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고학으로 본 단군조선
우리 한민족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개시는 다른 지역보다 늦지 않았으며,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황하(黃河)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날에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문화의 발전이 늦을 것으로 믿어왔다.
지금까지 확인된「청동기문화」연대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고인돌 무덤)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중국 황하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에서는 서기전 2200년경으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문화는 서기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연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근래의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한민족은 외부로부터의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거나, "그 주체가 예ㆍ맥족(濊ㆍ貊族)이었을 것이다"는 등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리고 예ㆍ맥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이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반도에는 청동기 유물조차 없다고 부인했다. 또한 우리문화의 기원을「시베리아 → 연해주 → 한반도」로 이어지는「전파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교육되어지고 있다.
임효재(任孝宰; 1941∼)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전 한국고고학회 회장)가 발굴한 8천년(서기전 6천년경)된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유적(주거지 유적) 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유문화를 형성한 후, 전파문화를 흡수했음이 분명하다(흑요석제 석기는 백두산이 원산지임). 오산리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시베리아 신석기 유적보다 2천년이상이나 앞서는데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는 '한민족의 기원'은 물론, '문화전파설'은 하루 빨리 수정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청동기문화의 전개연대를 서기전 1000년경으로 못박아 단군조선 중기나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다거나, 특히 단군조선을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분리, 이를 바탕으로 아예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까지 있었다.
현행 국사교과서를 보게 되면
ㆍ단군조선 건국: 서기전(BC) 2333년
ㆍ청동기 시대: 서기전 1000년 ~ 1300년(?) 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철기문화의 보급연대를 단군조선 후기인 서기전 300년경으로 잡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최근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800년경부터였고, 서기전 300년경부터는 강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단군조선인들이 청동과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역사상에서도 매우 이를 뿐만 아니라, 그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
단군조선은 전기와 중기의 청동기시대로부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된, 그리고 앞으로 발견될 이 기간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유적과 유물은 모두 단군조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최고의 희귀 장신구인 '유리'가 단군조선시대인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우리나라에서 제작ㆍ사용됐음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동아일보 1997년 4월 12일자 29면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 주(崔 炷: 65ㆍ책임연구원) 박사팀은 1995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유리구슬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이 구슬이 서기전 5세기쯤 한반도에서 나는 납을 혼합해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밝혔었다.
이 유리구슬은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와는 달리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등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이 땅에 일찍이 유리문화가 뿌리 내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성분분석 결과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증명됐는데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첨가물질로,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 주 박사가 "금강유역에 발달한 청동기문화는 중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실험결과로 유리 제조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이다.
우리나라 '국보급'원로과학자인 최 주 박사는 특히 비파형동검이 남한의 원료를 써서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을 뒤엎었다. 그의 지적으로 우리 교과서의 단군조선 유물인 청동기 등 고대금속유물의 기원과 성분 특성 등에 대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다.
중앙일보 1998년 4월 1일자 1면과 3면에 보면, 국내에 한점도 없던 단군조선의 미송리형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런식이라면 단군조선에 대한 아직도 많은 유물과 사료들이 국내ㆍ외에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강대했던 단군조선, 단군조선의 서부 영토였던 중국 베이징(北京) 부근의 난하유역까지를 수복하고 중국을 향해 위용을 과시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있었고, 바다를 건너 중국 베이징과 톈진(天津)지역으로부터 남쪽의 저장성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백제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었는데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문명을 전해받은 것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의 각종 문헌에는 한국 관련 기록들이 많은데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고려하(高麗河), 고려포(高麗鋪), 고려영(高麗營) 등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베이징 인근에만 30여개에 이르고, 중국 남부 광서성에는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이 보이기도 하고, 무인도이긴 하지만 중국 동남해안에는 신라도(新羅島)라는 지명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쓰이기도 한다.
1996년 9월 15일 KBS 1TV「일요스페셜」에서는 신라중심의 역사기술로 소홀히 다뤄져온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속 무령왕릉, 잊혀진 땅 ─ 백제22담로의 비밀」이란 이 다큐멘터리는 백제 특유의 지방 통치체제인 '담로'를 화제로 삼아 6세기 당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백제의 구역을 추적한 것이다.
담로(擔魯)란 백제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서,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행정 구역을 말한다. 백제는 22담로를 두었으나 시대와 지역의 대소에 따라 수효의 변천이 있었다.
과연 '담로'는 어떤 모습의 통치체제였고, 어디에 존재했는지 또, 해외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인가! ─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를 섭렵하며 8개월 동안 백제의 흔적을 추적했는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에서 백제의 지명을 찾아낸 것 일 것이다.
제작진은 베이징에서 3천km나 떨어진 베트남 인접지역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에서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을 찾아냈고, 이곳이 바로 중국의 사서인《송서(宋書)》에 등장했던 백제의 옛 영토 '진평군'이란 것을 알아냈다. 백제향의 중심마을 이름이 백제허(百濟墟ㆍ백제 옛터)란 것도 눈길을 끄는데 이곳에는 전남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등이 발견돼 백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지금의 중국 베이징과 톈진, 스자좡(石家莊)지역에까지 백제의 흔적이 퍼져있음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중국사서에 기록된 백제 태수들의 임지가 중국 동해안을 따라 선을 잇듯 분포한다는 것도 밝혀, 중국 속의 백제 지배지가 베이징과 톈진지역으로부터 지금의 저장성(浙江省)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줬다.
특히 제작진이 발견한 흑치상지의 묘지명(남경 박물관 소장)에서 흑치상지가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원래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를 버리고 흑치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는데 결국 흑치지역이 동남아시아를 뜻하기 때문에 백제의 통치지역은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제는 서기 246년(고이왕 13년)에 진충(眞忠) 장군을 파견하여 지금의 베이징지역을 공략하고「백제군」을 설치한 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의 하북성, 산둥성(山東省), 장쑤성(江蘇省), 저장성 지역의 동부해안을 차지하였다. 백제의 중국 동부해안 지배는 시기에 따라 그 영역에 차이는 있었지만 서기 588년까지 계속되었다.
백제의 남방경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백제의 남방경영은 지금의 제주도 경영부터 시작되는데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필리핀 군도로 뻗어나갔다.
즉 백제는 제주도를 기항지로하여 이전부터 진출해 있던 북규슈(北九州, 기타큐슈)를 잇는 상설 항로를 열었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타이완)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시켰다.
필리핀 군도(群島)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인데 이곳이 백제와 연관이 있음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이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그 가문은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黑齒)에 분봉(分封)된 관계로 그 지명을 따서 씨(氏)를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인 '발해'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698∼926)의 개국 시조 대조영(大祚榮; ?∼719)은 고구려 멸망 30년만에 거란ㆍ돌궐족의 대두와 당제국의 혼란ㆍ약화라는 국제정세의 타이밍을 포착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강대국을 세웠다.
서기 698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옛날 부여가 있던) 지역인 백두산 동북 송화강 유역인, 만주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東牟山)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임(自任)하고,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남쪽의 통일신라와「남ㆍ북국관계」로 대립ㆍ교섭하면서 동북아 일류의 문화국으로 영화를 누렸던 2백 30여년간 존속한 선진 발해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보유하기도 했고, 1천 300km 떨어진 일본의 보호자 역할을 하였다.
발해는 육상전투에서 능숙했던 대륙국이면서도 해양대국이었다. 일본과는 47회의 교류를 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발해인의 일본진출 루트는 동해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예로부터 동해는 발해의 내해(內海)였다.
평양∼원산 이북 지역부터 중국 동북부의 대부분과 러시아 연해주를 지배한 발해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이다.
발해 북쪽의 강역은 고구려 북쪽의 강역보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발해는 만주 동부에 중심을 두고, 북쪽으로는 아무르강까지,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를 호령하던 동북아의 대강국이었다.
발해의 152년간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동경성(현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은 둘레가 16km에 달하고, 궁전터만 37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발해는 고구려인 대집단을 기반으로 형성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동북아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자리매김 하려면 단군조선과 고구려, 발해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발해를 건국하는데 있어서 말갈족도 참여하였는데 말갈족은 단군조선의 속국이었다.
고구려 후손들은 비록 나ㆍ당연합군에 의해 왕조의 역사를 마감했지만 그 혼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와 당당하게 맞서 고구려 옛땅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이정기 장군은 중국 산둥반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이정기 장군은 고구려 멸망 100년 후 고구려인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산둥반도를 비롯해 랴오닝성, 허베이성, 안후이성 등 무려 15개 주에 걸친 영토를 58년간 통치했다.
이렇듯 우리는 단군조선∼현재까지 4332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그런데 각 성씨(姓氏) 족보에 보면 성씨의 기원이 중국이라고 한 성씨들이 있다. 이것은 사대주의 때문이다. 중국이 강해지니까 단군조선을 비롯한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는 중국을 상국(上國)이라고 여긴 영향 때문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가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우리 역사를 우선 정립하지 못한 상황아래서 '한ㆍ일 역사 공동연구'라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일본에 끌려다닐 소지가 있다고 본다. 특히 한ㆍ중ㆍ일 3국이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게 되면 우리만 고립하게 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정립한 후에는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우리가 적극 나설 필요성도 있다.
우리 '문화'는 흔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중국과는 크게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문화권에 속하면서도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 것이 우리문화이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은 우리 국민이나, 특히 전세계인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광복이 된지 54년이 지나도록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함께 이들에게 부화뇌동하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문화'를 비하한 바로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사료'부족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가 '취사선택'하여 남겨 놓은 사료만을 들먹이면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가져간 수많은 사료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료들을 모으려는 노력도 미흡했고, 외국 각국의 교과서에서 우리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 서술돼 있거나 잘못 기술되어 있는데도 이런 왜곡실태가 현재까지도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실정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 고문서가 많을 것이라고 본다. 2002년 월드컵 한ㆍ일공동개최를 계기로 일본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 우리 민족사 관련 수탈자료를 반환해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일본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놓았을까.
사단법인 한배달에서 발행한 계간지 ≪한배달≫40호(1998년 겨울호) p.70∼p.74에 보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 왕실문고(왕실도서관)에서 도서분류 및 내용분석 업무를 담당했던 박창화(朴昌和; 1889∼1962) 씨와 관련된 글이 실려있다.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가 고향인 역사가 박창화 씨는 1900년 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그는 그 뒤 충북 영동(永同) 소학교, 배재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일본 궁내청 소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1933년부터 12년동안 조선전고(朝鮮典故)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던 그는 이곳에서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을 보았다고 그 뒤 청주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최기철(崔基哲; 1910∼) 서울대 명예교수(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이를 '증언'했다고 한다.
『본란에서는 (사)한배달 최봉열 원로회 회장, 한애삼 부회장 등이 1998년 10월 최기철 서울대 명예교수를 탐방하고 녹취한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 최초 제보자: 이름/박창화(朴昌和ㆍ당시 56세)
▶ 2차 제보자: 이름/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
주소/서울시 관악구 신림본동 92-368 12/8
박창화와의 만남
본건의 제보자인 최기철 박사는 1945년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처음 박창화를 만난다. 박창화는 왕실문고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였다.
당시의 박창화는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던 중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고, 요양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에 머물게 되었으며 청주사범학교 교장이던 최기철 박사를 찾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터였다.
그는 자신이 원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며, 나라가 어려워지자 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만주로 떠나 독립항쟁을 하다 중국 안동에서 일본관헌에게 잡히게 되었다는 것. 거기서 독립항쟁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신념을 밝히자 그 관헌이 박창화의 뜻을 좋게 여겨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박 씨는 왕실문고 재직 당시(8ㆍ15 광복 전) 왕실문고 내 소장된 사료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수탈해간 우리 사서임을 직접 확인했고, 한국에서 수탈해간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
수탈된 사료들을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 보니 중요한 사료들을 모두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료의 대부분이 '단군(檀君)' 관련 사료였다. 소화(昭和) 일왕의 이름 '소화'를 내각총리의 의뢰로 박창화가 지어주기도 했다는 것.
당시 그곳에서 같이 근무하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고서는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다"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청주사범학교 국사교사로 새출발
광복 직후 학교로 자주 찾아와 말동무를 하던 박창화는 최기철 박사에게 "이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요청하였고, 최기철 박사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인정, 청주사범학교의 국사교사로 채용하게 되었다.
박창화는 마땅한 말동무가 없어 자주 최기철 박사를 방문하였고, 자신이 왕실문고에서 보았던 책들과 일하던 내용을 말하곤 하였으나, 역사에 전문지식이 없던 최기철 박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교사로 재직하던 박창화는 한 학기 동안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할 정도로 단군에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문고에서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창화로부터 국사를 배운 제자로는 김준호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 생물학)와 임양재 교수(전 중앙대 교수)가 있다.
광복 직전 미국의 B-29의 폭격이 한창이자 일본정부는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오하리(尾張) 공작(또는 백작)집 지하실로 사서들을 옮겼는데 이때 박창화가 직접 왕실문고를 옮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후 귀국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오하리의 집 지하실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거나 왕실도서관으로 다시 복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기철 박사가 청주사범학교 교장(1년 재직)을 그만두고 충주사범으로 잠깐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옮긴 후 교수들 사이에서 박창화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었다. 당시 30세 정도의 일본사를 전공하던 김용덕 부교수(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찾아와 "화랑도, 화랑정신을 알린 분이 박창화 씨라는데 그 박창화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여 박창화를 수소문한 결과 친지가 있는 괴산에서 요양하다가 별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기철 박사가 서울대에 재직할 당시 이병도 박사(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에게도 일본 왕실문고에 소장된, 우리나라에서 수탈해 간 고대사 관련 사료의 존재와 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알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또 1957년경 문교부 편수국장을 방문하여 박창화의 왕실문고에 관한 내용을 말해주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박창화 씨는 1950년까지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근무했다.
청주에 사는 박인규 전 초등학교 교장이 박창화 씨의 손자이다.
1999년 7월 10일(토) 저녁 8시 KBS-1TV [역사스페셜]에서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증언한, 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역사가 박창화 관련 기사가 방영됐다.
다음은 박창화 관련 기사 부분이다.
『역사가 박창화는 일제강점기에 12년간 미공개된 우리나라 도서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왕실도서관의 사서를 지냈다.
박창화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그는 1889년 이곳 박씨 집성촌의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유달리 똑똑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박창화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강역고, 영토연구에 애정을 쏟았다. 고려 때까지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박창화는 1902년부터 16년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력서 형식으로 남겨 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00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소설가 길팔봉의 회고에 따르면 그후 박씨는 충북 영동소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는데 조선어, 일본어, 체조를 가르쳤다. 그는 배재고보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 후 청주사범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최기철 선생(현 서울대 명예교수)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최기철 선생은 36살의 교장이었고 박창화는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최기철 선생은 (박창화 씨로부터) 주목할 만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중국을 갔는데 국경 넘어서 안동이라는 곳에 갔데요. 그런데 일본 관헌한테 붙잡혔답니다. 독립항쟁을 한다면 야단이 나는데 정중히 대하더래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 역사공부라고 했더니, 그러면 좋은 수가 있소. 우리가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할테니 오시오 해서 간 곳이 왕실도서관이라고 해요."
박창화와 일본 왕실도서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을 찾았다.
"1950년 퇴임자 이력서 철인데요. 50년도 박창화라고 돼 있네요."
1950년 퇴임자 명단에 박창화의 이름이 있었다.
"이거군요. 어떻게 돼 있죠?"
"최종적으로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단기 4283년 의원 면직했는데요. 서기로는 1950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박창화가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이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왕실도서관 측에서는 박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근무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취재팀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서 193 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직원의 명단을 발견했다.
그중 1935년 직원명부. 박창화의 이름이 보인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계약직으로 월 수입은 85엔이었다.
12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박창화는 광복직전 귀국했다. 광복 후 그는 정부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번번히 무시되거나 정부에서 알아서 갈테니 목록을 적어보내라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었다.
박창화를 가정교사로 모셨던 제자 김준웅 씨는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왕실도서관이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12년동안 여러 제약을 받으면서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강탈해간 것인데,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고 한다. 그런식으로 자기들 책이라고 하고 있는데 가르쳐 주겠느냐, 자기(박창화 씨)는 거기 근무하면서 어느 구석 몇 층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부에서) 간다고 주겠느냐."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왕의 족보는 물론 수많은 고서적들이 보관돼 있다.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중요한 '고서적'들도 이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고서적을 비롯, 도자기, 그림, 비석, 탑, 건물 등 우리 문화재를 마구 파괴하고 약탈해 갔다. 1999년 8월 현재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 미국 등 18개국에 6만 8천 5백 20여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일본에만 3만 3천여점이 있다. 이중 대부분은 약탈품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반환은 5%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재일동포 수집가의 기증이 대부분이어서 순수 반환은 미미한 편이다.
일본정부는 진정한 한ㆍ일우호증진을 원한다면 2002년 월드컵 한ㆍ일공동개최를 계기로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간 '단군조선'관련 고서적과 우리 문화재의 목록을 공개하고 이를 반환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교착상태에 빠져있는「외규장각 고문서」반환협상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고문서 3백40여권 중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2백96권이 보존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법학자인 백충현 서울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 권리를 포기하고 프랑스의 역사적 불법성을 정당화시키는 협상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전시하되 한국도 같은 가치의 우리 문화재를 프랑스에 임대해주는 등가교환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도 말했듯이, 프랑스군(軍)이 1866년 11월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도서 340책을 약탈하고 건물과 나머지 고서를 불태운 사실은 프랑스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약탈된 외규장각 문화재를 추가로 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태진, 백충현 두 교수는 1991년 서울대가 우리 정부를 통해 프랑스정부에 대해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요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ㆍ일관계사', 특히 '단군조선'을 정립시킨 후 이를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각국의 교과서는 물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어느 한 곳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올바른 역사가 적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21세기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려면 먼저 국민의식 수준부터 높여야 하는데 특히 '역사의식'은 중요하다.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북3성을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등 한대륙에서 터를 열고, 한대륙과 한반도를 발판으로,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천하를 누비며 사자후를 토하던 우리선조의 모습이 담긴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되면 우리의 과거가 그리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왜곡된 '역사' 교육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너무도 잘못 보아왔고,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불안정으로 우리 '국가'를 불신하고, 우리보다는 외국을 선호하며 살아 온 이유로 우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젠 우리 언론매체가 앞장서서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