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찬송이 필요한 이유 [2006년 9월 30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역사적 사명 중 하나가 조국 교회가 시편을 찬양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 일을 위해 지난 91회기 총회에 헌의하여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될 시편찬송의 필요성에 대한 논문을 여기에 옮기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클릭을 통해 성경적 찬양에 관한 바른 이해를 가지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개혁교회의 예배 음악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서 창원 목사
이끄는 말
교회 예배에 있어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치는 설교 다음으로 중요하다. 어떤 교회는 설교보다 음악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 것 중에 하나가 찬양대를 중심으로 한 음악 예배 혹은 찬양 예배 시에 설교는 늘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하나님 말씀 선포가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도리어 찬양대의 찬양이 별로 유익하지 못한 설교보다 훨씬 낫다는 말을 구실 삼아 하나님의 말씀 선포의 가치를 저하시키며 음악의 기능을 상대적으로 격상시키는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 시대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예배 음악은 설교와 더불어 예배의 중심 축이 되어 온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예배에 있어서 찬양대를 중심으로 한 음악의 중요성 혹은 필요성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이 출처를 찾기 위해 뒤적이는 구약 성경은 찬양대의 역할 자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하신 큰 일들을 지극히 높여드리는 제사의식의 한 요소로 여길 뿐이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제사 드릴 때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호를 높여드리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구약에서 제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구약에서 제사의식과 관련이 있는 찬양대의 사역과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 사역은 사실 관련을 맺고 있지 않는다. 신약에 와보면 이것이 더 명확해 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드려진 이후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는 상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에 있어서 구약시대의 레위인들이 주로 맡아 했던 찬양대를 중심으로 한 어떤 음악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는다.
도리어 구약에서조차도 찬양에 대한 최초 기록으로 볼 수 있는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에서 보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 함께 찬양하였다. 즉 회중 중심의 찬송이었지 특수한 찬양대 중심의 노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이 신약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를 입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주님의 은혜를 인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 찬양을 읊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회중 찬송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경적 증거를 통해서 오늘날 개혁교회의 예배 음악이 어떠해야 하는지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정체 불명의 무분별한 교회 음악이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하나님의 성호와 그 분의 존귀하신 은총을 감사 찬미하는 예배 음악은 일종의 세속 음악으로 전락되어버렸다. 이런 현실에서 바른 예배 음악이 무엇인지 개혁교회는 예배의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성경적 가르침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개혁교회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단지 음악하는 자들에게 일임하여 온 지난 세월이 교회 안에 신학적 특색도 없고 예배 대상자이신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 아니라 예배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즐겁게 하려는 세속적 음악으로 흘러가 버려도 도리어 그렇게 하고 있는 무리들을 칭찬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고에서 개혁 교회 예배 음악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다루고자 한다. 올바른 찬송 신학을 정립하여 개혁교회에서 사용되어지는 예배 음악이 예배를 받으시는 성 삼위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합당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 또한 세상 음악이 예배 음악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 바른 예배 음악을 통해서 바른 기독교 문화 형성에 기여하는 구별된 예배와 예배 음악 문화가 새롭게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중간부분 생략
나가는 말
지금 한국의 개혁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노래들은 성 삼위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가사들과 적어도 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는 노래들이 쉽게 불려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지로 성도들로 하여금 노래하도록 준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회개와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며 총회는 속히 시편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혁교회 예배음악을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교회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감사한 것은 한 출판사(기독지혜사)가 시편 찬송가집을 출판하였고 필자의 교회에서도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편가를 번역하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고신측 계통의 군소 교단에 속해 있는 한 교회에서 시편집을 편찬하여 사용하고 있는 등 점차 시편을 불러야 한다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범교단적으로 우리 장로교의 전통적이고 개혁주의적 예배음악의 특색을 살리는 일에 우리 교단만이라도 힘을 기울여줄 것을 간곡히 사모하는 마음에서 본 논고를 준비하였다. 시편편찬 위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음악인들에게만 일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자들과 경건한 음악인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 한국교회에서도 시편이 유일한 찬양곡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배 음악으로 시편이 불려질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더욱이 우리 교단의 헌법에 실려 있는 예배 모범에서도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다루면서 시편을 부르라고 권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찬송집을 편찬하지 않는 것은 총회의 직무 유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시편을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상황에서 온 교회는 이 문제가 속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중 성 삼위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들을 불러야 한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가사들은 바르게 고쳐서 부르도록 하는 것이 개혁교회 특색을 살리는 주된 일이라고 본다.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이 예배를 통해서 정립되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본 노고를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