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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역사적인 의미해석
3.1운동의 추진계획
3.1운동은 처음에 종교단체와 학생들에 의해서 각각 독자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까닭은 일제가 무단정치를 실시한 이래 국내의 사회 단체 대부분이 해체되었지만, 종교단체와 교육기관은 비교적 활동이 자유롭고 조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종교에 의지하거나 교육에 힘쓰면서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단체 중에서 조직력이 강한 천도교(天道敎)와 기독교(基督敎)와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우다가, 후에 서로 다른 계통의 활동상황을 알게 되자 이를 통합, 단일 추진계획이 세워지게 되었다.
천도교측의 계획은 손병희(孫秉熙)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천도교는 동학(東學)의 후신으로서 제3세 교주가 된 손병희가 일본 동경(東京)에 망명해 있을 때 교명(敎名)을 개칭한 것이다. 그는 1906년 1월에 귀국하여 교세확장에 여러 모로 힘을 기울여 오다가, 1918년 말경 파리강화회의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과 여러 차례 만나 대체적인 합의를 본 것 같다. 그리고 천도교내의 결속을 목적으로 다음 해 1월 5일부터 49일간의 연성기도회(煉性祈禱會)를 열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추진계획은 없었던 것 같다.
이들은 1월 하순경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서 대중화(大衆化)할 것 일원화(一元化)할 것 비폭력(非暴力)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실천방법은 2월 초에 천도교측의 최린이 중앙학교측의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과 만나 논의하여, 첫째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하여 국민의 여론을 환기하고, 둘째 일본정부와 귀(貴) 중(衆) 양원(兩院) 및 조선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고, 셋째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여 국제여론에 의하여 일본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독립을 성취하기로 합의하였다.
천도교측은 처음 계획을 합의할 때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단독으로 거사하는 것은 불가하므로, 각 종교단체와 대한제국 시대의 저명인사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워야 한다는데 의견을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박영효(朴泳孝) 한규설(韓圭卨) 윤용구(尹用求) 김윤식(金允植) 윤치호(尹致昊) 등을 참여시키기 위해 교섭하였으나 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질적으로 천도교측의 독립운동을 추진해 오던 송진우 최린 현상윤 최남선 등은 평북 정주에 있는 이승훈(李昇薰)에게 연락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하여 송진우 신익희(申翼熙) 등과 만나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합류에 찬성하고 그 이튿날 선천에 내려가 기독교측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불교측과의 합의는 최린과 친분이 있는 승려 한용운(韓龍雲)과 협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어 한용운은 승려 백용성(白龍城)의 동의를 얻고 유림측의 참가를 위해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갔으나 교섭에 실패해 그들의 합류는 포기하고 말았다.
기독교측의 계획은 처음에는 평안도 지방의 장로교 계통과 서울의 감리교 계통을 중심으로 한두 갈래의 움직임이 있었다. 평안도에서는 중국에서 파견된 선우혁(鮮于赫)이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고하였으므로, 이승훈은 동지들과 협의하여 계획을 세웠는데 때 마침 천도교측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천도교측과 접촉함으로써 기독교측의 계획은 천도교측과 합류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의 기독교측은 박희도(朴熙道)와 함태영(咸台永)을 중심으로 감리교 계통의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청년학생들과 연락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中央基督敎靑年會) 간사로 있던 박희도는 기독교 중심의 청년학생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은 박희도와 이승훈이 만남으로써 통합되었고, 이승훈을 통해 천도교측과 합류하게 되었다.
천도교측과 서울에서 협의하고 합동으로 독립운동의 추진계획을 세우기로 결정한 이승훈은 평안도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2월 17일에 다시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났으나 그의 태도가 확실치 못한데 의혹을 품던 차에 박희도를 만났다. 그리하여 박희도의 청년학생단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측의 독자적인 운동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20일에 박희도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등과 협의하여 기독교 단독으로 추진계획을 세우기로 하고 그 방법으로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시 함태영 집에서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인 이갑성(李甲成) 등과 회합하였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2월 21일 최남선이 이승훈와 함께 최린집에 찾아가 협의한 끝에 민족의 행동통일을 위해 합동키로 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기독교측의 거사준비를 위한 자금으로 5,000원을 천도교측으로부터 받았다. 이날밤 이승훈은 세브란스병원내의 이갑성 숙소에서 10여명의 기독교 간부들과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찬동을 얻어 24일 천도교측에게 통고함으로써 마침내 천도교측과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학생측의 추진계획은 1919년 1월 26일경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졸업생 주익(朱翼), 재학생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璧) 윤화정(尹和鼎),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의 윤자영(尹滋英), 세브란스의전(醫專)의 이용설(李容卨), 경성공전(京城工專)의 주종의(朱種宜), 경성의전(京城醫專)의 김형기(金炯璣) 등 8명을 관수동 대관원(大觀園)에 초대한 자리에서 대체적인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2월 3일경에는 그 추진계획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대관원에 모였던 학생대표들은 각자가 재학하는 학교와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에게 권고하여 그들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주익이 2월 20일경 독립선언서를 기초해 인쇄하려던 때에 23일 이승훈과 박희도가 천도교측과의 합류를 성공시켰기 때문에 김원벽은 그 원고를 승동예배당(勝洞禮拜堂)에서 불태우고, 학생측도 천도교 기독교측의 추진계획에 참여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3 1운동의 주도체는 단일화되었고, 이로부터 추진계획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천도교 기독교 학생측의 개별적인 독립운동 추진계획이 통합되고 불교측이 이에 가담함으로써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인선(人選)이 시작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재경(在京) 또는 지방간부로써 서울에 와 있는 이종일(李種一) 박준승(朴準承) 나인협(羅仁協) 임예환(林禮煥) 이종훈(李鍾勳) 권병덕(權秉悳) 양한묵(梁漢默) 김완규(金完圭)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나용환(羅龍煥) 등 15명이 서명하였다.
기독교측에서는 26일경 한강인도교(漢江人道橋)에서 이승훈 양전박 오화영 박희도 안세단 최성모 이필주 등이 모여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고, 이승훈 양전박 이명용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신홍식 박희도 오영화 정춘수 이갑성 최성모 김창준 이필주 박동완 신석구 등 16명이 서명하였고, 여기에 불교측의 한용운 백용성을 포함하여 민족대표로 33인이 결정되었다. 이 33인이 민족대표 이외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사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개인사정이나 또 독립운동의 다음 일을 위하여 서명에서 빠졌다. 그들은 중앙학교의 송진우 현상윤을 비롯하여 정노식 김도태 최남선 임규 박인호 노헌용 김홍규 이경변 함태영(咸台永) 안세환 김세환 김지환 강기덕 김원벽 등 16인이었다. 이렇게 하여 3 1운동의 중앙지도체가 형성되었다.
독립운동 준비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일은 독립선언서의 작성 문제였다. 이 일은 최남선이 최린 현상윤 등과 논의하는 자리에서 자기는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니 독립운동의 표면에는 나서지 않고 선언서를 작성하겠다고 제의하여 찬성을 얻음으로써 민족대표에는 빠지게 되었다. 그 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 초안을 최린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은 독립운동을 책임질 수 없는 최남선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여 자신이 짓겠다고 나섰으나 이미 손질이 끝난 뒤여서 선언서 끝에 한용운의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2월 27일 오후 6시경부터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인쇄소에서 공장 감독 김홍규(金弘奎)는 채자(採字)하고, 사장 이종일(李種一)은 교정하여 21,000매를 인쇄하여 경운동(慶雲洞) 이종일 집에 운반하여 두었다가 28일 아침부터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여 전국 각지에 전달하였다. 이때 각자가 수수한 매수는 정확치 않으나 서울에는 이갑성이 세브란스의전 학생 김성국(金成國)에게 1,500매를 주어 승동예배당에 가서 강기덕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즈음 승동예배당에는 김원벽 한위건 등 학생대표들이 다수의 전문 중등학생을 집합시켰으므로 이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서울의 각처에 배포하도록 지시하였는데 그 담당구역을 보면 종로 이북은 불교학생이, 종로 이남은 기독교학생이, 남대문 밖은 천도교학생이 맡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든 추진계획이 완료되어 그들은 독립선언을 고종 황제의 국장일(國葬日)인 3월 3일에 발표하려 했으나 최종 회합에서 3월 1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은 국장일의 거사는 불경(不敬)이라 피하되, 국장배관(國葬拜觀) 차 상경한 지방민을 참여시키려면 3일과 가까운 날이어야 하는데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측에서 피하고자 하므로 결국 3월 1일에 거사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사중 재경 중인 20여명은 2월 28일 밤 재동(齋洞) 손병희 집에 모여 거사계획을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여기에서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였던 당초의 결정을 바꾸어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和館, 명월관지점)에서 거행하기로 하였는데 그 까닭은 학생과 민중이 많이 모일 것이므로 일제측과의 충돌이 있을까 염려한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2월 28일 밤까지 모든 계획이 비밀리에 완료되어 3월 1일을 기하여 마침내 거족적인 3 1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전문
宣 言 書( 선 언 서 )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
(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
(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 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 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聞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3.1운동의 역사적 배경-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승전국 佛-英-日의 식민지 독립은 흐지부지
《3·1운동의 배경을 설명할 때 흔히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를 예로 든다.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며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의 민족 자결주의는 당시 식민지 국가의 독립운동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당시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에 신음하던 아프리카 및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패전국의 식민지를 재분배하기 위한 명분상의 원칙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다.》
교과서에는 민족 자결주의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독립 운동의 기반을 국내외에 만들어 가고 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미국 대통령 윌슨은 새로운 세계 질서와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14개조의 평화 원칙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윌슨은 식민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칙으로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민족 자결주의는 그동안 제국주의 침략을 받았던 약소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 이후 영국 프랑스가 주축이 된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4개조의 평화원칙을 내세워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민족 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를 포함한 약소국들도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귀 기울여 독립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중국의 1919년 5·4운동, 인도 간디의 저항운동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비록 대부분의 식민지가 당시 독립을 쟁취할 수는 없었지만 열강들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전후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자결권을 되찾은 민족으론 동유럽의 핀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이 있다.
하지만 민족 자결주의는 단지 패전국의 식민지를 재분배하기 위한 원칙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민족 자결주의는 윌슨이 1918년 1월 8일 의회에 보내는 연두교서에서 제창한 것으로 독일에 제시한 14개 조항으로 된 강화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러자 윌슨은 이 원칙을 1918년 10월 평화회의로 유보하면서 “완전하지 않은 국가들(곧 식민지)이 평화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극히 좋지 않다”며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였다.
결국 윌슨은 1918년 12월에는 ‘민족 자결주의의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즉 승전국이었던 프랑스, 영국, 일본 등의 식민지에는 민족 자결주의가 적용되지 않게 된 것이다.
당시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하고 있을 당시 미국은 서부 개척을 하느라 외부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뒤늦게 식민지 개척을 하려 했으나, 벌써 다른 열강들이 대부분을 나누어 가진 후였다.
민족 자결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은 민족 자결주의란 바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민족 자결주의를 통해 식민지 상태의 민족들에게 나라를 돌려준 다음에 자신의 영향권(식민지)으로 만들자는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를 보유한 승전국들이 동의를 하지 않게 되자, 대신에 힘을 잃어버린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반영된 것이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그에 앞서 발표된 레닌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내의 제 민족뿐 아니라 비러시아계의 약소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권을 지원하였다.
주로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던 1차 대전 당시의 연합국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터키가 혁명 러시아 진영에 가담하는 것을 예방할 필요가 있었고,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3·1운동은 민족 자결주의를 오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3·1운동의 역사가 퇴색되거나 폄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의 국내외사정
-국내사정: 우리 겨레는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삭이면서 독립운동을 펴나가는 한편, 일본에 대항하는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함.
-국외사정:1. 미국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제창민족 자결주의는 그동안의 제국주의 침략을 받았던 약소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큰희망을 가지게 함.
2.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민족 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함, 유학생들은 1919년 일본 도쿄에서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발표.(민족자결주의란? 자기민족의 운명은 자기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2.8독립선언서)-(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3.1운동에 큰 영향을 줌.)
2.8독립선언서 내용
조선 청년단은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사천삼백년의 긴 역사 속에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다.......을사조약을 맺을 때에는 황제와 신하, 그리고 민족 전체가 대항하였고, 국권을 뺏긴 이후에도 이에 저항하다가 일제의 총칼에 희생된 사람을 헤아릴 수 없다........이에 우리민족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하여 독립을 이룰것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3.1운동의 전개과정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같은 시각에 서울 탑골공원(서울종로구에 있으며, 파고다 공원이라고도 한다.)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평화적인 독립만세시위를 함.
(독립선언서의 내용)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주인임을 선언하노라. 이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을 자손 만대에 일러 우리 민족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독립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4월말까지 계속되었고, 만주,연해주,미국 등 해외에까지 퍼짐.
-일본 경찰과 군대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이거나, 집을 불태우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진압함.
(독립가)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의 목소리10년을 참고 참아 이제 터졌네삼천리 금수강산 이천만 민족살았구나 살았구나 이 한소리에만세 만세 독립 만세만세 만세 조선 만만세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탄압)
-유관순순국: 유관순은 충청도 천안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 수감됨.옥중에서도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투쟁하다가 순국함.
-제암리학살사건: 일본 경찰들이 화성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채 총을 쏘고 불을 질러마을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함.
(3.1운동의 의의및 영향)
-우리 민족에게 자주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러 일으킴.-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나라들에게 희망과 용기, 힘을 줌.-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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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 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 임명되었다. 6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9월 6일에는 노령정부와 통합하고 제1차개헌을 거쳐 대통령중심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26년 9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형태의 주류를 이루었다.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1939]·충칭[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부 45개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 금 갹출운동 등 다양하였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되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하였다.
재정기반을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9월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신대한보(新大韓報)》·《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공보(公報)》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을 광둥[廣東]의 쑨원[孫文]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였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되었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東京義擧]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 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라고 하여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하였다.
3·1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거족적인 3 1운동의 거사계획은 비밀리에 추진되었고, 예정대로 3월 1일 정오부터 민족대표 33인중 29인(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불참)은 태화관에 모여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려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 오자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가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시내 남녀중학생 이상의 학생이 4∼5,000명 모였다. 학생들은 이미 강기덕과 김원벽의 연락을 받고 오전 수업을 마친 후 학교 단위로 모였으며 경성의전(京城醫專) 학생들은 만약을 위하여 당일 아침부터 전원 결석하고 그 시각에 모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날 새벽 서울의 거리에는 각종 격문과 독립운동의 정확한 소식을 알리기 위한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제1호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함께 민중에게 배포되었다.
「조선독립신문」은 2월 28일부터 천도교의 박인호(朴寅浩) 이종일(李鍾一) 이종린(李鍾麟) 등에 의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普成社)에서 준비되어 보성전문학교장 윤익선(尹益善)의 명의로 간행된 것이다. 그 후 이들은 곧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나 이 신문은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 간행되었고, 일본 총독부 도장관보고(道長官報告)에 의하면 27호까지 간행되었다. 또 이날 새벽 동대문과 남대문 등 큰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벽보가 붙어 있었다.
「희(噫)라 아(我) 동포여 군수(君讐)을 쾌설(快雪)하고 국권을 회복할 기회가 왔다.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써 대사(大事)를 공제(共濟)함을 요한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파고다 공원 팔각정 단상에는 10년만에 태극기가 내걸리어 모인 군중들의 감격과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드디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식전이 개막되었다.
이 식전에 33인의 민족대표가 예정을 바꾸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鄭在鎔)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날 무렵 군중속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 탑골공원에는 서울시민과 고종 황제의 국장을 보러 올라온 지방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이같은 당시의 독립운동 상황은 천도교에서 비밀리에 간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에서는 「탑동공원(塔洞公園)에 회재하였던 수 만의 학생이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면서 수무족도(手舞足蹈) 풍탕조용(風蕩潮湧)의 세(勢)로 장안을 관중(貫中)하니 고목사회(枯木死灰)가 아닌 우리 민족, 금어롱조(金魚籠鳥)가 아닌 우리 민족으로 수(誰)가 감읍(感泣)치 않으리요.라고 보도하고 있다.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과 군중들은 공원문을 나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시위행진 대열은 학생 · 신사 상인 농민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담하여 서울시가를 누비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은 민족대표들의 예상대로 국장(國葬)으로 인하여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수십만 민중이 거리로 뛰쳐 나왔고 또 서울시민이 만세시위행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행렬은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경성부윤(京城府尹)과 경무국(警務局)의 보고에 의한 이날의 운동상황을 보면 종로통(鐘路通)에서 군중은 중심체인 학생시위대의 분열에 따라 여러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져 일파는 2열 종대로 종로에서 광교 부청 앞 남대문 등을 거쳐 남대문 정차장(서울역)을 돌아 의주통(義州通)으로 꺾이어 프랑스공사관으로 행진하였다. 다른 일파는 종로에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일부는 제지하는 일군경(日軍警)을 물리치고 대한문 안에 들어가 고종 황제의 영전에 조례(弔禮)를 행하고 나왔다. 그후 대한문 앞 광장에서 독립연설회를 가진 다음 구리개(현 을지로)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갈린 일파는 미국영사관 앞으로 행진하고, 일파는 종로에서 지금의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앞에 집합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한 다른 일파는 창덕궁 앞으로 행진하였으며, 다른 일파는 일제의 조선보병사령부(朝鮮步兵司令部) 앞으로 행진하여 영내까지 들어가려 하였다. 그 밖에도 일파는 소공동을 거쳐 총독부 쪽으로 향하려고 진고개(현 충무로)로 행진하였다. 좁은 골목에는 일제의 기록으로도 6천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어 제지하는 일군경의 저지선을 두번이나 뚫었다고 한다.
이 만세시위행진 중에 미국영사관 앞에서는 한 학생이 '조선독립(朝鮮獨立)' 이라고 쓴 혈서를 들고 시위하다가 미국영사의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또 서울에서 가장 넓은 육조 앞(현 세종로) 거리도 만세시위군중으로 메워졌는데 이때 군중 속으로 인력거를 타고 퇴근하던 일본인 경기도지사(京畿道知事)가 군중들의 강요로 모자를 벗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웃지 못할 장면도 벌어졌다.
만세시위행진은 해질 무렵부터는 시가지에서 교외로 번져나가 오후 8시경에는 마포 전차종점 부근에서 다수의 군중이 시위하였고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부근에서는 학생들이 오후 11시 경까지 해산하지 않고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처럼 이날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독립선언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질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수십 만명의 군중이 활동하였는데도 단 1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가장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독립의지를 표시하려는 것이 3 1운동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일제는 군국주의(軍國主義)의 본성을 드러내어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헌병 이외에도 용산에 있는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동원해서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빈손일망정 결사적으로 졸진하는 시위 행렬은 막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진고개에서의 시위행렬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주동자로 보이는 학생 군중을 체포하였고,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 29명을 포함하여 약 13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날의 시위운동은 서울에서 뿐만 아니었다. 평남의 평양 진남포 안주와 평북의 의주 선천, 함남의 원산 등지에서는 3월 1일 서울과 비슷한 시각에 독립선언식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서울과 이북 6개 도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은 거족적인 3 1운동의 전체로 볼 때 그 첫 봉화에 불과하였다.
서울은 3 1운동의 전국적인 진원지이므로 3월 1일의 수십만 대시위에 이어, 2일 이후에도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4월초까지 1개월간에 걸쳐 매일 계속되다시피 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의 주도체는 각 종교단체 신도, 각급학교 학생, 노동자와 지방에서 국장을 보고 참배하러 상경한 사람까지 참여한 각계 각층과 각 지역인의 통합으로써 전국적인 운동의 축소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울의 운동규모는 3월 1일의 수십 만명을 정점으로 하여 점차 소규모로 변하였다. 서울의 시위상황을 살펴보면 2일에는 주요 시가지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국장 참배차 상경하여 만세를 불렀던 인파로 뒤덮였으며, 종로거리에는 노동자와 학생이 중심이 된 약 4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 방면으로 시위하였다. 이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일경(日警)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 20명이 체포되었다.
3일에는 고종 황제의 장례식이 훈련원에서 거행되었으므로 민중들은 조례(弔禮)를 표하느라고 시위가 중단되었으나 밤에는 신정(新町, 현 묵정동) 쪽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군중 속에는 서양인이 4,5명 끼어 있어 일경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기도 했다.
4일에는 각 학교 학생이 거의 결석하고 지방학생들은 귀향하여 만세운동의 추진을 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시내 요소 및 전차 등에는 각종 격문과 국민회보(國民會報) 등이 나붙어 민족 운동을 고취시켰다.
5일에는 남대문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사이에서 큰 시위가 발생하였다. 오전 9시 역광장에서 독립연설회(獨立演說會)가 개최되고, 일단의 학생은 평양에서 일반 여행자를 가장하여 상경한 약 300여명의 학생을 맞이하여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에 들어가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였다. 학생 중에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격문을 일반에게 배부하여 많은 군중이 이에 가담하였으며 몇 차례 일군경(日軍警)의 저지선을 뚫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은 서울의 학생 활동이 너무 완만하다하여 각 도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재경학생을 도와 주었다.
이날은 남대문역 광장에서 뿐만 아니라 대한문 앞과 종로 등지에서도 남녀학생 및 일반 군중이 모여 시위하였는데 대한문은 3 1운동 이전 고종 황제가 아관(俄館)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항일 민중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 때 모인 군중은 일제측 기록에도 약 10,000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일제측 기록은 3월 1일의 시위도 겨우 3 4,000명의 시위 군중이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날의 시위 규모는 대단히 큰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이날 주동자로 체포된 자는 100여명이었다고 한다. 또 특기할 만한 것은 이날부터의 시위에는 종래 참가하였던 중등 이상의 학생들만이 아니라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시위행렬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한편 종로 보신각(普信閣) 앞은 서울의 만세시위운동 중심지로서 3월 1일부터 계속적으로 일어난 만세시위는 거의 다 이곳이 중심이 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보신각 종도 울렸으며, 2차 대규모 시위인 3월 5일의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대로 나누어졌던 모든 시위대는 정오 경에 모두 이 곳에 집결하여 일군경과 충돌하면서 독립연설회를 개최하였다. 5일의 시위 후 며칠간은 대운동을 기획하는 학생과 일반인을 일군경이 대대적으로 검색하였기 때문에 서울 중심가에서는 표면적인 시위가 크게 벌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교외와 고양 시흥 등 서울과 인접한 각 군 면의 만세운동은 격렬해진 듯하다. 일군경의 대대적인 검거의 예는 송현동 62번지 이인식(李仁植)의 집에서 독립운동차 귀국한 동경유학생들을 합한 시내학생 63명의 운동모의현장(運動謀議現場)의 급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날 아침에도 시내 곳곳에서 40여명이 더 체포되었다. 그러나 지방민의 상경과 서울운동을 돕기 위한 지방 학생의 결사대 조직으로 서울은 일군경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운동이 추진되었다.
3월 9일부터는 서울의 상인이 일제히 동맹하여 철시하였다. 4월초까지 1개월간 계속된 철시(撤市)의 동맹공약서(同盟公約書)는 다음과 같다.
「 9일 일체(一切) 폐점(閉店)할 것.시위(示威)에 가담할 것. 단 폭행(暴行)은 하지 말 것.위약(違約)한 상점(商店)은 용사(容赦)없이 처분할 것.」
일군경은 이 동맹을 철회, 개점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였다. 심지어 총구를 들이대고 개점(開店)을 강요하였으니 상인들은 마지못하여 개점할 경우 그들만 돌아서면 다시 상점을 문을 닫고, 또한 부청 경찰서 등에서 상인을 불러다가 개점을 강요하면 운동에 의하여 구속된 자를 석방하면 개점하겠다는 등의 대담한 요구로 일제측을 곤란케 하였다.
이 상인들의 철시와 아울러 8일부터는 각종 공장직공이 파업 저항과 집단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같은 행동을 가장 먼지 시작한 곳은 총독부 경영의 용산 인쇄소 직공들이었다. 8일밤 야간 작업을 하던 직공(職工) 200여명은 갑자기 일을 중단하고 뛰어나와 만세시위를 벌이자 부근의 일반 민중이 이에 가담하였다. 일군경과 소방대가 동원되어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동자로 보이는 20여명을 체포하였다.
그후 철도국(鐵道局) 직공, 연초회사(煙草會社) 직공들의 시위가 있었고, 10부터는 전차운전사(電車運轉士)가 가담하여 서울시내의 전차는 모두 운행되지 않았다. 이 저항운동에 가담치 않고 운행한 전차는 시위군중에 의 해 모두 파괴되었다. 일경의 3월 15일자 보고에 의하면 이같은 파업이 성행하여 서울시내의 대부분의 공장은 직공이 10% 정도밖에 취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의 시위는 3월 22일 오전 9시에 봉래동 방면에서 일반 노동자 수 백명이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어 서울은 다시 만세시위운동으로 휩쓸리게 되었다. 봉래동 철도교차점 부근에서 4,5명이 태극기를 세워놓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부근에 모인 전차 차장, 공장 직공, 노동자, 일반시민 등이 합세하여 수백 명의 군중이 되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의주통을 향하여 독립문까지 행진한 것이다. 이 사이 시위군중은 점점 더 증가하여 시위대는 종로 본정(충무로) 경찰대원과 고양군청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과 충돌하여 강제로 해산되었다. 또 이날 밤 11시경에는 종로 단성사(團成社)에서 활동사진의 상영 중 관객이 일제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 날인 23일에는 오전 9시경부터 만세운동이 계속되었고 그 규모도 더욱 확대되었다. 훈련원 부근, 동소문내, 미생동(도원동), 원효로, 창덕궁 앞 등 각처에서 50명 이상 500명 이하의 군중이 모여 24일 새벽까지 제지하는 일군경에게 쫓기면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 이 날 교회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여 시내의 시위군중에 호응하였다. 그 중요한 곳으로는 동묘리 돈암리(현 돈암동) 청량리 왕십리 마포 양화진 수색 녹번리 동막 양진리 행주 창천리 구파발리(이상은 현재 서울시에 편입되었지만, 그 당시는 고양군내였다) 등이었다. 그리고 이날 정동과 어의동의 보통학교에서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졸업식 도중 전학생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위와 같이 22일부터 다시 벌어진 서울의 시위운동은 26일과 27일에 그 절정에 달하였다. 26, 27일 양일간은 3월 1일과 마찬가지로 서울이면 어느 곳을 막론하고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고 전주와 전선에는 태극기 격문 등이 붙어 있었다. 와룡동과 재동의 일경파출소에서는 시위군중이 피수인(被囚人)의 구출을 기도 투석(投石), 습격하여 폭력사태가 벌어졌으며 일군경의 발포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27일의 시위에는 만철경성관리국(滿鐵京城管理局) 직공 800여명이 원효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3월 하순부터 격렬해진 서울의 시위운동은 일군경의 저지와 그들의 무자비한 발포로 4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4월부터는 표면적인 시위운동 보다는 비밀결사라는 새로운 양상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일에 시작하여 4월초까지의 서울의 총 시위 회수는 64회이며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약 57만명에 이르고 피살자가 5명, 피상자는 69명, 피수자는 12,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의 통계숫자는 발표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3 1운동의 행동대원으로서 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학생의 활동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들은 3 1운동의 중앙지도층 인사들이 투옥되어 투쟁의 대열에서 멀어지고 민중에게로 넘겨지자 당시의 유일한 조직세력이었으며, 실천력 있는 행동으로써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세계만방에 민족해방선포 3.1만세운동
3.1운동의 충격과 영향을 받은 중국 북경대학생들은 5.4운동을 일으키면서 한국의 학생들을 본받자고 호소했다. 특히 5.4운동을 주도한 북경대학 학생대표 부사년(傅斯年)은 ‘한국독립운동의 교훈’이란 글에서 한국민족의 3.1운동 특징을 세 가지로 평가하고 중국민족이 배워야 한다고 제기했다. 첫째, 무기를 갖지 않는 비폭력 혁명이었다. 둘째, 불가능한 것을 알고 한 혁명이었다. 셋째, 순수한 학생혁명이었다고 분석하면서 “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3.1절이 어찌 하루 노는 날로 치부되며 그 나마 태극기 게양하는 일조차 잊는 날이 되어야 하겠는가?
기미년 3.1운동은 피압박 민족 해방운동사에서 세계사적인 의미의 대사건이다. 왜 그런가. 내적으로는 민족독립의 피어린 저항이었고, 외적으로는 아시아. 중동지역에서 새로운 민족해방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반영(反英)운동, 이집트의 배영운동, 터키의 독립운동을 차례로 촉발시켜서 한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세계만방에 선양하게 되었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는 친일매국세력들과 후손들이 활개치며 사는 대한민국, 세월이 지날수록 3.1운동이 하루의 공휴일, 의례적인 기념일로 화석화되어 가고 있어 가슴 아프다. 나라를 빼앗긴 지 9년 만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일제는 시위군중 7509명을 학살하고 1만5961명을 부상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3.1운동은 한민족이 결코 일제에 나라의 주권과 2천만 동포의 생명과 우리의 역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민족적 저항이었다. 3.1운동은 계층. 지역. 종교. 나이를 뛰어 넘어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 포악한 일제 침략주의에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맞서 조국독립을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상실했던 국권회복을 선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 국맥과 법통을 승계하였다. 3.1운동 이전의 모든 항일투쟁과 국권회복운동은 3.1운동으로 결집되고, 그 이후의 민족해방투쟁과 민주화운동은 여기에서 발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을 계기로 몇 갈래의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전개되고, 이것이 통합을 거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민족의 정통성과 법통을 잇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왕정복고, 입헌군주제, 사회주의정부 등 여러 가지 정부형태가 논의되었지만, 치열한 토론을 거쳐 민주 공화제를 채택하고, 이것은 대한민국 건국으로 승계되었다.
3.1운동은 세계 혁명사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역사의식을 찾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갈래의 사상적인 배경과 항쟁의 계기가 접목된다. 첫째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로 인해 온 국민이 국권회복의 열망에 차 있었다. 둘째는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발표로 민족지도자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등 국제정세를 적극 활용하는 기회를 포착하였다. 셋째는 일본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3.1항쟁을 준비하였다.
넷째는 1918년 만주 일대에서 무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만주. 노령. 중국. 미주 등 해외 망명 지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다섯째는 국내에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초기부터 일부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의 손병희 등과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과 불교측의 지도자들을 규합하였다.
3.1항쟁의 기본정신은 민족의 자주 독립이었다. 89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우리는 분단상태이고 ‘반쪽 자주독립’에 머물러 있어서 3.1정신은 현재 진행형이 되고 있다. 애국 선열들이 혹독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선포하고, 총칼에 희생되면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한 ‘3.1정신’을 회복하여 반드시 친일매국세력을 청산하고, 민족사 바로세우기와 국민주권,그리고 민족통일과 100년 전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였던 간도를 회복하여 한민족이 하나되는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진정한 3.1정신의 계승이고 완성이 될 것이다.
또한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집단들과 관련하여 만해 한용운 선생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 따위 것을 독립선언문이라고 만들었냐고 집어 던졌다고 한다. 그래서 끝에 행동강령을 따로 적어서 넣었다고 한다.
3.1 독립선언이 있은 후 한용운 선생은 빠져 나가고, 민족대표라는 작자들은 자수한다. 그리고 천도교, 천주교, 개신교, 불교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친일행각을 벌이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해당 종교계에서 반성이 없다. 천주교에서는 심지어 안중근 장군에 대한 부정까지 했다. 안중근 장군은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나서 먼저 나서서 살인자이므로 천주교에서 그를 배제시킨다고 발표를 했던 것이다. 개신교나 불교도 다를바 없었다. 일제의 눈치를 보며 일제에 협조를 했다. 그들 중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애써 부정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비굴하게 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종교라는 특별한 입장 때문에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독립 운동가로 알려진 사람들 중에 친일파들이 있다. 또 민족 음악가니 민족작가니 하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수가 친일파였다. 이런 것들을 모두 규명을 하고 제대로 밝혀야 하는데, 일본 오사카 출신에 일제 침략주의를 찬동한 뉴라이트 세력의 절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위원회 해체운운하며 그것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
오늘은 3.1절이다. 3.1절의 의미는 이름이나 올려놓고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주인공들이 아니라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일반 민중들이 일제에 항거한 것이 가장 큰 의미다. 진정한 3.1운동의 계승은 당시 기회주의적이던 지식인들이나 변절한 민족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던 민족해방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시성 타고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국을 소재로 한 두편의 시, ‘동방의 등불’과 ‘패자의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패자의 노래’는 육당 최남선의 요청에 따라 쓴 것이고,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렸을 때 ‘동아일보’ 기자의 한국방문 요청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다. 타고르의 유미적이면서도 신앙적인 기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동방의 등불’ 전문을 소개한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