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동쪽으로50리 계룡산속 동학사에 사당 3칸이 있으니 위패를 받들어
단종공의돈효대왕(端宗恭懿敦孝大王)과 정순왕후송씨(定順王后宋氏)를
제사하는 곳이라 매년 10월과 3월 이면 원근의 선비들이 사당아래
나아가 제사 올렸다,
아 ! 王은 世宗大王의 적손이요 문종대왕의 장남으로서 일찍 세자에 책봉되고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니 총명한 자질로 성학(聖學;임금의 학문)이 장차 성취되어
일국의 신민들이 큰 德을 보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더니
불행하게도 천지운기가 핍박하여 하늘이 정한 운명이 이미 돌아가게 되어
겸양하여 왕위를 물려주어 정축년10월24일의 변에 이르게 되었으니
臣子로서는 차마 말할 일이 아니요,또한 감히 자세히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조가 단종을 높이여 上王으로 하고 매일 3번씩 문안하는 예절을 행한 것으로
보아 최후의 행한 처분은 본 뜻이 아닌 듯 의심되니
여기에서 당시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았던 자의 죄상이 하늘에 닿은 것이다,
처음에 청간공 김시습(淸簡公 金時習)이 변을 듣고 통곡하며
거짓 미쳐 중이되어
충의공 엄흥도(忠懿公 嚴興道)와 정절공조여(貞節公 趙旅)
충정공조상치(忠貞公 曺尙治) 충간공송간(忠簡公 宋侃) 감사 이축(監司 李蓄)
교리 성희(校理 成熺) 정랑 정지산(正郞 鄭之産)등과 더불어
어포(御포)를 받들어 영월을 향하고
초혼하여 천어(川魚) 산과(山果)로써 제사하였더니
세조가 지나다가 동학사에 들려보고 슬픈 듯이 감회가 일어
단종의 어휘와 원통하게 죽은 모든 臣下 백여인을 써 놓고 절에 부탁하여
재계 축원하고 그후 추가하여 또 제전 40결을 주어 제사날 마다
유생과 중들로 하여금 제공들 까지 제사하게 하니
이것이 초혼각을 설치하게 된 유래이다,
숙종 무인년 1698년에 현감 신규가 상소하여 복위 하시기를 청하니
제신들에 세 수의(收議)하도록 명하였는데 의논에
이동(異同)이 많았으되 오직 호조참의 권상하(權尙夏)가
끝까지 대답을 올려 임금의 마음에 결단을 내리게 하여 한꺼번에 번거릅고
까다로운 예절의식을 정하게 하니
300년간 신령과 사람의 원통함이 여기에서 쾌히 풀리게 되어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광무8년에 편액을 숙모전이라 걸고 정순왕후의 위패를 받들어
함께 제사 지내니 체모가 더욱 존중되었고
또 東西무 가 있어 전후로 제신들을 종향케 하니
안평대군 용(瑢) 금성대군 유(瑜) 화의군 영(瓔) 한남군 어(王於) 영풍군 천(王泉)
하녕군 양(禳)은 육종영이고 정민공 송현수(貞愍公 宋玹壽)
충장공 권자신(忠莊公 權自愼) 헌민공 정종(獻愍公 鄭悰)은 三의척이고
충정공 황보인(忠定公 皇甫 仁) 충익공 김종서(忠翼公 金宗瑞)
충장공 정분(忠莊公 鄭분)은 三상신이고 충정공 박팽년(忠正公 朴彭年)
충문공 성삼문(忠文公 成三問) 충렬공 하위지(忠烈公 河緯地)
충간공 이개(忠簡公 李塏) 충경공 류성원(忠景公 柳誠源)
충목공 유응부(忠穆公 兪應孚)는 死六臣이고
청간공 김시습(淸簡公 金時習)과 문정공 남효온(文貞公 南孝溫)
정간공 이맹전(靖簡公 李孟專) 정절공 조여(貞節公 趙旅)
정간공 원호(貞簡公 元昊) 정숙공 성담수(靖肅公 成聃壽)는 生六臣이고
충장공 이보흠(忠莊公 李甫欽) 충의공 김문기(忠懿公 金文起)
충정공 민신(忠貞公 閔伸) 판서 조극관(判書 趙克寬)
충숙공 성승(忠肅公 成勝) 충강공 박정(忠剛公 朴靖)
문민공 박중림(文愍公 朴仲林) 정간공 허후(貞簡公 許.言羽)
절민공 조숭문(節愍公 趙崇文) 정무공 기건(貞武公 奇虔) 조상치(曺尙治)
송간,이축,성희,정지산,등 禍를 입었거나 자정한중에
가장 현저한 사람 같은 분들인데 충
의공 엄흥도 는 이 사람에게 힘입어 장릉을 이루었은즉 그 공이 더욱 가상하다,
아 ! 천승지국의 임금의 사당이 하방의 작은 고을 궁벽한 상중
적막한 절가운데 붙이어 있으니 이는 천지의 큰변이다,
그러나 계주(桂州)에도 이미 우(虞) 임금의 사당이 있고
초나라 백성의 초가집에서도 오히려 소왕(昭王)의 제사를 지내고
촉주(蜀主)의 사당도 또한 야사(野寺)곁에 있으니
이것이 가히 증거가 되어 질정하여 의심없고 의혹되지 않기를 기다릴 만 하다,
사전(祀殿)이 오래되어 무너지니 경향의 진신(搢紳) 장보(章甫)들이
수리개축 하기를 함께 꾀하여 장차 비석을 세우려 하니
시종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은 참봉 류상근(柳庠根)과
참봉 이계익(李啓翼) 유생 송주헌(宋柱憲)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군신간의 큰 윤리는 하늘의 경위이요
땅의 의리이며 배성의 이륜(彛倫)이라]하였다,
만일 이뜰에 들어가 禮를 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당이 우뚝하여 잘 정리된 것을 우러러 보게되면,
오 ! 전왕을 잊을 수 없도다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고
東西,兩무의 위엄스러움을 살펴 본다면 忠義의 마음이 왕성하게 일어나
사람마다 충군 애국하고 집집마다 윗사람에게 친하고
어른을 섬기면 난신적자가 계속 나오지 못하여
기리 천하 만세의 풍교에 도움이 되리라,
臣이 삼가 사당을 세우게 된 전말을 펴서 감히
이 뜻으로서 무궁히 다가올 後世 사람들에게 보이노라,,,
銘하노니.
동학산 골짜기 계룡산 산속에
사당이 우뚝서니 쓸쓸한 절간 이어라
우리 단종대왕 총명하고 어지신데
어찌하여 운이나빠
아 ! 지위 못 지켰나
희생제향 못 받고 원금(寃禽)인양 울었다네,
노능의 한 무덤은 차마 어찌 말하리까
草夜에 忠臣있어 변을 듣고 미쳤다네
소리높여 혼 부르니 우리 上王 못 잊겠네
위패묘셔 祭 지내니 동지들과 같이했네
물고기와 산과일을 피눈물에 섞었다네
숙종조에 이르러서 어렵게도 의식올려
신과 사람 고무되고 百代後도 면목있네
정순왕후 생각하니 궁중규범 빛나시어
험한일 갖추겪고 완전한옥 티가없네
甲辰年에 비로소 배위로 모시고
숙모전액 걸어놓아 숭봉의식 깆쳐졌네
함께모셔 배향하니 한마음 한덕이라
三상신도 종향하고 六종영도 배향하고
四의척과 생사六신 신하중에 충신이라
화를입은 동료들과 자정하신 제공들을
사당에와 제사하니 3월과 10월이라
깃발이 휘날리니 혼령이 왕래하는 듯
선비와 고간들이 바삐 달려와
제 각각 있는 정성 모두 다 하니
그윽한 골짜기 한구역 안에
군신간의 의리가 밝아 졌다네
퇴락한 혼각을 수리하여서
깨끗이 제사올려 정성을 다 하니
그마음 기리기리 변치 않아서
영원히 영원히 밝은 인륜 펴게 되었네,,,
장릉 사실은 원비(原碑)에 밝게 기재되어 있으니
다시 중첩하여 말할필요가 없으나 당시 절개를 세운 사람들의 생사는 비록 다르나
그 충성은 같은 것이니 의당 함께 배향할 것인데 혹은 제사를 올리고
혹은 올리지 않아 공론이 함께 일어나 추후로 제향하였다,
순절한 신하라면
충경공 정효전(忠景公 鄭孝全) 판관 권완(權完)충정공 박심문(朴審問)
도정 이종(李種) 장신 송석동(宋石仝)
부사 이경유(李耕유) 참의 조순생(趙順生) 첨중추 민보창(閔甫昌)
수찬 허조(許조) 교리 김선지(金善之) 박이년(朴仁年)
정랑 윤영손(尹鈴孫) 판사 윤처공(尹處恭)
별좌 봉여해(奉汝諧) 검열 박영년(朴永年) 박사 손서륜(博士 孫敍倫)
증교관 조철산(趙哲山)이요,
자정한 신하로는 충숙공 권절(權節) 직제학 강희안(姜希顔)
김한계(金漢啓) 이종검(李宗儉) 판사 최선문(崔善門)
유수 민심언(閔審言) 집의 홍연(洪演) 군수 강승(姜昇)
도사 송경원(宋慶元) 정랑 신규(申奎)가 진심을 들어내어
글월을 올려 마침내 복위 되었으니 이 사실을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이라,
禮를 이루었음에 추가로 왼쪽에 세기노라,,,
進士 臣 宋哲憲 謹記
아--- 빛나도다,
영능(英陵)은 우리 동방의 요순(堯舜)이요,
집현전 문선(文選)에는 비로소 神仙이라 일컬었고,
司成같은 이는 문충공(정몽주)의 학문을 이어 받았도다,
玉같은 좋은 자질(資質)이오 빙얼(氷蘖)같은 곧은 모습이라
때에 풍운을 만나서 일찌기 높은 급제에 뽑혔도다
전헌(銓憲)의 양부(兩部)를 두루거쳐 임금의 계옥(啓沃)함이 많았도다
팔준마를 그린 쪽지는 태조(이성계)의 창업을 말함이라
왕이 지어서 올리라 命함에 신하들이 써서 노래를 지었도다
성삼문 박팽년 같은 분들이 함께 찬양하여 그 功을 들어내었도다
경태(景泰)에 이르러 우리 임금이 있음을 알았도다
오직 이때에 순흥에서 외숙부가 죽었도다
자기의 몸을 숨기고 마음을 차마 들어내지 않고
어버이께서 罪에 걸리지 않기를 구(求)하였도다
마음을 잡음은 어려우니 義理를 보고 스스로 다스렸다고 말하였으니
아...그 말이 가까우며
아 ! 그말이 가깝도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