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조반정과 함께 세자로 책봉되고,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에서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삼전도의 굴욕적 항복을 부왕과 함께 겪고 자진하여 청나라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잡혀갔다. 볼모가 된 소현세자는 함께 잡혀 온 봉림대군과는 달리 대륙의 정세를 살피면서 이미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선교사와의 교루 증 사상면에서의 개방도 보여주었다. 반면 봉림대군이 부왕과 조정의 뜻에 좇아 청나라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며 분노와 증오의 세월을 가슴에 쌓으며 보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수행원 3백여 명과 함께 심양에 `심양관`을 짓고 거주하였다. 그곳에서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통해·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했다. 실제로 조선의 대와 창구 역할을 했는데 그의 인품과 업무처리가 뛰어나서 청나라 측에서의 칭송도 자자했고 그러한 명성이 오히려 인조를 자극하여, 당시 보호국이나 다름없는 조선의 상황에서는 친청 성향의 국왕을 세우는 것이 청나라 입장에서는 해될 것이 없으므로 심심찮게 국왕 교체설도 청나라에서 흘러 나왔고, 이에 인조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탐 형식의 사자도 자주 보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의 위상이 올라가면 갈수록 인조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좁아지는 상황에서 인조는 점차 소현세자를 불신하게 되었고 미운털이 잔뜩 밖히게 된 것이다.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이 독살당한 사람 같았다는 사실을 『상(인조)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소현세자 독살에 인조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소현세자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李馨益)에 대한 처리 문제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어미 집에 왕래하던 의사로 세상에 추잡한 소문이 많던 자였다. 세자가 이형익에게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양사는 이형익을 처벌하자고 주청했다.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는 것이 양사의 탄핵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이형익을 비호하면서 처벌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돼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 석철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가 세손으로서 세자를 대신해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그 중 두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게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다른 증거는 세자빈 강빈의 처리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빈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왔다. 세자의 장남 석철의 보모 최상궁은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죽어갔다. 그리고 인조 24년 정월에는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이미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인조와 소용 조씨가 공모해 강빈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내린 인조의 비망기는 자신이 사건의 배후 연출자임을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외람되게 내전(內殿:왕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인조 스스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을 귀양 보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의 악함은 강빈을 사사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결국 강빈을 폐출하여 사저로 내쫓은 후 사약을 내려 죽여버리고, 교명 죽책(竹冊) 등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까지도 죄를 씌워 죽여버렸다. 자신의 친아들과 손자, 며느리와 사돈까지 죄없이 죽여버린 이런 인물의 시호에 「어질 인」자를 써 인조(仁祖)라 한 것은, 서인 정권의 역사뒤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악조(惡祖)라 불러야 마땅하다. |
첫댓글 한 시대의 잘못된 리더의 리더십은 한국을 망국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의 문제 뿐 아니라 광해군을 척살한 인조반정으로 이어진 조선의 역사는 추후 조선의 국력을 약화시켜 결국 조선이 망하는 시발점이 된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