 세력인 모노베씨를 누르고, 조정의 정치를 거의 독점하게 된다.
또한 이 때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가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섭정에 취임(593), 그는 소사씨 등의 호족과 손잡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의 기초를 닦기위해 노력했다. 우선 관위 12계를 만들어서 관리들의 순위를 정하고, 능력있는 자를 관리로 발탁했다.
또한 불교와 유교 사상을 받아들여 헌법 17조를 제정했다. 그것은 「화합이 중요하다」「부처님을 공경하라」는 따위의, 천황을 모시는 관리들의 마음가짐을 기술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헌법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는 또 사신과 유학생등을 중국에 파견 (견수사), 선진문화의 수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쇼오토쿠태자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서 야마토의 이카루(斑鳩)에 호오류우지(法隆寺)를 세웠다. 이 절은 한번 불이 났지만 곧 재건되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호오류우지에는 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훌륭한 미술·공예품이 보존되어 있으며, 호오류우지 뿐만 아니라 나라에 있는 츄우구우지(中宮寺), 쿄오토에 있는 코오류우지(廣隆寺)에도 예술성이 뛰어난 미륵보살상이 남아 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야마토의 아스카(飛鳥)나 이카루를 중심으로 번성했기 때문에 아스카문화라고 부른다. 아스카문화는 대륙의 영향이 강하여, 멀리 그리이스나 서아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적지 않다.
쇼오토쿠태자의 사후, 소가씨들의 세력이 더욱 강화되어, 그들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황태자인 나까노 오오에(中大兄)와 호족의 한 사람인 나까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 등은, 645년 소가씨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이것을 大化의 改新이라고 한다. 大化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연호이다.
대화개신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그 당시까지 호족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인민을 모두 천황이 소유하는 것으로 전환시키고(公地·公民化), 호족은 도읍이나 지방의 관리로 만들어 버렸다.
중앙정부에는 제사를 관장하는 신기관(新祇官)과 정치를 담당하는 태정관(太政官)의 2관과 8省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중앙정부가 임명한 관리가 국사(國司)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다. 모든 인민을 호적에 등록시키고, 그에 따라 일정한 토지(口分田)를 나누어 주었다. 토지에 따라 쌀이나 천으로 세금을 조정에 내게하고, 사람이 죽을면, 토지를 반납하게 했다. 그 밖에도 남자에게는 도읍이나 지방의 토목공사 등에서 일해야 하는 勞役의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도읍지나 큐우슈우의 국경을 경비하는 병역의 의무도 있었다.
710 奈良(나라)시대
710년에, 조정은 중국의 당왕조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을 모델로 삼아, 나라에 헤에죠오교오(平城京)라는 도읍을 건설했다. 가로 세로로 넓은 도로를 만들고, 천황의 궁전, 귀족들의 저택, 절 등이 늘어서 있었다. 푸른 기와지붕에 빨간 기둥, 흰 벽의 당나라풍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 나라의 도읍지는 마치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 같다고 노래 불려졌다.
平城京은 약 70년간 수도로서 번창했는데, 이 동안을 나라시대라고한다.
나라시대는 大寶율령에 근거하여 천황에 의한 정치(율령정치)가 행해지고, 도읍지는 번창하고 귀족들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시장이 생겨나고, 708년에는 화폐도 사용되어졌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노역, 병역때문에 가난에 허덕여야만 했다. 그중에는 토지를 버리고 도망쳐버리는 자도 생겨났다.
그래서 조정은 새로이 초지를 간척하는 자에게는 그 토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해 주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유력한 귀족이나, 신사나 절, 지방호족 등이 앞을 다투어 대규모적인 간척사업을 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장원)는 그 후에도 점점 확장되어가서, 율령정치의 근본인 公地公民제도가 붕괴되어 버린다. 조정의 정치도 부패하여 넓은 토지를 가진 귀족이나 승려들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다.
나라시대 중반, 흉작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심이 깊었던 쇼오무 천황(聖武天皇)은 부처의 힘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에다 토오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그 안에 본존으로 높이가 16m나 되는 금동대불을 만들었다.
토오다이지 바로 옆에 쇼오소오잉(正倉院)이 있는데, 이것은 쇼오무 천황이 사용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지금도 수많은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중국이나 인도, 페르샤등으로 부터 수입된 진귀한 공예품도 섞여 있다. 그 유물들이 1200년 뒤인 오늘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쇼오소오잉이 통풍이 잘되고, 습기를 막는 일본풍토에 적합한 목조 건축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천황의 허가 없이는 절대로 열 수가 없는 창고이기 때문이다.
조정은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십수차례나 견당사를 파견, 당왕조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텐표오 문화(天平文化)라고 불려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정치가 불교에 의한 진호국가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고도의 발전을 보이고, 또한 문화전반에 걸쳐 당문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국가에 의한 당문화의 적극적인 섭취를 반영하여, 현란한 문화의 추진자는 귀족계급이었으며, 중앙편중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万葉集』와 같이 각계 각층 사람들의 적나라한 생활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생겨났으며, 천황 가문의 유서 깊음과 그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사편찬이 국가적 사업으로 거행된 것은 당나라에 대한 일본의 국가 의식의 발전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
平城京 :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한 것이지만, 규모는 그보다 작은 동서 4.2km 남북 4.7km의 크기였다. 북쪽 중앙에 천황의 궁궐이 있고, 주작대로를 경계로 左京, 右京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동서남북으로 뻗어진 도로에 의해 구획되어지고 남북은 條, 동서는 坊으로 위치를 표시했기 때문에 이런 도시형태를 조방제라고 한다.
794 平安(헤이안)시대
칸무(桓武)천황은 혼란한 정계의 기풍을 일신하고 율령정치를 쇄신하기 위해서 794년 헤이안쿄오(平安京=오늘날의 교오토)로 옮겼다. 이후 1192년 카마쿠라 막부가 성립되기까지 약 400년간을 헤이안시대라고 부른다.
헤이안 초기의 율령정치 쇄신과정에서 후지와라(藤原)씨가 정치적으로 대두되게 된다. 이들은 정부의 중추부를 장악하고 다른 유력씨족들을 제거하는 한편, 천황의 외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셋쇼오(攝政), 칸빠쿠(閔白)직을 독점했다.
그 결과 천황을 대신하여 후지와라씨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고 소위 셋칸정치(攝閔政治)를 전개했다. 셋쇼오·칸빠쿠 둘 다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집행하는 직무로서, 천황이 어릴 때는 셋쇼오, 천황이 성인이 되고 나면 간빠쿠가 정무를 담당했다.
후지와라씨들이 이 지위를 독점·세습화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는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독재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攝閔政治)의 전성기는 10세기말에서부터 11세기 초반에 걸친 후지와라 미찌나가(藤原道長)·요리미찌(賴通)시대였다. 중앙에서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가 확립되어간 반면, 지방에서는 정치나 치안의 기강이 흐려지고, 그러한 와중에 즈료오(受領)로 불리는 지방관리들이 사재를 축적, 경제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정치가 천황중심의 율령정치에서 후지와라씨 중심의 귀족정치로 이행되어감에 따라, 공지공민제가 붕괴되고 토지의 사유화를 의미하는 장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그런 장원을 가장 많이 소유한 것은 물론 후지와라씨들이었다. 그 장원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은 셋칸정치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9·10세기에는 고대국가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그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앞시대와 마찬가지로 귀족문화이긴 하지만 종래의 唐風文化와는 달리, 당풍문화를 토대로 한 문화의 일본화가 진척되어 國風文化가 꽃을 피우게 된다. 국풍문화는 당풍문화를 일본적으로 소화시켜 생겨난 귀족문화로서, 그 특색은 수도인 쿄오토에 사는 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하여 우미·화려하긴 하지만, 시야가 좁고 매우 감각적인 것이었다.
국풍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일본문학이었으며, 그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카나문자의 발명이었다.
카타카나는 한자의 획에서 생겨난 것으로, 주로 승려들 사이에서 발달했으며,
히라가나는 한자의 초서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여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女手라고도 불렸다).
카나는 8세기말경부터 구체화되었지만, 이것에 의해 일본인들의 생활감정을 자유롭게, 또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궁중에 출사한 교양있는 여자들이 이 카나문자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모노가타리(物語=일종의 소설), 수필 등에서 걸작을 남기고 있고, 또 만요오슈(万葉集)이래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던 와까(和歌)가 복권되어 유행하게 되었다.
헤이안 중기 이후 후지와라씨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계급들이 쿄오토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새로운 계급층인 무사들이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토호나 부농들이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자기 영지내의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생겨난 계층이다.
이들 무사들은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되어 무사단(武士團)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였다.
11세기 중엽, 후지와라씨들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시라까와(白河)천황은 상황이 되어 원정정치를 펴면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 후 12세기 중엽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생기자
겐지는 상황측에서,
헤이지는 천황측에서 싸웠다.(호오겐·헤이지의 난)
무사들은 이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는 정치의 실권을 잡고, 1167년에 태정대신에까지 올라 平氏들의 권력은 극에 달했다.
平氏들의 권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까와법황(後白河法皇)은 겐지세력과 결탁,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平氏들을 전멸시키고, 源氏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1192 鎌倉(가마쿠라)시대
平氏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고, 카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무사정권을 수립했다.
카마쿠라 막부는 이후 약 140년간 지속되는데, 이 기간을 카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이 때부터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700여년간 무사들에 의한 군사독재정치가 지속된다.
카마쿠라막부의 성립은 종래의 귀족정권에 대해 무사가 독자적 정권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며, 이는 장군과 그 부하(고케닌=御家人이라고 함)가 토지를 매개로 맺은 주종관계를 그 기초로 하고 있으며, 막부는 그중 유력한 자를 슈우고(守護)·지토오(地頭)로 임명하여 전국적 지배를 실시했다.
하지만, 정권의 구조 자체에는 고대적 성격이 남아 있었고, 쿄오토에는 천황과 귀족들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 형성의 한 단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즉, 카마쿠라 시대는 公·武 2중정권의 시대였던 것이다.
요리토모가 죽자, 그의 처인 마사코(政子)의 친정인 호오죠(北條)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싯켄(執權) 정치를 하게 된다.
13세기 후반,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원정(1274, 1281)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두 번 모두 태풍의 덕택으로 여·원 연합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약소 고케닌들의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어 불만이 누적, 막부의 세력을 따르지 않게 되고 막부의 세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 고다이고 천황은, 카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 시대 정치의 2중성은 문화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 귀족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흥 무사계급이 갖는 실질적이고 강건한 기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생겨나고, 또 무사계급은 고전문화를 받아들여 무가의 독자적인 문화도 창출해 냈다. 그 경우, 문화의 창조에 민중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과 송나라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는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세태였기 때문에, 무사나 백성들은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불교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헤이안 시대의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물을 중요시 한 것과는 달리, 알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신란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정토진종을 열고, 니찌렌은 남묘호오렝게쿄오를 외우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일련종을 개창했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은 무사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다.
좌선을 통해 정신을 단련시키는 선종의 엄격함이 무사들의 심정과 일치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교의나 경전을 갖지 못하고 있던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도 이 무렵, 이세신궁의 신관이 불교 등의 교의를 참고로 해서 신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정립할려고 했다.
1338 室町(무로마치)시대
1334년, 고다이고천황은, 천황 중심의 정치를 부활시켰다. (建武의 중흥) 그러나 그것은 고대적인 천황과 귀족정치의 이상을 쫓는 것이었고, 무사계급의 요구나 의향을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
그중 가장 유력한 무사였던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반란을 일으켜 쿄오토로 쳐들어 가자, 천황은 요시노(지금의 나라 현)로 도망쳐 버렸다.
1336년, 타카우지는 쿄오토에서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고(북조), 1338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쿄오토에서 막부를 개설했다. 이 아시카가막부는 타카우지의 손자인 3대 장군 요시미쯔가 쿄오토의 무로마찌에 화려한 저택을 지어 그곳을 막부로 이용했기 때문에 무로마찌막부라고 하고, 이 시대를 무로마찌시대라고 한다.
한편, 요시노로 도망간 고다이고천황은, 거기에서 조정(남조)을 세웠기 때문에 두 개의 조정이 대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시대를 특히 남북조시대(1336-1392)라고 부른다.
무로마찌막부는 카마쿠라막부보다도 장군과 무사의 유대가 약했기 때문에, 유력한 슈우고는 자신의 소유지를 확장하고, 군사력을 양성, 그 지역을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슈우고를 슈우고 다이묘오(守護大名)라고 한다.
카마쿠라시대 말기부터 왜구가 한반도와 중국에 걸친 해역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요시미쯔는 그것을 단속하여 중국의 명왕조와 정식 무역을 개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467년, 8대 장군 요시마사의 때, 장군의 후계문제를 놓고 무사들은 두 파로 나뉘어, 쿄오토를 중심으로 전란이 11년간이나 계속되었다(오오닌의 난). 이 싸움으로 말미암아 장군의 힘이 약화되고, 장원제등이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실력만 있으면, 신분이 아래인 자가 윗사람을 제거하고 지배자가 된다고 하는 하극상의 사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가 100여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하고, 이 시대의 새로운 지배자들을 센고쿠다이묘오(戰國大名)라고 한다.
무로마찌시대에는 농업의 기술이 발달하고, 물레방아가 사용되어 벼농사 뒤에 보리를 심는 이모작도 널리 행해지게끔 되었다. 농민은 각 촌락마다 회합을 열어 농사기술이나 세금(年貢)등에 관해 상담했다. 각 촌락마다의 유대가 강화된 농민들은 서로 단결하여 막부에 세금을 경감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전당포나 양조장등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것을 쯔찌잇키(土一揆)라고 한다. 또 잇키는 종교적인 것도 있었다(一向一揆)
센고쿠다이묘오는 무기 등을 조달하기 위해 상공업자를 자신의 영지에 모아서 보호했기 때문에, 상공업도 발달했다. 상품유통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각지에 시장이 서고, 운송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대상인들도 증가했다. 또 상인이나 기술자들의 동업조합인 자(座)도 전국적으로 결성되고, 각 지방의 특산품도 생산되게끔 되었다.
무로마찌시대는 막부가 쿄오토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다움과 귀족적인 것이 융합되어 새로운 무가문화를 창조했다. 그것은 중국의 원·명조의 문화나 선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간소하면서도 깊이있는 문화였다. 또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까지 퍼져서 각지에 민중의 문화가 생겨났다.
건축물로는 장군 요시미쯔가 쿄오토의 키타야마(北山)에 지은 은각이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은각은 쇼잉즈꾸리(書院造)라고 하는 선종의 양식으로, 쇼잉즈꾸리의 건물에는, 방 안에 토코노마(床の間)나 치가이다나(違い棚)가 있고, 타타미를 깔고, 방과 방사이에는 후스마나 아카리쇼오지(明障子)로 구분하고 있다.
이 양식은 점차 무사들의 주택에 사용되게 되고, 현재의 일본주택 건축의 원형이 된 것이다. 또 정원은, 무로마찌 초기에는 금각사처럼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었으나 차츰 자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카레산스이(枯れ山水)라는 양식으로 바뀌어갔다. 이 양식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류우안지(龍安寺)의 정원이 유명하다. 이것은, 흰 모래를 깐 곳에 바위를 배치한 것으로 선종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말해진다.
회화에서는 송·원나라에 성행한 수묵화가 전해져서 발달하고, 선승인 셋슈우(雪舟)처럼 독자적인 일본적 수묵화양식(산수화)을 창조해낸 화가도 있다.
전통예능방면에서는, 간나미·제아미부자가 그 당시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소박한 연극을 노오가꾸(能樂)로 완성시켰다.
노오가꾸라고 하는 것은, 주역은 가면을 쓰고, 화련한 의상을 입고 요오쿄쿠(謠曲)에 맞추어 춤을 추는 가무극으로, 독특한 상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다.
노오가쿠와 함께 공연하는 쿄오겡(狂言)은, 노오가쿠와는 대조적으로, 가면을 쓰지 않고, 수수한 복장으로 하는 회화극으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천박함을 익살스럽고 사실적으로 연출한다. 이 노오가쿠와 쿄오겡은 이 시대의 연출형식이 그대로 이어져서 공연되고 있다.
1573 安土桃山(아즈치 모모야마)시대
중세유럽에서는 봉건제도와 카톨릭교회가 각각 속계와 정신계에 있어서 강력한 지배력을 갖고 있었으나, 십자군·르네상스·종교 개혁·지리상의 발견 등에 의해서 그 지배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의 배경에는 상공업자등의 도시시민과 자영농민 등의 신흥세력의 대두가 되었다.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절대왕정의 경향을 강화하고, 활발한 지중해무역을 통하여 동양의 향료, 차, 비단, 약품의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15세기 중반 오스만 터어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루트를 개발해야만 되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은 희망봉의 발견과 인도 향로 발견에 성공, 16세기에는 동쪽 항로에 의한 무역루트를 장악했다.
한편 스페인은 콜럼부스의 서인도제도 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로 개척 등 서쪽 항로로 필리핀에 도달, 1571년에는 마닐라를 점령하여 동양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와같이 동서로 부터 닥쳐오는 유럽 세력의 동양 진출이, 드디어 1543년 2명의 포르투갈인이 큐우슈우 남방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함으로써 일본에도 닥쳐왔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표착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인의 내항과 함께 총의 전래, 기독교의 전파가 일본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주목해야 될 사항이다.
오오닌의 난 이후 계속된 전란의 시대는 16세기 후반이 되자 비로소 통일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선두 주자가 바로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識田信長)였다.
그는 센고쿠다이묘오의 한사람이었으나 차례차례로 다른 다이묘오를 복속시키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는 1543년 타네가시마에 전래된 조총을 국산화하고 대량생산하게 하여 소총부대를 편성, 재래의 전투양식을 바꾸게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1573년, 노부나가는 쿄오토로부터 장군을 쫓아내고, 무로마찌 막부를 멸망시키고, 아즈찌(安土)에 자기의 거성을 짓고 천하통일 사업에 전념했다.
한편 노부나가는 상업이나 수공업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하고(樂市·樂座), 기독교를 보호 장려하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과 무역을 했다(남만무역).
기독교는 스페인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프란시스코·자비엘이 가고시마에 왔으 때부터 전도가 시작되었다(1549).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인(당시 이들을 남만인이라 불렀다)은, 기독교 포교를 위해 무역을 하고, 노부나가는 불교세력을 견제하는 수단으로써 기독교를 보호하고, 또한 무역에 의해 유럽의 앞선 문물을 입수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 사업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심복가신인 아케찌 미쯔히데(明智光秀)의 공격을 받아 죽게 된다.(本能寺의 변 : 1582)
노부나가 사후, 권력을 장악한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히데요시는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으나 무사가 되어 노부나가 밑에서 출세를 거듭, 노부나가의 휘하의 가장 유력한 무장이었다. 그는 아케찌 미쯔히데를 처단하고 주도권을 잡고, 오오사카에 성을 건설,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천하통일 사업을 계승했다.
그는 토지조사를 단행, 전답의 수확고를 조사하여 세율을 정하는 것에 의해 농민지배를 확고히 다지고, 농민들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농민으로부터 무기를 거두어 들였다(칼사냥이라고 부름). 이에 따라, 병농분리가 실시되고 장원제가 소멸되었다.
히데요시는 1590년 끝내 천하통일을 완성했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출병했으나 두 번 다 실패로 끝났다.(일본에서는 文祿慶長의 役이라고 한다). 노부나가·히데요시가 활약한 시대를 아즈찌·모모야마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문화는, 새로이 등장한 센고쿠다이묘오나 호상의 영향으로 호화스럽고 웅대한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성(城)이다. 아즈찌·모모야마라는 시대의 이름도, 노부나가의 아즈찌성과 히데요시의 모모야마성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대의 다이묘오는 성을 자기 영지의 중심 평지에 짓고, 주위에 부하들이나 상공업자들을 살게하여 죠오카마찌(城下町)를 만들었다. 성은 적을 막는 것 뿐만 아니라, 다이묘오가 거주하는 곳이며, 정무를 행하는 관청이기도 했기 때문에,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웅대하게 지어야 했다.
다도가 이 시대에 성행했다. 다도에 쓰는 차(말차)는, 카마쿠라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선승들 사이에서 약으로서 사용되었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무로마찌시대에 귀족이나 무사, 부유한 상인들 사이에서 번져나가고, 그것을 센노 리큐우(千利休)가 다도라고 하는 예법으로서 완성했다. 리큐우는 다도의 정신은 간소한 속에 심오하고 풍부한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하여, 그 정신을 和敬정숙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또 이 시대에 남만무역을 통해, 여러가지 서양문물이 일본에 들어왔다. 현재도 쓰여지고 있는 빵, 즈봉, 카스테라 등의 외래어는 당시 포르투갈어로부터 일본어에 유입된 것들이다. 예수회 선교사이며 포르투갈인인 로드리게스는, 히데요시의 통역을 담당할 정도로 일본어가 능통한 사람으로 『日本大文典』을 편찬했는데, 이는 외국인이 쓴 최초의 일본어 문법책이다.
1603 江戶(에도)시대
① 막번체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약소 다이묘오의 하나였지만, 차츰 세력을 키워, 히데요시의 사후 1600년에 세끼가하라(關ヶ原)의 전투에서 토요토미파를 격파하고, 1603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에도(현재의 토오쿄오)에 막부를 설치했다. 이후 약 260년간을 에도시대라고 한다.
에도막부는 전국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은 영지외에도 쿄오토, 오오사카, 나가사끼 등 주요 도시를 막부직할령으로 직접지배했다. 또 토쿠가와씨 일족(親藩大名)이나, 이전부터의 가신(譜代大名)들에게는 에도에 가까운 영지를 나누어 주고, 세끼가하라 전투이후 가신이 된자(外樣大名)들에게는 東北, 四國, 九州등의 외곽지의 영지를 배분했다. 이와같이 막부가 나누어 준 영지를 한(藩)이라 하고, 그 영주를 다이묘오(大名)라 부른다.
막부는 전국의 한을 지배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조직(막번체제)를 구성했다. 장군의 밑에 정무를 분담하는 부교오(奉行)를 설치하고 있다. 또 비상시에는 막부 최고의 직책인 다이로오(大老)를 설치하고 있다. 막부는 다이묘오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칙(武家諸法度)을 제정하고, 만일 그것을 어기면 영지를 바꾼다든지, 몰수하는 무거운 벌을 주었다. 그러나 막부정책의 범위내에서는 다이묘오는 자기 한에서 독자적인 정치를 할 수가 있었다. 막부는 그밖에 조정의 권한을 제한하고, 사원의 행동에도 간섭을 했다.
3대장군 이에미쯔(家光)는, 다이묘오들의 정실을 에도에 거주하게 하고, 다이묘오들은 격년제로 에도와 자기 영지를 왔다갔다하게 하는 참근교대제를 만들었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또한 막부는 전국적 규모의 임시공사등도 다이묘오들에게 그 비용을 부담시켰다. 그것은 모두, 다이묘오들에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줌으로써 하극상을 방지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② 신분제도
막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총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배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농민으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세금(年貢)이 막부의 주된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백성들은 죽지 않게끔, 살지도 못하게끔 잘 생각해서 세금을 거두라」고 말하고 있다. 막부와 각번들은 규칙을 정해서 농민의 일상생활을 세세하게 지시하고, 제한했다. 예를 들면, 「쌀은 세금으로 바치는 것이므로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밥에는 보리나 무우 등을 섞어서 먹을 것, 술이나 차를 사마시지 말것, 의복은 마나 면이외에는 입지 않을 것」따위이다. 또 집 5~6호로 5인조를 구성하여, 납세나 방범의 책임을 공동으로 지게 했다.
소수의 무사계급이, 많은 수의 농민이나 쵸오닝(町人=상인이나 기술자층)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막부는 사공농상(무사·농민·직인·상인)이라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최상위 계급인 무사는 무예나 학문을 닦으며 허리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농민이나 쵸오닝 등이 무례를 범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 죽여도 괜찮았다. 농민이나 쵸오닝은 무사들과 달리 성도 없고, 다이묘오 행렬을 만나면 길에 엎드려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이와 같이 상·하를 차별하는 사고방식은 무사사회에서는 주군과 부하의 주종관계를,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막부는 이와 같이 하여 막부체제를 견고하게 다져 봉건사회를 유지했다.
③ 쇄국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해외도항을 허가하고 주인선(=막부의 허가를 받은 무역선) 무역도 허가했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이 필리핀이나 태국, 베트남 등에 일본인 마을을 만들고 생활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활약한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맹렬한 기세로 전파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고, 이어 3대 장군 이에미쯔는 일본인의 해외도항금지 및 해외도항자의 귀국을 금지시키고, 이 규칙을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이 무렵 1637년 큐우슈우의 시마바라(島原)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금지 등에 반항하여,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오(天草四郞)를 대장으로 삼아 잇키를 일으켰다. 막부는 4개월 걸려 이 난을 진압하고, 이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예수나 마리아의 그림을 밟게하는 방법(후미에)으로 기독교 신자를 가려내어 처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기독교를 믿는 자들이 없어지지 않고 막부의 탄압과 순교가 계속되었다.
막부는 1639년, 쇄국령을 공포하여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에게만 나가사끼의 데지마(出島)에서의 무역을 허가했다. 이 쇄국정책에 의해서 일본은 서양문명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일본 독자적인 문화나 산업이 발달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④ 산업의 발달
에도시대가 되어 전란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자, 농업은 더욱 더 발달되었다. 농민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을 넓히고, 농구를 개량, 재배작물의 종류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쌀이외에 면, 생산, 채종유 등 각지의 특산물을 상인에게 팔아 부농이 되는 자도 있었다. 견직물, 술, 종이 등의 수공업도 발달했다.
산업의 발달이나 참근교대제의 영향으로 도로교통이 발달하여 전국에 5개의 가도가 생기고, 그 가도에는 역참이 생겨났다. 또 쌀 등의 대량의 물자를 수송할 때는 배가 빈번이 이용되게 되어, 항로도 발달했다.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상업도 융성하게 되었다. 막부나 다이묘오가 거둔 연공미는 오오사카에서 현금과 교환했기 때문에, 오오사카에는 코오노이께, 미쯔이 등과 같은 대상인이 생겨났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정치의 중심지였던 에도는, 인구 100만에 가까운 대도시가 되고, 오오사카는 상인의 도시,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천하의 부엌」이라고 말해졌다.
⑤ 쵸오닝(상인, 기술자) 문화
평화로운 세상이 되자, 학문과 예술도 융성하게 되었다. 막부는 중국의 유학, 특히 주자학을 보호하고, 막부에 學問所를 설치하고 무사의 자제들을 배우게 하였다. 주자학은 주군과 부하, 부모와 자식 등의 상하질서를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막부의 정치에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무사뿐만 아니라, 쵸오닝들도 「읽기, 쓰기, 주산」등의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다. 서민의 교육은 처음에 절에서 행해졌으나 나중에는 데라코야(寺子屋)라고 하는 교육기관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고, 승려나 신관, 실직무사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5대장군 쯔나요시(網吉)의 시대, 오오사카·쿄오토에서 쵸오닝들의 새로운 문화(겐로꾸 문화=元祿文化)가 생겨났다. 오오사까의 쵸오닝인 이하라 사이카꾸(井原西鶴)는 겐로꾸시대 서민들의 생활을 『好色一代男』이나 『世間胸算用』등의 소설에서 묘사했다. 그의 소설에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여 돈이 인간생활을 지배하게 된 사회에서, 돈에 운명이 좌우되는 서민들의 모습이나, 당시의 개방적인 향락생활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⑥ 3대개혁
에도시대가 시작되고 100여년이 지난 겐로꾸시대부터, 막부의 재정이 어렵게 되었다. 막부는 질이 나쁜 화폐를 자주 발행했기 때문에, 경제는 큰 혼란을 겪었다. 물가가 오르고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특히 하급무사들은 영주로부터 받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상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무사의 신분을 파는 자조차 생겨나오게 되었다. 18세기 전반, 8대장군 요시무네(吉宗)는 막부의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했다(亨保의 개혁). 우선 새 논을 개척하여 세수증대를 계획하고, 무사들에게는 사치를 금하고 절약을 명하였다.
경제가 점점 발달하고 화폐가 농촌에서도 사용되게 되자, 농민사이에서 빈부의 차가 커지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는 빈농들도 많아졌다. 또 냉해나 대기근이 발생하여 굶어죽는 자도 많이 나와 농촌의 비참은 극에 달하였다. 18세기 말, 막부는 재차 정치의 개혁을 단행, 무사에게 검약을 명하고, 무사가 상인들로부터 빌린 돈은 갚지 않아도 좋다는 명을 내려 무사의 생활을 도와 주었지만,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實政의 개혁)
막부는 재정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농민의 세금을 점점 더 부과하게 되었다. 생활에 곤란을 느낀 농민은 연공을 경감시켜 줄 것을 번주나 중앙정부에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힘으로써 저항했다(百性一撥). 막부는 이를 엄하게 금지했지만, 1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잇키는 자주 발생했다. 또한 가난한 쵸오닝들도 에도나 오오사카에서 미곡상이나 고리대금업자 등의 대상인을 습격하여 가옥파괴, 방화, 약탈 등을 감행하기도 했다. 1837년 전직 관리였던 오오시오 헤에하찌로오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오오사카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만다. 이 반란이 진압된 뒤, 막부는 세 번째의 개혁(天保의 개혁)을 단행하여 무사에게는 검약을 명하고, 대상인들에게는 매점매석을 하는 조합을 금지시키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이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⑦ 새로운 학문
유학이 여전히 주도적이었지만, 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학(國學)이나 양학(洋學)등의 새로운 학문이 생겨나왔다.
국학은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고유의 사상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국학자들은 『万葉集』나 『古事記』등을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했다. 국학자중에서 『古事記傳』이라는 『古事記』의 주석서를 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유명하다.
국학은, 후일 천황의 직접 정치를 부활시킬려고 하는 존황사상이나, 외국세력을 배척하는 양이사상을 키워, 막말에 일어난 존황양이운동의 추진력이 되기도 한다.
서양의 학문이나 지식은, 쇄국동안 막부가 무역을 허락한 네덜란드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에, 난학(蘭學)으로서 발달했다.
그중에서 특히 발달한 것이 의학의 연구로, 스기타 겐빠쿠(杉田玄白) 등은 네덜란드의 해부학책을 번역하여 『解體新書』를 출판했다. 또 히라가겐나이(平賀源內)는 새로 배운 학문을 응용하여 일본에서 최초로 발전기를 제작하고, 이노오 타다타까(伊能忠敬)는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일본 전국의 실측지도를 제작했다.
양학에 의해, 서양의 사정을 알게됨에 따라 막부의 쇄국정책이나 양이사상에 반대하고, 일본의 개국을 주장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막부를 무너뜨리는 운동과 연결되어 갔다.
⑧ 개국
일본이 쇄국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구미제국은 근대국가로서 조직을 정비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혁명을 수행하고 세계에 진출하여 해외시장을 손에 넣었고, 미국도 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러시아가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했지만, 막부는 쇄국을 고집했다. 그 후 영국, 미국의 선박이 일본근해에 와서 물과 식량의 보급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막부는 이를 물리치고, 개국론자들을 처벌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 네척을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왔다. 막부랑 에도 주민들은 대포가 있는 군함에 깜짝 놀라, 그것을 흑선이라고 불렀다. 1854년 막부는 미국의 강화 요구를 받아들여,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외국배가 시모다(下田)와 하코다떼(函館) 두 항구를 사용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어 1858년 미국 총영사 해리스가 시모다에 와서, 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조정이나 다이묘오 등과 상담을 했지만 모두 반대했다. 그러자 다이로오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일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5개의 항구를 무역을 위해 사용할 것을 허가하고 있고, 그밖에도 불평등한 내용이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수입품에 대해서, 일본이 자유로이 관세를 결정하는 권리(관세자주권)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국인이 일본에서 범법을 하더라도 일본의 법률로 재판하지 못한다고 하는 치외법권의 허용이었다.
존황론자나 양이론자들이 이이 나오스케가 조정의 허가없이 조약을 맺은 것을 강력히 비난하자, 이이는 이들 반대파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엄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결국 에도성의 문앞에서 반대파등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櫻田門外의 변:1860)
⑨ 막부말기
개국에 의해 무역이 시작되자, 생사나 차들의 수출이 급증하여, 국내 물자의 부족현상을 보이고, 물가가 앙등하여 경제가 혼란상태에 빠졌다. 그로 인해 하급무사들이나 서민의 생활이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쯔마(지금의 가고시마현)와 쵸오슈우(야마구찌현)의 하급무사 사이에서, 존황론과 양이론이 결합된 존황양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막부는 조정과 협력하여 정치를 행할 것, 즉 공무합체를 고려했지만, 존황양이파들은 더욱 자기들의 생각을 다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사쯔마번은 영국의 함대와 싸우고, 쵸오슈우번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국 함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통하여 사쯔마, 쵸오슈우의 두 번은 외국의 힘을 실감하고, 양이의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두 번의 젊은 무사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 존황도 막운동을 추진했다. 사쯔마번의 사이고오 타까모리, 오오쿠보 도시미찌등은 도사(코오찌현)의 사까모토 류우마의 중재로 쵸오슈우의 키도 타카요시 등과 동맹을 맺고 신정부 수립을 약속했다.
그리고 영국에 접근하여, 서양식 군비를 정비했다. 한편, 막부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군함이나 무기를 구입, 두 번에 걸쳐 쵸오슈우번을 정벌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이것을 지켜본 사이고오등은, 무력으로 막부를 전복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정치와 경제의 혼란으로 인해 에도와 오오사카에서 대규모의 폭동이 일어나고, 농민봉기도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 사회의 불안으로 인해, 구원을 바라는 심리에서 이세신궁에 참배하는 것이 대유행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15대 장군 요시노부(慶喜)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1867년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한다고 선언(大政泰還)하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천황정치가 부활했음을 정식공포했다(왕정복고).
그러나 신정부가 요시노부에게 관위를 주지 않고, 그의 영지를 모두 조정으로 귀속시키기로 결정하자, 막부측의 무사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쿄오토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신정부군은 도바, 후시미에서 승리하고 요시노부를 토벌하기 위해 에도로 향했다.
그 때, 막부측의 카쯔 카이슈우(勝海舟)와 신정부군 쪽의 사이고오가 회담, 막부측은 신정부군에게 자진 에도성을 건네주는 조건으로 토쿠가와 가문을 존속시킬 것을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약 260년간 계속된 에도막부는 끝나게 된다.
- 이 후의 일본 역사 시대 구분 -
1868 明治(메이지)시대
1912 大正(다이쇼)시대
1926 昭和(쇼와)시대
1989 平成(헤이세이)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