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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하철역 유래
인천지하철역 유래
1.동막[東;동녘 동/幕;장막 막]
이 동네의 이름인 동막에서 역명을 따왔다. 동막은 옛날에 동쪽에 군대가 막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동막은 현재 인천지하철 1호선의 종착역이나 향후 송도신도시까지 연장될 계획이다.
2.동춘[東;동녘 동/春;봄 춘]
동춘역(동춘동 237 일대) : 청량산 동쪽이라 東村 또는 동춘으로 불려 동춘동은 본래 인천부 서면의 지역으로서 청량산 동쪽이 되므로 동촌(東村) 또는 동춘이라 하였는데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쇠미(小岩) 풀무골 (治谷) 각골(稼谷) 자앞(尺前) 도굴(道谷) 동막(東幕)을 병합하여 동춘리라 해서 부천구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동춘정(東春町) 이라 하다가 1946년 왜식동명 변경에 의하여 다시 동춘동 이 되었다.
3.원인재[源;근원 원/仁;어질 인/齎;가져올 재]
원인재는 인천 또는 인주 李氏의 근원이 되는 집이란 뜻으로 인천이씨 重始祖인 이허겸의 재실이었다. 고려시대 인천의 이름이 인주였으며 고려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 내향(친정) 이라하여 인주 이씨 본향의 이름 을 따온데서 비롯되었다. 재실이 인근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역명 선정시 원인재역으로 선정이 되었다.
4.신연수[新;새로울 신/延;끌 연/壽;목숨 수]
연수신시가지를 뜻하는 의미로 신연수라 제정하였으며 연수란 수명이 연장된다는 장수마을의 의미를 가진 이름이 다. 옛날 연수동과 남촌동 사이를 능안말이라고도 불렀으며 이 곳에는 문학지구, 선학지구등에 걸쳐 흐르는 승기천 이 있다.
5.선학[仙;신선 선/鶴;학 학]
- 문학산 동쪽, 길마산 주변에 위치한 선학동은 본래 도재 혹은 도장으로 불렸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부내면 소속. 이후 구읍면으로 개칭되어 구읍면 도장리가 되고, 다시 1914년 행정구역 조종에 따라 인천부에 편입, 무학정으로 명명. 해방 이듬해인 1946. 1. 1부터 지금의 선학동이 됨.
- 무학정이라 불리던 당시 '무학'이란 명칭을 문학산의 줄기인 '선유봉'의 '선'자와 '무학' 의 '학'자를 따서 지은 이름
6.문학경기장[文;글월 문/鶴;학 학/競;다툴 경/技;재주 기/場;마당 장]
문학동, 관교동, 연수동, 학익동, 청학동에 걸쳐 있는 문학산은 그 꼭대기에 백제 온조왕의 형 비류의 도읍터라고 하는 성터가 남아있는 유서깊은 곳으로 본래 인천도호부의 남산으로 명명되었으나, 조선 중종때부터 "학산"으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산 북쪽에 "문묘"라 불리우는 향교가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학산의 이름에 "문"자를 더하여 문학산이라는 이름이 탄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문학산의 일원에 건설된 문학경기장의 이름을 따서 "문학경기장역"으로 명명 되었음.
7.인천터미널[仁;어질 인/川;내 천/터미널]
1997년 11월에 완공된 인천종합버스터미널은 현재 많은 인천 시민들이 이용하는 곳으로써 인천지하철이 개통 후 이 곳을 찾는 시민들이 이용에 편리하도록 “인천터미널역"으로 제정되었다. 문학산 자락 끝에 위치한 관교동은 예전의 인천 도호부 청사가 있던 관청말과 인천향교가 있던 향교말을 합친 이름 으로써 지금까지 전해져 사용되고 있다.
터미널은 한자표기 안합니다
8.예술회관[藝;재주 예/術;재주 술/會;모을 회/館;집 관]
이지역은 예로부터 구리울, 구울, 구월이라 불리어 왔으며 1994년 12월 인천종합 문화예술회관이 개관되면서 이 역을 예술회관역 이라 하였다. 이 역은 향후 인천지하철3호선과 환승할 수 있도록 계획되어있다.
9.인천시청[仁;어질 인/川;내 천/市;저가 시/聽;들을 청]
인천시청역은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시청이 위치한 곳이다. 전에는 중구 중앙동에 위치하였으나 이곳으로 이전 하면서 인천의 새로운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 당초에는 시청역이었으나 서울지하철 1호선의 시청역과 혼동을 줄 우려가 있어 변경되었다. 차후 인천지하철의 2호선과 환승할 역이기도 하다.
10.간석오거리[間;사이 간/石;돌 석/五;다섯 오/거리]
간석동은 본래 인천부 주안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주안, 가촌리, 새말, 벌터, 실은재, 석촌, 쇠파니, 풀무골, 삼거리, 기화집말을 병합하여 간촌과 석촌의 이름을 따서 간석리(間石里) 라 하였다. 그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일본식 이름으로 목월정(木越町) 이라 불리다가 해방후 1947년에 오늘의 간석동으로 변경되었다.
#거리는 순 우리 말이라 한문표기 안합니다 距離[거리]와 뜻이 달라요..
11.부평삼거리[富;부자 부/平;평평할 평/三;석 삼/거 리]
1999년까지만 해도 이 곳은 서울방향, 백운역방향, 인천방향의 삼거리로써 부평삼거리라 불렀다. 현재는 도시계획 에 의거 사거리가 되었으나 시민들은 여전히 부평삼거리로 부르고 있다. 부평삼거리는 신태양 아파트 부평공동묘지 입구에 까지 걸쳐 있으며 이곳에서 간석오거리로 넘어가는 원통고개가 있어 당초에는 '원통역'으로 인천시 지명위원회에서 결정 되었으나 이 지역의 주민들의 요청으로 현재의 '부평삼거리역' 으로 역명이 제정 되었다. (원통고개 : 한강물을 끌어 인천 운하를 만들려고 고려말∼조선초까지 운하계획을 세우고 공사를 시작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원통하다 라는 의미의 원통산, 원통고개 에서 유래됨.)
12.동수[同;한가지 동/水;물 수]
부평역을 중심으로한 주변지역 일대가 옛날에는 동소정면에 속하였으며 부평역 남부지역 사람들을 동수쟁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미루어 동수쟁이는 동소정이 변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1970년 부평2동에서 부평6동으로 분동하여 나갈 때 동수동으로 불렀었다. 이곳은 과거 경인운하 공사가 시작되었다가 암반 때문에 중단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경인운하가 중지된 곳은 지금의 부평삼거리 부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동수는 확실치 않으니 확인 하세요..
13.부평[富;부자 부/平;평평할 평]
고구려시대에 부평은 주부토군(주부토 -부평평야 황무지에 뚝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었는데 그 뚝이 줄줄이 연이어 져 줄보뚝이라는데서 유래됨)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장제군으로 개칭되었다가 몽고 매방(매 사육 장) 을 두고 매 사냥을 즐겨 하였다하여 이 곳을 길지라해서 길주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2년후 길주목을 부평부로 개칭하면서 부평은 넓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넓은 곡창지가 되었는데 농지가 넓어 수확이 많이나고 풍요로운 평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평은 경인선과 환승역으로써 일찌감치 역명이 고수된 역이다.
14.부평시장[富;부자 부/平;평평할 평/市;저자 시/場;마당 장]
부평이란 이름은 고려 충선왕 2년(1310)에 부평부라고 불려진데서 비롯된 것으로 원래 부평지역은 현재의 계양구 계산동이 중심지였으나, 경인선 부평역이 생기면서 그 주변과 시장지역을 부평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지역은 구한말 에는 부평구 동소정면 대정리로 되었다가 1914년에 부천군 부내면 대정리로 되었고,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소화정으로, 해방 후인 1948년에 부평동으로 개칭되었다. 인천지하철 1호선 부평시장역이 들어선 부평동 529-77일원은 계양구와 부평구로 나뉘기 전의 북구청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북구청사거리로 불리웠고, 이곳이 부평시장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부평시장역이라고 명명하였다.
15.부평구청[富;부자 부/平;평평할 평/區;구역 구/聽;들을 청]
이곳은 부평4동, 청천2동, 갈산2동, 산곡4동이 서로 접하는 지역이라 동네명을 붙이기가 부적합하여, 바로 인근에 부평구청의 이름을 따서 부평구청역이라 하였다.
16.갈산[葛;칡 갈/山;뫼 산]
갈산은 현재의 부평정수사업소 자리에 있었으며, 칡이 넝쿨지어 우거져있었기에 갈월리, 갈월, 갈울리라 불리다가 1946년에 지금의 갈산동이 되었다.
17.작전[鵲;까치 작/田;밭 전]
본래 부평군 서면지역으로서 물맛이 좋고, 수량이 많은 큰 우물과 주변 우거진 숲에 까치가 많이 서식하여, 까치우물, 까치물, 까치말 또는 작정(鵲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작전(鵲田)이라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 금번 작전역이 위치한 곳은 된밭이라고 불리는 화전리지역이다. 화전리는 옛날 부평구 서면(西 面)소재지로 현재 한산APT주변이다. 야산이 밭으로 변하여 화전(花田) 또는 된밭이라 부르게 되었다
18.경인교대입구[京;서울 경/仁;어질 인/敎;가르칠 교/大;큰 대/入;들 입/口;입 구]
인근에 인천교육대학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당초에 교대역으로 하였으나 서울지하철의 교대역과 혼동 우려 로 인천교대역으로 제정됨.
※ 인천교육대학교는 2003년3월1일 경인교육대학으로 학교명을 개정됨에 따라 경인교대입구역으로 역명 변경
19.계산[桂;계수나무 계/山;뫼 산]
이동네 이름이 계산동이다. 계산동은 계양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지어진 이름이다. 인근 부평초등학교내에 정조임금이 활을 쏘았다는 어사대라는 문화재가 있다.
20.임학[林;수풀 림,임/鶴;학 학]
임학은 글자가 뜻하는 대로 <수풀과 학>이 어울린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실제로 옛날 이곳에는 낙락장송 노송이 우거져 숲을 이루었고 수백마리의 백로가 서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학이라고 호칭하는 백로는 현재 귤현역 동쪽 소나무 숲에 위치를 바꾸어 서식하고 있다. 임학동은 본래 부평도호부 동면(東面)의 지역으로 계양 고성 밑에 있는 마을로서 막이 있어 예막골, 이막골, 또는 임학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임학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1월 인천시 북구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계양구에 편입되어있다.
21.박촌[朴;후박나무 박/村;마을 촌]
박촌은 본래 부평도호부 동면의 지역으로 박씨가 많이 살았으므로 박말 또는 박촌이라 하였음.
22.귤현[橘;귤나무 귤/峴;재갈 현]
귤현의 옛 지명은 '굴재' 또는 '굴현'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황어면'의 "노고지리" 일부를 편입하여 '귤현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되었고 1989년에 인천직할시(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귤현'이라는 명칭은 본래 '굴재'였으며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일본인 관리들이 '굴현'을 '귤현'으로 잘못 듣고 한자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굴재'의 위치는 '귤현동'의 마리골마을에서 박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현재 박촌동 프리나농원 북서쪽 해발 91고지와 68고지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추정된다. '굴현'의 뜻은 고개가 높아서 통행이 불편하므로 고개를 파서 깍아 내렸기 때문에 깍아 내려판 고개란 의미 라고 추정된다.
첫댓글 인천의 한 사람으로 유익한 정보 잘 보고갑니다.
스크랩 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