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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 땅 용봉산(龍鳳山.369m)을 가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계절의 여왕인 5월에 꽃중의 여왕인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온 누리에 향기로 충만하고, 다가오는 먼~ 산천(山川)의 색깔은 푸르다 못해 거무스름하게 보이며, 날씨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폭염을 예보할 정도다.
칠곡 휴게소에서 간단히 조식(朝食)을 하고는 줄곧 내달아 ‘예산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한 다음 홍성군의 “내포 신도시”에 들어서니, 너무나 많은 변화에 정신이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그 옛날 넓은 평야는 간 곳 없고~ 아파트와 새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풍요의 고장 “내포땅”이라는 말은 이제 전설이 되어 버렸다. 이곳 예산땅은 ‘무한천’과 ‘삽교천’의 넉넉한 수량(水量) 덕분에 물산(物産)이 풍부하여 서울사는 양반님들이 정계를 물러나 정착하여 많이 살던 곳이다.
하여~ 고덕면에 “구만포(九萬浦)”라는 곳은 아산만에서 뱃길로 벼 9만 섬을 실어날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또 일제 초기만 해도 “예산 가서 옷 잘 입은 체하지 말고 홍성 가서 말 잘하는 체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충청남도의 경제 중심지였다.
그럭 저럭 ‘용봉산 주차장’에 당도하여 단체(46명)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최영장군 활터”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어찌나 대열이 긴지 선두(先頭)와 후미(後尾)가 끝간데를 모르겠슴니다.
오늘 따라 날씨도 유난히 화창하고 별나게 더워서 경사진 산행길에 지열(地熱)이 대단합니다. 산행길 좌 우측으로는 식당과 유흥업소들이 즐비(櫛比)해서, 공양간, 경마연습장, 청소년수련원 등 다 셀 수 없슴니다.
10여 분을 올랐을까? 인공 폭포(瀑布) 위에는 ‘사조산업’의 간판이 보이고 그 입구에 ‘김좌진(金佐鎭 1889~1929)장군’의 존함(尊啣)이 적혀있다. 사조산업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문이 굳게 닫혀있어 더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는 홍성(洪城) 출신이며 독립운동을 한 장군으로서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이범석(李範奭), 나중소(羅仲昭) 등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고, 그 후 ‘항일운동’에 많은 공훈이 있었으나 1930년 1월 자객(刺客)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묘(墓)는 보령시 청소면(靑所面)에 있으며, 후손(後孫)은 (子)김두한, (孫女)김을동(현 국회의원)으로 이어진다. 오를수록 시야는 넓어져서 ‘내포 신도시’가 한 눈에 들어오고, 막힌 곳 없이 탁 트여서~ 참으로 속이 다 시원합니다!
북동쪽으로는 무한천(無限川)과 삽교천(揷橋川)의 끝트머리에 ‘아산만’이 보이고, 건설중인 신도시엔 ‘충남도청’을 비롯하여 교육청, 경찰청이 들어설 예정으로 한참 공사중이며, 멀지 않아 ‘예산군+홍성군’을 합쳐 시(市) 승격이 되리라!
오를수록 기이(奇異)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 틈새로 자라난 소나무들이 자연 그대로가 수석(水石)이요! 분재목(盆栽木)이로다! 님들에게 사진촬영도 해드리며 거북바위, 흔들바위를 지나 ‘최영장군 활터’에 도착하니... 사방이 탁~ 트여서 신도시의 건물들이 ‘성냥갑’만하게 보이고, 바로 옆의 6각정자에는 앉을 자리가 없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안내문에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어린시절에 애마(愛馬)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화살을 쏘아 홍성읍에 있는 “은행정(銀行亭)”까지 누가 더 빠른지 말과 내기를 하였는데... 힘껏 달려 도착해 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 약속한데로 애마의 목을 칼로 내리치는 순간 ‘피융~’하며 화살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최영은 자신의 경거망동을 크게 후회하며 말을 그 자리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홍성읍 국도변 “은행정” 옆에 “금마총(金馬塚)”이라고 부르는 말 무덤이 있으며, 이 곳은 그가 무술연마를 하며 활을 쏘았던 곳이라 적혀있다.
그는 조선초기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 1359~1438)의 외조부이며, 고려 말엽에 왜구를 물리치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우왕(1374~1388) 때 ‘요동정벌’을 하기 위해 출전 하여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일파에 붙잡혀 고봉(高峰,高陽)에 유배 되었다가 훗날 죽임을 당했다.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은 만고에 진리요,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슴니다. 그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인지~ 고불(古佛)도 조선의 “청백리(淸白吏)”로 존숭(尊崇) 받고 있으며,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위정자(爲政者)와 공인(公人)들이 깊이 새겨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할(喝)!!!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20여 분을 걸어 올라 정상에 도착하니, 여러 산악회에서 모여 든 등산객들이 바글바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로다! 서로들 용봉산 표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시느라 줄을 서 기다림니다.
기다리는 동안 능선님은 “추억의 아이스께끼”를 여러개 사서 남산님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빈 몸으로도 오르기가 쉽지 않을 텐대~ 만만치 않은 이곳까지 얼음과자통을 운반해 온 정성이 놀랍슴니다. 10여 분 이상을 기다려 우리님들에게 단체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소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천하를 조망(眺望)해 봅니다.
이 곳 용봉산(龍鳳山 369m)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 부근에서 ‘금북정맥’을 따라 서북쪽으로 구룡산, 상당산, 좌구산, 오대산, 보현산 등을 거쳐 안성의 칠장산 부근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서운산, 성거산, 흑성산, 봉수산, 문박산을 지나 광천(廣川)의 백월산 부근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매성봉, 일월산을 거쳐 용봉산(龍鳳山)에 이르고, 그 잔여지맥은 수덕산, 가야산, 은봉산을 지나 태안군(泰安郡)의 지령산 부근에서 서해바다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금북정맥’이라 한다.
아울러 기이한 바위와 수려(秀麗)함이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 하여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산천(山川)의 정기 또한 뛰어나서 오고 간 인걸(人傑)도 셀수없이 많아서~ 예산의 추사(秋史)선생을 비롯하여 홍성의 윤봉길의사, 토정 이지함, 이산해, 김좌진장군 등이 있어 이 고장을 빛나게 하고 있슴니다.
더욱이 유명한 것은 바로 이웃하여 가야산 석문봉 아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墓)’에 얽힌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 오는데... 1822년에 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에 어느날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을 만났다.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다. 흥선군은 단연 가야산의 명당을 선택하여 형제분들과 경기도 연천에 있는 부친의 묘를 이장(移葬)하기로 결정하였다.
허나 그 곳에는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 서 있어, 그가 처분한 재산의 2만냥을 주지에게 주고 매수하여 절을 불지르게 했다고 한다. 그 뒤 탑(塔)을 헐고 그 자리에 1845년에 연천에 있던 묘를 운구해 와서 모셨다.
이 후 7년만에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둘째아들 재황(載晃:命福)이가 1852년에 태어났으며, 그로부터 11년 뒤에 1863년에 고종임금으로 등극하였다. 또 그 뒤를 이어 아들이 순종임금이 되어 1910년 한일합병으로 조선이 막을 내렸으니, 명지관의 예언대로 2대천자가 난 것만은 사실이다. (이상 황현의 ‘매천야록’& 예산의 향토사학자 박흥식의 ‘예산의 얼’ 참조)
믿을 수도 안믿을 수도 없는 일이라! 오래전(1999년) 답사의 기억을 되살리면, 석문봉(石門峰)이 주산이 되고 청룡(靑龍)이 옥양봉 만경봉으로 이어져서 30여리에 걸쳐 감아있고, 백호(白虎)는 가사봉 가엽봉 원효봉으로 이어져 감기우며, 안산(案山)은 멀리 60리 떨어진 봉수산(鳳首山)이 감싸주고
있으며 득수(得水) 또한 잘 갖추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조산(朝山)이 겹겹이 싸여서 그야말로 중중포리(重重袍裡)다.
필자의 견해(見解)로는 거의 교과서(敎科書)적인 명당이며, 과시(果是) 조선(朝鮮)에서는 제일가는 명당이라 하겠슴니다. 연하여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은 고종5년인 1868년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두 번이나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고덕면 구만포에 배를 타고 들어와서 ‘한국 천주교인’을 앞세우고 와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일이 역사적으로 생생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 것이 빌미가 되어 대원군이 천주쟁이를 더욱 박해를 했다 하니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무언(無言)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악귀봉’ 방향으로 몇걸음을 진행하다가 모두들 적당한 곳에서 삼삼오오(三三五五) 모여 앉아 점심을 드심니다. 저마다 시장타 하며 한참을 맛나게 드시는데, 지근(至近)한 옆자리에서 조병하 회원님이 한컵의 식혜(食醯)와 찌짐을 가져 오셨다. 이래 저래 山 인심은 언제나 푸근하고 아름답슴니다.
얼마를 쉬다 다시 행군을 하니 점심후라 배도 든든하여 하오(下午)의 더운 날씨도 되려 시원하게 느껴짐니다. 오르락 내리락 능선길은 험한 바위들도 많아서 철계단이나 나무계단을 잘 시설해 놓았으며 어떤 곳에는 작업중에 있다.
모두들 시간의 여유도 있어 기이한 바위들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해 가며 서서히 진행합니다. 한참을 걸어서 “용봉산의 보물(옆으로 크는 나무)”앞에 도착하니 보다 보다 처음보는 소나무입니다. 이십수 년을 등산하는 동안 ‘요런 소나무는 처음이랑 께요!’ 얼마나 강인하고 고통스러웠을까? 안내판에 수령이 100년은 되었을 거라고 하며, “용봉산의 보물”이라고 적혀있다.
또 쪼끔 더 나아가니 ‘솟대바위’가 나타나는데~ 조물주의 작품이 기이하다 못해 신기할 정도입니다! 꼭~ 거시기처럼 생긴 것이... 게다가 끝부분 쯤 해서 ‘돌귀’가 버섯처럼 한쪽으로 돋아 있는데~ 이를 깨물어도 웃슴이 절로 나옵니다!
이어서 행운바위, 물개 바위, 삽살개 바위 등 끝이 없슴니다. 토질도 마사토여서 걷기가 조심스럽고 나무그늘도 적어서 봄, 가을 산행으로 적합하며, 경치는 눈에 쥐가날 정도로 아름답고 신기합니다 그려!
1시간 여를 걸어서 ‘절고개’에 도착하여 한참을 쉬다가 다시 용봉사 방향으로 하산합니다. 10여 분을 걸어 내려오니 높은 언덕위에 거대한 자연석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으며, 언덕아래 넓은마당 한켠에는 제단(祭壇)이 마련되어있다.
안내문에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좌상(洪城 新耕里 磨崖如來坐像)’은 감실형(龕室形)의 공간 안에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는 육계(肉髻)가 큼직하고 얼굴은 몸에 비해 크고 풍만하다.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微笑)가 흐르고 신체는 얼굴에 비해 왜소하게 느껴지며 균형이 잘 잡혀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으며, 중생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실 것으로 느껴짐니다. 조각 양식으로 봐서 고려초기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 4m 보물 제3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채로 예를 드리고 벽송대장님과 윤갑용총무님께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물러나오니, 언덕아래 커다란 바위 위에 “문보살공덕비(文菩薩功德碑)”가 세워져 있다. 후면에 “壬子年 六月生 경상도 출신 文順德 菩薩이 불기 2521년(1977) 5월에 마애불을 발견하여 일생 동안 信奉, 造景, 造築, 불사에 심혈을 바친 공덕비”이다.
다시 10여 분을 더 걸어 용봉사 우측 언덕에 이르니 등산개념도에 있는 “조씨묘”가 보인다. 국세(局勢)가 크고 웅장하며 용봉산에서 흘러내린 용맥(龍脈)이 힘차게 멎어 있고, 청룡 백호도 비교적 잘 갖추어 있으며, 다만 안산(案山)에 해당되는 여의주봉(如意珠峰)이 너무 가까워서 좀 답답한 느낌을 줍니다.
이 높은 곳 까지 옮겨모신 후손들의 정성이 갸륵하며, 비문에 “朝鮮嘉善大夫工曹參判平壤趙公羲純과 貞夫人文化柳氏”합장 묘 이다. 경사진 언덕을 내려와 용봉사 도량(道場)에 들어서니 내일이 ‘초파일’이라 마당에는 연등으로 찬란히 빛나고, 지장전(地藏殿) 내부에는 보살님 두분이 불기(佛器)를 닦고 계신다.
언덕 바로 옆에는 근세에 세운 듯 한 “석불입상(石佛立像)”이 모셔져 있는데, 그 곳에도 노보살(老菩薩)님 한분이 정성껏 청소를 하고 계시며, 대웅전 뜰 아래에는 스님 한분이 연등접수(蓮燈接受)를 받고 계신다.
연등(蓮燈) 접수를 하고 도량을 잠시 둘러보니 전각의 수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삼성각, 요사채 등 비교적 단촐하다. 주산은 웅장하고 청룡 백호는 감싸기 보다는 흘러가는 형국으로 그의 협곡에 가깝도다!
대웅전 뜰 아랫마당에는 팔각다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축대벽에는 감실형(龕室形)에 자그마한 약사불이 모셔져 있어 귀엽고도 앙증스럽다. 도량을 한바퀴 휘~ 돌아 나오니 우측 석벽(石壁)에는 마애불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용봉사마애불(충남 유형문화재 제118호)”은 명문(銘文)이 “정원 15년”이라 새겨져 있어 서기 799년 통일신라 소성왕(昭聖王 798~800) 2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귀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겠으며, 머리는 육계(肉髻)가 봉긋하고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무릎까지 드리워져 있으며 높이 2.3m에 수인(手印)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다.
선 채로 예를 드리고 물러나오니 삼성각(三聖閣) 뒤쪽의 ‘병풍바위’가 유난히도 밝고 눈부시게 빛나도다! 龍鳳山의 정기와 부처님의 서광(瑞光)이 한데 어우러 짐인가! 일주문에서 이경숙님, 조병하님 등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한 걸음에 나려오니 소공원에는 용봉산의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碑文)에 용봉산은 고려시대에는 북산(北山), 조선시대에는 팔봉산(八峯山)이라 불렀으며 일제 때는 홍성군의 산줄기는 용봉산, 예산군 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수암산으로 불리워 졌는데, 이는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용봉사’ 와 ‘수암사’라는 절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아울러 산 전체의 형상이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용봉산(龍鳳山)”이라고 했단다.
본래 이름이라는 것은 없는 것인데
이런 저런 인연들로 서로 얽혀서
만물에 식별을 위해 명칭을 붙인 것이라
이름은 없어도 좋고 있으면 더 좋고
죽고나면 나무요, 고인(故人)인 것을
40여 분을 신나게 달려 “추사고택”에 이르니 어쩐지 조용하다. 해설사도 보이지 않고 전에 받던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먼저 추사(秋史) 선생의 묘(墓)에 간단한 예를 드리고 별채를 지나 고택에 들어서니, 화단 앞에 추사의 친필인 “石年(석년)”의 긴 그림자가 반갑게 맞아 주심니다.
추사고택(秋史古宅)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반가 주택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채로 구분되어 있고 사랑채 방안에는 병풍을 뒤로하고 전형적인 서생(書生)의 글방 냄새가 난다.
각 기둥의 주련(柱聯)에는 선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한시들을 새겨 놓았으며, 또 높은 벽에는 조선 최고의 걸작품이라 불리는 “세한도(歲寒圖)”의 모조품도 보인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1844년 완당(阮堂) 나이 59세 때 그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준 것이라 한다.
완당(추사)은 유배시절에도 많은 명사들과 서신으로 교유를 하였다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이상적은 희귀한 서적들을 청나라에서 힘들게 구해 와서 스승 완당에게 보내 드렸다. 세상 인심은 과거와 달리 많이도 변했건만 한결같은 제자의 정성에 감읍하여 “세한도”를 그려 주었다고 한다.
한데 일제시대에 일본 학자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서예가 ‘소전 손재형’선생이 1944년에 무상으로 돌려 받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또 그의 아들 “아키나오”는 2006년 2월에 선친의 추사 관련 유품 2700여 점을 대한민국 과천시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아는자는 안다! 작품의 가치를... 그 것은 돈으로 환산 하거나 “무가보(無價寶)”,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보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진인(眞人)은 국적과 대상(對象)을 가리지 않으며, 또 보상(報償)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줄 알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이 집에서 출생 했으며 일설에 태어날 때 뒤뜰에 우물이 마르고 뒷산에 나무와 풀들이 시들었다고 하며 또 24개월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어머니 기계 유씨와 아버지 노경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나중에 백부(伯父)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으며,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 임금의 둘째 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훈척가문이 되었으니 명문 중에서도 세도가였다.
어릴 때 실학의 대가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25세에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당대의 석학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4~1849)’을 만나 고증학의 셰계와 실사구시론을 배웠다. 당시 옹방강으로부터 “경술문장이 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귀국하여 34세(1819)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제, 호서안찰사(충청도 암행어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1830년 그의 아버지 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류되어 일시 벼슬길에서 물러 났으나 순조의 배려로 다시 관직에 복귀되었다.
그러다 1840년 안동김씨 일파가 10년 만에 ‘윤상도’의 옥사 사건을 다시 거론하여 이번에는 추사 자신이 9년간에 걸친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 들러 대웅전에 걸려있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저런 촌스런 글씨를 달고 있느냐?”면서 다시 써 주어 걸게 하였다고 한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 (원교 이광사의 글씨)
당시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대가였으며, 주로 지방에서 활약하여 글씨에 겸재 정선에 비견되는 존재였으니, 향색(鄕色)이 나는 “촌스러운” 글씨가 추사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9년여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 대흥사에 들러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였다.”며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게 하였다. “날이 차가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松柏)가 뒤늦게 시든다(後凋)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유배생활이 주는 삶의 시련이 그의 눈을 뜨게 했으며 아울러 그의 글씨도 완성하여 오늘날 “추사체”라고 일컬어 지고 있다.
연하여 그는 글씨(書)와 그림(畵)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며, “그림이나 글씨가 어떤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道)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였는데 그의 “부작란(不作蘭. 不二禪蘭)”의 작품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이어서 1851년에 당시 친구였던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하며, 이 후 과천에서 기거하며 서울 봉은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다가 71세 되는 1856년에 타계 하였으며 봉은사의 “판전(板殿)” 글씨를 죽기 3일전에 썼다고 한다.
추사의 유품은 생전에 사용하던 벼루와 인장(印章) 등과 편지와 서첩, 또 1857년에 이한철이 그린 추사영정을 일괄하여 보물 제547호로 지정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하여 보관하고 있다.
고택을 한바퀴 휘~ 돌아서 몇 몇 회원님들과 함께 화순옹주(和順翁主)의 정려각(旌閭閣)으로 갑니다. '화순옹주'는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결혼하여 그의 부군(夫君)이 죽자 단식(斷食)하여 따라 죽으니, 훗날 정조임금이 이 열녀문을 내렸다 하며 조선왕조를 통틀어 왕실 사람에게 내린 것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한다.
당시 영조는 딸을 무척 아꼈으므로 단식을 하지말 것을 명(命)했는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괘씸하여 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情)보다 사랑과 법도(法度)를 따른 예라 하겠슴니다.
白松公園에 오르니 ‘추사의 예술’과 ‘현대의 석조예술’이 한데 어우러져서 보는 눈을 의심케 합니다. 입구에 “세한도(歲寒圖)”는 공원의 백미(白眉)이며, 몇걸음 떨어져서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에게 써 보낸 “명선(茗禪)”이라는 글이 실물과 꼭 같이 새겨져 있다.
추사는 어릴적 집근처의 화암사(華巖寺)에서 공부 하면서 불교에도 조예가 깊으며,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 초의스님과는 서신(書信)을 주고 받으며 교분이 깊어 스님께서 늘 차를 보내주시는 보답으로 “茗禪”이라는 글을 써 드렸다고 한다.
구윤서회장님, 윤갑용총무님, 강선생님 세분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한바퀴 휘~ 돌아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추사의 고조부 묘(墓) 앞에 ‘백송(白松:천년기념물 제106호)’을 보러 갑니다.
이런저런 여담을 나누며 잠시 걸어서 묘 앞에 당도하니, 白松의 상태가 오래전보다 더 싱싱합니다 그려! 1809년 추사가 청나라 연경에 아버지를 따라가서 가져 온 씨앗을 심었다고 하니 200년은 족히 넘었슴니다.
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돌아 나오니 전화가 빗발침니다. 몇분 후에 다시 합류하여 못다한 분들께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 귀갓길로 오르니, 5월의 긴 하루해도 노을에 물들어서 찬란합니다!
빈 손으로 왔다가 한 자루 담아 가는데
무게는 하나도 없고 기쁨만 충만 하고나!
님은 가시고 없는데 님의 자취만 남았구려
시공을 초월해서 님의 향기 영원 하소서!
단기 4348년(서기 2015년) 5월 24일
충청남도 내포 땅 용봉산(369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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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잘 계시는지요?
바쁘다는 핑계로 산행후기가 많이 늦었슴니다.
당일 용봉산 산행에 동참하신 모든분들(46명)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아울러 진행에 수고하신 구회장님을 비롯하여 벽송대장님, 윤총무님, 김미소총무님,
능선운영위원장님 등 많은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림니다~
연하여 사진자료도 부족하여 다른 자료에서 활용한 것도 있으며~
이제 5월도 마지막 주말이네요! 모든님들! 늘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
고고문님 긴장문의 여행기쓰시느라 많은수고 하셨습니다,
용봉산에 얽힌 역사공부 많이하고 같니다.~~~
벽송님 잘 계시죠?
보잘 것 없는 장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림니다.
안쓰도 허전하고 쓰고나도 허전하담니다!
공허를 공허로 달랠 수 밖에~ 없는가 봅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산행 후기에서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겁게 산행 한것 같이 느끼면서..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수고 많았어요.
황고문님! 잘 계시죠?
산행 당일 함께못해 많이 아쉬웠슴니다!
덕분에 저는 사진을 못 찍었어요!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산행하실 수 있기를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