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문화재안전과 강신태
금강산 줄기에 자리한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乾鳳寺)는 신라시대 아도화상이 창건한 천년 고찰이며 석가모니 진신사리탑을 모시고 있는 대사찰이다. 지금과 달리 민간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금지되었던 1986년. 이곳에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가 도굴, 절취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에는 전국 사찰 3000여 개소의 사정을 두루 꿰는 한 간부 직원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그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도굴당한 사실을 알려주셨다고 한다. 너무도 생생한 꿈이 이상하게 여겨져 다음 날 건봉사를 찾아갔다가 사리탑이 훼손되어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급하게 사리탑 속에서 나온 부재들을 수습해 상경한 그는 다음 날로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현 문화재청 문화유산국 문화재안전과)에 신고했다. 이 때가 1986년 어느 봄날이었다.
부처님께서 꿈에 현신하시어 도난 사실을 알려준 것에서부터 도난 당한 사리를 찾는 과정까지 사연이 매우 드라마틱했던 그 사건을 다시 기억해본다.
왜 그냥 돌려주었을까.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신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은 일단 문화재 매매가 주로 이뤄지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과 동대문구 장안평에서 사찰 문화재를 취급하는 그 분야 고참들에게 소문을 흘리는 한편 은근한 추궁과 협박도 하면서 관련자 주변을 내사했다.
그러던 중 사범단속반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십대로 여겨지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서 도굴, 절취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사거리,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가야파크호텔에 있으니 그 호텔 프런트에 가서 강원도 신흥사 해법스님이 맡겨둔 약봉지를 달라고 하면 물건을 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는 즉시 끊겼다. 당시 전화라는 것이 녹음은커녕 발신자 번호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장난 전화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므로 수화기를 내려놓자 마자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얼마 후, 봉천동의 가야파크호텔에 도착해 시키는대로 했더니 프런트 종업원이 스테이플러로 꼼꼼하게 찍어서 삼중으로 포장한 누런 꾸러미 하나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누런 꾸러미를 받아는 순간 손에 땀이 배어들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부처님과 동일시되는 귀중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므로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선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기획관리부장 스님에게 전화를 걸고는 객실로 들어가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모셔 놓고 기다렸다. 약 1시간쯤 지나자 총무원 스님 세분이 도착했다. 스님들은 손을 깨끗이 씻고 불교 의식에 따라 엄숙하게 절을 올린 뒤 삼중으로 포장된 누런 꾸러미를 열었다. 사리함이었다. 청동합의 뚜껑을 여니 그 안에 은제함이 있었고, 은제함을 여니 그 안에 또 금제함이 들어 있었다. 금제함 안에 있는 명주천을 풀자 아연으로 된 후령통(候鈴筒, 불상의 배 안에 사리와 불경 등을 넣을 때 이를 담는 통)이 나왔다. 사리는 그 안에 모셔져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 소장하고 있는 문헌에 따르면 건봉사의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는 모두 12과였다. 신라 자장율사가 가져와 경남 양산 통도사에 모셨는데 임진왜란 때 약탈당한 뒤 선조 38년(1605)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 환수하여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사찰인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봉안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호텔 객실에서 열어본 사리함에는 12과가 아닌 8과만 들어 있었다.
그때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를 보고 있노라니 나의 마음 한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했다. 사리가 나머지 4과를 찾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부처님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어서 그랬을까.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사리를 모시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당시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은 종로구 광화문 미국대사관 옆에 있는 문화공보부 건물 8층에 있었다. 일단 도굴, 절취된 석가모니 사리함과 진신치아사리 8과에 대해 회수하였음을 보고했다. 그렇지만 당시 주변 정황과 사리함 속에서 약간의 공간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사리 4과가 더 있을 것으로 판단되엇다. 나는 이를 찾기 위해 달아난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사리를 찾아, 사람을 찾아
가만, 생각해보니 건봉사가 민간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금지된 민통선 지역이니 출입자 명단이 있을 것이었다. 즉시 건봉사의 본사인 신흥사 해법스님께 연락해 검문소에서 출입자 명단을 비밀리에 확보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다음 날 명단을 확보해 확인하니 강원도 강릉에 있는 문화재 매매업자 류OO를 포함한 문화재 전문 도굴범 4명의 신원이 드러나 있었다. 즉시 서울지검 문화재 담담 검사에게 동향을 보고한 뒤 주변 관련자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하던 중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민통선 안에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가 도굴, 절취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크게 공개됐다.
사범단속반은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관련자의 신병 확보를 위해 검사 지휘를 받아 수사에 착수, 관할 지역 군 사단을 찾아갔다. 조계종 총무원 관계자와 사범단속반 소속 수사관 2명이 동행했다. 용의자는 고·류·황·이를 포함한 4명으로 모두 이 바닥에서는 솜씨 깨나 있는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류씨는 강릉에서 골동품 매매업을 하는 이였다.
먼저 류씨를 검거하기 위해 강릉으로 향했다. 주소지로 찾아가보니, 가게가 없어진 지 한참 되었다고 했다. 혹시 이미 도주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런 마음으로 주변을 수소문해 보았다. 다행히 가게는 시내의 한 대형마트 2층으로 옮긴 상태였다.
우리 조사팀은 차를 건너편에 세워두고 가게로 올라갔다. 류씨는 없고 부인만 있었다. 부인한테 류 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더니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로 남편을 찾는지 꼼꼼히 묻는 것이 아닌가. 당시 언론을 보고 눈치를 차린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서울서 보러 왔다"고 했다. 뜻밖에도 "잠깐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곧 올테니 여기서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을 범인이 알지 못하고 도망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혹시나 해서 류씨의 집을 둘러보았다. 단칸방에 어린 네 남매가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는데 형편이 퍽이나 딱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 가장이 구속되면 어떻게 살아갈지…. 인간적으로 고민이 되었다.
20분쯤 기다렸던가. 류씨가 혼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 오래간만이라며 반갑게 악수하고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을 하면서 건너편에 세워둔 차로 가고 있을 때, 가게 앞에서 ’끼익’하는 큰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군 사단 보안대 소속의 지프차 2대가 류시를 연행하기 위해 들이닥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류시에게 사건 전반에 대해 설명한 후 임의 동행하여 차에 태우고 막 출발하였으므로 보안대는 간발의 차이로 류씨를 놓치고 만 셈이 되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류시가 집으로 전화하게 해달라고 해서 연결해주고 돌아앉았다. 급한 일이 생겨서 서울에 있겠다고 둘러대는 류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날 오후 6시 무렵, 서울 덕수궁 내에 있는 사범단속반 조사실에 도착했다. 밤샘 조사 긑에 석가모니 진신사리탑 도굴·절취 일당이 확인되었다. 보고서를 작성하여 청와대에 보고하였다. 본 사건이 매우 중요하므로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만의 수사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청와대는 서울지검 특수3부와 공조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서울지검 특수3부장의 지휘 아래 관련자 검거를 위해 편성된 5개 팀이 새벽 4시에 출동했다. 수사대가 각기 나누어 탄 검은 세단들이 새벽녘 거리를 일제히 질주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대구, 대전, 천안, 청주, 장안평으로 출동한 수사대는 범인 넷을 검거하였고, 류씨 등은 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범인 중 이씨와 류씨는 매제지간이었으니 집안이 어떻게 되었을는지 싶기도 하고, 이들을 출입시켜주었다는 이유로 유능한 장교 2명이 옷을 벗게 된 것도 마음이 매우 아팠다. 무엇보다도 나머지 사리 4과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무언가 석연치는 않았으나, 범인들이 끝까지 8과밖에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렇게 범인을 잡는 한편에서는 돌아온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를 제자리에 모시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이 문화공보부 장관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인수하여 진신치아사리를 꽃가마에 모시고 광화문에서부터 조계사 법당까지 이운식을 하였는데, 당시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하려는 불교인의 행렬이 종각까지 길게 늘어섰다.
악연을 인연으로 껴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나는 종교를 초월하여 불교 문화재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문화는 역사가 오래되어 그 양이 많기도 하지만, 도난당하는 문화재의 70퍼센트는 탱화, 목각 동자상, 부도 같은 사찰 문화재이다. 이후 도난 당한 사찰 문화재를 회수하여 사찰에 돌려준 것이 얼마인지 셀 수조차 없다.
이 사건은 있은 지 몇 해의 시간이 흘렀다. 1990년 여름이었다. 선배 등 세 가족이 함께 대관령 골짜기에서 피서를 하고 있는데, 한 후배가 찾아와서 강릉 류시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힘들고 긴 5년이란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얼마 전에 모범수로 출감, 지금은 강릉 경포대 강문솔밭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지 걱정도 되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찾아가려 하였더니, 곁에 있던 친구가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냐면서 강하게 말렸다.
그렇지만 나는 문화재 사범 단속 업무를 수행하면서 일말의 거짓없이 죄가 밉지 사람은 밉지 않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해 왔다. 보복의 두려움보다는 사람의 도리가 중요하다 생각하고 경포대 내 솔밭으로 류씨 가족을 찾아갔다.
닭 모이를 주려고 마당에서 배추를 자르고 있는 류씨를 보는 순간 반가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는 마음에 눈가에 눈물 방울이 맺혔다.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서서 류 사장을 불렀다. 혹시나 화를 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류씨는 나를 보자 뛰어와서 부둥켜앉으며 반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식당으로 달려가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 강 부장이 왔다고 말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부인 역시 뛰어나와 나의 손을 꼭 잡고 식당으로 데려가 푸짐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류씨는 그 사건 후 문화재 절취나 도굴에서 손을 씻고 강릉 경포대 내 솔밭에서 오골계와 닭을 키우며 아내와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어울리며 살아간다. 그 가운데 참 모습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는다. 그런 참 모습을 발견할 때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헛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from 문화유산 채널, 강신태 (2010. 11. 30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