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金氏桑村傳
우리는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역사는 우리조상의 업적이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三國史(삼국사) 즉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때부터 비로소 정사(正史)가 있어 왔고 그 삼국사 이전의 역사는 분명히 전래한 것도 적고 또 년대가 너무 오랠 뿐
아니라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에 依存(의존) 한 것이다. 동양문화는 중국(中國)에서 기원(起源)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司馬遷(사마천)과 班固(반고)같은 천재적 歷史家(역사가)들이 출생해서야 사기(史記)라는 작품이 편찬되었다. 그 사기를 표준 하여 三國史라는 정통역사를 고려(高麗)때 金富軾(김부식)이 처음 편찬(編纂)하였다. 그는 新羅國姓(신라국성)이던 慶州金氏(경주김씨)의 자손이었다. 대개 어떤 왕조(王朝)에서나 그 왕업을 찬 건한 인물이 自己卽系(자기즉계) 자손에게 전래케 하는 제도가 되었으나 新羅(신라)왕조에서는 이런 관례를 준수하지 얹었다. 거기는 國姓(국성)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 있었으니 박(朴) .석(昔) 김(金) 삼성(三性)이었으며 왕가가 계승하지 아니하고 그때그때 가장 출중(出衆)한 인물을 정치 최고회의에서 뽑았다. 그 후자는 박(朴).석(昔).김(金). 三氏中에서 출생하여야 그 자격을 갖었섰다. 역대 신라 왕은 朴. 昔. 金 三氏중에서 돌라가면서 왕위를 이렇게 계승하였던 것이다. 또 보통 동양풍습으로는 여자(女子)에게 상속권(相續權)이 없었으나 신라왕조에는 선덕(善德) 眞德(진덕) 眞聖(진성)의 여왕 세분이 왕통을 계승(繼承)하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때그때 남자보다도 인물이 출중하여 뽑았던 것이다. 신라건국(建國)초에 각 촌장이 집합하여 그중 가장 잘났던 인물이 最高首班(최고수반)에 당선되었으니 지금부터 二千年前에 벌서 민주주의 방식을 채용한 나라는 곧 신라인 것도 역시 우리 겨레의 자랑거리에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신라왕조는 五十六 君主(군주)가 993년을 누렸다. 신라 최종 왕 金溥(김부)는 경순왕(敬順王)으로 재위하였다 왕조를 고려(高麗)와 합병한 뒤에 그는 고려의 정승이 되었고 고려(高麗)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딸 낙랑(樂浪)공주에게 장가들었다. 그는松京에서 살다가 붕어(崩御=별세)하였고 그 유해는 지금 長湍高浪浦(장단고랑포)에 안장되어 경순왕 능으로 알려져 내려왔다. 경순왕의 장자(長子) 곧 당시 신라 태자이던 金溢(김일)은 고상(高尙)한 기품을 갖젔던 애국자로 부친 경순 왕과는 의견이 판이하였다. 당시 국운이 쇠약(衰弱)하여 한 국가의 위신과 체통을 유지 할 수 없이 되었으므로 경순 왕 九年(西紀九百三十六)十月一日에 경순왕은 宮廷(궁정)에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아놓고 국가에 가장 중대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는 신라왕조를 고려에 넘겨주어 두나 라가 한나라가 되자는 비통(悲痛)한 의논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에 의논이 백출하여 혹은 적극적 반대를 표명하였고 혹은 눈물을 먹음 고 찬성하였다. 신라태자 金溢(김일)은 끝끝내 반대의견을 주창하여 [국가의 존망이란 것은 천명이니 충신과 의사(義士)를 모아 그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대로 지켜 가다가 최종에 할 수 없이 되는 경우 이라면 모르거니와 어찌 미리 천년의 사직(社稷)을 일조(一朝)에 경솔하게 남에게 줄 수가 어디 있습니까]하고 그 의론이 불가함을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강경론이 성립될 시기(時機)는 벌서 늦었다. 그 때 국세는 이미 허약하여 국토를 보전 할 수 없이 되었고 무고한 백성을 희생케 하는 것을 경순 왕은 차마 앉아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정부에는 나약한 신하들뿐 이므로 강경한 태자의 말을 좇을 수 없어 하는 수없이 侍郞金封休(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특파하여 합방절차를 교섭하게 하기로 결정적 단안을 내렸다. 국가사태(國家事態)가 이렇게 진전됨을 보고 태자 김일(太子金鎰)은 부왕께 울며 고별하고 금강산 속에 들어가서 바위틈에 집을 짓고 베옷(麻衣)과 나물밥으로 一生을 지냈다.
그는 세상에서 이른바 麻衣太子(마의태자)이니 금강산 九龍瀑布(구룡폭포)위에 있는 黃石洞 (황석동)에 그의 묘소(墓所)가 지금까지 전래하였다. 마의태자는 이 세속을 하직하고 금강산에 들어가던 때 금강산 초입 마루 덕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하여 그 곳은 지금까지 단발령(斷髮令)으로 알려져 나려 왔다. *****************
신라는 본래 삼국 중에 가장 적은 나라로서 지금 경상 남북 도에 해당한 지방을 그 나라 국토로 갖었으나 화랑도(花郞道)를 실시하여 국민의 정신을 단결하고 무예를 훈련하며 국민개병(國民皆兵制)을 채용하였다. 그래서 그 국력은 충실하여 필경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였으며 전후 일 천년 가까이 통치(統治)를 계속한 것이다. 이제 그 통치권을 계승한 고려왕 서북에서 침략하여 들어오던 외적의 세력을 여러 차례 격퇴하여 三十四군주에 四百七十五년을 누려다. 고려왕조는 어떤 의적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이 아니고 그 조정에서 벼슬하던 신하에게 잃어버렸다. 그런데 신라 때 孤雲崔致遠(고운최치원)이 중국에서 儒敎書籍(유교서적)을 비로소 수입해 왔으나 그 발전이 지지부진 하다가 고려왕조 중엽(中葉)이후에 文成公安裕(문성공안유)가 체계를 갖추어 중국에서 수입된 儒敎道德(유교도덕)은 점점 발달하여 말엽(末葉)에 이르러서는 관리나 백성들까지도 유교도덕에 함양되고 왕도정치가 옳겠다고 남녀노소 없이 유교를 찬양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떨치게 되어 나라가 망하므로 충신(忠臣)七十二人이 杜門洞(두문동)에 들어가서 새로 설립된 이조(李朝)에 벼슬하기를 거부(拒否)하였으니 그것도 유교도덕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란 정신이였다. 그리고 五百年後 유교사상이 점점 쇠퇴한 때문인지 이조(李朝)가 망할 때에는 重臣(중신)중에 똑같은 수효 七十二人이 작(爵)을 받게 되어 일본에 충성을 다한 괴상스러운 대조(對照)를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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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金自粹).본관 경주. (1341--1413년)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여 자결
이색. 정몽주께서 꽃을 피운 유교 사상은 효와 충을 신하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여겨는 데 이른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실천 철학이 여기서 나왔다. 게다가 유교의 특성은 완성(完成)된 것을 보수(保守)하는 데 있었다. 고려가 망하자 많은 신하들이 벼슬을 버리고 숨어산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려 공민왕 때문과에 급제하여 좌상시를 거쳐 형조판서로 있던 김 자수는 고려가 망하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갔다. 조선 태종이 형조판서를 맡기면서 불렀으나
망국의 슬픔으로 絶命時(절명 시)를 지은 뒤 경기도 광주의 추령에서 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불교 억제책을 주장했고, 위화도회군 때 공을 세운 조민수의 전공(戰功) 祝賀文을
작성하라는 왕명을 거절해 귀양을 갔을 정도로 절의(節義)를 지닌 인물이었다.
호는 桑村(상촌) 삼사부사 英伯(영백)의 손자. 통례문부사 王吾(오)의아들 根의 아버지.
江陵判官 永年 兵曹佐郞 永源 司丞 永전 大司憲 永濡의 조부 김자수는 太子太師公의 九世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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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이조) 서울은 漢江(한강)을 끼고 있으므로 漢陽(한양)이니 한성이라는 땅이름을 붙였고
고려의 首都(수도)뒤에 松嶽山(송악산)이 있어 이산이름을 따서 松都(송도)니 松京(송경)이니 하는 이름이 생겼다. 이송악산은 돌산이 높이 솟았고 그 뒤에 大興山城(대흥산성)의
산맥과 나란히 섰다. 송악산밑에 고려 왕 궁터 滿月臺(만월대)가 있고 그 앞으로 都市(도시)가 전개되었으며 송악산 東麓(동록)밑에는 成均館(성균관)이 있어 儒敎道學(유교도학)의 총본부가 되었다. 李朝(이조)가 창립되어 漢陽(한양)에 도읍을 옮기고 市街地(시가지)이름도 송경의 각 同名(동명)을 그대로 因用(인용) 하였으며 성균관도 역시 새로 건축하였다. 그래서 우리 나라 전국에 성균관은 둘뿐이니 하나는 송도에 하나는 한양에 있어 오늘까지 내려왔다. 李朝(이조)에 와서 송도는 開城(개성)이라는 새로운 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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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왕조를 물론하고 君主(군주)가 暗弱(암약)하면 權臣(권신)이 농간하는 전례가 많이 있다. 고려말엽에 軍權(군권) 政權(정권)을 잡았던 李成桂(이성계)와 그 一派(일파)는 쇠약해 가던 국권을 회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야심을 품고 반대당수령을 除去(제거)하기를 꾀하였다. 그래서 大將(대장) 崔瑩(최영)과 大臣 鄭夢周(대신 정몽주)를 살해하여 반대할 세력이 없어진 뒤에 恭讓王(공양왕) 三年(西紀一三九二年) 七月十六日일 李成桂는 壽昌宮(수창궁)에서 등극하여 李朝(이조)의 태조가 되었으며 국호를 朝鮮(조선)이라 하였다.
忠孝(충효)를 인생의 근본도덕으로 믿던 儒敎思想(유교사상)이 성행한 당시에 민심이 그렇게 쉽사리 새로 이룩한 李朝(이조)에 전향할 수는 없었다. 새로 수립된 정부에서는 민심을 수습하려는 목적으로 科擧(과거)를 보이기로 결정하였으나 종래 高麗王朝에서 과거 보이던 장소를 변경하여 龍峀山(용수산)밑에 李太祖저택이었던 楸洞宮(추동궁)에서 거행하기로 되었다. 용수산은 송도의 按山(안산)으로 송악 산을 對立(대립)하였으니 이상하게도 북쪽으로는 石山(돌산) 松嶽山(송악산)이 둘러 있고 남쪽으로는 土山(흙산) 용수 산이 놓였으니 이것이 舊都(구도) 송도의 특이한 地勢(지세)이다. 이번 과거는 인재를 관리로 採擇(채택)함에 그 목적이 있던 것은 물론 아니고 민심의 動向(동향)을 타진해 보려든 것이 그趣旨(취지)이었었다. 그 때 지식 계급에서 민심을 지배하고 여론을 조성하던 곳은 성균관이 최고 권위이었다. 그래서 음으로 양으로 정부에서는 권력을 부려 성균관 유생을 추동궁에 집합하도록 노력하였다. 과거를 보인다는 장소로 즉 추동궁은 시가지 남쪽에 치우처 있고 성균관은 동북시가지 끝에 있어 그距離(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壓力(압력)에 못 이겨 추동궁 근처까지는 몰려오지 아니할 수 없었으나 여기까지 집합한 선비들은 悲憤慷慨(비분강개)하고 또 군중심리에 쏠리어 각기 자기 의견을 그 자리에서 서로 교환하게끔 되었다.
그 군중은 당시 高麗舊臣(고려구신)과 儒林(유림)으로 구성되었으니 과거장소에 참예 하는 줄로 看做(간주)하게 될 형세인 때문이다. 그들은 차라리 고려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조관리는 원하지 않겠다고 부르짖었다. 古代中國(고대중국) 殷王朝(은왕조)가 망하고 周王朝(주왕조)가 창건될 때 伯夷( 백이)와 叔齊(숙제)는 새 왕조의 國祿(국녹)을 아니 먹겠다고 首陽山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죽은 사실을 본뜨기로 그들은 의논이 일치되었다. 그러나 전임대관들의 다수히 일치행동을 한다면 신 정부의 탄압이 있을 것이라 하여 그들은 일체로 變裝(변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추동궁 앞 언덕에서 고려관리가 쓰던 관을 나무 가지에 걸고 平陽笠(패랭이)을 일제히 바꾸어 쓰니 누가 보던지 하동배(庶民層)의 보행 군으로 알게끔 되었다.
마루턱 하나를 넘어 午正門(오정문)을 서편으로 향하고 행진하였다.
그들의 향한 목적지는 시가지에서 약 二十里(이십리) 거리 밖에 아니 되는 萬壽山(만수산)의 南洞(남동)이었으니 이 만수산에는 고려 태조의 顯陵(현능)이 봉안된 곳이다.
그들이 갓을 걸어 둔 것은 갓걸재(掛冠峴괘관현) 또 一齊(일제)히 서쪽을 바라고 넘어가던 마루턱은 不朝峴(부조현)이라고 後人(후인)들이 불으게 되었다.
그리고 萬壽山(만수산)의 南洞(남동)은 杜門洞(두문동)으로 알려 젔었다.
이 두문동에 들어간 충신은 七十二人이었으니 그들은 고관대작을 역임한 인물과 태학생들이
섞였다. 그들은 두문 동에 들어간 즉시로 同族(동족) 즉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의를
개최하고【저 武辨(무변)=軍人(군인) 이성계가 임금이 되어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니 새로
이룩한 왕조에 생활하는 백성을 위하여 우리 두문 동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희생하여야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 중에서 유학대가의 한 사람인 黃喜(황희)를 희생자로 선출하였다.
그의 호는 尨村(방촌)이니 이조초창시대에 모든 행정제도를 설정하였고 政丞(정승)으로
이조역사상 가장 청렴결백하고 정치에 탁월하였던 대 정치가이였다. 옛날 伯夷(백이)와
叔齊(숙제)는 형제 단두사람 뿐으로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고 생명을 얼마동안 연장 시켰다. 그러나 杜門洞(두문동) 七十二人은 좁은 산 꼴짜기에 원래 野山(야산)이 되어 고사리도 없었고 송경 시가지에서 二十里밖에 않 되는 가까운 거리이었다.
七十二人의 가족은 모두 시가지에서 그들을 따라갔었다.
우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중에서 손재주 있는 이들은 가정공업을 시작하였고 이렇게
제작한 일용필수품을 당시 각 가정에서 부리던 하인을 시켜서 판매하게 하였다. 李朝(이조)가 도읍을 한양(지금서울)으로 옮긴 뒤에 송경은 廢虛(폐허)가 되었으니 고려에 忠誠(충성)을 품은 백성들까지도 서울로 따라가지 아니하니 생계가 끊어질 것은 물론이므로 백성들이나 구조관원들은 일용품을 제조하기 시작하였고 이 물품을 각지에 판매하게 되어 소위 松房(송방=송도 사람이 장사하는가 가방)이 도처에 생겼던 것이다. 高麗忠臣(고려충신)들이 시국에 울분을 못 이겨 두문 동에 모였으나 거기서 생활하기는 일시적이었고 오래 지내기는 불가능하였다. 그 때는 마침 여름 절기이어서 露宿(노숙)도 가능하였으나 수삭이 지날수록 기후도 한랭하여 생활이 군색한데 신 정부에서 여러 가지로 탄압하기 시작하여 필경 두문동에 간신히 얽어 놓았던 초막을 전부 불살라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각기 자기네 연고지를 따라 전국각지로 해어졌던 것이다. 杜門洞(두문동)에 생명만을 유지하고 있는 高麗忠臣(고려충신)七十二人인중에 한 분인 金自粹(김자수)는 故鄕(고향)인 慶尙道(경상도) 安東(안동)에 돌아갔었다. 그런데 미처 杜門洞을 떠나지 못한 선비들 일부는 李朝軍隊(이조군대)의 말발급 아래 무참하게도 밟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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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高麗(고려)에 넘겨주고 송경에 와서 高麗太祖(고려태조) 王建(왕건)의 駙馬(부마)가
된 新羅(신라) 敬順王(경순왕)의 後孫(후손)은 그 부인 樂浪公主(낙랑공주)의 소생 아들 여러 兄弟(형제)에서 후세에 퍼졌던 것이다.
長子(장자) 麻衣太子(마의태자)는 金剛山(금강산)에서 중이 되었거니와 둘째아들 金湟(김황)도 역시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伽倻山(가야산) 海印寺(해인사)에 들어가서
萬姓譜(만성보)라는 文獻(문헌)을 상고하면 羅州金氏(라주김씨) 시조 金雲發(김운발)은 金湟(김황)이 출가하기 전에 출생한 아들이라 하였고 金湟의 法號(법호)는 梵空(범공)이라 하였다. 그러나 文獻備考(문헌비고)의 王子考(왕조고)를 보면 마의태자의 아들이 바로 雲發(운발)로 되어있다. 文獻備考慶州金氏家乘(문허비고경주김씨가승) 敬順王(경순왕)의 장성한 아들 두 사람은 이렇게 세속을 이별하여 중이 되었고 樂浪公主(락랑공주)의 소생 중에서도 第四子(제사자)는【第一子.第二子.第三子는 박씨 부인소생) 第三子.第四子는 慶州金氏로 후세에 전래하였고 다섯째 아들은 義城(의성)에 封君(봉군)되었다가 후에 義城金氏의 始祖(시조)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들 金鐥(김선)은 彦陽君(언양군)이어서 彦陽金氏 시조가 되었다. 또 敬順王(경순왕)의 아들 하나는 金德摯(김덕지)로 鶴城府院君(학성부원군)에 봉하였고 蔚山金氏(울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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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王朝 역대에 慶州金氏中 名賢(명현)이 많이 났다. 高麗睿宗(예종)때 (西紀1105∼1131年)
文科壯元(문과장원)하여 太子太師 까지 올랐고 만년에 慶尙道 安東에 낙향하였던 金仁琯(김인관)은 오늘날 慶州金氏의 선조다. 그 아들 則麗(즉려) 孫子(손자) 匹鈞(필균) 曾孫(증손)貞裕(정유) 玄孫(현손) 宗誠(종성)은 禮賓省丞(예빈성승)이란 관직을 지냈으며 오대손 裔(예)는 閤門祗侯(합문지후)에 六代孫 英伯(영백)은 三司副使(삼사부사)에 각각 봉직하였다.
七代孫 王吾(오)는 通禮門副使에 선임되었으나 일찍이 별세하고 遺家族으로 부인 孫氏와 두 어린아들 子汀과 自粹와 딸사형제가 安東에 살고 있었다. 孫氏婦人은 福州府院君靜平公(복주부원군정평공) 孫洪亮(손홍량)의 딸로 명문가족이 집안에 출생하여 금지옥엽으로 귀엽게 성장하고 김오에게 출가하여
二男四女를 출생하였으니 장자는 자정 이었고 둘째아들은 자수이다. 자녀가 모두 어렸을 때 사별하였던 손부인은 맹자 어머니와 같이 그들을 교훈하기에 여염이 없었다. 손부인은 청춘과부로서 육남매의 어린자녀들을 길러 아비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별명을 듣지아니 하도록 하려고 친정 아버지인 복주부원군과 그남편의 친구인 염동정(廉東亭)에게 맡기어 글과 행실을 가르쳐 조금도 남에게 뒤지지 않도록 지도하였다. 六男妹중에도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났던 어린 막내아들 자수는 편모시하(片母侍下)에 자랐으나 천성으로 효성이 극진하였다.
장성하여 큰인물이 될사람은 어려서부터 그기를 드러나는 것이다. 소년자수는 재주있고 총명이 뛰어나서 한번 들으면 잊지아니 하고 한가지를 배우면 열가지를 터득하니 원근에서 神童이라는 소문이 藉藉(자자)하였다. 元나라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수입된 孔孟의 聖學은 당시불교가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진흥되었다. 이 분위기(雰圍氣)에서 성장한 소년 자수는 忠經 孝經 小學 四書[중용(中庸) 大學 孟子
論語 三經 詩傳 書傳 周易을 약관전에 유학에 조예가 깊은 염홍방과 그의外祖 복주부원군 손홍량의 지도에 의하여 左傳 禮記 春秋등 유학에 진수(眞髓)가 될만한 서적을 통달하니 儒學의 眞理를 깨다렀다.
충효는 인생의 근본되는 것으로 절개를 홀로계신 어머니 손씨부인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정성껏 모셨다. 손씨부인 슬하에서 육남매는 큰아들 子汀은 成人이 되어 外祖 손부원군의 반련으로 송경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으며.
自粹는 아직 나이 어려서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있어 문장과 도덕을 연마하고 있었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도 반듯이 한 쌍의 남녀가 합하여야만 가정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니
김자수도 배우 감을 고루지 아니할 수 없었다. 김 자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주가 있는
까닭에 글을 배우고 도덕을 연마하여 흐려 저가는 이 나라를 바로잡아 태평한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가 있으니 자기를 도와줄 만한 아내 감을 고루지 아니할 수 없었다.
비록 아버지 없이 자라왔으나 대대 명문거족으로 어머니 손씨 부인의 가르침과 그 외조부
손복주 부원군의 지도로 문장 도덕이 훌륭하고 또 주위환경이 좋아서 딸을 둔 사람들은
통혼을 하였다. 그러나 손씨 부인은 허락지 아니하고 고루고 또 골라 필경은 郎將(낭장)을
지낸 權隨(권수)의 딸과 約婚(약혼)하게 되니 朱子(주자)의 儀禮(의례)대로 六禮(육례)를
갗우어 성대히 결혼식을 지냈다. 유교사상에 젖어 효성이 극진한 自粹(자수)는 이미 成人(성인)이 되어 어머니 봉양에 있어 자기를 대신할 女性(여성)의 협조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특히 효성이 극진하다고 소문난 閨秀(규수)를 택하여 권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다. 김씨나 권씨는 명문거족으로 명망이 높은 두 집이었다. 기상이 늠름하고 언어동작이 괘활하고 성격이 강직한 신랑 김자수와 花容月態의 용모와 온순 恭謙한 성질을 가진 신부 권씨는 천장 배필이 아닐 수 없다. 靑年自粹 夫婦(부부)는 정성을 합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렇게 다시없는 단란한 가정생활은 남의 표본이 되었다. 好事多魔(호사다마)라는 말은
옛날도 있었다. 앞길을 개척하는 데는 평탄한 길만 걷기란 어려운 일이다.
험준한 태산준령도 닥치고 파도치는 大海(대해)도 앞을 가로막는 것이 인생 항노의 원칙이다. 김자수가 아내를 맞이하여 신혼생활에 단란한 가정을 이른지 얼마 되지 아니 하였을 때였다. 하루는 손씨 부인이 아침에 문안 들어 왔던 아들을 앞에 안치고 엄격한 어조로
[얘 네 형은 송경에서 벼슬을 살고 있는 게 아니냐. 그 애는 총명이 너를 따를 수 없다.
어미러서 그것쯤이야 모른다 해서 말이 되느냐. 그래도 벌써 출세하지 않아느냐.
너는 나이가 벌서 二十이 댔다. 너의 夫婦(부부)가 어미의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하니 내마음이 든든하기 한량없다. 드러나 남자라는 것은 집안에서 어미를 섬기는 것만으로 효도를
아니다. 나라일 을 잘하여 임금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이름이 천하에 떨 처서 만인이 우러러 보도록 하는 것이 곧 효가 되고 충이 되는 것이다.
네가 오늘까지 글을 읽어 문장을 연마하고 道義心(도의심)을 기르도록 내가 늘 권장한 것을
넌들 어찌 모르고 있을 것이냐. 너로 말하면 新羅 國姓(신라 국성)후예로 그만큼 학문을 닥었으니 인제는 立身揚名(입신양명)할 길을 네가 찾아야 한다. 앞길이 九만리 같으니 너로서 초토에 그대로 뭍일 수는 없다. 도라 가신 너의 아버지께서 다 못한 나라일 을 네 형제는 精力(정력)을 기우러 백성들의 活路(활로)를 찾게 하여야 할 것이니 요다음 과거에는 너도 송경에 가서 應試(응시)하여야 한다.]하고 보통 때와 다른 훈계를 하였다.
청년이 된 自粹(자수)는 그 동안 연구한 학식으로 보아 이미 어떤 포부와 경륜이 있을지 오래다. 그러나 천성이 지순하고 총명이 過人(과인)하므로 儒敎眞理(유교진리)를 철저하게 해득하고 본즉 인간의 근본 되는 효심이 우러나와서 잠깐동안이라도 홀로 게신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기가 무엇보다 곤란하여 자기 희망과 포부를 한번도 나타낸 적이 없었다.
그 날 어머니의 정중한 훈계를 듣고 [지당하신 말씀이 오나 나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장래에 과거 보러 갈 기회는 언제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집에 어머님을 받들 사람은 철없는 아내 한 사람 뿐이오니 아내 한 사람에게 어머님 받들 것을 맡기고 어떻게 어머님 술하를 떠날 수가 있습니까]하니 손씨 부인은 정색을 하며
「그렇게 용렬한 생각은 다시 할 필요도 없다. 집에 있어 父母(부모=어버이)를 받드는 것만이 효가 라니라 나라일 을 잘하여 위로 임금을 충성 것 섬기고 민정을 잘 살펴 편안하게 하는 것이 또한 효이다. 그러므로 효와 충은 한결같은 것이다. 네 아내가 있으니 그런 염려쯤은 하지 마라. 네 아내는 현숙한 사람이다. 친정에서 듣고 배운 것이 있어 시어미에 대한 예절과 정성이 극진하다. 권씨 가문같은 훌륭한 문벌에서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데다가 성품이 지순하니 집안걱정은 조금도 하지말고 인젠 네 앞길을 속히 개척할 때가 닥쳐왔다. 세상일이란 것은 모두 시기가 있고 기회가 있어 그 적당한 시기와 기회를 잘 기회를 잘 포착하는 자라야 성공하는 것이다. 네가 아무리 문장도덕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발휘하지 아니하면 썪은 학문이 될 것이고 사람들의 조소 거리가 되는 것이다.」(네. 차차 그리해 보겠습니다.)고 김자수는 대답하였다.「얘. 차 차라니. 이번 과거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부터 곧 준비해라.」이렇게 모자간에 문답이 있은 뒤에 어머니 훈계를 순종하는 靑年自粹는 송경에 과거 보러 갈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부인 권씨를 「외조부와 동정선생의 지도로 내 학문이 경지에 달하지는 못하였으되 과거를 실력은 충분한 학문은 얻은 듯하나 홀로 계신 어머님을 받들 형님은 장원 급제하여 서울에 게시고 누님들은 출가하여 아니 계시고 오죽 우리 두 夫婦(부부)뿐 남아있으니 슬하를 떠날 생각이 막연하여 유예미결하고 있던 중 어머니께서 그만큼 글을 배웠으니 과거에 應試(응시)하라고 말씀이 계심으로 서울로 갈 것을 정하였으니 나를 대신하여 어머님을 효성 것 밤들고 어머님 마음은 편안케 하여 우리 김씨 문중을 빛나도록 정성을 다하기 바랄 뿐 이오」당부하고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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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附近(안동부근) 一對地域(일대지역)은 三韓(삼한)때부터 우리 나라 문화의 發祥地(발상지)이다. 新羅王朝(신라왕조)와 합병한 뒤에도 역대에 이 곳 사람들이 정부요직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에도 金自粹의 친형 자정과 學友(학우)는 물론 안동출신 先輩(선배)들 다수가 고려정부 요인으로 송경에 거주하고 있었다. 송경 官界(관계)의 안동 출신 중 門下評理(문하평리) 大提學(대제학)으로 있던 廉興邦(염흥방)은 일찍이 金自粹가 스승으로 모시던 東亭(동정)선생이다. 동정 선생의 문하에서 학동 김자수는 여러 해 글을 배우고 자라났다. 처음 가는 송경이기는 하나 이런 동향인물의 지도를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김자수는 마음이 든든하였다. 어머니이신 손씨 부인과 아내인 권씨 부인은 객지에 군색함이 없도록 行資(행자)와 의복 등을 마련하여 지장이 없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워 길을 떠나 보냈다. 김자수는 송경에 도착하여 그 형의 집에 행장을 풀고 친척과 지구며 선배를 일일이 심방하고 지도함을 부탁함과 동시에 成均館(성균관)에 居齊(거제)하여 문장을 더 연마하고 과거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장 재덕이 겸비한 김자수가 성균관에 거제 하니 거제 생인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성균관 大司成(대사성)=現 大學總長(현 대학총장)이하 관원들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때 김자수는 그 어머니 병환이 계시 다는 기별을 듣고 초조한 마음으로 고향에 도라 가
어머님 병환을 시탕하고 저하니 그 때 대사성으로 있던 박상충의 시를 지어 김자수를 보냈으니 그 얼마나 촉망이 컸던것을 알 수 있었다.
朴尙衷(박상충)의 시는
浩然歸志白雲秋(호연귀지백운추), 太學諸生可得留(태학제생가득유),
侍奉高堂應不暇(시봉고당응부가), 那堪一醉映湖樓(나감일취영호루), 『湖在安東(호재안동)』
김자수는 집에 도라 가 어머니 병환을 시탕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손씨 부인의 병환은 위중하여 필경 藥石(약석)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지성으로 侍湯(시탕)한 보람 없이 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모친이 중병으로 신음한지도 장구한 시일을 지냈다. 여름철 같은 때는 모든 물품이 풍부하여 모친의 구미에 맞도록 음식을 공양하다가도 겨울이 닥쳐올 때 어머니는 병석에서 신기한 음식을 찾었다. 그러나 신기한 음식을 구하기란 천금을 구하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물건을 운반하는데도 사람의 등에 지고 걸어다니게 되는 때이라 생선한마리 구할 도리가 없었다. 바다는 멀고 洛東江(낙동강)은 꽁꽁 얼어붙었으니 피라미 새끼한마리 구할 수 없어다. 김자수는 병환 중에 게신 어머님의 신기로운 음식을 찾으시는 말씀이 뼈가 부서지는 듯하여 북풍설한 추운 겨울이라도 낙동강 어름을 끄고 물 생선을 잡어다가 어머니의 식탁에 요리하였고 산속깊이 들어가 싸인 눈을 해치고 눈 속에 쌓여 있는 신기로운 산채를 캐다가 공경하였다. 어머니를 섬기는데 자기능력이 미치는 데까지는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실행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연은 거역할 수 없이 모친상을 당할 수 밖에 없어다. 손씨 부인은 병환이 위중하여 회춘하지 못할 것을 아셨던지 자녀들을 불러 앞에 앉히고 【내가 죽은 후라도 김씨 문중에 욕되는 일이 없도록 명심하고 자녀들을 잘가르처 이 나라에 보필이 되어 국가나 선조에게 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고 이어 말씀이 끝첬다. 安東府에서 동으로 三十里쯤 가면 廬山五老奉(려산오로봉)이였다. 이 오로봉에
김자수는 모친 손씨 부인을 朱文公家禮(주문공가례)에 의하여 安葬(안장) 하였으니 운명하신 후에 모든 절차를 법도에 맞고 엄숙하게 하여 마지막 가시는 부모를 위하여 人子(인자)의 도리를 다하여 보는 사람으로는 【아 참 부모의 높으신 은혜를 갚는 것이 생전에만 잘 받드는 것이 아니고 별세한 후에 장사까지도 저렇게 엄숙하게 하는 것이 부모의 은공을 갚는 것이겠다.】고 하는 생각이 나도록 산 표본을 만들어 자기가 부모의 은공을 갚기 도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효성스러운 마음이 솟아 나오도록 엄숙하고 悲痛(비통)하게 거행하였으니 그 절차는 아래와 같이 하였다. 손씨 부인이 회춘하실 가망이 없고 운명하실 지경이 되니 깨끗한 옷으로 가려 입히고 일분일초라도 연명하시도록 약을 쓰고 동동 촉촉하여 구호에 열중하였으나 필경 운명하시니 터저나오는 슲음을 억제하고 혹시나 회생하실 가하여 조용히 한동안 옆에 모시었으나 살은 어름같이 차거워지고 뼈는 점점 굳어져서 마듸마듸가 붙은 듯 뻣뻣하여지니 할 수 尸床板(시상판)에 고이 모시고 四枝(사지)가 허트러지지 않도록 반듯하게 묶고 솜으로 두 귀와 코를 막고 깨끗한 홋이불를 덮어 불결한 물건이 뭇지않도록하고 한가운데다 가 큰그릇에 맑은 물을 갓득부어 상에 밭어놓고 평시에 웃옷(上衣)을 맏아들 자정이 공중에 흔들며【영혼이라도 계시면 이 옷을 따라 이물에 빛어주시오 하며】성명과 생년월일(性名및生年月日)을 몇 번이고 불러보았다. 그러나 물에는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흰구름(白雲)만 빛일 뿐 아무고도 빛이지 아니하여 억제하던 슲음은 더 억제할 수 없어 울음이 터져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일가친척 지구들도 통곡하였다. 윗옷은 신체복부에 덮어두었다.
김자수 형제들은 땅에 엎드린 채 통곡을 끝이지못하였다. 尸室(시실) 앞에 거적자리와 거적으로 만든 베개를 마련하고 상주들은 그 자리로 옮기고 통상복인 겉옷(外衣)을 왼팔에만 궤고 오른팔에는 걸치기만 하여 머리를 풀어 죄수모양을 표하였다. 이어서 護喪所(호상소)를 일가친척과 지구에게 부고를 돌리는 일방 치상준비를 하였다.
【이것을 皐復(고복)이라 한다.】
운명하신 지 일 주야가 지난 후에 새로 만든 마지막 옷(燧衣수의)을 입히고 이불로서 싸서 시상 판에 다시 고이 모셨다.(이것을 小斂「소렴」)이라 한다. 다시 일 주야가 지난 후에 큰 이불로 다시 싸고 흩어지지 않도록 넓은 천으로 반듯하게 묶어서 다시 시상 판에 모셨다.
이것을 大斂(대렴)이라 한다.) 그리고 병풍을 치고 그 앞에 고복 할 때 쓰던 웃옷(上衣=상의)을 장방형으로 정한 조의로 싸서 【遺衣(유의)】작은 상에 밭아놓고 酒果(주과)로 奠(전)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상주들은 풀은 머리를 걷고 굵다란 麻布(마포=삼배)로 만든 두건을 쓰고 중단을 입었다 그리고 붉은빛 넓은 천에 명정을 써서 시체 앞에 걸어놓았다. 다시 일 주야가 지나서 棺(관)에 시체를 넣는데 관 바닥에 조 바닥에 요를 깔고 위편에 베개를 놓으며 아래 편에는 신을 놓고 시체를 고이 넣은 뒤에 좁은 이불 天衾(천금)을 덮고 관 뚜껑을 덮으며 은 장을 걸고 마 목 우에 고이 모셨다. 【이것을 入棺(입관)이라 한다.】机筵(궤연)을 설치하는데 유위와 혼백을 모시고 상주이하 복인들은 각각 제복을 갖추어 제를지냈다(이것을 成服이라한다. 그리고 입관한 후에는 관에 옻칠을 여러번하여 시체가 썩어도 유해(뼈)는 흙과섞이지 않고 관속에 고이 남아있게하는 것이다.
칠이 다 마른후에 [慶州金氏諱王吾妻一直孫氏之柩]라 썼으니 이것을 관상명정이라 한다. 글씨가 마른 뒤에 皮紙 張紙 油紙로 싸고 또草蓆(초석)으로 싸며 굵은 끈으로 擧棺(거관)하기 편리하도록 관을 묶어서 마목위에 올려 모셨다.(이것을 結棺이라 한다.) 그리고 일주야가 지난후에 출빙하고 김자수 형제는 장지(葬地)를 구하기 위하여 집을나와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오로봉으로 묘지를 정하고 택일하여 장례를 지냈다. 조전(朝奠)을 지내고 발인할때 견전(遣筌)을 지내고 장사길을 떠나니 맨앞에 몇쌍의 불을 밝인 청사용이 서고 다음에 혼백을 모신요여(가마)이며 요여를 보호하는 요여배행이 따랐으니 요여배행은 무복지친으로 범연치 않은 사람이였다.
다음에 붉은 명정이서고 그 뒤에는 구중겹줄로된 상여가 따랐고 상열르 호위하는 왕등이 수십쌍 상여좌우를 싸고 따르며 다음에 상주복인 무복지친등이 차례로 따랐으며 일반 수상객(隨喪客)들은 맨나중에 열을지어 따랐다. 보는 사람들은 아참 저러케해야겠다. 낳으면 잘기르고 죽으면 마지막으로 저렇게 보내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가 하였다.
[養生送死之道(양생송사지도) ,주문공 가례에 쫓아 양례하기는 고려말기에 김자수집에서 세번째로 실시한것이 수선총기(蒐善總記)에 기록된 바있어 이를 초출한것이다.] 장례를 마치고 김자수는 이여 묘소앞에 풍우를 가릴 정도로 초막을 짓고 삼년동안 시묘하였다. 그래서 후인들은 이곳을 侍墓洞이라고 이름하여 부르게까지 하였던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은 부모상을 치르고나서 백일이면 解喪(해상)하여 버리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김자수는 일찍이 鄭夢周 朴尙衷등 大儒와 함께 三年喪은 朱子家禮에 의하여 人子로서 당연히 실행할것을
주장하여왔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자수는 어머니 상복을 三年間입을뿐만 아니라 묘소아래 세운 초막에서 거처하여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하루도 본집에 도라갔던일이 없엇다. 그러므로 김자수를 보려던 사람들과 친척고구들은 일부로 묘소 廬幕(여막)으로 방문하여야 했다.
그는 문장과 재덕을 겸비한 청년이므로 덕망이 원래높은 학자이었으니 그를 사모하던 청년 학도들까지 원방에서 심방하였던 것이다.
아직 조정에 나가 현 달한 관직을 갖지는 못했으나 鄕黨(향당)에서는 일반의 존경을 받아 오던 명문거족의 후예로 더욱 문장도덕이 김 자수가 산물에 들어가서 삼년간 侍墓(시묘)할 것을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 당시 임금은 나약하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政局(정국)은 시끄럽고 수습 할 방 약은 희박하니 김 자수 같은 인물을 찾아 정국 수습책을 의논하기 위하여 날마다 찾아오는 정객이나 학자들의 수를 혜 일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천성으로 효심이 우러나오는 김 자수는 이런 장애를 조금도 도라 보지 아니하고 유교도덕에 종지인 忠孝(충효)를 토대로 한 修身齊家(수신제가)한 후에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를 평화롭게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하는 윤리를 밝히고 저 모친묘소 앞을 삼년간 떠나지 않고 시묘한 것이다. 그 방식에 있어서 보통 인생은 아무리 최저생활을 실행한다 하더라도 하루에 밥 새끼는 먹어야 한다. 그러나 효자 김 자수는 하루에 밥한 끼로 겨우 연명만을 企圖(기도)하였고 묘소 앞에서 꿇어 엎드려 주야를 분간하지 않고 呼哭(호곡)하였다. 그래서 그 근방을 지나가는 노상행인이나 소먹이는 아동이나 풀 깎는 농부들까지도 묘소 앞을 지나갈 때 김효자의 시묘광경을 목도하고 도덕과 문장으로 유명한 김자수가 저렇게 하는 것이 인생의 도리인가 하는 생각이 솟아 나와 새삼스럽게 자기 분노에 대한 효심이 울어 날 뿐 아니라 서로서로 경계하여 부모를 받들기 정성껏 할 것을 권장하여 분노에게 대한 생각이 달라졌으며 김효자를 공경하는 마음이 솟아오르게 되었다. 문 언중에 김효자는 實踐(실천)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교훈을 남겨 주는 산 표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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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식사를 한끼 밖에 아니하는 김 효자는 간신히 유지하니 그의 얼굴은 반쪽이 되도록 형용이 보는 사람마다 개탄하지 않는 자 없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기운이 탕진되어 몸을 이 르 켸 설 수도 없었을 것이나 그는 의지가 굳셀 뿐 아니라 천 품이 건강한 체격의 소유자인 때문에 삼년간 一日一食주의로 비상한 육체적 고통도 넉넉히 갑 내 하였고 그 난관을 용이하게 극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儒家道德(유가도덕)을 몸소 실천하여 효자로서 산 표본을 보였으니 그 영향이 전국으로 널리 퍼져 김 자수는 효자라고 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묘하던 삼년 동안 이 초막에 김 효자를 방문한 당내문장과 명사가 많았다. 大庇齊선생 文益漸(문익점) 沙川伯 南乙珍은 그중에도 유명한 사람이다. 그들은 詩를지어 기록에 남겼으니.
文益漸詩
래견거려자(來見居廬子) 묘막사는 자네를 찾아와 보니
고전제예명(苦前祭禮明) 엎드려있는 거적자리 앞에 제사범절이 분명하도다
순생식의절(筍生識意切) 자네 정성으로 땅에선 곧은 대순이 솟아있고
백백효심경(栢栢孝心傾) 송백나무 가지들도 효성에 귀기울여 꾸부러져 있도다.
南乙珍詩
이시에 찬양한것은 김자수는 母親묘소에 삼년시묘한 것만이 아니라 모친이 병롼중에 잉어가먹고 싶다하여 嚴冬雪寒추운 겨울에 어름을 깨서 잉어를 잡아서 공양하였고 竹荀(죽순)이 생각이 난다하여 눈속을 해치고 죽순을 구하여 어머니 구미를 맞추어 지극히 봉양하였다는 찬양한 글이있다.
옛날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었다. 어머니를 섬기는 효성이 지극하여 제철이 아닌때 食物을 구한것은 당시거의 불가능하였다.
벌서 항간에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김 자수는 이렇게 효자로서 이름이 전국적으로 전파되었으니 그 시실 은 자연히 임금에게까지 들리게 되어 나라에서 孝子旌閭(효자정려)가 내렸으니 우리 나라에서는 효자라는 말은 있으니 실지로 효자가 있어 나라에서 旌閭 까지 나린 것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이니 김 자수가 처음으로 표본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김 자수가 영 귀하게 된 뒤에 안동사람들은 효자가 김자수의 행적을 영구히 보전하여 후생들은 그 본을 받아 사람마다 효심이 생기게 하자는 뜻으로 安東南門밖에 있던 김 효자 자택 앞에 효자비를 세웠으니 그 비문에는
孝子高麗觀察使金子粹之里(효자고려관찰사김자수지리) 라고 새겼다.
삼년간 居喪(거상)중에 죄인으로 자처하고 하루 밥한 끼로 연명한 김 자수는 집에 돌아간 뒤에
비로 서 하루에 세끼를 계속하고 그 동안 수척하여진 몸을 돌보아 건강이 회복되매 성현의
경학에 더욱 연구를 거듭하여 가정살림 감독하고 있었다.
공민왕 이십 삼년 甲寅(갑인)년 봄에 권씨는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根(근)이라 하였다.
그 해 겨울에 科擧令(과거령)이 내렸다. 김 자수는 큰 뜻을 품고 과거에 응하려고 젊은 아내와 갓난 아들을 집에 두고 다시 길을 떠나 송경을 향하였다.
권씨 부인은 남편이 길을 떠난 후 아들을 껴안고 집을 지키며 남편이 장원 급제하여 御賜花(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銀鞍白馬(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금의로 도라 오기를 고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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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自粹 (처음에는 子粹) 자는 純仲 (순중)이오 (처음에는 去石廣) 별호는 桑村(상촌)이니 그의
직계 자손들은 지금 桑村公派(상촌공파)라 한다.
그는 高麗(고려) 恭愍王(공민왕) 이십 삼년 甲寅(갑인) (西紀1374년)에 송경에 올라갔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小科에 장원하고 또 12월에는 大科(대과)에도 급제하여 德寧府主簿(덕녕부주부)로 出仕(출사)하였다. 辛卯生(신묘생)인 김 자수는 그 해 즉 24세의 청년으로 첫아들을 얻었고 또 과거에 급제까지 하였던 것이다. 김 자수는 이듬해 高麗禑王(고려 우왕) 원년에 左正言(좌정언)에 임명되었으니 상촌 은 그 동안 배운 바 정치 이념을 발휘할 때가 도라 왔다. 그러나 집을 떠난 지 일년이 지났으니 집에 있는 젊은 아내도 어린 아들도 보고싶고 또 사당에 고유도 해야 하곘으므로 고향 안동에 다녀올 허가를 상사에 맡고 친지에게도 그 계획을 알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은사 동정선생의 주최로 김 자수가 장원급제하고 향리로 도라 갈 때에 龍頭會(용두회)라는 송별회를 개최하고 당시 巨儒 (거유)들이 술잔을 나누었다.
그 때 壯元金子粹還鄕(장원김자수환향)을 전별한다 하였고 그 회 석에는 鄭圃隱(정포은)외에
常軒安震(상헌안진) 東亭廉興邦(동정염흥방) 宋凝(송응) 正言鄭樞(정언정추)등 당시 문장도덕이 높고 또 政界(정계)에 쟁쟁한 명사들이 회합한 것이다. 목은 은 병석에 오랫동안 누어
출입이 부자유하였으나 주최자인 廉興邦은 김 정언을 시켜 목은 을 청하니 목은 은 참석지
못하고 시를 지어 보냈으니
少壯元招考壯元(소장원초고장원) 젊은 장원[金子粹]이 늙은 장원[李穡(이색)]을 초대하는데
壯元郞又特傳言(장원랑우특전언) 壯元郞이 또 특별히 말을 전하는 구나
斯爲盛事足驚世(사위성사족경세) 이것은 장한 일이라 세상을 놀라게 할 만 하지만
只恨病軀難出門(지한병구난출문) 다만 병든 몸이 문밖을 나가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聚散却同萍興水(취산각동평흥수) 만나고 헤어짐은 흡사 물과 같으며
閒忙只合酒盈火尊(한망지합주영존) 바쁘고 한가함은 술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은가
四支調適知何日(사지조적지하일) 四支는 어느 때나 제대로 풀릴 것인가
風雨蕭蕭獨倚軒(풍우소소독의헌) 폭우가 소소한데 홀로 마루에 기댔도다
(載牧隱集재목은집)
안동출신으로 대제학에 현임으로 있던 東亭(동정)선생 廉興邦의
주최로 자기 사택에서 그 宴席(연석)을 베풀어 놓고 평일 왕래가 빈번하게 교분이 가까웠던
친구들만을 사사로이 초청한 연석이었다.
따라서 일등명창 官妓(관기)들의 (지화자 자로)부르는 노래에 맞추어 掌樂院(장악원) 樂士(악사)들의 三弦六角(삼현육각)으로 반주하여 장원 김 정원의 금의환향 송별연은 참으로
호화판이었다. 이휘귀한회합에 관한 참고文獻(문헌)으로 牧隱集(목은집)에 개재된 것을 보면
그 龍頭會(용두회) 송별연에 [東亭]은 그 문생 장원 김 정언(門生壯元金正言)을 보내서 나를 초청하였으니 一國의 원로 재상이며 또 학자들이 一堂에 모여서 귀향하는 청년간관 김자수를 위하여 성대한 송별연석을 개최한다는 일이 그렇게 보기 쉬운 일은 아니다. 그의 장래가 촉망되는 위대한 인격은 벌서 청년시대 부터 이렇게 나타났던 것이다. 상촌 김 자수는 장원급제 하여 정언이란 간관의 지휘에 배 명되어 잠시동안 掃墳(소분)의 길을 떠날 때 전별하기 위한 용두 회는 끝나고 모였던 여러 선배와 지구들은 상촌에게 일시적이라도 서로 이별하기를 안타 갑게 여겨 속히 돌아오기를 부탁하고 각각 헤어졌다. 상촌은 東亭廉興邦先生께 하직 인사를 하고 자리를 물러설 때 동정은 상촌의 손을 잡고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다. (자네 선장(先丈)= 남의 죽은 아버지를 일컷 는 말)이 총명하고 快活膽大(쾌활담대)하고 의리 있고 청렴하여 이 나라에 보필이 될 줄 알았더니 불행이 일직 별세하니 국가의 불행한일이오 金氏一門의 비운인가 생각되었네 그러나 자네 같은 훌륭한 인물이 나왔으니 다행한 일일세 십여 년 전 에 선장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문병을 갔더니 선장말씀이 내가 필경 회생할 길이 없는 듯한데 만일 내가 세상을 떠나면 저 어린 여섯 자식이 어찌 될는지 답답하며 죽어도 눈이 감기지 않을 것만 같은 데 내 아내가 지순하고 부덕이 있어 착(善)하기로 유명하다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은 자자하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여자의 홀몸으로 저 여섯 자식을 잘 길러서 가르쳐 사람에게 뒤지지 아니하도록 할는지 답답한 일일세 내장인[外舅(외구)] 福州府院君 靖平公이 건강한 몸으로 아직 생존은 하셨으나 쇠로지 년이니 인간의 수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섯 자녀를 동정형의 자녀같이 사랑하여 훈육을 하여주게 저 자식들이 후일에 국가의 동양이 되고 저 녀석들이 훌륭한 짝을 맺어 효성 껏 시부모(舅姑)를 받들고 (孝奉舅姑효봉구고) 남편의 보조가 되어(承順君子) 모범적 남의 아내가 되도록 하여주게 지하에 있는 죽은 넋이라도 감사히 생각하겠네 나는 누구보다도 동정형을 믿고 갈 것일세} 이러한 말을 나에게 하였네. 나는 이러한 말을 듣고 [죽는다는 불길한 말을 하지말고 병환을 조섭하여 속히 완쾌되도록 하라]하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병석에 누운 선장을 작별하고 집에 돌아왔었네 집에 돌아온 지 몇 시간이 지난 뒤에 별세했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원통함을 금치 못하였네 몇 시간 전에 나에게 부탁한말이 遺言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네 나는 선장의 유언을 뼈에 새겼네. 자네 외조부 복주부원군과 의논하고 내 몸소 자네 육남 매를 지도 훈육하였네 자네 모친은 참 훌륭하신 부인이 시야 청춘과부로서 家産을 정리하고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게 자네 육남 매를 지도 훈육하여 자네 육남 매 중 자네가 지금 마지막으로 출세의 첫길을 밝게 되었네.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말이 있네 아무리 보아도 우리 高麗나라가 위태하여가네 나는 늙은 몸이라 할 수 없네 만은 자네는앞 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니 앞으로 할 일이 많이 있네 그리고 자네 동지로 많이 있네 오늘 모였던 선배들은 연치의 차는 있을지라도 동지일 것일세 왜 그런 고하니 그들이나 자네는 모두 儒敎道德을 투절 하게 깨달은 까닭이세 유교도덕이란 것은 忠孝를 토대로 하여 조정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충성 것 섬기고 백성들의 文化啓發과 생활을 향상시켜 평화로운 세월을 堯舜때같이 하는 것과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를 효성 것 받들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가족이 화목하게 하고 한집안 가족이 화목하면 一洞이 平安 할것이오 一洞이 평안하면 一郡이 태평할 것이오 一郡이 太平하면 全國이 무사하여 태평세월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유교도덕의 왕도정치(王道政治)란 말이야 우리 나라가 위태 러워 가는 것을 반듯하게 세우려면 왕도정치를 단행해야 할 것일세 왕도 정치를 잘 수립(樹立)하여 한 번 반석 위에 올려 놓으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것일세 무너진다면 올바른 왕도정치가 아닐 것일세 어떠한 학설이 나오고 또 이외의 다른 방법이 나온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아침에 일어났다가 저녁에 없어질 것일세 올바른 왕도 정치를 하여 토대가 완전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지라도 없어지지 않네 그러면 올바른 왕도정치를 하려면 먼저 백성들의 사상을 잘 지도 계몽 할 것과 임금은 백성들을 알도록 해야 하는 것일세 사상을 계몽하는 데는 의(義)에 쫓고 의가 아니면 쫓지 아니 할 것과 만물의 영장(萬物之靈長)인 인간으로는 인간다운 예법(禮法)을 지킬 줄 알아야 하는데 예법이란 것은「임금은 신하를 아끼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 것 받을 것과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지극한 효로써 공경할 것과 부부(夫婦) 간에는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여 화합하도록 참을 것과 어른과 어린이에는 차례가 있어서 질서가 분명할 것과 친구는 믿으므로 사귈 것이며 또 물욕에 탐내지 않도록 지도 계몽하여야 될 것이며 따라서 문명이 발달되고 생활은 향상 될 것 실세. 물욕에 탐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은 각각 맡은 바 소임(책임(責任)을 정성 것 하면 되는 것인데 그러하고 보면 권력(權力)도 위엄(威嚴)도 다 소용없네.
옛날 성군(聖君)들은 나라동산(秘死(비사)를 혼자서 완상(玩賞)하고 즐 겁보다 여러 백성들과 같이 완상 하고 줄 거운 것이 좋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참된 왕도정치일세 이렇게 하면 물욕을 탐낼 사람이 생길 까닭이 없네.
지금 우리고려(高麗)가 이렇게 흔들이는 것은 물욕을 탐내는 까닭일세 물욕에 탐내지 아니하면 임금의 자리가 귀할 것이 아니며 백성이 천(賤)할 것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올바른 왕도정치일세 자네는 각별 조심하여 올바른 정치로 이 나라를 반석 우에 놓게. 자네 선장의 유언을 받는 내가 거듭 부탁하는 것일세] 하였다. (東亭集所載一部=동정집소재일부)
동정선생은 김 자수의 손을 힘껏 잡고 정에 넘치는 작별하였고 김 자수는 감개 무량한 표정으로 자리를 물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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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촌이 장원 급제하여 머리에 御賜花(어사화)를 꽂고 수분하여 내려온다는 소문은 벌서
安東일경 뿐 아니라 근읍(近邑)에 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그 일행이 안 동부 지경에 도착하던 때는 지구친척이나 안 동부 관원들은 물론이고 隣邑(인읍) 守令들도 유림(儒林)에서도 학우들까지도 아무 관련도 없는 일향 사람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장원 급제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김 자수의 容貌風采(용모풍채)를 보려고 나왔다. 당시 장원급제는 용이한 일이 아니므로 사람마다 우러러보던 시절이었다. 상촌은 유교도덕에 젖은 사람일 뿐 아니라 원래 성품이 지순하고 겸하여 강직함으로 환영하러 나온 군중들 가운데 연장자(年長者)에게는 두 손을 공손히 들어 읍하여 반기며 年輩者(연배자)에게는 두 손을 마주 잡아 정에 넘치는 인사를 일일이 하느라고 자연이 집에 들어갈 시간이 늦었었다.
그 때 구경하러 나온 군중들은 나도 저러한 자식을 두었으면---젊은 여인들은 상촌의
머리에 꽂은 어사화며 은안 백마에 높이 앉아 위험이 당당한 그 풍채를 흠모(欽慕)하여
나도 남편이 저러하였으면----권씨 부인은 금이 환향하는 남편을 맞으려고 대문 밖까지
나와서 기다린 지 한동안이나 되었다. 해가 바뀌도록 단 모자만 조용히 살아오던 김정언
본댁에는 아침부터 친척 고 구가 방문하여 큰집 안 밖을 들러 싸고 뫃 여 앉았다.
八대를 살아 내려온 안동에는 김 자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장원급제를 하고 벌써 조정에 간관이 되어 돌아오니 安東一景에는 기쁨에 잠겼다.
이왕에 경사(慶事)도 많았으나 一般의 記憶에는 사라지고 김 자수만이 자원급제 한 듯이 떠들었다. 상총이 자기집에 도착하니 기다리던 內外 親戚들은 반겨 맞으며 한참 시끌덩벙 하였다. 권씨 부인은 기쁨에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맞아 들어가니 아들 근(根)은 어리둥절하여 어머니 권씨의 품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상촌은 아들을 받아 안으며 많이 자라구나 너를 낳은 지 한 달이 채 못되어 집을 떠났더니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하며 친척들에게 격조하였던 인사를 하고 아내를 대하여 감개 무량하여 별세하신 부모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만일 부모가 세상에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 가 생각이 복받쳐 떠돌았으나 억지로
진정하였다.
[내가 일직 아버님을 여의고 홀 어머님 슬하에서 자랐으며 동정선생과 외조부의 가르침을
힘입어 장원 급제하여 금의로 도라 왔으나 감개가 무량함이다.]하며 그 부인 권씨에게 슮은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옆에 앉았던 권씨는 수삼 한 태도로 바라볼 뿐 얼굴이 붉어지며 아무 말이 없었다. 상촌은 어린 아들 근(根)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혼자 말로 --어머님께서 우리 六男妹를 기르시기에 얼마나 괴로우셨으랴 우리들이 지금 모두 이렇게 장성한 것은 어머님의 수고하신 결정이다. 어머님께서 생존하셔서 너를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으랴 내 효심이 부족하여 십세 전에 아버님이 별세하시고 또 약관에 어머님 마저 별세하시니 내 신세가 이렇게 기구하단 말이냐… 이렇게 한탄하며 부모의 생각이 더욱 간절해 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먼저 별세하는 것은 천리(天理)이다. 내 앞길을 개척하고 자식을 잘 길러 부모의 넋이라도 위로하는 것이 또한 효도이다 하는 생각이 나니 상촌의 비통한 표정은 和樂한 얼굴로 변하였다. 이렇게 단란한 가족은 오래간 만에 일당에 모여 온 집안에 화기가 가득 찼었다. 상촌은 즉시 방문객들과 일일이 접견하고 송경에서 치러 온 경험을 차근차근 보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사당을 열고 자원 급제한 사유를 고유하고 그 어머니 묘소에 소분 하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였던 큰 잔치가 벌어졌으며 귀가한 뒤에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
인정 없이 흐르는 세월은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다. 어느덧 휴가기일이 지나가고 다시 먼길을 떠나 송경을 향하게 된 김 정언은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 놓고 집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참으로 없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몸이 나라에 메었으니 나라일 이 수선해 가는 이때에 한시라도 조정을 떠날 수 없는 때이라 아니 갈 수 없어 그 부인 권씨를 잠깐동안이나마 다시 이별하는 연연한 마음도 또한 진정하기 어려우나 이는 모두 사사로운 사정에 불과하다. 김정언은 이미 몸이 나라에 매였으므로 할 수 없이 집을 떠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작별을 강행하고 김 정언은 송경으로 와서 다시 대궐에 입시하여 우왕(禑王)을 매일같이 충심으로 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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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도 소위 왜구(倭寇)는 고려 각 지방에 출몰하여 약탈과 방화를 감행함이 끝이지 아니하였다. 당시 李成桂(이성계)는 본래 咸興(함흥)출신으로 유수한 名弓(명궁)이 되어 왜구 퇴치하는데 거듭 공적을 이루어 필경 侍中이란 높은 지위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은 당시 위정자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이런 왜구침략이 계속발생 하던중 경상도 巡問使曺敏修 는 수차 왜적과 교전하여 많은 생명과 방대한 국재(國財)를 소비하였다. 그러나 조 민수는 또 密城(밀성)에 까지 순회할 무렵에 왜적과 정면 충돌하는 사건이 생겼다. 때마침 컴컴한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왜구 數十人이 배 두어 척에 나누어 타고 낙동강(洛東江)을 거슬러 올라온 뒤에
上陸하고 陸地로 깊이 親入 하여 촌락에서 부녀자를 납치하며 양식과 育蓄(육축)을 노략하는 중이었다. 이번 왔던 왜구(倭寇)는 철저히 격파하여 한 사람도 살아서 도라 가지 못하였음을 기회로 순문사 조 민수는 전번에 수차 패전한 허물을 이번에 씻어 보려고 과장하여 첩보를 정부에 올렸다. 이 첩보를 받은 우왕은 그 공노로 의복과 주효 준마(駿馬)를 상금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순문사 조 민수는 감격하여 謝恩上疏(사은상소)를 우 왕(禑王)께 올렸던 것이다. 우 왕은 그 때 왜구침략을 가장 근심하다가 조그마한 정공이라도 세운 신하의 행적을 가상히 여긴 나머지 사은상소까지 받고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때였다.
좌우에 정언 김 자수가 시립하였으므로 조 민수에게 批答(비답)을 한장 지으라고 하명하였다. 그 때 정언(正言)이란 관원의 근본직책은 간관(諫官)으로 왕의 좌우에 늘 시립(侍立)하여 왕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살피며 만일 왕이 정사를 잘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사건이 생기면 이를 시정(是正)하도록 간하여 바로잡게 하는 것이고 간혹 전교(傳敎)와 밀지(密旨)를 왕의 대작도 하였다. 이 하명을 받은 김 정언은 우 왕의 그 때 기분이 어떤 것은 요량도 않고 정직한 천성으로 곧 엎드려 상주하기를 「황송하오나 민수(敏修)는 이미 과분하온 은상을 입었 싸옵니다.
그가 일도(一道)의 군병을 통솔하고 있으면서 앞서 김해(金海) 대구(大邱)에서 왜적과 싸워 대패하여 군 졸은 많이 죽었고 또 국가 재물과 보배를 불소이 도둑맞아 국가체면을 손상하온 과오가 있었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오며 지금 밀 성에서 굶주린 왜적 십 여명 잡아 없애 버린 조그마한 이로 전일의 죄를 보상할 수는 衣酒鎧馬(의주개마)의 은상도 오히려 과분한 처분이라고 하겠거늘 하물며 치사까지 나리 시는 성은(聖恩)은 너무 지나치신 것으로 아뢰옵니다.」하고 그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앞서 실패는 지난 사건이고 전공이 성립 된데 대하여 대소 공적을 불구하고 왜적을 섬멸한 것만을 기뻐하던 우 왕은 김 정언의 간어에 진로 하였다. 그래서 왕명을 거역한 죄목으로 당장에 순위부(巡衛府)에 명하여 김 정언을 잡아 나리께 하였다.
그리고 우 왕은 행신(幸臣)이던 池淵과 대사헌(大司憲) 河允源(하윤원) 에게 분부하여 엄중히 문초하라 하였으므로 池淵은 지체 없이 정언 김 자수를 違旨罪(위지죄)로 몰아 처단하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뜰에는 형틀을 비롯하여 곤장 주장 등 형구를 벌려 놓고 형을 집행하는 사령(使令)들은 위세가 등등하여 제모인 벙거지를 뒷 꼭지에 제처 쓰고 거문 군복자락 뒤로 제처 남전대 허리띠에 단단히 찔러 놓고 좌우에 늘어서서 집행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니 상엄한 기세는 초목도 벌벌 떨 지경이었다. 상 엄한 마당에서 김 자수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아연히 서서 집행관들에게 말하기를 국가에서 간관(諫官)을 두는 것은 그 나라 백성을 대신하여 군왕의 정치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만일 옳지 못한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극간 하여 옳은 정치를 하도록 하는 즉 과실을 바로잡아 들이라는 직책이다. 그러므로 간관이란 직책은 임금의 이목(耳目)이니 금의 과실에 대하여 간 관이 諍諫(정간)함은 옛날 祖宗朝 (조종조)때 부터 있어 오던 관직인 것이다. 그러니 간 관의 한 사람인 나는 간 관의 직책으로 임금의 잘못을 정간하는 것인데 어찌 벌을 주려 하는 거인가 제공은 나라에서 간 관의 제도를 설치한 본뜻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국가에서 그 법을 시행하지 않은 重臣(중신)들은 조종 조에 죄를 짓고 국사를 좀 먹이는 것이니 모두 물러가야 나라꼴이 바로 들어설 것이라고 추상같은 언사가 정정당당하였다.
집행관인 池奫(지윤)은 뻣뻣하고 고분고분하지 못한 김정언의 공술에 대하여 더욱 불쾌하였으나 실상인즉 간관을 함부로 처결할 수 없어 그 사건을 도당(都堂)에 품의하고 정언 김자수는 태형(笞刑)하여 귀양을 보내야겠다는 악형에 처벌할 것을 제안하였다. 당시 도당(都堂)에 모인 대신들도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지윤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그 제의가 불공평함을 알면서도 감히 그르다고 반박하는 자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때 밀직부사(密直副使)인 李寶林(이보림)은 우왕께 직접 상주하여 간관(諫官)을 장형(杖刑)에 처하는 것까지는 너무 가혹한 처형일 뿐 아니라 국가대사의 중요한일에 언론을 트러 막는 것이오니 후일에 누가 바른말을 할 신하가 있겠는가 장내를 위하여 근심되는 바이고 국가기본 제도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즉 유형(귀양)에만 처형하기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진로가 식지 아닌 우왕은 그런 건의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보림의 입이 열리자 도당공론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김정언에게 장형을 처결하는 국가기본 제도에 어그러지는 중형(重刑)이라는 공론이 하여졌으나 우왕의 진로를 풀게 할 도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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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大司憲) 하윤원등은 법을 맡은 장관으로 간관을 중형 하는 것이 국법에 어그러지는 줄을 잘아는 무리들이 지만은 나라일이야 어찌 됐던지 임금의 비위만 맞추어 간사한 행동을 하는 행신 들이다. 그러나 다른 憲官(헌관)들이나 간관들은 불가하다고 연명상소를 하고 성균관(成均館) 대학생들은 [국가의 기본인 간관을 잘못 한일 도없이 중형에 처하면 전무후무한 일일뿐 아니라 국가장내가 근심 되옵고 祖宗朝(조정조)에서 간관제도를 마련 하옵신 경륜에 어긋나는 일이 오며 간관을 중형한다는 말이 벌써 항간에 퍼져 도하(都下) 백성들까지도 간관을 치 죄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라고 수성수성 하여 민심이 비등하여 황황하오니 성상(聖上)께 옵서는 죄없는 간관을 중형 하였다는 누명을 듣지 맙 소서 당초 간관을 임명할 때에는 인품이 고결하고 학식덕망이 높고 경륜(經綸)이 풍부한 인물을 선택하는 제도이 옵기로 김자수로 정언을 임명할 때에도 조정 공논에 의하여 그 인품과 학식 덕망 경륜이 출중하다 하여 임명될 줄로 아옵는 데 중형명령이 왼 일이옵니까 경상도 순문사 조민수는 군법에 처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사 오나 숭상의 넓으신 은혜로 용서를 받아 온 터에 이번에 굶주린 도둑 십 여명을 잡았다는 첩보(捷報)에 후상을 나리 시옵고 겸하여 문서까지 주신다는 것은 잘못되는 일이 오며 이것을 잘못이라고 간하는 간관을 중형 하시려 하오니 이것은 성상의 성덕(聖德)에 해가 될 뿐 아니 오라 민심이 동요될 가 염려되오니 살피소서] 태학생들의 상소는 절절귀귀가 충용 강직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태학생의 상소를 보고 불윤(不允=안 된다)이란 비답이 내렸다. 태학생들은 비분함을 참지못하여 이번에는 수백 명의 태학생들이 대궐문 앞에 모여 [황공황공 하옵고 이번 간관 인 정언 김자수의 중형은 끝이지 아니 시옵고 기어이 집행코자 하시오니 신등도 김자수와같이 同律(동률)에 처해주소서 신등도 학문을 연마하고 도덕을 배워 장차 간관이 되어 나라일 을 바로잡고자 하옵거늘 간관 이 되어 옳은 말씀으로 간 하 옵 다가 중형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김자수와같이 중형을 받는 것이 옳을 가하오니 살피사 동률에 처해주소서] 하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 우왕은 태학생의 再疏(재소)를 보고 더욱 노하여 사헌부에 김자수를 장형에 곧 집행하라고 재촉명령이 나려다. 그러나 간신 배들도 태학생의 기세에 어리둥절할 뿐---그 때 三司右使인 金續命은 도당회의석상에서 일어서 내전(內殿)에 급히 들어가서 태후(太后)께
「지금 도당회의로 정언 김자수를 장형(杖刑)에 처하라 하오니 이런 욕을 보이는 것은 언론(言論)의 길을 막는 것이오니 국가에 불행한 줄로 아뢰옵니다.」하고 그 의논이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어머니될 여성이 자식을 사랑하기는 사사백성의 집이나 왕가를 물론하고 일반으로 태후는 아들 우왕이 정사에 큰 과오가 없기를 주소로 축원하고 있다 가 김속명의 보고를 듣고 급히 우왕을 내전으로 들게 하여 「나는 지금 삼사(三司)우사 김속명의 보고를 듣고 도당에서 중대한 의논이 진행되는 줄로 알고 있소. 이 늙은이가 국사에 참여하려는 것은 아니나 나이 늙은 탓으로 세상일을 지내 온 경력은 많은 듯이 여기오. 간관 을 장형에 처결한다는 말은 듣고 본일이 한 번도 없소. 만일 사람의 바른말을 트러 막는다면 나라일 은 장차 틀려 갈 것이 아니 하겠소」하고 그 불가함을 말하였다,
우왕은 태후의 말씀이 옳기도 할 뿐 아니라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다시 도당에
명령하여 장형을 중지하고 귀양만 보내라 하였다.
그래서 정언 김자수는 장형(杖刑)만을 모면하였으나 이 違旨罪(위지죄)로 전라도돌산(全羅道
突山)섬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돌산은 지금 麗水(여수)에 조그마한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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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은 돌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기가 원통한 것은 물론이오 조정에 충만한 악당들을 어떻게
하던지 몰아내어야 나라꼴이 잘될 것이라고 주야로 악당들을 몰아낼 궁리에 골똘하여 세월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다. 池奫(지윤)은 당시 禑王의 총애를 받던 권신(權臣)으로 간관을
미워하여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다 가 이번일 은 김자수 한 사람만이 아니고 여러 간관들이
의론하고 왕명을 거역하기로 모의하였다 하여 필경 간의대부(諫議大夫)
鄭寓(정우)를 경상도 죽림(竹林)땅으로 역시 정배(定配)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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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오기는 오래 전부터이나 발전이 지지부진 하다가 성균관이 창설
된 뒤로부터는 유학연구에 몰두한 청년학자가 배출되었으니 정부에서도 더욱 유학을 장려하여 유학자를 많이 등용하니 포은 정몽주 묵은 이색 야은 길재 동정 염흥방 반남 박상중
양촌 권근(正夢周 李穡 吉 再 廉興邦 朴尙衷 權近)등 대유학자가 있었다.
성균관에 거재(居齋)하는 유생들이 날마다 더하였고 居齋 하는 유생들은 태학생이라 하였다.
우왕은 태학생들의 再疏(재소)를 깔고 뭉개다가 날 수 없이 아래와 같이 批答을 내렸다.
「경들은 지금 공부에 열중할 뿐이고 정치에는 관여치 말라 학문을 충분히 연마하고 덕을 닦아 급제한 뒤에 조정에 나와서 비로소 정사를 의논하라 경들의 상소로 김자수를 감명한 것은 아니다. 태후궁에서 특별 하옵신 분부가 계심으로 중형을 면하고 귀양만 보낸 것이다.」라고 批答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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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四年만에 정언 김자수는 귀양 갔던 突山(돌산)에서 풀려 돌아왔고 벼슬하기를 다시
시작하여 典敎副令(전교부령)에 임명 뒤었고 여러 번 승진하여 司宰侍事(사재시사)까지 되었다. 그리고 外職으로 충청도 都觀察(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충청도에 재직 중 치적이 찬란하여 관청에 일이 없고 백성들은 평안할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워낙 중앙정부의 망국적 칙령(勅令)에 몇 번이나 불가함을 상소하였으나 임금은 본체 만체하고 자기의 복(福)을 빌기 위하여 요망한 행동으로 불사(佛事)에 전력하니 아무리 한 지방을 잘 다스린다 하여도 임금이 국사가 나로 틀려 감을 개탄하고 뜻한 마음으로 도관찰사 김자수는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안동으로 돌아가서 그 아내와 더불어 아들을 길러 뒷일을 경영하려는 것이 그 임무로 알었었다.
평소에 전국적으로 유수한 大儒(대유)와 두터운 교분이 있었다. 예를 들면 鄭夢周(정몽주)
李穡(이색) 朴尙衷(박상충)같은 저명지사들이었다. 도 관찰사를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가는
金桑村에게 양촌 권 근 (陽村權近)이 시를 지어 작별하였으니 그 시(詩)는
寄金正言去광 (기김정언거광 상촌선생 초자거광)
匹馬千山路(필마천산로) 匹馬로 첩첩산길을 돌아가는데
孤鴻八月秋(고홍팔월추) 외로운 기러기 날으니 팔월의 가을이로다
歸寧之子追(귀녕지자추) 부모를 찾아 떠나는 그대이니 무척도 바쁠 터이지만
惜別故人愁(석별고인수) 작별을 아쉬워함은 친구의 심정일레라
芋栗村中樂(우율촌중락) 토란과 밤 등은 마을에서의 줄 거움이고
薄로物外遊(박로물외유) 순채와 농어회로 세상 밖에서 노닐 테지
也應同去광(야응동거광) 필시 함께 광(광)을 떠나가면서
笑我目悠悠(소아목유유) 나 홀로 悠悠하다고 비웃을 테지
이 시를 보아도 상촌은 어지러운 세상을 동지고 한적한 시골 고향에 도라 가 아들이나 기르고 가정생활에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 보려는 듯 하였다. 그러나 상촌은 문장을 더 연마하고
덕을 딲아 뒤에 오는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양왕은 나라일 은 어지럽고 착한 신하들은 하나씩 둘씩 사직하고 물러가니 국가 대사를
염려하여 상촌을 다시 불렀고 때를 같이하여「이런 난시에 국가일 을 등한시 할 수 없으니 곧 상경하여 충성을 다 하라는 고구(故舊)들의 간절한 권고도 있을 뿐 아니라 권씨 부인은
[요조숙녀(窈窕淑女)라야 군자(君子=남편)의 짝이 된다 하였지마는 내가 비록 요조숙녀는 못되었으나 저 아이 근(根)의 나이 약관이 못되고 아직 학문이 미숙하니 좀더 잘 지도 교훈하여 장래 김씨 문중을 그르치지 아니하도록 할 것이니 집안일 은 아무 염려 마시고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니 다시 서울에 가서 宮中府中(궁중부중)에 가득 찬 탐관오리들과 역 심을 품고있는 무리들을 하루바삐 물리치고 어진 선비들을 모아 西山落日(서산낙일)처 럼 기우러 저가는 이 나라의 國權(국권)을 회복하여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없애어 견고한 국권을 반석 우에 놓도록 하는 것이 글 읽은 사람의 할 일인가 하나이다. 사람이 글을 배운 것은 실천에 옮겨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유생(儒生)들의 소원이라 할 것이오니 군자는(옛날에는 남편의 대명사) 어찌하여 배운 바를 실천에 옳기 고저 하지 않나이까 군자가 정언으로 재직 중 임금이 옳은 정치를 못하니 옳은 정치를 해야 한다고 극찬하다가 임금의 비위에 거슬려 귀양사리 四年을 겁내심이 아닌가 의심되는 바이며 이 난국에 있어 그러나 국민으로 옳은 일에 쓰지 못하면 이 아이 근(根)이도 가르쳐 무엇에 쓰겠나이까 신라이후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배출한 이 김씨 문중이 장차 어찌 되오리까 하루라도 빨리 상경하여 간신 배에 쌓여 정사에 어두운 임금을 도와 바른 정치로서 도탄에 빠진 고려(高麗) 백성들을 구출하여 太平乾坤(태평건곤)에 擊壤歌(격양가=기뻐서 흙덩이를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를 부르게 하여 이름이 천추에 빛나도록 하소서 어느 때를 막론하고 백성이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없고 나라 가없는 백성이 있을 수 없는 것이오니 지금 이 난국에 빠진 나라를 구하지 아니하고 무엇을 하오리까 나라가 없어지면 백성이 있을 수 없고 백성이 없는데 우리 집인들 남아 있을 리 만무하오이다]하여 눈물을 흘리며 정성껏 거듭거듭 권고하니 도 관찰사 김 자수는 철석(鐵石)같은 忠君愛國(충군애국)하는 마음이 강할지라도 어질고 착한 권씨 부인과 어린 아들 근(根)을 두고 잠시라도 집을 떠나는 심정이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장엄한 결심으로 즉시 행장을 수습하고 길을 떠났다. 당시 안동서 송경까지 십여일일이 걸려야 가는 때였다. 송 경에 도착 즉시로 형 子汀(자정)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공양 왕께 온 뜻을 알리고 선배지구들을 찾으니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대관이나 학자 등 저명한 인사들의 반겨함을 그전보다 더하였다. 정부에서는 즉시 충청도 도 관찰사로 부임 하기 전 관직 典敎副令(전교부령)에 서임 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되어 判司宰寺事(판사 재시사)로 차차 중직에 승진하여 成均館大司成(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김 대사성은 성균관에 居齋하는 유생들에게 유교의 종지인 윤리 도덕으로 지도하니 그 이름이 국내에 진동하였으며 世子左輔德(세자좌보덕)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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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김 대사성은 공양왕(恭讓王)에게 상소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是正)하였다.
그 시정한 것은 恭讓王의 생모(生母)이 던 왕대비가 있었고 원래 國大妃(국대비)가 또 있었다. 두 대비에 宮中儀式(궁중의식)에 쫓아 지존인 군왕으로 生育之恩(생육 지은)과 승조지의 (承조之義)가 뚜렷이 구별하여 일반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터인데 군왕으로 의식절차를 차리지 못함을 바로잡아 먼저 왕대비께 다음 국대비께 국왕의 문안 절차와 봉양절차가 차례가 있어야 대의에 옳고 기상이 바로잡혀 민심이 안돈 되겠다는 것 당시 중국에서는 원(元)나라의 부패한 정치로 백성들이 塗炭에 빠저 있음을 구출하려고 朱元璋(주원장)이란 사람이 무리를 모아 부패한 원나라를 섬멸하고 명나라를 새로 이룩하고 주원장이 명나라 태조(太祖)가 되어 중국일원을 완전 정복하니 그 新興勢力(신흥세력)은 천하를 흔들어 동쪽으로는 우리고려를 엿보고 남으로는 안남 국경을 범하고 북으로 시베리아까지 출병하여 그 위력이 천하무적(天下無敵)이였다. 그 때 명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 양마만필(良馬萬匹)을 보내라 위협하니 朝野(조야)가 물 끓듯 황황한 중에 국내에서는 늦지도
아니한 世子冊封(세자책봉)준비로 거액의 국비가 소모됨이 불가하니 잠시동안 세자 책봉준비를 중지하고 명나라와의 국교(國交)를 완전 해결해야 재정을 부담할 백성들이 안돈 되 겠다는 것과 원래 불법은 정신을 수양하는 일종의 학문인데 지금 우리 나라에서 불법을 숭상하는 것은 불교의 본지(本旨)를 떠나 개인 명복을 빌 뿐이니 이것이 어찌 불법의 정신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 나라에서 불법을 숭상 하는 데는 백성들이 거대한 세금을 정부에 바쳐야겠고 또 고역이 심해야겠는데 어느 겨를에 재물을 모아 거액의 세금을 바칠 것인가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백성을 사랑하기 자식과 같이하여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근본이 될 것인데 전하(殿下)께 옵 서는 천기의 왕위에 올라 배성의 질고는 돌보지 않고 演福寺(연복사)의 탑을 세우느라고 백성의 집三十四호를 헐어버리고
또 불당을 건축하려는 큰 토목 공사를 시작하시니 농사를 짓는데 그 시기가 있어서 만약 그때를 놓치면 一年농사를 걷을 수 없는 것은 천지(天地)의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이농부들을 시켜 산에 올라가서 재목을 채벌케 하고 또 그 재목을 도정에까지 운반케 하 믄 국비도 소모되고 백성의 인력이 필요하므로 여기 대한 원망이 생기는 것이다. 국왕자신의 명복(冥福)을 불당에 빌기 위하여 여러 생령(生靈)의 實地禍亂(실지화란)을 불러오게 함은 백성의 부모가 되는 국왕으로 행할 일이 아니니 명확한 전교(傳敎)를 나려 불당건설 토목공사를 중지케 하여 백성들이 안도감을 느끼도록 하자고 불당건설을 반대한 것과 또 전하께옵서 임금의 자리에 즉위하였으되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신太廟(태묘)가 퇴락 하였으나 이것을 수리하였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고 여러 능침(諸陵)이 폐 퇴 되었으나 한 것도 영선(營繕)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조상을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이렇도록 없고 오직 자신의 명복만 빌기 위하여 백성의 노고를 생각지 아니하고 조상도 추모치 않고 자손도 애무치 아니하고 불당건설에만 치중하니 이것은 천지신명인 들도 도울 리 만무하다고 강력히 불당건설을 반대한 것이며 또 황당무계한 무당(巫堂)이 곳곳에 설치되었고 서울장안에만도 은혜를 빈다는 곳이 십(十)여 개소나 있어 사시로 치성 할뿐 아니라 매년 특별한 제사를 지내고 어느 때에는 밤마다 치성하는 제사를 하여 거액의 국고를 낭비하고 방금 禁酒令(금주령)을 나려 실시 중 이나 무당 패의 무리들은 나라 일이라.
稱託하고 白晝大路(백주대로)에서 마음대로 飮酒歌舞(음주가무)하며 요괴로 운 행동을 자행하니 풍속을 해이케 하고 법규를 괴란하고 기강을 문란케 하며 때로는 九重宮闕(구중궁궐) 깊은 속에서도 치성한다 하여 음탕한 풍유와 간사한 노래며 어지러운 춤으로 명복을 빈다는 제사를 지내니 무식하고 절조 없는 궁중내인들은 그 본을 떠서 음탕하고 허황하여 엄숙해야할 궁중에서 기강이 문란하니 여염백성들도 이런 데 빠지지 아니 하리 오 유사(有司)는 있으나 감히 금지할 수 없는 현상이오니 嚴勅(엄칙)을 나려 무당배가 궁중 출입하는 일을 막는 동시에 무당 배의 요괴로 운 행동을 엄중 처벌하게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기상을 서게 하자는 것과 또 근일 천하에 조직을 나려 치민하는 요령(要領)을 구하시니 심히 좋은 일이오나 신이 일직 듣고 본 바에 의하면 대간(臺諫)들이나 유생들이 충성될 말을 올리면 이를 융납지는 못할지라도 그 말은 가상이고 혹은 억제하여 승진이 없으니 두려움을 무릅쓰고 누가 감이 말할 신하가 있으리요 지금 바라 옵는 바는 전일 낙직(落職)한 신하들을 다시 등용하고 옳은 말을 구하여 시행하여 장내가 잘되도록 한다면 전하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누구든지 말을 아니할 사람이 있어 오리까 듣자 하오면 얼마 전에 성균 생원 박초등(成均生員朴礎等)이 착한 정치를 하는 방법을 상소하였으나 크게 노했다 하오니 이런 일이 있지 않도록 널리 선비를 구하여 나라일 을 바로잡자는 것과 또 국고의 금전과 양곡을 출납함에는 먼저 都評議使司(도평의사사)에게 알리고 使司가 출납여부(出納與否)를 정확히 삺인뒤에 또 재고를 계산하여 문 부를 정리한 뒤에 출납을 해야 낭비나 허용이 없이 국가재정은 윤택하여지고 백성들의 부담이 경감 될 것이라는 등으로 상소하니 임금은 이 눈물겨운 상소에 감동되어 채택하겠다는 윤허 가 내렸다.
상소조문을 간단이 결론하면
一, 국왕으로서 윤리를 밝힐 것.
二. 국내정세가 위급한 때이니 세자(世子) 책봉(冊封)준비를 잠시 중지하자는 것.
三, 명나라와의 국교를 먼저 해결하자는 것.
四, 불당건설은 나라가 망하는 근본이니 절대로 건설을 폐지하자는 것.
五, 태묘와 제능을 영선하여 思親愛子(사친애자)하는 도리를 밝히자는 것.
六, 淫祠巫堂(음사무당)의 괴풍의 영향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해가 막대하니 엄벌처치하고 七. 널리 선비를 구하고 낙직(落職)자들을 다시 등용하자는 것.
八. 국가재정을 양입계출(量入計出)하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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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대사성 김자수의 상소가 있기 직전에 성균 생원 朴礎(박초)등 十五人이 왕의 불교숭배를 반대하여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사예 유백순(司藝 柳伯淳)은 이렇게 상소하면 왕은
반듯이 진로할 것을 말하려고 지신사성석용(知申事成石瑢)도 상소의 내용이 옳기는 하나
급속히 서 들러서는 전 국민의 반감이 생길 염려도 있고 너무 과격한 문구가 많을 뿐 아니라 임금에 대하여 불공스러운 구절이 많아서 임금의 생각을 돌이기는커녕 도리어 죄를 받을 가 두려워하여 그 상소를 중간에서 보류하여 임금께 올리지 아니하였으나 결국은 오랫동안
보류할 수 없어 임금께 까지 올려 더니 왕은 진로하고 상소는 각하되었다.
그리고 대사성은 갈리고 김자수로 입명 하였던 것이다.
상소문제로 성균관이 소란하였을 때 김자수는 대사성으로 입명 되어 오래 동안 진정시키기에 노력하였다.
성균관에 있던 太學生(태학생)들은 國學(국학)의 受業(수업)을 거부하였으나 요사이 말로는 동맹휴학이 일어났었다. 대사성 김자수는 그 사건 처리에 곤란하여 諸生(제생)을 장학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博士 金貂(박사 김초)와 金租(김조)등 선동 자를 譴責(견책)하였다.
그 뒤에 김대사성이 성균관에 사진하던 때 김초등은 보통 때와 같이 뜰에서 영접하지 아니하므로 김대사성은 下官(하관)에게 능욕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사직원을 제출하였으나 왕의 允許(윤허)가 나리지 아니하다가 그 뒤에 전근 뒤어 典敎寺判事(전교사판사)로 左常侍(좌상시)가 되었다. 壬申(임신) 5월에 김자수는 刑部尙書(형부상서)에 인명 되었으니 고려왕조의 최후 내각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그 해 7月에 이 태조가 등극하였으니 고려왕조는 필경 망하고 말었다. 그런데 성균관은 국학대학이오 대사성은 요사이 대학총장인 것이다. 고려왕조의 말엽에 국운은 쇠약하였으나 유교적 학문이 가장 왕성하기 시작하여 孔孟(공맹)의 도를 연구하는 학자가 날을 따라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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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등의 상소를 대강 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황공하옵거니와 이때 우리 나라는 북쪽에 명나라의 신흥세력이 패 창하여 우리 나라에 압력을 더하옵고 동쪽과 남쪽바다에 왜구들의 노략이 격심하오나 이것을 막지 못하와 남쪽백성들은 남쪽으로 생명을 보려고 男負女戴(남부여대) 하옵고 헤매고 있사옴을 성상께옵서 근심하옵시와 그 방책을 강구중이시오나 묘안이 없사옵고 또 국내에는 武人(무인)들이 단결하여 어지로운 세태를 匡救(광구)하려는 생각은 없압고 기회를 보아 궁중 부중을 겁박 하여 革命(혁명)을 일으키려 하오니 유교도덕의 대학자가 집권하고 있으므로 그 철통같은 유교적 의리를 두려워하여 거사치 못하고 있음은 더 살 외 말씀이 없 사 오며 심지어 前王(전왕) 兩位(양위)를 중의 종자라고까지 반역한 것은 무당 배와 僧侶(승려)를 假裝(가장)한 무식한 중들이 주야를 가리지 아니하고 궁중출입을 무상하게 하온 까닭이오니 성상은 널리 살피사 불교를 박멸하소서 등등 【以上토善總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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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행과 명망이 높고 관직이 높던 김자수는 당시 조정에 있던 대관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侍中(시중) 李成桂(이성계)와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시중은 곳 의정대신이었다.
정권과 궁궐을 한 손에 장학한 이성계는 필경 이심을 품고 오다가 오백년 고려왕조를 물리치고 새로운 朝鮮(조선)을 건설하니 유교가 팽창하던 당시人心(인심)이 그를 따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사상은 儒家(유가)에서 金科玉條(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유가대종이던 포은 선생은 이미 善竹橋(선죽교)에서 피살되었으나 三隱先生중에서 牧隱 冶隱(목은 야은) 두 분은 한탄하던 중이니 새 왕조에 쫓으리라는 생각에 이 태조는 등극하면서 이들을 먼저 초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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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元宗(고려원종)十年(西紀1269年)에 몽고는 고려를 정벌하였고 그때부터 고려학자 安珦(안향)은 중국의 宋學(송학)즉 儒敎性理學(유교성리학)을 고려에 수입하고 그 후 恭愍王(공민왕)때 益齊 李薺賢(익제 이제현)은 북경에서 중국의 趙孟부
같은 학자와 교유하고 귀국한 뒤 송학을 더욱 고무하여 고려 말에는 稼亭(가정)같은 (목은의 부친) 대학자가 나오고 이어 三隱 先生이 儒學을 대집성한 것이다.
이런 巨儒(거유)들이 반역한 이성계를 추종할 이치가 없었다. 이들 눈에 가시같이 보이던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윤소종(尹紹宗) 남재(南在) 조박(趙박)등이 우익으로
개국공신에 참여하였고 이름났던 선비는 부름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공민왕 때부터 과거에
급제해서 그 벼슬은 시중(侍中)까지 올라갔고 그의 높은 학문과 덕망은 전 국민의 숭배를 받든 목은 이색(牧색)은 이성계와 본래 교분이 친밀하였다. 그래서 이 태조가 등극하면서 즉시 목은 부터 불렀다. 신 왕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불음을 거절할 수도 없어 그는 수창궁에 들어갔다. 滿月대 궁궐은 그 동안 불에 탔고 시가지 중앙에 있던 壽昌宮(수창궁)은 아무런 화를 입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신 왕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신 왕에 대하여 그는 읍을 할 뿐이고 절을 하지 아니하였다.
이 태조는 불쾌한 마음을 억제하고 大儒를 맞는 예절로 용상에서 내려오며 정중하게
목은을 영접하였다. 반기어 인사를 마친 뒤에 이 태조는 용상위로 다시 올라갔다.
목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국왕에게 쓰는 用語를 쓰지 않고 平交間에 쓰는 용어로 「이 늙은이는 앉을 자리가 없어」하고 그대로 서서 있었다.
아무리 大儒라도 一國의 王에 대한 태도는 너무도 오만하였다.
그러나 이 태조는 또 좋은 낯을 보이며 간곡한 어조로 「부패한 고려왕국을 개혁하고 유교정신으로 새로 이룩한 나라를 도와 백성의 살길을 찾아 주기를」 간청하니 목은이 대답하여
「망국한 늙은 선비로서 외람 되게 무슨 좋은 계책이 있겠소. 늙은 몸을 끌고 고향에 도라 가서 해골을 뭍일 곳이나 장만하게 해준다면 다행일가 하오」하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그 자리에서 수창궁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런 뒤에 四年間을 산수간에 방황하다가
五月 어떤 날 驪州 앞 한강에서 배를 타고 한산으로 가다가 한잔 술에 노쇠한 몸에 독한 술기운운을 이기지 못하여 망국의 유한을 품은 체 이 세상을 영별하였다.
목은은 일찍이 연소한 동지 桑村의 자(字)純仲(순중)에 자설(字說)을 지었고 상촌은 목은의
문장을 사모하여 시(詩)를 지었으니 그 시는
東國文章集大成(동국문장집대성) 東國의 문장을 집대성하였으니
稼亭父子冠群英(가정부자관군영) 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의 으뜸이었네
山川朶秀今猶古(산천타수금유고) 山川의 품은 정기는 지금도 옛과 다름없는데
借問何人繼盛名(차문하인계성명) 묻노니 어느 사람이 그 이름을 이을꼬
三隱先生中(삼은선생중) 최후의 冶隱(야은)은 창왕(昌王)시대에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로 있었고 이 태조는 당시 侍中(시중)으로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辛旽의 종자라는 누명을 씌워 갈아내고 공양왕을 등극시켰다. 그는 이 사건에 불복하여 분연히 벼술을 사직하고 고향 善州(선주)로 내려가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태조의 제五자 芳遠大君(방원대군)과 동문 수학한 관계로 여러 번 불렀으나 종시 응치 않고 늘 글을 써서 사퇴하였으나 필경은 위협으로 부르니 야은 선생은 화가 늙은 어머니에게 미칠 가 두려워하여 송경에 까지 왔었던 일이 있었다.
개국공신의 하나인 조준의 아우 趙胤(조윤)은 戶曹典書(호조전서)를 개국 초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아직까지 불러오던 자기이름을 (견)으로 고치고 자(字)는 從犬(종견) 이라 하였다. 「나라를 잃고 죽지 못한 것은 개나 다름없다. 그러나 주인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개와 같다.」하는 의미로서 개로 자처하고 이산에서 저 산중으로 방랑하고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상촌 김자수도 이 태조가 불렀으나 다른 선비들과 같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김자수와 이 태조는 한 조정에서 한 임금을 섬기고 벼슬을 같이 하였으므로 친분이 두터웠었다. 이 태조는 그 때에 민심을 수습한다는 의미에서 유생들이나 전조 구신 들을 가해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高麗遺臣(고려유신)들을 개별적으로 회유하려다가 실패한 나머지 이 태조는 편전에 충신 몇
사람을 집합하고 나라정책을 의논하다가 문득 탄식하며
「그 동안 여러 사람을 등용하려 했으나 모두 공양왕을 섬겼으니 나를 섬기지
못하겠다고 들하고 물러가니 나는 덕이 없기로 공양왕만도 못한가 천우신조하고 경들의 협력으로 새나 라를 세웠으나 짐은 본래 무인(武人)이라 충고한 정치이념이 부족하여 개국 초 정사에 어찌할 묘책이 없고 쓸만한 사람은 부족하니 장차 어찌할 고]하고 탄식하니 제신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앉았다.
개국공신 중에 지혜가 뛰어났던 정도전은 좌석에서 처음 입을 열어
「전조구신들이나, 유생들이 새 왕조에 벼슬하지 아니함은 전 왕조를 잊지 못하여 나오지 아니하니 이 정신이야말로 훌륭한 정신이라 충신은 두성(姓)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정신으로써 출사(出仕)치 아니하오니 이 정신을 타파시키기 위하여 새로 과거를 보이는 것이 상책으로 아뢰옵니다.」「과거라니」
이 과거는 구조(高麗)관리나 누구나 새 정신으로 과거를 보아 여기 선출되어 이신왕조에 벼슬하여 백성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하오면 그 중에서 누구든지 먼저 나올 것이며
나온 뒤엔 다른 구조관원들이 따라올 사람이 생길 것으로 아뢰옵니다.]
이런 계책을 즉시 실천에 옮기도록 함의를 보았다. 앞에서 말한 추동궁 과거를 좀더 상세히 진술하자면 짐(朕)이 덕이 부족하나 천하민심에 쫓아 전 왕조로부터 대위(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으니 이것은 천도를 순응한 것이다. 글 읽은 너의 신민은 이번과거에 응하여 국가에 보필이 될지라 이러한 글로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방을 붙여 과거일자를 널리 알리는 한편
성균관에 본부를 둔 태학생들에 압력을 가해서라도 과거보이는 楸洞宮(추동궁)에 모이도록
한 것이다. 문과는 첫날 무과는 둘째 날로 정하였으나 과거 날자가 가까워도 시골서 모이는 사람이 터무니없이 소조하였다. 그래서 더욱이 유생들을 출두하도록 압력을 은근히 가하였다. 유교총본부인 성균관(成均館)에는 그야말로 벼슬도 아직 아니한 유생들만이 집합 한 곳이 아니라 고려왕조에 벼슬한 관원들도 섞여 있었으나. 과거 보러 추동궁에 들어가려면 성균관에서 정포은이 순절한 선죽교를 지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당일 압력에 어찌할 수 없이된 성균관에 있던 사람들은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결심으로 추동궁으로 향해가던 도중에서 겨우 三四 삭 전에 정포은이 순절한 선죽교를 지나게 되는데 이 선죽교를 지나며 신왕 이성계를 얼마나 원망하였을 것인가. 여기서 더욱 충격을 받은 무리는 추동궁 앞에서 집합하고 두문동을 향하기로 결의한 것이니 그 때 참석한 사람이 七十二人이다.
상촌 김자수는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인물로 이런 동지와 서로 맹서하여
「우리는 조석으로 성균관에 출입하여 大成殿(대성전)에 알성하고 도덕을 강론하는 사람들이니 오늘 같은 과거를 볼 수 있는가」하여 일제히 갓을 벗어 걸고 패랑 이를 쓴 뒤에 만수산을 향하였던 것이다.
그 때 桑村은 이러한 시(詩)를 지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忠臣烈士今安在(충신열사금안재) 충신 열사들은 어디가고 여기 없는고
飛去山禽語古春(비거산금어고춘) 날아가는 산새만이 옛날 봄을 그리워하네.
王階花心風後老(왕계화심풍후노) 대궐 안 뜰의 꽃도 모진 바람에 다 늙었으매
金陵樹邑雨中貧(금능수읍우중빈) 임금님 사랑하시던 나무 빛도 우중에 초라하다.
應知日短淸香閣(응지일단청향각) 아아, 날이 이미 기운 이 추운 청향각에서
想必天寒觀德人(상필천한관덕인) 오직 그리운 것은 나라 구할 충신의 덕이로구나.
,感淚振衣臺上客(감루진의대상객)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씻고 고궁의 섬돌에 선 누가
此時幾泣我王身(차시기읍아왕신) 가없은 임금의 몸을 울어 위로 할 긴고.
첫날 문과시험에 응한 자는 시골선비 몇 사람 밖에 없이 쓸쓸하게 지나갔고 이튼날 무과에는 다소 희망을 갖았었으나 역시 시골 한량 몇 사람만이 응시하여 새나 라의 위신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졌다. 전날 문과에는 성균관에서 遺臣들이 압력에 못 이겨 최후의 행동을 취하였고 이 날 장안의 무 변들도 不期之會(불기지회)로 송경東郊(동교)에 하나씩 둘씩 모여 四十八人이 집단이 된 때 역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사상으로 단결이 되어 寶鳳山(보봉산)밑으로 모여 산중에 한 부락을 세웠다. 그래서 만수산 밑을 두문동 이라 하여 서두문동(西杜門洞)에는 전조문관들 七十二人이 모여 부락을 형성하였고 보통산밑에 새 부락을 東杜門洞(동두문동) 이라 하여 東杜門洞에는 전조무변 四十八人들이 一시적이나마 은둔한 곳으로 후세에 일컬었다. 그 때는 七月 염천이 되어 산중에 당분간 거처하며 모든 살림을 준비할 여유도 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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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등극하기 몇 일전에 정도전은 왕대비를 대하여
≪지금왕이 昏暗(혼암)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지킬 수 없고 해이해진 백성을 안정식 힐수 없으니 폐위를 시키오≫하여 군왕에 대한 존엄한 말까지 아니 쓰고 威脅的言動(위협적언동)을 자행하여 남은 은 때를 같이하여 패 위하자는 대비전교를 거짓 만들어 공양왕을 뜰 아래로 끄러 내리는 무엄(無嚴)한 행동을 하며 한편으로는 거짓 전지를 읽어 들리며 玉璽(옥새)를 빼앗으려 하니 공양왕은 울며
「우리 왕씨 옥새를 어찌 참아 타인에게 빼 아끼겠는가」하며 申浩를 돌아보고
「우리 왕씨 국운이 오늘 까진가 보다 이 옥새를 참아 빼 아낌을 볼 수 없으니 경이 임의로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신호는 울며
전하께옵서 형세가 절박 하시와 소신으로 典璽官(전새관=옥새를 맡은 관리)을 삼으시니 소신의 머리를 줄지언정 옥새는 남에게 빼 아끼지 않으오리다]하고 옥새를 움켜쥐고 대성 통곡하며 한사하고 놓지 않았다. 정도전등은 억지로 빼앗으려 하니 신호는 옥새를 섬돌에 동댕이처서 한 모퉁이가 부서졌다. 신호는 당장에 처 참되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禹成範(우성범) 姜涯季(강애계) 두 사람은 부마(附馬=왕의사위)로서 정도전과 남은 의 무엄한 언동을 힐난하다가 즉석에서 참수되고 공양왕과 왕비와 세자는 원주(原州)로 추방하였다가 杆城(간성)으로 옮기어 공양 군으로 降封(강봉) 하고 이성계는 왕위에 올 났다. 이 태조 三年 갑술(甲戌)에 한양으로 천도하고 이 천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송경과 한양사이 임진(臨陣)에서 과거를 보았으나 한 사람도 응시자가 없었다. 그래서 이 태조는 분노하여 송도인 에게는 과거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刊城(간성)에 추방했던 고려 왕족 중 공양왕과 아들 두 사람을 三陟(삼척)으로 보내서 목을 매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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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는 망하고 새나라 조선이 창건하니 김자수등 문관칠십이인이 두문동으로 드러갔으나 신 왕조의 압력이 너무 심하여 뒤 기회도 볼 수 없었으므로 혹은 먼 시골로 혹은 선산(先山)밑으로 혹은 고향으로 뒤 기약을 약속하고 뿔뿔이 헤어지니 상촌 김자수도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가서 숨어 있으면서 도덕과 문장을 더욱 연마하여 뒷일을 계획하던 중 공양왕이 무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 사배 하고 통곡 한 뒤에 매일 술맛이고 시를 지어 슬픈은 사정을 표시하고 지냈다.
이 태조는 수창궁에서 등극한 후 조회는 수창궁에서 받고 침전은 자기 사저이던 추동궁을
敬德宮(경덕궁)으로 이름을 고치고 송경의 고려수도에 눌러 앉아 나라를 다스리려고
三年이나 지내다가 할 수 없이 한양으로 천도한 것이다. 그중 대한 원인은 송경 백성이 전체로 신 왕조를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밤이면 부녀자 여러 천명이 경덕궁 근처에 와서 돌을 던젔었다. 그녀 자들은 간단히 짧은 치마를 입고 거기 잔돌을 담아 가지고 와서 궁안으로 팔매를 치고 가는 것이다. 남자도 아니오 여자 수천인 이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날마다 돌을 팔매 치니 누구인지 분간치 못하여 체포감금 할 수도 없고 三年을 계속하여 돌팔매질을 하는데 일국(一國)의 군권을 가진 임금도 어찌 할 수 없이 필경 천도(遷都)하였고 그래서 서울로 천도한 뒤에 서울 부녀자는 긴치마를 입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신들은 고려를 광복하려고 암암리에 활동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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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본 새 왕조에서는 달래고 위협하여 박멸하려 하였다. 이태조제三年에는 송도에
한가지 놀라운 일이 있었다. 송경 골목마다 방이 붙었다. 그 방에는
「국권이 개혁되어 임금의 개통이 바뀌는 때는 전 왕족을 잔멸시키는 것이 전례다.
그러나 우리성상께 옵서는 특히 寬厚하사 직계 왕자 왕손만 처치하였고 너희들 왕씨일 족은
지난 三年동안 무사히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버려 두는 것도 법률을 흐리는 일이다. 그래서 王氏一族을 모두 가까운 바다섬 紫燕島(자연도)로 당분간 정배를 보낸다. 이렇게 관대하신 처분에 너희들은 감은 할 것이다. 그 뿐 아니고 一시 유배를 명하나 미구에 다시 너희를 부르셔서 너희를 번성케 하실 계획이다.
이런 성의를 너희는 전조에서 못한 것이다. 모일까지 너희는 준비하고 영정 포에 집합하라.
거기는 너희를 호송할 배 數十(수십)척이 등대할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 거륵 하신 뜻을 오해하는 자가 있어서 관후하신 처분을 모면하려고
얕은꾀를 쓰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관후하신 성상께서도 이런 무리는 용서
아니하실 것이다. 그 날 이후에 이 강토 안에서 발견되는 왕씨는 다시 밝은 세상을 구경 할 수 없으리라.」
공양王과 직계 왕손을 죽여 버린 것을 본 왕씨의 일족들은 무슨 박해가 있을 가 두려워하여
각지로 도망하여 숨어 지내던 그들은 죽이지 않고 귀양만 보내는 그 寬厚한 처분을 들어서
의아하게 여겼다. 그 동안 高麗王의 부자를 죽인 일이라던 지 정 포은을 타살한 후에 악한행동이 많았다. 종내 숨어 지내다가 잡히면 어찌 하나하고 차라리 바다 섬으로 귀양 가는 것을 요행으로 생각한 왕씨 들은 준비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지정한날 영정포로 구름같이 王氏들이 모여들었다. 수십(數十)척의 배는 대만원
으로 떠났다. 비록 귀양 가는 길이나 미구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믿고 전별하러 왔던 친지들이나 떠나는 王氏들이 좋은 얼굴로 작별하였다. 어느덧 왕씨를 실은 선 척은 깊은 바다로 떠나갔다. 한배에서 군호가 나더니 배 밑에는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미리 뚫고 막았던 구멍을 일시(一時)에 터놓았다. 사공들은 헤염잘치는 자들로 뽑혔으므로 그들은 일제히 바다로 먼저 들어갔다. 그 동안 왕씨를 만재 한 수십(數十)척의 선단(船團)은 바다 밑으로 갈아 않고 말았다. 아무 죄도 없는 남녀 노 유는 바다의 원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왕씨를 발견하는 대로 죽이므로 남아있던 왕씨는 변성(變姓)하여 마(馬)씨 전(全)씨 등 한문글자에 왕(王)자가 포함된 성을 택하게 되었다.
道學者 桑村 先生은 安東鄕저에서 이런 끔찍스런 소문을 듣고 더욱 문을 굳게 닫고 시와 술로 소견하고 지내다. 그런데 포은은 壬申年 四月에 善竹橋上에서 저격을 당하여 별세하고
海豊郡(해풍군)에 초장을 지냈으나 태조의 第五子 방원대군이 태종으로 등극한지 제六年되는 丙戌(병술) 三月에 龍仁郡瀑布洞(용인군폭포동)에 이장하였다. 이 사실을 탐지한 桑村은 존경하던 포은이 묘소에 한 번 참배하고 갔던 일이 있었다. 그 동안 태종은 개국공신이던 정도전과 남은 을 반역으로 모라 처치하고 인재를 등용 하려하여 유림에 덕망가인 桑村 金自粹에게 判江陵大都護府事(판강능대도호부사)를 임명하였다. 상촌은 물론 받지 않었다. 그러나 이름만은 신임명부에 올라 있었다. 그 후에 태종은 다시 憲長(헌장)이란 직위로 상촌을 불렀으나 역시 고사하고 응하지 아니하였다.
태종은 十三年癸巳(계사)에 (西紀一四一三年) 다시 준엄한 전교를 나려 형조판서(刑曹判書)
로 부임하라 하고 만일 불응하는 때는 違旨罪(위지죄)로 전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방원대군이 어떤 인물인줄 잘 알고 있던 상촌은 탄식하여
《인신(人臣)이 되어 나라가 망하면 따라서 몸이 없어지는 것이 의로운 일이다.
나는 평생에 동정선생이 가르친 바 충효로서 인간의 생활 표본으로 정하고 스스로 행하여
왔다. 이제 만약 실신하여 새 왕조에 벼슬하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군부(君父)를
만날 것이냐 나는 죽을 때가 왔다.》하고 사당에 하직한 뒤에 독약을 준비할 뿐 아니라
상구(喪具)까지 마련하여 뒤에 갖이고 아들 근(根)을 수행케 하여 광주 秋嶺(추령)까지 올랐다. 추령고개만 넘으면 곧 한강(漢江) 유역이자 서울이 되는 데니 송파 뒤 남한산성 산맥으로 옛날에는 문경(聞慶) 새재(鳥嶺=조령)를 넘어 서울에 도달하던 대로이다.
거기는 즉 광주(廣州)땅이나 산하나 격하면 龍仁(용인) 땅으로 포은 묘소가 산 넘어 있는
고개이다. 바로 七年前에 포은 묘소를 이 곳으로 이장한 곳이다. 임신(壬申)오월(五月)에
김자수는 고려의 형조상서에 임명되었다. 국권이 바뀐 뒤에 그대로 송경에 머물러 있었다.
그 해 七月十六日에 이 태조가 등극하였으므로 그는 나라가 바뀌는 그 때 송경에 있었기 때문에 두문동 七十二人중에 함류 되었던 것이다. 태종은 하필 형조판서로 불렀는가 하면 전조에 임명된 똑같은 직임을 이조에서 못할 것인가 하고 시험한 것이다.
상촌 일행은 秋嶺(추령) 마루턱까지 올라왔다. 거기서는 서울 뒤에 있는 북한산성이 보였고
추령은 역시 남한산성 줄기에 있어 이 고개만 넘어가면 곧 漢江流域(한강유역)이니
서울에 거의 도달한 셈이다. 거기서 상촌은 수행하던 아들 根(근)을 돌아보며
≪내가 평생에 圃隱(포은)선생을 따라가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이근 처 즉 저 서쪽 산봉우리만 넘으면 圃隱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니 이 땅은 내가 죽을 장소이다. 여자로도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데 인신(人臣)으로서 성(姓)이 다른 임금을 어찌 섬길 수 있느냐. 이미 결정되었다. 너는 내가 이르는 대로 이근 망에 나를 장사하고 아예 비석을 세우지 마라. 내가 평생에 하고자 하던 일을 못하고 원한을 품고 죽는 이 몸을 초목과 같이 썩게 해라. 너는 내자 식이니 아비 유언을 꼭 지켜라.≫하는 유언을 남기고 즉석에서 絶命詞(절명사)를 지어놓고 몸에 품고 왔던 독약을 마시고 자진하였다. 때는 太宗十三年(태종십삼년) 계사(癸巳)(西紀一四一三年) 十一月 丁丑朔(정축삭)十四日 경인(庚寅)이고 향년 六十三세 이다. 절 명사는 평생 충효로 뜻하였던 것을 이 세상에 누가 알까 보냐 한 번 죽으매 한 될 것 없음이여 지하에 가면 내 뜻을 알이 있으리
두문동 모인 칠십이인은 유교사상에 저은 유능한 정치가 학자들이다.
그들은 신 왕에는 정치가가 없으니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심할 것이다..
우리 중에서 한 사람쯤 신 왕조에 벼슬하여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해야겠다
는 의논이 되어 72인 중에서 방촌선생을, 추천하였다. 위촉을 받고 이조에
벼슬한 尨村 黃喜(방촌 황희)정승은 상촌이 자결한데 대하여 挽詞(만사)를
이렇게 지었다. 충성되고 또 효도하기 어려운 것이오 효성 있고 또 충성되기
어려운 일이라 이 두 가지를 다 하였으니 죽기가 무엇이 어려울 바이겠느냐
(原文)
有忠有孝難(유충유효난) 충신도 효자 되긴 어렵고
二者旣云得(이자기운득) 효자도 충신 되긴 어려운데
有孝有忠難(유효유충난) 그 둘을 다 이루 었을 뿐 아니라
황又殺身難(황우살신난) 가장 어려운 내몸까지 죽인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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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난리를 치른 뒤 자손이 보관하였던 가승(家乘)
이 유실되어 상촌의 자결한 때가 어느 해 어느 날이었던지 생신이 언제 던지
아무 기록이 남아오지 못하였다. 그런데 李朝實錄(이조실록)에 태종13년 11월14일
자결한 기록이 나타났다.
거기는 前判江陵大道護府事金自粹卒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政院日記(정원일기)에 그런 직함이 게재되었던 것이다.
형조판서는 아직 서임(敍任)이 아니 되었고 判江陵大道護府事라는 벼슬은 본인이 사퇴여부
없이 조정에서는 서 임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음독 자결한 상촌 유해는 추령상 多沙洞(다사동) 酉坐(유좌) 巽向(손향)
으로 안장하였다.
桑村은 일찍이 權氏 婦人과 결혼하여 아들하나 딸 하나를 출생하였으니 아들 근(根)은
高麗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平壤少尹(평양소윤)에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이씨 왕조를 변혁됨으로 고향에 돌아가서 부모를 받들었다.
그는 노년에 병사하니 이조(李朝)에서 특히 형조판서의 중직을 내렸고 사위는 고려 때 中郞장이란 벼슬을 역임한 權厚(권후)이었으며 외아들 근(根)의 소생손자 四兄弟를 두었으니 모두 이조(李朝)에 벼슬하였다. 장손 영년(永年)은 江陵判官(강릉판관)을 역임하였고 차손 永源은 생전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별세 후 그의 손자 양필(良弼)의 공으로 戶曹參議(호조참의)란 중직이 내렸으며 평시에 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이 높았다. 3손 永전 은 사승을 역임하였으나 항상 그 조부와 부친이 이조(李朝)에 불복한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꺼림 직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산수를 쫓아 유랑생활을 하다가 별세 후 손자 양필의 공으로
李朝參判(이조참판)의 增職이 내렸으며 4손 永濡(영유)는 문장도덕과 정치적 식견이
출중하여 관직이 높았고 別世後에 恭平公(공평공)이란 시호(詩號)까지 내렸다.
(자손목록에특기)
추령 다사동 桑村 묘소가 있는 넓은 산 판은 이조(李朝)에서 사패지(賜牌地)로 내려와서 가족묘지가 되었다. 桑村 묘소 바로 뒤에 부인안동권씨의 묘소 또 그 뒤에는
자부(子婦) 牛峰李氏(우봉이씨)를 안장하였으므로 한 번 얼른 보기에는 어째서 도장(倒葬)이
되었던가 하는 감이 없지 아니 하나 桑村 묘소을 따라 가족묘지를 구성하는데 지형이
그렇게 밖에 안된 것이다.
그런데 상촌 아들 근(根)의 묘소는 건너편 산턱에 동향 하였으니 父子分(부자분)묘소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이게 되었다.
桑村先生의 부자분 묘소 一景은 광활한데 그 국내(局內)에는 상촌의 제4손
永儒(영유) 또 그의 아들 5형제 중에서 네 분의 묘소를 합하여 直系 4대묘지(四代墓地)를 이루었고 그 밖에 그 자손의 여러 묘소는 이 賜牌地域(사패지역)안에 여기저기 산재(散在)하였다. 신라왕통을 계승한 고려왕조는 그 사상계통까지 받아 들었다. 그 때 일반을 지도한
사상은 불교를 중심으로 일반풍속은 물론 정치제도에도 불교사상이 침투하였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때에 孤雲 崔致遠(고운 최치원)이 유학(儒學)을 처음으로
수입하였으나 발달이 되지 못하고 遲遲不進(지지부진)하다가 고려 중엽(中葉)이후
중국에 왕 내 하는 학자가 많이 있어 유교(儒敎)사상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종래 불교사상의 세력을 항거하여왔다. 말엽(末葉)에는 圃隱(포은) 鄭夢周(정몽주) 牧隱(목은) 李穡(이색)
冶隱(야은) 吉再(길재)의 삼은 선생들이 유교사상을 지도하여 백성의 풍속과 정치제도에
유교의 진리를 침투시켰다. 충효(忠孝)는 인간의 생활 근본으로 고취하다가 나라가
바뀌었다. 이조(李朝)가 창건(創建)되면서 유교사상이 확립되었으니 그는 당시 위정자들은
불교사상을 적극배척하고 유교사상하에 백성을 지도할 목적으로 유교사상에 관한
서적을 많이 발간하였다. 그 대표적 서적은 三綱行實錄(삼강행실록)이니
이 책의 내용에는 공자(孔子)의 부르짖은 충효(忠孝)를 모토로 人倫大道(인륜대도)가
되는 五倫(오륜)을 밝인 것이 첫머리에 상촌이 모친 생존 시에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던 사실과 병환 중 시탕 하던 일과 별세하신 후 초종범절과 묘소에 초막을 세우고 시묘하던
광경과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대신하니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유교도덕의 철칙에 의하여
이씨 조선에 불복하고 廣州 추령서 자결하던 광경 등을 삽화(揷花)로 표시하고 한문(漢文)이던 원문을 한글로 자세히 기록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출판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大衆讀物(대중독물)로 사회 풍화의 큰 역할을 하게 편집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아직 문화의 혜택을 입지 못한 僻山窮村(벽산궁촌)에 거주하는 사람들 까지도 유교사상을 침투시킬 유일한 선전 독물인 것이다. 이런 啓蒙(계몽) 정책은 간이(簡易)한 한글의 혜택으로 전국에 널리 전과된 결과를 수획하였다. 그래서 민심은 순량하여젔고 관리들은 분주한 일이 없이 국태민안(國泰民安)한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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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金氏(경주김씨)는 원래번열하여 浩瀚(호한)하여 各派別(각파별) 아니고는 족보를 수집하기도 거의 불가능한데 상촌의 가승(家乘)까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사이에 태워 버리고 또 상촌의 유훈(遺訓)에 의하여 비석도 세우지 못한 때문에 상촌의 행적은커녕 그의 생년월일도 알 수 없는가 하면 자결한 날자 까지 나타나지 않었였다. 그러한 중 자손들로는 향상 마음에 미안쩍게 생각하던 차 상촌의 8대손(代孫) 弘郁(홍욱)은 비로소 사촌선생의 행장을 저술하여 비석을 새기게 되었다.
李朝孝宗(이조효종) 二年辛卯(西紀1651年)에 8대손(代孫) 弘郁(홍욱)은 忠淸道觀察使(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하루 자기 8代祖(대조) 상촌이 고려 때 똑같은 직임으로 재임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상촌 재임시에 정사를 올바르게 한 것은 물론이고 당시 부패하여 가던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한낮 도백(道伯)으로 국왕에게 자주 상소하여 시국을 논의하였으나 자기 주장이 관철되지 아니함을 보고 관직을 사퇴한 후 향리로 돌아갔던 사적과 또는 그가 충과 효를 겸하여 일세를 격동케 하였던 사실을 다시 추모(追慕)하게 되었고 자기 부친 단구자공이 安奇察防(안기찰방)으로 부임하여 상촌의 효자비(孝子碑)를 봉심(奉審)하고 처음으로 비각(碑閣)을 건축한 사실도 다시 추모하게 되었다. 홍욱은 감개 무량하여 그 선조의 업적을 널리 알려 자손만대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인간의 근본 원칙인 충과 효로써 나라를 도읍고 집안을 다스리게 할 목적으로 자기 선조의 일뿐만 아니고 나라일이라 생각하고 공사(公私)의 겨를을 틈타서 高麗史(고려사) 各書院通文(각서원통문) 海東野乘(해동야승) 管窺錄(관규록) 牧隱集(목은집) 三綱行實錄(삼강행실록) 李朝廷院日記(이조정원일기)등 여러 문헌(文獻)을 수집(蒐集) 참고하여 行狀을 저술(著述)하였고 당시 문장으로 이름 나있던
大提學蔡祐後((대제학채우후)에게 청촉 하여 비로서 神道碑銘(신도비명)을 엮어서 효종(孝宗)五年 갑오(甲午)(西紀1654년)에 홍욱이 무고히 장폐(杖斃)당하던 두 달 전인 오월에 이 비석을 완성하였으니 하마터면 이 비석을 완성하지 못하였을 지도 몰랐었다.
그러나 상촌은 음독자진하기 직전에 엄격한 유훈이 있어 비석수립(竪立)을 금하였으므로
지금 와서 감히 이 비석을 세울 수는 없으나 후일 참고로 묘소 언덕아래 조금 평평한 장소에 이를 묻었던 거이다. 이조국권이 상실된 지 17년이 되던 해 병인(丙寅) 즉 서기1926년 그 자손 들은 회의를 거처서 흙 속에 파 묻었던 신도비를 캐어보기로 하였다.
수백 년 땅속에 있던 비서글자가 마멸되어 그 字體가 확연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석의 품질이 견고하지 못해서 다소酸化(산화) 작용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자손들은 다시 종중회를 거듭하고 비문 그대로 다른 비석에 조각하여 그 옆에 신도비를 세우니 때는 서기1929년 기사(己巳)이다.
그리고 전일 신도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매치 하였다.
이것은 유훈을 거역하려는 의미는 물론 아니고 때가 바뀐 지 오랬으며 그 후손은 번창함을 따러 선조(先祖)의 행장을 사모하는 성심으로 五百年을 훨씬 지난 오늘날 조상을 追慘(추모) 하는 동시에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는데 그 입석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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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善之家(척선지가)에 必有餘慶(필유여경)이란 명구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효자(孝子) 집에서 자손이 번창한다는 말이 있다. 孝子 金自粹(효자 김자수)의 후손은 실로 그 수효만 번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문화를 연구발전 시키는데 큰 役割(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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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상촌의 第四孫(제사손) 金永濡(김영유)의 자는 澤夫(택부)요 별호는 退齋(퇴재)이다.
나라의 왕통이 고려에서 이조(李朝)로 넘어가는 동안 그 조부 상촌은 순절(殉節)하였고 그 부친도 역시 이조 벼슬을 거부함으로 가게생활에도 감내하기 곤란한 풍파도 일어났었다. 그러나 상촌의 손자시대에 와서는 사정이 달랐다. 영유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출중하였고 장성하여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吏曹參議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뒤에, 외직으로 나가서 충청
전라, 황해, 경상사도 감사(監司)와 송도유수(開城留守)를 지냈으며 그 치적이 淸廉潔白(청염결백)하였으며 成宗二年(성종이년)(西紀1471년) 佐理原從一等功(좌리원종일등공)에 기록되어
자헌대부중추부사(自憲大夫中樞府事)에 서임(敍任)되었다.
영유는 천성이 고결하였고 경학(經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일찍이 중국에 사절로 파견되어 당시 중국명사와 교유하여 그의 문장(文章)이 중국 천지에 떨쳤고 그의 저술한 문헌
(著述文獻)은 중국에 유명한 문장들이 收錄刊行(수록간행)된 것이 많이 퍼졌다. 그가 경상감사로 재임 시에 經典治民施政之要(경전치민시정지요)라는 책을 저술 간행하여 임금께 바첬다. 이조국초에 모든 정치제도가 불 완성되었으므로 위정자(爲政者)는 이런 종류의 문헌을 요청하던 시절이다. 국왕도 이 책을 보고 기뻐하여 조정에서 그대로 실행하여 정치와 경제가 그 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문화는 발전하여 풍속이 순후하여젔다. 그야말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성시를 이루었다. 퇴재선생은 연산군(燕山君) 5년(西紀1499년)정묘(丁卯)에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생전업적을 표창하여 恭平(공평)이란 시호(詩號)를 내렸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十歲 지나서 부터 무예(武藝)의 재주가 있어 말 타고 활쏘며 병서를 읽어 심신을 단련하던 증손(曾孫) 임(任)은 무과에 장원하여 중정반정에 공이 있어 공신의 영화를 입었으며 嘉善(가선)에 승진되어 한성우윤에 봉직하였고 계성군(鷄城君)에 봉작(封爵)되였다. 별세 후 형조판서(刑曹判書)의 증직을 받었다. 치민 치정에 업적이 훌융하여 사림들은 그의 영정(影幀)을 坡州郡(파 주군)에 봉안하고 춘추 향사하였으며 그 후에 십오대손 東孝(동효)가 그 영정을 사본하여 부여홍산면 (現忠南扶餘郡鴻山面)에 보안하였다.계성군은 세종(世宗)삼십 년 무진(戊辰)에 탄생하여(西紀1448년) 중종구년 갑술(甲戌) (西紀1514年)에 별세하니 향년이六十七歲이다.
상촌의 현손이요 공평공의 손자인 世弼(세필)은 李朝儒林(이조유림)의 碩學巨儒(석학거유)로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선비였다. 세필은 성종(成宗) 21년 경술(庚戌)에 문과일등으로 장원하여 한림을 거처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연산군(燕山君)의 횡폭을 바루고치려 하다가 십 년 갑자에 巨濟로 귀양 갔었다. 연산군의 학정에 견디다 못하여 국내 여진사람들의 응원으로 중종 (中宗)이 반정(反正)하여 연산군 당시에 귀양 갔던 어진 신하들을 풀어 복직시키니 세필도 응교(應敎)로 부름을 받았다. 세필은 당시 유명한 趙光祖(조광조)와 뜻이 맞어 국정(國政)을 바로잡는데 활동이 맹렬하였다.
조광조들은 국정을 바로 잡는 데는 「반정 때 아무 공훈(功勳)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공신(功臣)을 봉한 것은 국가장래를 위하여 폐단이 많을 것을 염려하여 不正功臣(부정공신)의 공훈(功勳)을 깎아서 정리(整理)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반정공신 朴元宗(박원종)등의 위협에 王后愼氏(왕후신씨)까지 폐위한 懦弱(나약)한 임금이었다. 당시 재상중 악당 沈貞(심정)과 남곤 등은 無名功臣(무명공신들의 공훈을 깎고 바른 정치를 하면 자기들의 지위가 무너질 가 두려워하여 조광조 김세필등 靑年志士(청년지사)들을 몰아내 쫓고저 하였으나 조정에 가득한 청년지사들을 쫓을 길이 없어 가진 모함으로 조광조는 역적(逆賊)이라 모라서 귀양 보내게 하였다가 결국 그를 죽여 버렸다. 당시 세필은 性理大全(성리대전)연구차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가도라 오는 중도에서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탄식함을 마지 아니 하였다. 조정에 도라 온 세필은 조광조 등의 억울함을 雪원시키고자 결심하고 경원〈(경전=임금과 한자리에 앉아 정치를 강논하는자리)>
에 나아가서 論語(논어)를 강론하다가 過勿憚改(과물탄개)(허물을 고치되 꺼리기진 말라)란 구절에 들어가서 (조광조는 전하를 받들어 요순(堯舜)의 밝은 정치를 하려 하므로 전하(殿下)의 총애를 극진히 받었고 또 신망이 두터웠으므로 부패한 제도를 고치고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기에 너무 급속히 서두른 것은 잠시 실수는 있을지언정 그 마음을 어찌 죄라 하겠나이까 전하께 옵서는 그것을 큰 죄라 하여 귀양 보내고 또는 죽여 버려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 하시니 이것은 조광조의 정책을 인용하신 까닭으로 조광조는 급히 서두른 것이오니 이것은 전하의 허물인가 아옵고 옳은 일을 하는 거시이 죄가 된다면 이 나라가 장차 어찌 되오리까 조광조는 급히 서두른 것이 잘못인 것을 깨닫고 정책을 고쳐 완완이 하고저 하였으니 이것이 孔夫子(공부자)가 말씀한 과물탄개(過勿憚改)오니 君子의 도리가 아니오리까 전하 옵께 옵소서는 군자를 버리옵고 소인들을 밑으시오니 장내가 근심되옵나이다》 하고 조광조의 원통함을 풀고 또 (그 무리들을 적소로부터 풀어 등용하여 원한이 없이 나라일 을 잘하도록 하시옵 소서) 눈물을 머금고 우름 섞인 말씀으로 되풀이하였으니 언사가 추상같았다. 남곤 은 당시 좌의정으로 세필의 강론을 듣고 그 당파인 대사헌(大司憲) 홍숙과 大司諫(대사간) 趙邦彦(조방언)들과 항의하여 (세필이 조광조를 위하여 한말은 대역부도 한말 이옵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 옵고 또는 조광조는 이미 결정된 일을 개론 함은 저의들이 역모에 유리하게 하고저하는 바오니 김세필의 무리들을 당장 때려 죽여야 한다)고 임금께 아뢰였다. 중종은 남곤 의 말에 의지하여 궁문하라 하였다. 궁중에서는 때려 죽일 려고 형구(形具)를 차리는 중 별안간 중종은 김세필은 내가 맡어 처리할 일이라 하고 (사형은 말고 장형(杖刑)하여 陰竹(음죽)으로 귀향 보내라)고 다시 명령이 나렸다. 세필을 비롯하여 어진 선비 수백 명이 사형을 면하고 귀양만 갔었다. 남곤 은 악당들은 황황 망조하나 임금의 특명이니 하는 수없이 실패됨을 탄식할 뿐이었다. 이때가 중종 십사년 기묘(己卯)(西紀1519年)이니 이것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하였다. 중종 십칠년 임오(壬午)에 중종은 경연에서 논어를 강론하던 중 過勿憚改라는 구절에 들어가니 사년전에 김세필의 강론이 다시 생각나서 지난 일을 떠들어 보니 어제한 일과같이 김세필의 언사(言辭)가 정정당당하여 해와 달을 뚫고 금석(金石)을 마수는 듯하여 후회하고 즉시 특명을 나려 세필의 귀양을 풀고 중추부사를 제수 하였으나 사퇴하고 받지 아니하여 충주(忠州)로 낙향하였다. 그 이유로는 동지는 화를 입어 이미 죽은 이도 많고 또 귀양살이 중에 신음하는 이가 많은 반면 조정에는 아직도 악당들이 충만하였으니 단독 일신으로 도저히 올바른 정치를 실행할 자신이 없어서이다. 충주서 후생들을 모으고 문장도덕 또는 정치이념(政治理念)을 지도훈육한 결과 궁문하에서 인재가 배출하였다.
세필의호는 십청헌(十淸軒)이었고 뒤에 知非翁(지비옹)이라고도 하였다. 십청헌의 문하에 수백명 제자가 모여들 때에 원방(遠方)에서 말을 타고 왔으나 뜰이 좁은 탓으로 동리 앞에 기다란 논둑에 말을매어 두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동리 이름을 말마리(말馬里)라고
불러왔다. 그의문장과 덕행은 당시국내는 물론중국(中國)까지 이름이 높았으며 풀깍고 소를 치는 아동 들까지도 서로 잘못되는 일이 생기는 일이 생기는 때엔」충주 말머리 十淸軒 선생한데 가서 행실을 배워라」는 말을 항다반 하게끔 되었다. 임금이나 조정서도 고관들이 난처한 사건이 발생하면 十淸軒에게 자문하여 결정하였다. 中宗(중종)당시 사화(士禍)가 여러 번 생겨 한꺼번에 數百名식 회생되었으나 오직 十淸軒만이 구사일생 격으로 생존하여 그 지도 하에 보필(輔弼)의 인물이 배출케 되었으니 이는 국가의 경사라는 구절이 중종(中宗)27년 6월 政院日記(정원일기)에 기록되었다. 그는 성종(成宗) 4년 계사(癸巳)에 출생하여 중종 28년에 별세하니 六十一歲다. 일반(一般)은 이 나라의 스승 을 잃었다고 부르짖었다. 당시 교통이 불편하여 十淸軒의 부고를 1年 혹은 2年後에 듣고 비로소 애통하는 지방민이 많았다. 영조(英祖)23년 丁卯七月(西紀1747년에 정부공론에 의하여 임금은 그 업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 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五위도총부도총관 세자죄빈객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知春秋官成均館事 五衛都摠管 世子左賓客)이라 증직을 나리고 文簡 (문간)이란 諡號(시호)를 내렸다. 전국유림의 발론으로 충주 八봉서원(忠州八峰書院)에 위패(位牌)를 봉안하였고 그 후 여러 서원에 追配(추배)봉안도 되었다. 유고가 간행 되여 세상에 널리 퍼졌으니 지금도 그 덕행을 추모하여 그 유고를 읽는 사람이 많이 있다. 十淸軒은 재덕(才德)이 겸비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벼슬할 때에는 임금을 忠成껏 받들고 백성들을 자식같이 사랑하였으며 후배들을 지도할 때에는 禮儀廉恥(예의염치)에 어글어 짐이 없도록 하였고 집에 있을 때에는 경조부박 하고 사치스러운 일을 아니하고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를 섬기며 형을 공경하고 자손들을 예로써 가르치고 선조(先祖)를 정성껏 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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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淸軒의 셋째 아들이오 상촌의 오 대손인 石諸(저)는 중종 이년 기사(己巳)(西紀1509년)에 탄생하여 삼십일세 때에 別試文科(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부친이 다못한 바른 정치를 해 보려고 악당들을 물리치고 어진 정치를 하여 부친의 숙원(宿願)을 풀어 태평세월이 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린 명종(明宗)이 임금이 되니 그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攝政)했다. 호사다마 격으로 정부에는 무도한 두 세도관리가 있으니 하나는 섭정 문정왕후의 친정 남자 아우 尹元衡(윤원형)이오 다른 하나는 윤원형의 아성(牙城)인 李기와 간사하기로 유명한 세 간신(三奸)이 있으니 鄭順鵬(정순봉) 林百齡(임백령) 鄭彦각 등이 자기세력을 부식하여 가진 영화(榮華)를 독차지하려고 어진 관리들을 모함하여 모라 내 고저 하였으나 일이 잘되지 아니하여 결국은 역적으로 모라 (어린 임금 명종을 모라 내고 명종의 서형(庶兄)되는 봉성군(鳳城君)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는다.)고 윤원형이 자기의 아성인 이기를 시켜 섭정 문정왕후가 정사(政事)하는 忠順堂(충순당)에 밀고(密告)하였다. 문정왕후는 자기 아우의 말을 믿을 뿐 아니라 만일 자기소생인 명종을 모라 내고 봉성군을 임금으로 모신다면 자기 운명은 어찌 될 가하고 염려하여 봉성군은 물 논이고 당시 명재상(名宰相) 柳灌(유관)은 역적으로 모라 죽이고 이조판서 柳仁淑(류인숙)은 목을 베어 삼일동안 끌고 다녔고 그의 아들까지 목매어 죽이고 그 밖에도 여러 중신(諸重臣)들을 사약하여 죽이고
또는 귀양보내어 적소(謫所)에서 도라오지 못하고 죽게한 백여 명이었다. 그중 한분인 石諸(저)도 指平(지평)으로 있을 때 상촌이 사시던 안동으로 귀양 보냈다가 이듬해 병오(丙午)에 三水(삼수)로 옮겼었고 또 그 이듬해 명종(明宗)정미(丁未)(西紀1547년)三月에 사약하고 가산(家産)은 몰수하였으며 그 아내 高靈申氏(고령신씨)는 관비(官婢)를 삼았다. 石諸(저)는 한낫 아들도 없이 三十九歲(삼십구세)를 인생일기로 마쳤으니 충용 강직한 신하가 원통히 죽은 이 얼마나 되었으랴! 石諸(저)가 안동적소에서 삼수로 옴길 때 어머니 固城李氏(고성이씨)옷을 잡고 땅에 업어져 통곡하니 금오랑도 얼굴을 돌려 눈물을 씻었다. 저가 사약되었다는 비보를 들은 그 어머니 이씨는 남편인 十淸軒이 매를 맞어 피에 묻은 옷을 보며 「네 아버지는 이렇게 맞었으나 어진 임금이 게시어 살았는데 너는 임금에게 무슨 최를 지었느냐 」고 통곡하였다. 중씨(仲氏) 구(石瞿)에게 시를 지어 부탁하기를 「이재가면 살아올 기약이 막연하니 둘째 아들 重慶(중경)이 성년되었으니 뒤를이어 달나고 하였다. 宣祖朝(선조조)때에 栗谷 李珥(율곡 이이)의 설원상소로 설 원되고 복관(復官)되었다. 그러나 당시 저는 역적으로 몰려 죽고 그 아내까지 관비를 삼었는데 만일 아들이 있었다면 생명이 온전치 못하였을 것은 말할 것도 아니하였으니 중씨에게 부탁한 것은 외면으로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은 뒤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설원된 뒤에 南九萬(남구만)의 상소로 몇대 후 중경을 뒤를 잇도록 예서를 내렸다. 그 후 儒生들 백 여명의 연명상소로 증직(贈職) 贈諡(증시)의 윤허가 내렸으니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 경연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 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좌빈객 (資憲大夫吏曹判書 兼知 經筵知衛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春秋館事 五衛都總管 世子左貧客)이란 증직과 忠愍(충민)이란시호까지 내렸다. 그리고 知川書院(지천서원)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상촌의 오대손 경(涇)은 재주 있어 한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를 해득하여 일 향의 칭찬을 받어 장성하매 문장과 도덕이 일세를 진동하였다. 정부에서는 명성을 듣고 여러 번 불렀고 또 도내 유림들도 정부에 여러 번 추천하였으나 경은 본래 성품이 온순하고 강직하여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뜻 두지 아니하므로 나가지 아니하고 글일(독서(讀書))기로 일생을 보냈으므로 세상에서는 처사(處士)라 하였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일 향이 金處士(김처사)의 덕행을 사모하는 사람이 많다 한다. 경의 현손(玄孫) 은(木慇)은 호를 日省齋(일성재)라하고 그아우 추(樞)는 호를晦廬(회려)라 하였다. 형과 아우 두 사람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를 정성껏 받들었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하므로 입에 맞는 음식으로 입맛을 도 꿀 수 없어 항상 한탄하며 근처에서는 일가친척이나 지구간의 집에서 혼인이나 환갑잔치가 있어 청하여 가면 자기 목 어치의 음식을 싸 가지고 와서 부모에게 밭이고 위로하니 일 향이 아니라 무슨 음식이던지 별다른 음식이 있으면 의레것 한 상씩 마련하여 은 형제에게 보내어 부모에게 밭이도록 하고 형제는 따로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은 형제는 여름철에는 개천에서 미꾸리 송사리 새우등을 잡아 반찬하고 남은 것은 염간(鹽干)하여 말려서 겨울 반찬을 하니 사시를 물론하고 이러한 반찬은 떨어지는 때가 없었다. 형제 번 가러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온화한 말씀과 기쁜 낯으로 부모를 대하여 잠시라도 불편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 박씨가 병환이 위독하여 형제는 동동촉촉하여 약을 구하였으나 약석의 효력이 조금도 없고 운명지경에 빠졌으므로 형제는 손꾸락을 잘라 박 부인의 입에 흘려 넣으니 신기하게도 소생하여 차차 동정이 있었으나 수월후에 별세하였고.
그 뒤 아버지 병석에 누운 지 여러 달에 간호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형제는 어머니 병환 때 자르고 남은 손가락을 또 잘라 흐르는 피로 약을 대신하였으나 한 달 동안 연명하였을 뿐 결국 별세하니 朱子家禮(주자가례)에 初終襄禮(초종양례)를 지내고 兄온(穩)은 혼백을 모시고 집에 도라 가 고 연을 받들어 집에 있으되 새벽일직 일어나 묘소에 가서 참배통곡하고 집에 도라 와 아침상식을 올리기 삼 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고 아우 樞(추)는 묘소 앞에 초막을 짖고 시묘사리를 하는데 삼 년 동안 한 거름도 墓庭(묘정)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경향(京鄕)에 칭송이 자자하였으므로 숙종(肅宗) 四十年甲午(西紀1714年)에 형제에게 각각 戶曹佐郞(호조좌랑)의 직을 내렸고 경종(景宗)은 丹岩 閔鎭遠(단암 민진원)상소에 쫓아 효자정문세우기를 명하였다. 지금도 효자정문이 永同郡 覺溪(영동군각계)에 있으니 거기는 상촌 자손으로 기념이 되는 先志堂(선지당)앞이다.
충신열사는 한집안에서 나는 법이다. 상촌의 육대손 九淵은 成宗十三年 壬寅(西紀1485年)에
출생하니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비범하여 보는 사람들은 놀 나지 않는 이 없었다.
점점 자랄수록 지략(智略)이 過人(과인)하여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응교(應敎)란 직위에
있을 때 정부에서는 문신 중에 무예(武藝)가 출중한 사람을 뽑기 위하여 취재시험을 보는데
구연이 五矢五中하여 무과(武科)에도 壯元及第하니 가위 文武 쌍 전 이었다.
임금은 기이하게 여겨 金環菜花(금환채화)를 상 주었다. 역학(易學)에도 통달하여 여러 번
경연(經筵)에 나가 역학을 강론하였다. 咸鏡南兵使(함경남병사)로 北靑大都護府使(북청대도호부사)를 겸하여 북변을 수호하다가 임지에서 별세하니 정부에서는 議政府左贊成(의정부좌찬성)을 증직하였다. 맡아들 육(車 바퀴심대 륙)은 그 부친을 닮어 기골이장대하고 재주가 있어 병서(兵書)에 조예가 깊어 일직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勵節校尉(여절교위)에 봉직중 왜란이 일어났다. 전세(戰勢)가 불리하여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이르러 宣祖大王(선조대왕)은 의주(義州)로 把遷(파천)하려고 길을 떠났고 勵節校尉金육은 양주경내(楊洲境內)에 각 능소(陵所)를 수호할 중임(重任)을 맡아 썼다. 왜적은 승승장구하여 북으로 진격하니 육은 力戰三日(력전삼일)에 부하 병은 다 죽고 亞將(아장)한사람이 남었을 뿐 궁지에 빠졌으나 항복하지 않고 칼을 휘둘러 적을 대적하다가 적장의 잔인한 칼날에 목이 떨어졌다. 기이하게도 육의 愛馬(애마)는 주인의 머리를 물고 지금 東豆川(동두천)근처 阿亭洞(아정동) 고개까지 와서 말도 기진맥진하여 죽으니 지금도 그 곳을 마사령(馬死嶺)고개라고 한다. 왜란이 평정된 뒤에 정부에서는 백절 불굴한 큰 뜻을 표창하기 위하여 장절(壯絶)이란 시호를 내렸다. 부인(夫人) 草溪鄭氏(초계정씨)는 남편의 부음을 듣고 시체를 찾어 장사하고 자결하니 육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자결하고 애마(愛馬)는 주인을 위하여 죽으니 이것을 三節(삼절)이라 한다.
구연의 둘째 아들이요 육의 아우 (협) 협이 中宗三十三年 戊戌(西紀1538年)에 출생하니
재주가 출중하여 십세에 경학을 해석하였고 明宗 八年癸丑에 童蒙敎官(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니 그 때 연치가 겨우 十六歲이다. 조야의 칭송을 한 몸에 차지하였다. 선조(宣祖)원년임 신년에 增廣文科(증광문과)에 합격하여 吏曹參議(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충청감사를 거처 황해감사로 부임하니 宣祖十七年 甲申(西紀1584年)이였다.
이때 栗谷李珥(율곡이이)가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이여 사직
하였으니 그는 율곡이 간 후에 국가에 불길한 증조가 있을 가 한 듯하다.
九年 동안 在家治産(재가치산)하다가 왜란이 터지니 金監使는 戶曹參判(호조참판)으로 등용되어 전비(戰費) 염술에 힘써 공적이 컸었으며 을미 년에 잠시
휴전상태에 있을 때 宣武原從一等功(선무원종일등공)에 기록되었다 宣祖三十三年丁酉에 倭亂이 다시 벌어지니 호조참판 ()협 은 많은 공을 세우고 다음해 무술에 왜군은 완전히 패망하였다. 참판은 벌써 환갑이었다. 그 兄육()은 무예(武藝)가 절 윤하고 역리(易理)에 밝었건만 무명(無名) 전망(戰亡)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전란이 평정 된 뒤에 선조 대왕께 상소 하여 시호(諡號)를 받게 하였다. 다시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내려갔으나 청년학자들과 많은 교유(交遊)가 있었다. 光海二年경술(西紀1610년)에 다시 조정에 부름을 받아 議政府左參贊(의정부좌참찬)에 보직되었으니 엄연한 재상이라 누가 감이 흔들지 못하였다. 光海 즉위 초부터 光海의 성질이 난폭한 것을 기화로 仁穆大妃(인목대비)를 폐하자는 간특한 무리들의 의논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나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김참찬 협이었다. 그를 제거할 모든 조건을 연구하나 公明正大한 재상을 어찌할 도리가 없으므로 악독한 무리들은 童謠(동요) 를 지어 세상에 퍼트렸으나
그 동요는 「(金車了 金去了 莫問路上去 須涇路下回)김차료 김거료 막문로상거 수경로하회)라 하였다」 이 동요로 정부 요로 대관들이나 학자들까지도 세상은 흉흉한데 해석을 못하였다. 그 때 김참찬 협은 여러 청년 동지들과 이 동요를 풀었으니 「金車了=金은 내 승짜요 車는 내일음자의 한모통이다 金去了=김가는 가거라 하는 뜻이고 莫問路上去=벼슬을 더할생각은말라는 말이오 須涇路下回=그만하면 족하니 모름지기 집으로 가거라 卽下鄕(즉하향)하라는 말이다.」하고 가려하나 청년동지로 명망이 쟁쟁한 執義崔東式(최동식) 李時彦(이시언)등은 같이 조정에 있어 불길한 일이 있으면 막아 내자 하였으나 「내나이 칠십육세이니 늙은 몸으로 어떠한 불길한 일을 막아 낼 기력이 없으니 나는 가거니와 그대들은 충용한 기재로써 몇 놈의 악당을 물리치고 옳은 길을 밟어 국가에 욕됨이 없게 하라」하고 귀향하니 때는 光海五年 계축 (西紀1616년)이다. 때를 엿보고 김참판의
행동을 살피고 있던 李爾贍(이이섬) 鄭仁弘(정인홍) 朴承宗(박승종)등은 가장 두려워하던 김협이 사직 귀향하는 것을 보고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인목 대비를 폐위하자는 상소를 올려 조야가 벌컥 뒤집혀 폐위가 불가함을 상소하니 이들 청류(淸流)들은 光海의 비위에 거슬려 몰살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을 광해 계축(癸丑)사화라 한다. 이 사화에 김협은 주검을 모면하였으니 이것을 동요에 속고 미리 사직 귀향한 까닭이다. 광해십삼년신유(西紀1621年)에 별세하였다. 仁祖反正(인조반정)후 그의 업적을 찬양하여 특히 (資憲大夫吏曹判書 兼知 經筵 弘文館 藝文館 大提學 知成均館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左賓客)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 경연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 좌빈객 벼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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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의 집에서 효자가 나온다는 말은 상촌의 자손을 두고 이른 말이다. 第六代孫 好愼(호신)
은 中宗(중종)38年(년) 癸卯(계묘)(西紀1543年)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가득하여 이웃사람의 칭송을 듣고 자라났다. 장성하여 친 환을 3年間 치르는데 여름이면 병석 옆에서 부채질하였고 겨울에 때아닌 음식물을 부모가 찾으면 기적적으로 이를 구하여
봉양한 점은 상촌의 효행과 동일한바 있었다. 壬辰(임진)正月初二日`부친상을 당하고 이어서 初七日 모친상을 또 당하여 그는 비통한 처지에 거의 신체가 건강을 유지할 수 없을만 했다.
通津北面 枾岩間里 (통진북면 시암간리)에 쌍분을 모시고 시묘3년을 살았다. 마침 임진왜란
을 만나 부근 일경 백성들은 모두 도망하였으나 김효자는 묘소를 떠나지 않으므로 倭將(왜장) 平秀吉(평수길)은 이 광경을 목도하고 감동되어 木標(목표)를 세워 다른 병졸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 뒤에 一境十里岸에는 백성이 무사했다.
이 말을 들은 명나라 장수 李如松(이여송)은 자기나라 임금에게 추천하여 명나라 神宗(신종)의 부름에 응하여 中國을 방문 한일이 있어 김효신의 孝行(효행)은 동양 삼국에 떨 치였으므로 나라에서는 孝子旌閭(효자정여)를 세웠다. 그 자손이 번창하였으며 지금까지 통진 묘소에 시묘한 자리가 남아 있어 후인의 推仰心을 자어내는 것이다.
상촌의 후손들은 문장도덕이 겸비하여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면 임금을 돕는데 목숨을 바쳐 충성 것 하였고 백성들의 疾苦(질고)를 살펴 자식같이 사랑하였으며 지위가 높을수록 겸손하여 탐욕이 없고 시골농촌에 무쳐 있을지라도 부모를 효성 것 받들고 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존경하여 사모하고 믿음으로 친구를 사기여(親愛(친애) 敬長(경장), 降師(강사), 親友(친우), 之道(지도) 일향의 사표가 되어 후생을 지도교육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이 배출하였다. 鰲興府院君(오흥부원군)英祖國舅영조국구)은 부원군이란 특권계급에 있었으나 忠君愛國(충군애국)하고 愛民愛族(애민애족)하며 淸廉潔白(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하였다.
이조 500년 동안 국구인 부원군이 여러 분이었으나 오흥 부원군같이 덕망이 높은 이 별로
없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별세 후 의정부영의정과 忠憲(충헌)이란 시호를 받었으니
이름은 漢耉(한구)이오 호는 寄拙亭(기졸정)이다. 그러한 중위에 적은 모든 것을 겸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려서 부모가 다 별세하여 집성하는 범백이 어른을 능가하였다.
부모 없는 한낱 孤兒(고아)로서 열세 살 때에 牛溪成 渾문하에서 도덕을 배워 학업이 日就月將(일취월장)하니 우계문하에 있는 여러 선비들의 촉망이 컸었다. 32세 때에 生員進士에 합격하여 成均館(성균관)에 거재 할 때에 태학생들은 同僚(동요)이건만 존경하였다.
光海君(광해군)당시에 우계 율곡 두 분이 모함에 빠졌을 때 여러 학생들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伸寃(신원)상소를 하였으므로 그 성명이 판도에 널리 알려졌다. 광해의 폭정으로 시절이
불리함을 탄식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도덕을 강론하고 의리를 연마하여 실천 궁행 하여 일 향의 사표가 되어 세월을 보내니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길이 없어 어느덧 오십 세의 老境(노경)에 이르렀으니 때는 西紀1623년 癸亥이다. 事必歸正(사필귀정)으로 폭군 광해군은
쫓겨 가고 仁祖(인조)반정하니 세상은 다시 밝아지는 듯 하였다. 당시정승인 潛谷金堉(잠곡김육)의 천거로 廣興廠主簿(광흥창조부)로 임명되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상촌의 칠대손이오 十淸軒(십청헌)의 曾孫(증손)인 의이다. 明宗 二十七年壬申(明宗(명종)27年(西紀1572年)에 탄생하였다. 字(자)는 汝望(여망)이오 南谷(남곡)은 그 號(호)이다. 광흥창 주부로 임명된 지 수월후에 陰竹縣監(음죽현감)으로 제수 되니 남곡은 물질을 탐내지 아니하는 공명 정대한 천절의 소유자이므로 모든 폐단을 시정하고 직업을 장려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글 배우기를 권장하여 집집마다 글 읽는 소리 낭자하니 차차 민심이 순후 강직하여졌다.
이럴 무렵에 역적 김자점 음죽현 다면 음죽현 백성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고 유리사산 (流離四散)할 지경이 될 것이므로 정부에 김자점의 반대하는 글을 올려 중지하려 하였다.
당시 김자점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는 까닭에 위세가 당당하여 (뒤에 역적이 되었다.)
정부 요로 대관들도 억제하지는 못하였고 당초에 김자점이 계획 하였던 바와 같이는 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남곡은 당시 昌寧縣監(창영현감)으로 전임된 지 이듬해인 仁祖五年丁卯(인조오년정묘)에 胡亂(호란)이 일어 났을 때 昭顯世子(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 하였다.
三南(삼남)지방관들은 전주로 모여 세자를 위로할 때에 좋은 음식을 진배 하였으나 창영현감 金의는 거친 반찬 두 가지로 진배 하였다. 세자는 그 음식을 달게 받고 戰時財政(전시재정)을 이렇게 절약하니 믿음직한 관원이라고 찬탄함을 마지않았다.
정묘호란이 진정된 후에 각지방관으로 가는 곳마다 치적이 훌륭하여 전임될 때마다 백성들은 놓지 아니 하였다. 六十六歲 때에 병자호란이 끝나자 益山郡守(익산군수) 임명 되여 임진에 부임하여본즉 戰後(전후)민심은 흉흉하고 도덕들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公私文簿(공사문부)는 없어져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수란하였다. 남곡은 全心全力(전심전력)하여 애무하고 농사를 힘쓰게 하여 부임한지 이년에 민심은 안정되었다. 재직 만기되어 군민들은 일 년만 더 留任(유임)하여 달라고 진정하여 조정에서 引任(인밈)을 허락하였다.
칠십일세되던해 해임되어 돌아올 때에 삯말(貰馬) 한 필에 챗죽한개 뿐이었다. 남곡은 길을
떠나 半里쯤 와서 官下人(관하인)에게 「이 챗 죽은 官用物(관용물)이오 사사물건이 아닌데 내가 어찌 멀리 가지고 갈 수 있겠느냐 이 챗죽을 급히 갖어다가 관가(官廳)에 두고 다시 따라오라】고 하며 챗죽을 관하인에게 전하니 관하인 감격하여 물욕이 없고 광명 정대함을 잘 아는 까닭에 그 챗죽을 갖어다가 익산관아에 두어 오래 보존하였다. 뒤에 오는 군수들은 아무리 물욕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이챗죽을 보면 전임군수 남곡선생의 청렴 결백하매 생각나서 녹봉(월급)도 다못쓰고 군민을 위한 사업에 썼다는 말이 지금도 전라도 일경에는 옛날 얘기처럼 도라 다닌다 한다 남곡은 仁祖二十七年己丑(西紀1649年)에 별세하니 향년이 七十八歲이었다. 뒤에 사람들은 생전 덕행을 추모하여 지천서원에 추배 봉안하고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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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의 행장을 처음으로 저술한 상촌의 팔 대손 弘郁(홍욱)은 積(적)의 끝아 들로 호는
鶴洲(학주)이다. 학주는 八代祖(팔대조) 상촌과 때와 사건은 다를지라도 평생 행적이 비슷하므로 그 행장을 추려 보면 그는 일찍이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翰林(한림) 應敎(응교)
舍人(사인)등 요직을 거친지 半年밖에 아니 되어 仁祖(인조)14년 丙子(병자)(西紀1636년) 겨울에 뜻하지 아닌 淸兵(청병)이 조수같이 밀려왔고 서북지방 守令方伯(수령방백)은 모두
쓰러진 그 때 서울 함낙이 급박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학주는 우선 가족을 湖西(호서)에 부친 丹丘子(단구자)향저로 피란케하고 곧 入闕(입궐)하여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천도하여 적군의 銳鋒(예봉)을 피하자는 방침을 주장하여 江華(강화)로 가려던 계획을 변경케 하였다.
한편 林恒壽(임항수)등에게 정병일지 군을 주어 적군의 행진을 지연시킨 군사행동까지
지시하여 위급한 시기에 병조판서의 직책을 실행하였으며 당시 家兄弘翼(가형홍익)의 호는 默齋(묵재)이니 連山縣監(연산현감)으로 재직 중 勤王兵(근왕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을 목표로 주야를 계속하여 오다가 龍仁(용인)땅에서 적군을 만나 충돌하였으나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대장 홍익은 부하의 생명을 애껴해산을 명하였으나 군졸들은
비장한 결심으로 싸워서 죽을지언정 사러 서 도망하는 것은 원치 아니하였다.
창졸에 구성한 勤王軍(근왕군)은 무기도 불완전하고 수효가 적군과 비교도 안되었으나
충성만으로 활을 쏘는 군졸 들은 활시위를 다시 매고 石戰軍卒(석전군졸)들은 돌을 모아 정돈한 후에 김홍익 장군은 적지 중에 돌입하여 좌충우돌하며 군졸들의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여 적진이 홀 난하며 수천의 적군이 쓰러지나 중과부적으로 大敵(대적)을 저당할
수없어 김홍익 대장까지 필경 전사하고 말았다. 뒤에 殉國(순국)한 英雄(영웅) 김홍익에게
조정에서는 贈左承旨(증좌승지)하였다가 다시 특히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오위도총부도총관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五衛都總府都摠管)이란 증직과 忠愍(충민)이란 諡號(시호)를 나려 그의 충성을 표창하였고 연산 충열사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는 바로丙子胡亂(병자호란)이라는 만주족의 침략이었다. 학주는 남한산성 안에서 맏형이 전사한 보고를 듣고 몸소 그 전투장소에 가서 형의 시체를 찾아 湖西瑞山(호서서산)향저로
보내고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또 적군과 화친을 제의한일이 있었을 때 학주는 이는 망국의 근본이오 民族正氣(민족정기)를 말살하는 것이라고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결국 화친하기로 결정되니 崔鳴吉(최명길)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는데 글 뜻이 卑屈(비굴)하기 작이 없으므로 淸陰 金尙憲(청음김상헌)은 그 글을 찢어 버리고 통곡하고 兪啓(유계)와 김홍욱등 청년관원들과 같이 목숨을 걸고 다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굴욕적 화친으로 병란이 끝난 뒤에 학주는 사직하고 書算(서산)향저로 가서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모시다가 얼마 후에 모친 和順崔氏(화순최씨)가 별세하므로 홀로 게신 부친의 외로움을 위로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었고 仁祖二十四年 丙戌(병술)에 부친이 또 별세하니 예에의 하여 장사하고 風雪(풍설)을 가리지 않고 삼년 동안을 하루같이 아침 일직 성묘하니 朝野(조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삼년 동안 執喪(집상)하는 동안에도 나라일 을 잠시도 잊지 아니하였다. 인조는 尤庵 宋詩列(우암송시열) 同春宋浚吉(동춘송준길)들을 간관으로 불렀으나 병을 칭탁하고 부름에 응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을 듣고 학주는 우암 동춘 두 동지에게 정부에 나아가 나라일 을 담당하라는 권고편지를 하였으니 그 편지의 대강은 아래와같다.
조정에 국사를 담당할만한 인물이 없음은 이미 아는 바이어니 와 위로 군왕의 실책이 없도록 국사를 바로잡을 인물이 없고 아래로 옳은 길로 지도하여 사람다운 생활을 하도록 할 사람이 없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해이하여져서 勅令(칙령)이나 朝令(조령)을 복종하지 아니하니 통탄한일이 아니냐 조정안에는 말 잘하고 화기가 넘쳐흐르는 기상이 당당한 관리가 많이 있다하나 이기적 인물뿐인지라 일을 당하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우물 주물하며 혹은 무식하여 동서를 분별치 못하는 무리뿐이므로 상감(군왕)은 두 분을 중요한 벼슬로 불넜으나 종시 응하지 하니 함은 국가대사를 돌보지 아니하는 무리들이나 다름이 있으리요 평시에 옛 聖賢(성현)의 眞理(진리)를 배워 풍부한 학식을 얻은 것은 임금을 받들어 백성들을 잘 다스리 고저 하였는데 前後難局(전후난국)인 이때에 부름에 응하지 않는 까닭을 알길이없는 바이며 만일 이 나라에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두 분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 책임이라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니 속히 정부에 나아가 군왕을 받들고 옳은 정치로서 백성을 애무하라는 등등이었다. 삼년상을 지나 인조 이십칠년 己丑(기축)(西紀1649年)에 弘文館應敎(홍문관응교)로 제수되니 학주는 전후상처가 많은 政治 經濟 産業 社會 文化(정치 경제 산업 사회 문화)등 挽回(만회)할 방침을 세우고 널리 인물을 구하여 適材適所(적재적소)에 登用
하고 간신 등 탐관들을 숙청하고 모함에 몰려 귀양 갔던 관리들을 설원 복직시키며 문맹을
없애기 위하여 興學(흥학) 정책을 세우고 國稅(국세)이외의 貢物(곡물)의 폐단을 없애고
田制(전제)를 개혁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케하고 水陸(수륙)군을 철저히 훈령하여
南漢山城(남한산성)의 치욕 같은 일을 다시는 받지 아니하도록 하며 城地(성지)를 튼튼히
수축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고 王子王女(왕자왕녀)의 집을 크게 건축치 말고 국고지출을 절약하여 백성들의 세납을 절감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인조는 윤허하여 실시토록 하였다. 병자호란이 끝은 났으나 국내는 金自點(김자점)같은 대역부도한 악당들이 발효하여
한참동안 시끄러웠다. 昭顯世子(소현세자)가 병자호란관계로 청국에 人質(인질)로 잡혀 갔다 가 귀국 후 서거(별세)하였고 소현 세자빈 姜嬪(강빈)의 원옥사건이 발생하여 국내가 소란하였다.
姜嬪의 사건이 의욕인 것은 역적 김자점등의 흉계로 꾸몄던 것을 정부대소관리가 다 알면서도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김자점의 위력 때문에 감히 무죄 하믈 말하는 신하가 없고 학주는 오직 市南兪啓(시남유계)와 더불어 상의하여 강빈 원통함을 설원상소하고저 하다가 시기가 불리하니 다시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었다.
강빈의 의욕은 김자점등 악당들이 꾸며서 국내가 소요해지는 틈을 타서 국체를 변혁하려고
간특한 言辭(언사)와 영리한 모략과 기민한 활동으로 임금을 혹하게 하여 이러한 거대한 일을 저질렀던 거이다.
이전부터 김자점의 악의 있는 활동을 눈치챈 학주는 이를 탄핵하려고 兩司(양사)에 의논하였으나 뜻을 이르지 못하고 단독으로 그 죄를 탄핵하였으니 그 탄핵 문을 추리면
【김자점의 邸宅(저택)은 굉장하고 화려하기가 궁궐보다 더하며 국유전장을 김자점의 개인소유로 만들고 국권을 농락하여 세력이 전국에 진동하니 문전은 저자와 같이 門前成市(문전성시) 성황을 이루웠고 뇌물은 산같이 쌓여 교만 방자 하미 군왕을 능가하여 장차 찬역할
역심을 품고 있으니 사람마다 후일의 화근이 될 것을 알고 눈을 흘겨 그 행동을 살피고
있으니 治罪(치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조는 학주의 彈核(탄핵)문을 보고 학주의 벼슬만을 이동하였을 뿐이다. 학주의 탄핵상소를 본 양사에서도 김자점의 죄를 論啓(논계)하였고 학주도 죽을 각오로써 다시 김자점의 죄를 彈劾(탄핵)하였으나 인조는 종시 듯지 아니하였다. 김자점은 더욱 방자하였었고 학주를 미워하기 더하였다.】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계승하니 학주는【유생들을 대접하기에는 헛된 문서에 끝치지말고
실질적으로 어질고 어리석고 간사하고 바른 것을 살펴 쓸 것이며 지금 오랜 신하로서 領府事(영부사) 金尙憲(김상헌) 한 사람뿐이 온데 이는 국가의 龜鑑(구감)이오니 지성것 효유하여 불러 쓰시도록 하소서 만일 한번불너 들러 오지 아니하거든 두 번 세 번 부르면 필경은
응할 것이 옵니다. 김상헌이 비록 老衰(노쇠)하였으나 조정에 있으면 士氣(사기)가 왕성하고 인심이 翕然(흡연)하여 정치를 시작하시는데 큰 補筆(보필)이 될 것이 오며 李敬與(이경여)
沈東龜등의 귀양사리는 죄가 있어서가 아니오니 이들을 모두 뽑아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새로 즉위하신 은혜가 될 것이오니 이것이 제왕의 大道(대도)가 옵니다.】등등 상소를 하여 새 임금 孝宗을 크게 깨닫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전후재정을 만회할 방침으로 湖西地方(호서지방)에 大同法(대동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그 어려운 일을 담당하여 실행할만한 인물을 전형한 결과 대신 潛谷金堉(잠곡 김육=청풍김씨)의 추천으로 김홍욱이 적당하다 하여 孝宗二年(효종이년) 辛卯(신묘)(西紀1651年)에 김홍욱으로 忠淸道觀察使(충청도관찰사)를 제수하였다. 조정에서는 다시 불가하다는 의논이 돌고 호서지방에서도 대동법실시가 불가하다는 비난과 각 읍에서는 치열한 반대운동이 성행하였으나 관찰사 김홍욱은 국가 비상시에 국민의 협력이 없이는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는 의리를 들어
일반을 설득시켜 세법을 실시하여 잠시나마 戰後經濟(전후경제)를 회복한 것이며 또 학주가
黃海監司(황해감사)로 체임 중에 날씨가 몹시 가물어 초목은 다 타 죽고 흐르는 시내 물까지 말나서 농사는 고사하고 당장 먹을 물까지 떨어지니 민심이 흉흉하였다.
효종은 重臣(중신)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몹시 가무는 것은 필연코 내가 국왕으로서 德(덕)
이 부족한 때문이니 八道(팔도)에 영을 나려 말이나 글로 나의 허물을 기탄 없이 알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게 하였다. 황해감사 김홍욱은 이 영을 듣고 【강빈(昭顯世子嬪(소현세자빈)의 원통한 죽음은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
보통여자라도 원한을 품으면 오월에 서리 가 온다는데 世子嬪(세자빈)이 원통히 죽었으니 천지기운이 무심할 것인가 즉시 雪원하여
설원하여, 주시 오면 비가 나려 만물이 소생할 것이옵니다. 지금 조정에 대신이하 민간 말직 까지 라도 강빈의 원통함을 모르는 신하가 없사 오나 입을 담을 고 말을 아니 하믄 嚴勅(엄칙)이 내렸기 까닭에 벌을 받을 가 두려워하는 것이오니 이것은 자기 몸만 위하는 것이오 나라일 을 생각지 않는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만일 殿下(전하) 께옵서 무르신다면 그릇 대답할 관원은 한 사람도 없을 가 하옵 나이다.
대신은 군왕의 팔 다리와 같고 司憲府(사헌부) 司諫院(사간원) 관원들은 군왕의 눈과 귀와 같고 玉堂(옥당)은 군왕의 심복이오니 무르심에 옳은 말을 아뢰지 아니하오리까 지금 전하께옵서 대신이하 관원들을 부르사 신의 상소의 가부를 무르시와 신의상소가 옳다하오면 용납하사 강빈의 원옥을 설원 하시와 의리를 천하여 밝기 시 옵고 만일 신의 상소가 옳지 못하다 하오면 신을 역적으로 몰아 천번 죽어도 한이 없겠나이다.】
원래 강빈옥을 처결한 仁祖(인조)는 끝까지 姜嬪獄(강빈옥)의 妥當性(타당성)을 주장하였고
孝宗(효종)이 즉위하자 정승 閔鼎重(민정 중)은 상소하여 강빈의 원통을 풀어 주려 하였으나 효종도 역시 조용히 민 정승을 便殿(편전)으로 강빈의 간사한 행동을 말한 뒤에 다시는 누구든지 강빈옥에 대하여 시비를 逆律(역률)로 치 죄 할 것이라고 엄한 傳敎(전교)를 내렸었다. 이렇게 엄한 전교가 시퍼렇게 있은 뒤에 황해감사 학주는 강빈의 원욱을 상소하였던 것이다. 효종은 크게 진로 하여 금부도사를 황해도 海州(해주)에 급파하여 김홍욱을 나포하여 즉시 금부에 가두게 하고 효종이 친히 국문 하였으며 刑杖(형장)이 심하였으나 학주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국문 하는 임금을 우러러보며
【옛날 明君(명군)은 착한 일을 하도록 諫(간)하는 신하를 죽이지 아니하였아옵거널 殿下(전하)께옵서는 신을 죽이려 하시니 신은 죽어도 강빈의 원옥을 풀어주시옵소서]하며
좌우에 시립한 重臣(중신)들을 돌아보며 【제공은 이러한 때 강빈의 원통함을 알고 있으면서 말 한마디 못하는가】하고 못생긴 벼슬아치들이라는 듯이 눈을 흘겨보았다. 이런 태도를 보던 효종은 더욱 진로 하여 杖刑(장형)을 계속하게 하니 그 때 정승인 陵川 具仁后(능천구인후)는 임금 앞에 나아가 【옳은 말로 간하는 신하에게 형벌이 너무 중하니 중지하옵 소서】 주장하니 효종은 즉시 구 정승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그 꼴을 목도한 학주는 임금의 마음을 돌일 수 없음을 알고【명군은 간관에게 형벌 못하는 것인데 전하는 신을 죽이려 하시나이까】하였다. 형장은 이미 八十도에 이르렀다. 살은 점점이 흩어지고 흰 뼈는 살 밖으로 드러나고 피는 흘러 땅에 고였다. 그러나 오히려 정신이 총총한 학주는 【신은 죽어도 원통한 것이 없어 오나 천지가 모두 알고있아 오니 풀어 주소서】하고 다시 좌우 시신들을 돌아보며 【내가 죽은 뒤에 선산에 매장이나 하도록 하여주시오】하는 말을 최종으로 정신이 흔미하여 다시 말을 못하였다. 운명을 하였는지 혼돈이 되었는지? 그 때에 매질은 중지되었다. 이렇게 학주는 諫(간)하다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이 세상을 영구히 떠나으니 효종오년 갑오(西紀1656年)七月十六日이다. 효종은 죽은 김홍욱의 관직을 삭탈 하였다. 충직하고 剛勇(강용)하며 사람을 대하여 언사가 종용하고 화기가 넘쳐흐르는 천성인 학주는 임금을 충성 것 섬기였고 부모를 효성으로 받들었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였고 長幼(장유)의 분별을 차려 집안 하인이라도 늙은이는 후대하였고 부부간 화락과 친척간 화목 또는 붕우간 신의를 인생의 철 측으로 實踐躬行(실천궁행)하였다. 그의 문장과 도덕― 충군과 애민하는 깊은 사상― 지조와 경윤― 세상에 둘도 없는 人品(인품)을 사모하여 靜觀齋(정관제) 李端相(이단상)이 학주의 원통한 것을 풀어야 한다고
효종에게 아뢰였으나 효종은 탄식할 뿐 종시 듣지 아니하였다. 팔년 정유에 尤庵 宋時列(우암 송시열)과 同春 宋浚吉(동춘송준길)이 상소하여 학주 김홍욱의 원옥이 설 원되니 복직은 물론 資憲大夫吏曹判書 兼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左賓客(자헌대부이조판사 겸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데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좌빈객)이란 증직과 文貞(문정) 詩號(시호)를 내렸고 유생들은 瑞山 聖岩書院(서산 성암서원)과 여러 서원에 위패를 봉안하고 덕행이 민멸되지아니 토록 춘추에 향사를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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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의 九代孫 纘(찬)은 자를 士述(사술) 호는 山伏子(산복자)이요 烟水翁(연수옹)이라고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神童(신동)이라는 소문이 났고 二十前에 벌서 그 문장이 탁월하였으며
특히 易學(역학)과 數理(수리)에 밝었으므로 각지에서 수리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다. 山伏子는 그들 중에 재주가 있고 없음을 먼저 시험하여 수준에 달하지 못하는 자는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의 성질은 산천경개를 줄겨 하였으니 고요한 곳에서 數理(수리)를 硏磨(연마) 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는 문장이 탁월하고 수리에 정통하여 나라에 유용한 인재이나 천성으로 공명에 뜻이 없고 학문에 골돌 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光海君(광해군) 治下(치하)에 올바른 정치를 행할 수 없던 때이었다. 일반은 그 폭행을 견디지 못하여 필경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임금 仁祖(인조)를 세웠으니 이는 인조반정이라 하였다. 인조는 널리 인재를 구하고 광해군당시 썩은 관리는 모두 파면하였다. 이렇게 형세가 바뀌어 귀양갔던 인사들이 복직하고 산야에 은퇴했던 구신 들도 다시 政界(정계)에 나오게 된 것이다.
仁祖十五年 丁丑(정축)(西紀1637年) 纘(찬)은 도내인사의 추천으로 조정에서 불렀으나
사퇴하고 이듬해 세 번째 추천에 정부에서는 높은 벼슬로 불넜으나 纘은 자기 학문이 아직
미성 하다는 구실로 고관을 사퇴하므로 그러면 벼슬차례대로 조정에서는 초사로 通善郞(통선랑)을 임명하니 때는 24세이었다. 찬은 부임하여 일호차 착도 없이 집무하였고 각 요로 대관들은 청년 김찬에 촉망이 커서 각기 자기 집에 유숙케 하려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남대문안 수박다리 근처에 살던 자기집사람 朴景先(박경선)에게서 기숙하였다.
찬은 자기 학식이 아직 미숙하다고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윤허가 아니 되므로 결국 병탈하고 집에 돌아가서 학문을 더욱 연마하다가 顯宗(현종) 5년 甲辰(갑진) (西紀1664年)에
세상을 떠났으며 遺稿(유고)는 모두 허터지고 겨우 수집한 것이 두권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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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대손 有慶(유경)의 호는 龍谷(용곡)이니 崇祿大夫(숭녹대부)의 一品職(일 품직)에 이르렀으며 효행이 출중하였으므로 孝子旌閭(효자정여)와 孝貞(효정)이란 諡號(시호)를 받았고 또 興慶(흥경)은 호를 急流亭(급유정)이라 하였으며 議政府領議政(의정부영의정)으로 재직시
四色黨派(사색당파)의 당쟁을 타파하기에 전력하였기 까닭에 湯平大臣(탕평대신)으로
유명하였으며 별세 후 靖獻(정헌)이란 시호를 받았고 또 龍慶(용경)의 호는 夫溪(부계)이니
英宗(영종)때 禮曺參判(예조참판)으로 冬至副使(동지부사)로 청국에 파송되었다가 병으로
귀국치 못하고 별세하니 정부에서는 吏曹判書(이조판서)의 증직이 내렸고 그 아들 漢喆은
호를 可憲(가헌)이라 하고 刑曹判書(형조판서)로 재직당시 辛壬士禍(신임사화)는 의리에
불가한일이니 설원해야한다는 상소를 올리는 동시에 임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대궐섬돌에 머리를 부듸처 유혈이 낭자하니 英祖(영조)는 수건으로 흐르는 피를 씻어 주었으며
별세 후에 孝簡(효간)이란 시호를 받았다. 또 漢祿(한녹)은 호를 閑澗(한간)인데 일직이
韓南塘(한남당)문하에서 도덕을 배웠으며 禮設(예설)에 밝었고 출중하여 先賢(선현)에
뒤지지 아니하였으나 당시 국가에 용납되지 아니하여 귀양 갔다 가 풀려서 복직하였고 議政府領議政(의정부영의정)의 증직까지 받았고 다시 追奪(추탈)되었다가 高宗元年甲子(고종원년갑자)(西紀1864년)에 설원 복직되었다. 아들 觀柱(관주)는 호는 一絲(일사)이다 權臣(권신)들의 세력을 팔고 백성들의 苦樂(고락)을 생각지 않고 재물을 탐하며 행동이 오만방자하믈 彈劾(탄핵)한 상소로 인하여 도리어 권신 들에게 몰려 갑산으로 귀양 갔다 가 풀려 禮曹判書(예조판서)를 지냈으며 또한 漢耆(한기)와 漢老(한로)는 호는竹圃軒(죽포헌)이니 형제는 총명한 재주로 일직 관계에 나아가 공적이 많았고 工曹判書(공조판서)로 국가 工役(공역)에 명성이 진동하였고 오흥 부원군 한구의 아들 龜柱(귀주) 호는 可庵(가암)이니 일직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에 있었고 문장과 도덕이 뛰어났으나 이는 국가정책에 맡지 아니 한다 하여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사리로 전전하다가 풀리지못한채 適所(적소) 羅州(나주)에서 별세하였다. 뒤에 조정공론이 새로워져서 설 원되어 복직되고 吏曹判書(이조판서)의 증직을 받았다. 有慶(유경) 興慶(흥경) 龍慶(용경) 漢喆(한철) 漢祿(한녹) 漢耉(한구) 漢耆(한기) 漢老(한로) 觀柱(관주) 龜柱(귀주)는 英祖(영조) 正宗(정종) 兩世(양세) 오십녀동안에 實事 求是的 學風(실사 구시적 학풍)이 싹이 트기 시작할 때 재주 있어 글 잘하고 도덕이 뛰어나서 일직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要職(요직)에 있어 經濟(경제) 政治(정치) 文化(문화) 人倫(인륜) 道德(도덕) 文章(문장)으로 국가에 공훈이 많았다. 조정에 들어가면 그의 강직함을 두려워하였고 在野(재야)하면 일반 사민들의 공경을 받었으니 당시 朝野(조야)에 경주 김씨를 빼놓고 공명정대 하다고 청렴 결백한 사람이 매우 드믈었다. 이들은 재종 삼종간으로 유복지친이다. 오십 년 동안에 역사적 인물이 이렇게 많이 배출한 것은 다른 씨족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상촌이 沒後(몰 후) 삼백 오십 년이오 십청헌이 별세한 후 이백 오십 년이오 학주가 돌아간 후 팔십 년이다. 이것이 모두 선조의 음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외에도 英祖(영조) 正宗
年間(년간)에 경주 김씨로서 혁혁한 공훈을 남긴 분이 많이 있으니 일일이 기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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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宗(경종)3년 癸卯(계묘)(西紀1723년) 삼월 십 칠일에 당시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遇泰는
자기 十二代祖 상촌 묘소에 省墓(성묘)를 갔었다. 그 때 어떤 노인이 71세가 되었다 하며 지팡이를 집고 그를 따라오며 이 묘소는 누구 저 묘소는 누구라고 일일 히 指摘(지적)하였다. 참배를 끝내고 우태는 그 노인에게 묘소에 관한 전설을 물었다. 그 노인은 조금도 서슴지 않고 【네 소인은 여기서 출생하였고 여기서 늙었습니다. 이 묘소 얘기 는 마음속에 새겨넣은 듯이 소상하게 알고 있습니다. 상촌대감께옵서 개성 부에서 무슨 벼슬까지 지내신 것은 몰으오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안동에 낙향하옵섰다가 태종 대왕께서 여러 번 부르셔도 응하지 않으셨답니다. 내종에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도라 가실 때 쓰실 물건을 작만해 가지시고 龍仁(용인)땅 鐘縣亭子坪(종현정자평)까지 오시다가 서울산맥을 바라보시고 참아 서울까지는 들어갈 수 없다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 返葬(반장)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래서 후세에 전할 것이 없이해라) 하옵시고 자진하셨답니다. 少尹(소윤)영감께서 독신으로 수행했다가 대감영구를 소바리에 모시고 처음에는 公州(공주)로 발인하려고 했으나 소가 말을 듣지 않고 움직이지도 안이하여 그 곳에서 며칠을 지체했습니다. 그리하는 동안 喪主(상주)영감께서 꿈에 대감을 뵈 온죽 대감께서
【선산에 返葬(반장)아니하는 것이 내 뜻이다. 나는 葬地(장지)가 따로 있다. 종이 조각을 날려 그것이 떨어지는데 가 곧 나의 장지이다.】하섰답니다. 그래서 상주영감께서 꿈을 깬 뒤에 이상스럽게 여기어 종이조각을 실에 매어 연 날리듯이 공중에 날려 본즉 그 종이는 떠나가서 포은 대감 묘소를 돌아 지금 대감묘소 자리에 떠러 젔으므로 영구모신 소를 이리 끌고와서 안장케 된 것이 랍니다.】하여 자기가 직접 경험한 얘기 같은 신념을 가지고 말을 느러 놓았다. 본래 김씨가 중에 전래하는 말에는 洪州(홍주) 선산에 반장하려 하였으나 소발이 떨어지지 않고 있으므로 영구에 고유한즉 飄風(표풍)이 이러 나며 명정이 하늘에 떠올라 포은묘소를 배회하고 지금모신 묘소자리에 떠러젔다. 그래서 이제까지 꼼작 아니하던 소가 발을 떼어 그 자리에 영구를 모셔다가 안장하였다는 것이다. 이 전설과는 사실이 좀 다른 점이 있어 그대로 필기하였다. 이 말이 비록 無稽(무계)하나 그 노인의 말이 역역하므로 신기롭게 생각하고 그 자의 성명을 물었더니 柳善立(유선립)으로 상촌 묘소의 墓直(묘직)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 우태는 조사해본즉 상촌의 친산은 洪州城(홍주성)안에 있으니 그자가 공주반장이란 말은 홍주를 말한 듯 싶다. 늙으니 말이 틀림없이 傳記(전기)같으니 수백 년 후 野老村氓(야로촌맹)도 상촌의 遺風大節(유풍대절)을 어적게 목격한 듯이 말로 전해왔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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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상촌 후손으로 대대로 先祖(선조)를 추앙할만한 인물이 배출하여 14대에 와서 魯永(노영)은 참판을 지냈고 그 아우 魯敬(노경)은 禮曹判書(예조판서)로 청국 건륭황제때 북경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도라 와서 모함에 빠저 소군도로 귀양 같다가 삼년만에 풀려 와서 다시 복직되고 輔國(보국)에 제수되었다. 아들 正喜(정희)는 24세의 청년으로 부친을 수행하였다. 당시 중국의 碩學(석학)이오 대정치가인 翁方綱(옹방강)을 방문하고 그의 書齋(서재)에서 60일간 두류 하며 淸朝(청조)에 특유하던 考證學(고증학)과 金石學(금석학)을 연구하고 귀국하였다. 그래서 그 신문학을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수입한 正喜는 斯界(사계)에 鼻祖(비조)가 되었다. 김정희의 호는 秋史(추사)이었으나 북경에 있을 때 중국의 석학 거유 와 交遊하다가 그중 阮元(완원)을 특히 사모하여 阮堂(완당)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經學大家(경학대가)도 되었으니 그의 저서에 十三經注疏(십삼경주소)를 비판하였고 문장은 唐宋諸儒(당송제유)를 견주 하였으며 佛敎(불교)교리도 밝게 깨다른바 있어 당시 高僧(고승) 白波(백파)와 草衣(초의)같은 이도 추사에게 진리를 배웠다. 그는 老莊學(노장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금석학에는 그가 저술한 禮堂金石過眼錄(예당금석과안록)을 토대로 동양각국의 금석학자가
많이 나타났었다. 추사의 書藝(서예)도 역시 금석학과 고증학의 연구결정으로 특이한 書法(서법)을 발견하였으니 과연 王右軍(왕우군)에 비할만한 大家(대가)이였으며 그 아우 명희 상희 (命喜. 相喜)로 더불어 禮設(예설)에 연구가 深奧(심오)하여 冠婚喪祭(관혼상제) 宮中儀式(궁중의식) 官吏服裝(관리복장)등에서 번잡하고 호화로운 점을 간편하게 하여 국고지출을
절약하며 백성의 부담을 경감케 하자는 학설로써 一般文化(일반문화)를 향상하려 하였으나
그 주장을 관철치 못하고 도리어 斯文亂賊(사문난적)이라 하여 명희는 고금도로 귀양가고 상희는 과천으로 放逐(방축)을 당하였는가 하면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 갔다 가 명희 상희는 칠 년만에 추사는 구 년만에 각각 풀려 와서 다시 벼슬하였으나 추사는 당시 權敦仁(권돈인)의 제의한 禮設(예설)로 다시 귀양가게 되었다. 그런데 권 정승 학설은 추사학설에서 나온 것이라는 지목을 받고 北靑(북청)으로 귀양을 또 가게 되었다. 그 때 나이65세의 노령인 추사는 다시 살아 도라 올것을 기약할 수 없어 가족은 무한히 애통하였으나 추사는 태연히 매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잠시 暗雲(암운)이 가리웠을 뿐이다. 두 아우는 형의 목까지 대신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아껴라 하고 헤어져 북청을 향하였다. 沿道各郡 守令(각 군)들의 관대함도 일일이
사양하고 정배소까지 그는 갔다 가 3연후 哲宗(철종)3年 壬子(임자)西紀(1852年)에 풀여 도라 왔다. 추사는 곳 예조참판으로 서임되어 1년 간 봉직하다가 사퇴하고 글읽고 글씨 쓰기로 일생을 지냈다. 철종7년丁巳(정사)10월에 별세하니 향년 72세이다. 李朝(이조)에 정직한 이는 귀양을 안가면 약사발을 받는 것이 통례이었다. 그런데 추사의 부친노경이 65세에 귀양갔다가 육십칠 세에 풀려 왔고 추사자신도 65세에 북청으로 귀양 갔다 가 67세에 풀려 온 사건은 괴상하다고도 할 것이다. 세게 적으로 모든 부분의 학계에 있어 추사와 같이 한 사람으로 각부 분에 모두大家(대가)가 되기는 어렵고 변하여 학문도 따라서 달라지니 추사는 실로 前無後無(전무후무)한 대학자이었다. 15대손 道喜(도희)는 일직 문과에 장원하여 이조참의 대사 성을 거처 승진하여 判府事(판 부사)로 의정부 좌의정에 제수되니 고조부 금유정의 탕평정책을 인용하여 四色黨派(사색당파)를 물론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혁혁한 업적을 남겼으며 판 부사로 재직시에 族兄(족형) 台喜(태희)와 의논하여 상촌의 모 부인 손씨의 묘소를 다시 봉축하고 묘막 追遠齋(추원재)를 중건하고 광주 상촌 묘소 부근일대 산판을 학장 하여 선조를 위하여 사업이 컸으며 正宗(정종)7年 癸卯(계묘)(西紀1783년에 탄생하여 哲宗11年 庚申(경신)(西紀1860年)에 별세하니 孝憲(효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평시에 청염 결백하고 공명 정대하여 대신의 지위에 있었으나 貧寒(빈한)하였다.
16대손 商汀(상정)은 호를 閒月堂(한월당)이라 하였다. 옛날부터 名門巨族(명문거족)이나
간 구하기로 유명한 김씨 집에 高宗(고종12年) 乙亥(을해) (西紀1875年) 九月十二日에 고고의 소리를 지르고 탄생하였다. 상정은 어려서부터 구차한 생활에 쪼들려 왔으나 원래 재주 있고 기상이 늠름하여 남에게 지지 않는 성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부모의 명령에는 수화를 가리지 아니하고 복종하니 효심이 또한 출중한 인물이였다. 마음이 결백하니 상촌의 후예요 학주의 자손인 도리를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다. 어렸을 때에도 의리에 쫓아 시비를 잘 가르기로 유명하여 일 향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약관시절부터 대한제국은 병들기 시작하니 政界(정계)에 나가지 않고 賢人君子(현인군자)의 가르친 바 의리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나라는 결국 왜적에게 겁탈 당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한월당은 허희 탄식하고 의리를 밝히고 민족정기를 고취하려고 사방에 도라 국권 회복 할 것을 선전하였다. 高宗皇帝(고종황제)
승하한 비보를 듣고 손구락 피와 가슴의 피를 뽑아 슲은글을 쓰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피로 그려 고종황제의 빈소 쪽을 향하여 애통하니 산천초목이 다 슲어 하는 듯 하였으며 옆에서 보는 사람들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한다.
한월당의 행장을 拔萃(발췌)하여 본즉 고려말기에 상촌의 행적과
연관성이 있다. 고려말기에 상촌은 나라가 변혁됨을 보고 견디다 못하여 죽음으로써
不事二姓之義(불사이성지의)의 대의를 세워 천추만대(수천수백년동안)에 그 충성을 포창하였고 후생들은 그 업적을 사모하였으나 십육대 손인 商汀(상정)은 나라가 왜적에게 겁탈 당하였으나 주검으로써 의리를 세우지 아니하고 사러 서 어떻게 하던지 復權(복권)하려 하였으니 죽음으로서 의리를 세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산촌과 한월당은 대조적이다.
고려가 망할 때 상촌이나 대한제국이 망할 때 한월당이나―경주 김씨―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고종황제는 왜적에게 국권을 겁탈 당하였으나 회복해보려고 옛 신하들 중에 믿음직한
시하들을 골라 세계각국에 密派(밀파) 하여 복권운동에 한시간도 게을리 아니하고 세계 여론은 고종황제에게 동정이 많이 생기게되니 왜적들은 큰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왜적들은 한국 역적배들과 공모하여 고종황제를 없애기로하고 백방으로 연구한결과 食物에 治毒하여 삽식간에 고종황제는 허무하게, 승하하신 것이다. 음모로 치독 한 것을 세상에서 어찌 알았으랴 만은 그 당시 세계 일차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대통령의 民族自決主義를 선포한 뒤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독립사상이 일어나고 뜻있는 지사들은 암암리에 독립운동을 하던 때 불의에 활동하시던 고종황제가 별안간 승하하시니 국내가 벌컥 뒤집히다 싶이 인심이 흉흉하였고 얼마 되지 못한 청년학도들은 이것이 필연코 까닭이 있는 일이라고 십여명이 몰려 고종황제의 侍醫인 安商浩에게 달려가서 고종황제의 급작스레 승하하신 것을 위협과 공갈하며 물었다. 안상호도 이 나라에 태어난 인간이라 울분함을 참지 못하여 왜적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음식물인 식혜에 치독으로 인하여 승하하셨다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이 말이 삽시간에 장안에 퍼졌다. 인심은 흉흉하였다. 그들도 할 수 없이 음식물을 담당한 두어 사람들을 일본으로 압송하려다가 우물쭈물 치죄하는 형식을 취하고 책임을 궁녀들에게 밀고 외국에도 이렇게 선전하였다. 고종황제 승하 후 치독으로 승하하신 줄알고 한월당은 분통이 터지는 듯 하여 어찌할 줄 모르다가 한가지 박약을 정하고 실천에 옮기었다. 한월당은 천하에 널리 공포하여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외치며 왼편 가운데 손가락(左中指)을 끊어 흐르는 피로 대의를 밝히는 장문의 격문을 썼다.왜경들은 삼엄한 경계망을 치고 한월당의 주위를 사찰하다가 이 말을 듣고 혈서를 쓴 격문을 압수하는 동시에 한월당을 납치하여 투옥시켰다. 그리고 왜경들도 당황하여 흩어진 격문을 다 못 압수하고 전문의 오분지 사쯤 압수하였으나 오분지 일쯤은 찾다가 못하고 그대로 도라 갔었다. 나머지는 지금까지 그 아들 洪濟에게 보존되어있다. 국권이 상실된 지 십오년 甲子(檀紀4257年西紀1924年)에 한월당의 건강은 회복 되였을 때 왜경들은 담배를 심지 못하게 하였다. 한월당은 【大韓遺民으로 이러한 일까지 당할 수 있는가】하고 수백 포기의 담배를 시무고 나무를 꺾어서 대한유민 한월당 김상정 종불굴초(大韓遺民閒月堂金商汀種不屈草〓대한사람한월당 김상정은 왜적에게 굴복치 않는 담배를 심었다.)라고 큼직하게 글씨를 써서 담배밭 옆에 세웠다. 왜적들은 발견하는 즉시로 날마다 와서 패목을 뽑으라고 성화 치듯 하나 한월당은 그런 따위 소리를 들은 척 할 리 없다. 나중에는 소위 우두머리 되는 자들이 와서 달래고 꼬이고 또 위협도하였다. 한월당은【내 목은 베어 갈지언정 대의는 굴복하지 아니하겠다】하고 【또 너의 들의 더러운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하며 왼쪽 귀(左耳)를 잘라 흐르는 피로 글을 지어 섰으니 그 글뜻은 【내가 왼쪽 귀를 짜른 것은 너의 왜적의 악한 말을 듣지 않으려 함이다. 누가 君臣(군신) 의 의리를 말하는 이 있으면 내오른쪽 귀로 정성껐 들을 지어. (原文 靈死初心斷左耳惡聲不入
賊邊來 有人說道君親義 可使聽從右耳開〓원문 영사초단좌이 악성불입적변래 유인설도군친의 가사청종우이개)【이것을 목격한 왜경들은 기가막힐 지경이었다. 잡아가도 잡어가도 내년에도 내명년에도 불굴 초는 의연히 심어져 있었다(檀紀4256年西紀1923年) 壬申에왜적의 앞자비노릇을 잘하는 張基龍이란자가 한월당의 십대조 오상촌의 육대손인 好尹 官承旨의 묘소에 금광을 출원(金鑛出願)하여 소위 倭賊總督府의 채굴허가를 얻어 가지고 채글하려하므로 한월당은 좋은 말로 달래기도하고 의리에 옳지 못하다고 부드러운 말로 수차 일렀으나 장기룡은 종시 듣지 아니할 뿐 아니라 山坂使用(산판사용) 토지 수용령(土地收用令)을 쓰느니 하며 방자한 말로 대하니 한월당은 이에 격노하여 宗會를 열 기로하고 각파소종중으로 통문을 발송하였다. 회기일 에 承旨公자손은 물론이요 빈손들도 이 비창한 말을 듣고 전국각지에 산재한 김씨가 구름같이 모일뿐 아니라 他姓들도
비분 감개하여 김씨 종회에 모였다. 모인 인원은 오륙 백 명에 달하여 (瑞山一境)서산뿐 아니고 인근 읍 唐津 洪城(당진홍성) 각 경찰도 동원되어 경계가 삼엄하였다. 한월당은 왼편 無名指(무명지)한마디를 잘라 혈서로 檄文(격문)을 섰다 그 격문은
【애통한일이여 망국한일이여 張基龍(장기룡)이란 자는 외람 되게 욕심이 생겨 우리 선조의묘소가까이 採金許可(채금허가)를 얻어서 金(금)을 캔다 고하니 허가를 한놈은 누구며 허가를 받은 놈 누구냐 왜놈이며 무뢰배 장기룡이다.이것이 변괴가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 김씨가 아무리 용열하고 못생겼기로서니 이러한 멸시를 당하게는 가 아무리 잔 약한 우리 김씨일지라도 張漢(장한)을 상대하여 혈투할 사람은 얼마라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張漢을 불러 좋은 말로 달래보자 만일 듣지 않거든 힐난하고 꾸지어 보자 그래도 듣지 않거든 우리는 일을 못하도록 抗拒(항거)하여보자 그래도 가지 않거든 끌어내어 쫓아 보자 그래도 물러가지 않으면 결박하고 두둘겨 주자 縛之打之(박지타지) 그래도 않듯거든 할수없이 죽여버리자 이러한 도적들과 어찌 하늘을 같이하겠느냐 우리 김씨 일족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분발하여 죽음으로써 엄금하여 선영을 보존하여 후폐가 없도록 하자
原文(원문) 哀痛哉(애통재) 崗極哉(강극재) 彼所謂張基龍者(피소위장기룡자) 濫生無厭之慾(람생무염지욕) 採金許可於(채금허가어) 我先祖墓所逼近之地(아선조묘소핍근지지)
(逼=가까을벽.또는피박할핍) 許可者誰耶(허가자수야) 倭賊(왜적) 受許可者誰耶(수허가자수야)無賴漢張基龍(무뢰한장기룡)此何等變怪(차하등변괴)何等悔視耶(하등회시야)吾宗族(오종족)
雖曰(수왈) 庸遇殘劣(용우잔열) 豈可無一二人之苦心血爭者乎(기가무일이인지고심혈쟁자호)
卽於彼隻詰之責之(즉어피척힐지책지) 彼不若聽(피불약청) 抗之拒之(항지거지) 然旦不退(연단불퇴) 喝之遂之(갈지수지) 猶旦不退(유단불퇴) 縛之打之(박지타지) 亦旦不休(역단불휴)
殺之禁之(살지금지) 誓不與此賊(서불여차적) 共戴一天也(공대일천야) 惟我宗族
(유아종족) 一心誓約(일심서약) 奮發血誠(분발혈성) 卽死嚴禁(즉사엄금) 一而保守(일이보수)先壟一以杜絶後幣之地(선농일이두절후폐지지) 千萬辛甚(천만신심) 한월당은 이 혈서를 낭독하니 모였던 김씨들은 흥분이 될 대로 되어 【허가 한 놈부터 죽여보리자 당장 가까이 있는 張漢부터 죽여 버리자 달래고 타이르고 할 것 없다. 한놈 죽이고 김가 한사람 죽으면 그만이다】【아니다 장가만 죽일 것이 아니라 그놈의 일 문을 몰살하자 살 어서 先祖(선조)의 묘소를 파헤치는 꼴을 볼 수 있겠느냐 차라니 죽어서 보지 않는 것이 자손의 도리이다】라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 저나니 군중심리라 환경이 흉흉하여지며 살상이 당장 일러 날듯 김씨 네의 기고 만장하는 기세란 하늘을 투를 것 갔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왜적경찰들이 모여 삼엄한 경계망을 치고 張漢은 어디로 도망처 버렸다. 어느덧 해는 저서 대지는 황혼이 되었다. 김씨 들은 묘소근처 인가에 하루 밤을 치르고 내일 다시 모이기로하고 헤어졌다. 경찰은 어둠을 타서 한월당을 납치해갔다.
밝은 날 김씨들은 더욱 분통이 터져 경찰서를 처 부실 기세를 올렸다. 결국 張漢은 김씨 가세에 눌려 금강개발을 못하고 말았다. 한월당은 옥중생활을 자기집 사랑같이 일생을 지내다가 乙酉(을유)해방을 만나 육체적 고통은 면하였다.
檀紀(단기)4287년(西紀1954年)甲子(갑자)에 80歲(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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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효자비는 安東(안동) 남문 밖에 세웠다는 것은 위에 기재되었으나 풍우를 가리지 못하였다가 光海君(광해군) 3年辛亥(신해)에 (西紀1711年)7대손 積(적)은 安奇道 察訪(안기도찰방)으로 부임하여 비로소 비각을 세우고 碑閣記(비각기)를 지였으나 이 작품은 전래하지
아니하였다. 積의 호는 丹丘子로 문장과 도덕이 겸비하였고 아들 사형제를 두어모두 출중하였으며 그중 충효로 더욱 유명한 홍익 홍욱을 두었던 인물이다. 별세 후 정부에서는 特贈吏曺參判하고 사람들은 가지 서원과 향현사에 위패를 봉안하여 그 도덕이 민멸되지 아니하도록 하였다. 후손들이 기록한 桑村에 관한 각 文獻을 종합하면 그의 아들 根이 秋嶺 상촌 묘소에 시묘 중 지은 感懷詩를 비롯하여 단구자의 저술한 비각기가 있었고 학주는 廣州庄舍所題記와 桑村先生碑閣記와 행장을 지였다 그 뒤 十代孫 두벽은 천성이 한가로운 까닭에 산수를 쫓아 문장을 연마할 뿐이고 부귀를 뜻 두지 않았으나 정부에서는 그 학행을 발휘시키고자 開寧縣監을 제수하니 마지못하여 肅宗42年 丙申(西紀1766年) 開寧縣監으로 부임하여 지은 安東府桑村公孝子碑閣記, 十二代孫 遇泰의 景宗三年 癸卯(西紀1723年)에지은 廣州墓奴記 十三代孫 桓柱의 正宗八年 甲辰(西紀1784年)에지은 桑村先生事蹟辨 十四代孫 魯敬은 純祖十八年 丙申(西紀1818年) 慶尙監司로 부임하여 지은 碑閣重修始末記 十五代孫 正喜.命喜형제가지어 비각현판으로 걸었던 追慕時등을 列擧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상촌의 모친 손씨 부인 묘막 追慕齊에 관하여 十五代孫 泰喜의 追慕齊記의 상촌 실기를 편찬한 것과 十六代孫 商眞의 碑閣移建記가 있고 또는 十九代孫 翊煥 이 편집 발간한 桑村先生實記가 있다.
八代孫 홍욱은 경상도경차관으로 안동을 지나다가 그 부친이 세운 상촌선조비각을 남문밖
옛터에 찾아간 즉 비각은 수호하는 이 없어 허러젔고 주위에는 가시덤불이 무성하였다.
그래서 이 덤불을 헤치고 보니 비석은 성자이상이 부러졌고 부러진 조각도 없어졌다.
학주는 부러진 조각을 찾고자 근처일경을 샅샅치 찼었고 인근 노인들에게도 물었으니 알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몸이 사사가 아니고 官吏(관리)의 몸으로 사사로운 일에 날을 허비할 수
없어 그는 비각을 補修하고 時 한편을 지었다. 先祖名聲冠一時 凜然松柏雪霜姿(름연송백설상자) 前朝忠臣自盡絶(전조충신자진절) 後世遺傳傳孝子碑(후세유전효자비) 秋嶺路傍膽古墓(추령로방담고묘) 花山城外問遺基(화산성외문유기) 經過此日無窮恨(경과차무궁한) 下馬 (하마 주제루 )
十代孫 斗壁(두벽)은 開寧縣監(개녕현감)으로 肅宗(숙종)42年 丙申(西紀1716年)九月에 효자비각을 중수하였고 十一代孫 有慶은 英祖17年 辛酉(신유) (西紀1741年)九月에 十二代孫
工曹判書 漢耆(한기)는 英祖45年己丑(西紀1769年)八月에 十四代孫魯永은 安東府使로 부임하여 비각을 重建하고 성자이상이 부러져없어진 것을 근처땅속에서 찾아 原狀대로 이어서 세웠으니 처음 丹丘子가 비각을 創建한지 네 번째 회갑인 이백 삼십 년이니 때는 正宗15年 辛亥(西紀1791年)九月이다. 그 후22年壬申에 十四代孫 魯應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비각을 丹靑하였다. 다섯해 뒤에 14代孫 魯敬은 慶尙監司로 純祖18年 戊寅(西紀1818年)에 부임하여 학주가 엮은 비각기와 그 후 사실을 노경이 더 엮었고 그 아들 正喜가 써서 현판 하였고 비각을 철저히 중수하였다.안 동부의 인구는 점차로 팽창하여 효자비각이 人家(인가)가운데 뭍어 있어 보전하기 곤란하여지므로
15代孫 泰喜는 마침 判府事에 봉직중인【後에議政府左義政】 道喜와 상의하여 안동 조산거리 성밑에 비와 비각을 옮겼으며 16대손 商眞은 상촌 모친 손씨 부인의 묘소아래 시묘하던 바루그 초막이 섰던 자리에 비각과 비석을 옮겨 세웠다.
김정희(金正喜)
金正喜(西紀1786年∼1856年)
李朝제22代王 正宗때 朴燕岩(박연암)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정종은 역대 중국의 어떤 帝王(제왕) 보다도 우수한 문장이라 하였으나 박연암의 문장은 따를 수가 없어 정종은 登龍(등용)길을 막은 결과 40여세에 아직 初仕(초사)하나 못하였다. 연암은 본래 술을 좋아하였으나 손님을 대접하는 때가 아니면 무시로 술상을 차려 내지 아니하는 가정습관이있엇다 그래서 손님의 심방을 고대하다가 아무도 아니오면 연암이 지나가는 사람을 끌어들렸다는 것이다. 하루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이를 붙들고 집으로 청하여 술한잔 대접하겠다 하니 그 사람은 피차 신사 풍의 선비이므로 끌려 들어갔다. 연암은 내실에 분부하여 소님이오셨다고 술상을 내오게 하였다. 그러나 연암은 술을 잔에 부어 먼저 마시고 객에게 권하지 아니하여 괴이하게 여기였다. 연암은 또 한잔을 부어 역시 스스로 마시고 말았다. 객은 주인의 무례함을 책망한 뒤에 빈한이 생활하는 연암인줄 비로소 알고 도리어 연암을 청하여 고급 술집으로 가서 크게술상을 대접하였다. 이 소문이 세상에 퍼져 正宗의 천청에까지 도달하여 처음으로 조그마한 군수를 임명한 일이 있었다. 연암은 아직 백두로 43세 때 中國乾隆(중국건륭) 황제 七순잔치 축하사절단에 書狀官(서장관)으로 갔다 가 熱河日記(열하일기)를 저술한 학자이다. 그의 제자 朴楚亭(박초정)도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서 중국학자 백여인과 사귀였고 北學議(북학의)를 저술하였다. 초정의제자 秋史金正喜도 역시 24세 때 서정관으로 자기부친을 따라 북경에가셨고 당시 중국에 유명한 노학자 翁方綱(옹방강)의 도서실에서 2개월간 수만권 서적을 탐독하고 돌아왔다. 추사는 상촌공 15대 손으로 명필로만 일반에 알렸고 李朝末年에 經學大家(경학대가) 金石學大家(금석학대가)로 널리 알려지지아니하엿다. 그런데 日帝(일제)때 경성제국대학 한문학 藤塚(등총) 교수는휴가를 얻고 북경을 만류할 때 琉璃廠(유리창) 이라는 서적만 파는 상점이 즐비한 길거리에 가서 서적을 탐구하였다. 우연히 翁方綱文集(옹방강문집)을 표보다가 추사에게 사과편지가 개제 된 것을 발견했다.
80노인 옹방강과 청년 김추사가 필답할 때 자기가 두 가지 모르던 사실을 추사가 귀국한 뒤에 발견하고 그것을 사과한 서한이다. 그래서 등총교수는 경성으로 돌아와서 추사가 어떤 인물인가를 연구하고 논문을 써서 문학박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추사숭배자가 되어 추사의 글시는 물론 추사 생전에 쓰던 붓 벼루, 연적 등을 수집하였다가 사직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추사에 관한 遺物(유물)을 그때돈 30만 원에 팔아 경성제국 대학교에 두기를 교섭했으나
불응하고 모두 가지고 귀국하였다는 것이다. 또등총교수는 추사를 숭배하는 마음으로 忠南에 있는 추사묘에 두 번이나 제사를 받들었다. 당시일본세력아래 살게 된 일반은 추사를 잘모르다가 등총 교수가 존경하는 통에 그의 이름이 더욱 날리어 중국 王羲之(왕희지)와 같은
명필일 뿐 아니라 최후의 경학 금석학 대가로 이조말년을 장식하였다. 추사는 당호가 여럿이 있어 阮堂(완당)이라고도 하니 북경에서 알게 된 큰 학자 阮元(완원)씨를 사모하여 완당이라고도 이름했다.
金正喜
금속학 통해 서예의 새 경지 개척한 실학자.
김정희는 그가 독자적으로 개척한 글씨, 추사체로 한시대를 풍미했고 오늘날까지도 그것 하나만으로 역사의 한폐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나라는 아무리 서구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文風을 중시하는 동양사회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서예를 잘 모르는 문외한이 추사체, 그 중에서도 隸書體(예서체)로 쓴 글씨를 보면 그것이 왜 그토록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켰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김정희의 글씨는 마치 장작을 쪼개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문외한들은 단정하게 正字로 쓴 글씨체를 명필로 보기 쉬운데 사실 그것은 중국의 구양순이나 왕희지의 楷書體(해서체)를
모방해서 쓴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한석봉의 글씨이다. 김정희는 그런 글씨는 俗筆(속필)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김정희는 글씨에도 족보가 있다고 말했다. 즉 篆(전), 隸(예), 楷(해), 行(행), 草(초)의 서체 변천 과정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에는 해서를 주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전서나 예서를 모른 채 해서만을 쓰는 것은 뿌리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따라서 무릇 글씨를 쓰려면 전서부터 차근차근 써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를테면 마치 풀잎이 흐드러진 것과 같은 초서는 이러한 뿌리와 줄기가 튼튼한 가운데 비로소 쓸 수 있다고 했다.
전서는 고대 갑골문에서 나오문자로 한자의 원형이다. 예서는 秦(진)나라 때 전서를 간소화하면서 만든 글자이다. 따라서 전서나 예서의 원형은 유물에서 찾아볼 수 밖에 없었다.
고대에 만든 비석에 쓰여져있는 비문, 청동유물에 새겨져있는 金文 등을 직접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희가 金石學(금석학)에 심취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당시 조선의 금석학이라는 것은 그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다. 금석학을 배우려면 청나라로
가야 했다. 당시 청에서는 고증학이 학계를 풍미하고 있었다. 고증학이란 글자 그대로 고전의 문구를 원래의 뜻 그대로 고증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송나라 이후 사회를 지배해 온 주자학(성리학)은 공자나 맹자의 고전을 제멋대로 혹은 사실과 다르게 해석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증학은 기존 학문 체계에 대한 전면도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서
經世致用(경세치용) 사상이 배퇴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실학이라는 거도 사실 이러한 고증학의 금석학이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김정희가 왜 서예가이면서 동시에 실학자였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금석학에 눈을 뜨면서 역사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발견을 하기도 했다. 북한산에 무학대사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던 낡은 비석을 직접 고증해 본 결과 놀랍게도 신라“진흥”이라는 왕명은 일반적인 왕명과 같이 죽은 뒤에 붙인 시호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의 칭호라는 귀중한 사실을 알아냈다.
한 번은 평양의 옛성터를 돌아보던 중 돌조각에 새겨진“小兄”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그것이 고구려 시대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적도 있었다. 김정희에게 처음으로 고증학을 가르쳐 준 사람은 박제가였다. 박제가는 청에 가서 고증학을 접하고 국내에 돌아와 이른바 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를 창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김정희는 박제가로부터 전해 듣는 수준을 넘어 직접 청에 가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가 25세 되던 무렵 청 황제에게 가는 정기 사절단인 冬至使(동지사)에 동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그는 청의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학문의 신선한 공기를 흠뻑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국내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청의 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보고 명나라 멸망 이후
중국의 중화사상은 우리 나라가 이어받았다는 이른바 소중화론이었다. 소중화론자들이 보기에 북학파는 이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50대 초반에 병조와 형조에서 오늘날의 차관급인 참판의 지위에 올랐으나 이후 그의 학문을 배척하는 자들의 모함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돼 9년 동안이나 갇혀 지내게 되었다. 이 유배 기간 동안 그가 그린【세한도】인데 당시 중국의 문인들마저 이 그림을 보고는 神品(신품)이라며 경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희는 9년 만에 유배가 풀렸으나 또다시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혀 함경도 북청에서 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이 이후 그는 노구를 이끌고 이리저리 방랑해야만 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봉은사에서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했고 그 후 얼마 안 돼 별세했다.
★주요 약력/김정희(1786∼1856)
1786년 충남 서산 출생 호 추사.
1817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해독.
1819년 문과 급제.
1823년 규장각대교.충청우도 암해어사.
1836년 성균관대사성.병조참판 역임.
1839년 형조참판.
1840년 제주도 유배.
1851년 북청 유배.
1856年 타게.
★韓國史 千年을 만든 100人에서(西紀1001年∼2000年)
金正喜. 本貫 慶州(西紀1786年∼1856年)
金石學과 秋史體로 有名한 最高의名筆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는 언제 세웠는지 모르는 비가 이끼가 가득한 채로 있었다.
전해오는 이대조에게 한양 도읍을 천거한 무학대사의 비라고했다. 그러던 것을 김정희가
西紀560年 무렵 신라 진흥왕이 세운 유명한“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 냈다. 왕이 높은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을 다스리는 내력들을 적어 세운 비를 흔히 巡狩碑(순수비)라고 한다. 중국 진나라 진시왕때 시작되었다. 김정희는 金石學(금석학)에 깊은 지식을 지녔고. 특히 秋史體(추사체)로 有名(유명)하여 우리 나라 최고의 명필로 평가받고 있다.
어렷서 실학의 대가인 박제가에게 글을 배워 순조 14년 과거에 급제하여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합 13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는 등 불우한 생을 보냈다.
【완당집】【금석과안록】【실사구시설】같은 고증학에 바탕을 둔 책들과【목죽도】같은
유명힌 서화를 남겼다. 호는 秋史. 阮(완)堂(당) 등. 영의정의 현손,영조의 사위 월성위 한신의 증손자, 예조핀서 노영은
(노영)의 아들. 대사성 翰濟(한제)의 조부.
韓國歷史人物辭典에서
金正喜〓 李朝 末期의 學者. 자는 元春. 호는 阮堂 또는 秋史. 예산사람 金魯敬의 아들.
純祖14年(1814年)에 登第한 후 兵曹參判까지 지냈다. 憲宗6年(1840)에 罪人(尹尙度)의 옥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귀양 갔고 그 후 哲宗2年(1851)에 憲宗廟遷(헌종묘청)을 주장하다가 북청으로 귀양갔다. 純祖 때 靑年으로 北京에 들어가 청의 학자 阮元 翁方綱과 교류하여 朝鮮과 淸國의 문화교류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考證學 金石學에 밝았고 隸書는 漢隸를 잘하며 名筆로서 이름이높았다. 저서《阮堂集》《金石過眼錄》《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등이 있다.
大百科事典에서
김도희(金道喜)=桑村先生16世孫(1783年∼1860年)
李朝 憲宗 때의 相臣. 자는 史經, 호는 柱河 純祖11年 (西紀1811年)에 文科에 及第한 후 憲宗9年(1843年)에 左議政이 되었다.【三朝: 純:憲:哲】에 걸쳐 歷仕하여 元老로 있었다.
諡號는 孝憲公. ★ 金興慶(1677∼1750)★
李朝 英祖때의 相臣. 자는 子有, 호는 急流亭, 肅宗25年(1699)에 登第한후 英祖8年(1732) 영의정이 되었다. 아들漢藎은 英祖의 和順翁主의 駙馬 가 되었다.
51金豊德(金鼎國)
李朝 五百年間 보이지 아니한 三八線 이있다가불행이 지금 공산도배를 차단한 有形 三八線이 생겼다. 李太祖는 본래 함흥사람으로 三八 以北사람의 활동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自己政權을 탈취 당할까 두려워 三八 以北 사람에게는 대관을 입명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유명해진 板門店은 우리나라말로 【늘 문이】이다. 李朝 때 士禍가 생길 때마다 서울 태관중에서 구전성명 하려든이는 늘 문이만 넘어 도망하면 생명은 보전했고 벼슬은 다시 못했다. 대대로 거물이 끊이지아니한 開成에는 대관을 임명된 사람이 五百年中에 없었다가
大院君 때 처음으로 왕참판 최참판이 임명되었다. 金鼎國은 人物이 비범하여 開城사람이
아니드면 참으로 一人之下萬人之上이 될 만큼 잘났었다. 普通 開城사람이 생활하기 위하여
士農工商중 가장 천대받는 장사꾼이 되어 八道江山에 소위 松房(송도장사꾼)이란 상점을 벌렸었다. 그 영향으로 現在世上에쓰는 이태리에서 發明한 簿記學과 똑같은 簿記를 송방에서
몇百年前에 發明한 것이다. 金鼎國은 十九歲때 豊其로 장사를 갔다가 그것토반 裵生員과 言爭 끝에 商店을 떠엎고 故鄕 松都로 돌아오는 것이였다.
그때 풍기서 서울로 올라오려면 지금 退溪院을 通過하게되었다. 초여름에 暴雨가 내려 退溪院 개천은 물이 불었고 흙탕물로 변하여 그 深川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런 때 김정국은 퇴계원에 到着하여 다리도 없는 흙탕물을 어떻게 건늘가 하고 망설이다가 바라본즉 건너편
언덕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여보 여보, 나는 이 개천이 서투르니 越川을 좀 해주오】하였더니 그이는 아무 대답도 없이 물을 건너와서 김을 업어 건네 주었다.
저편 언덕에 내려서 주머니에서 돈푼을 꺼내 월천값을 주려하다가 멈추고 본즉 그이는 은퇴한 노재상으로서 개천 물이 불었으므로 청지기를 데리고 물 구경을 나왔다가 낚시질하는 생각이 나서 청지기를 집으로 들려보내서 낚싯대를 가져오라 하고 혼자 앉았다가 건너편에 어떤 행인이 월천을 청구하므로 물을 건너가서 업어다가 이편언덕에 막 내려놓았다.
그리는 찰나에 二十歲가 넘을락 말락한 소년을 그 노재상의 아들과 청지기는 낚시도구를 가지고 나왔든 것이다. 눈치 빠른 김청국은 그 노인이 아니고 은퇴한 재상인줄을 직각에 간파하였다. 그런즉 그때서야 노재상은【자네 성명은 무엇이고 어디 사는가.】하고 물으니 김정국은 황공한 태도로【시생의 성명은 김정국이옵고 송도에 살고 잇사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과히 바쁘지도 않고 또 노재상의 월천을 하여준 데 감격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것에서 그 노인이 낚시질하는데 구경하고 서서 떠나올 용기가 없었다. 한참 낚싯대를 들고 물고기 몇 마리를 잡은 뒤에 그 노재상은【여보게 김서방 지금 날씨는 곧 저물어 질 테니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어떤가.】하고 손을 가르치며
【저기보이는 기와집이 우리 집일세】하였다. 그 노재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은퇴한
이유원(李裕元) 즉 가오실대신이고 그의 집은 대궐같이 큼직하였다.
김정국은 사양할 까닭도 없이 노재상 일행을 따라 그 집으로 올라갔다. 노재상은 큰 대문을
들어서며 아들을 돌아보고【김서 방을 아랫사랑에 편히 쉬게 하고 석반을 잘 대접해라.】하고 자기는 큰사랑으로 올라갔다. 석반후에 김은 노재상이 있는 큰사랑으로 올라간 즉 노재상은【자네 바둑 놓아보았나.】하니 김은【네 조금 만져 보았습니다.】하였다.
노재상은 청지기를 불러바둑판을 가져왔다. 그러나 노재상바둑수는 김에 비하여 약했다.
그래서 김은 주인대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가까스로 한 번지고 한번이 기어 밤이 늦도록 바둑을 두엇다. 바둑두는 사이에 김은 풍기로 장사하러 갔다가 토반 裵生員과 언쟁 끝에
모두 뒤집어엎고 고향으로 간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 날밤은 아랫사랑에서 잤다. 이튿날
대감께 작별하고 떠나려 하니 대감은 그렇게 집에 아니 가도 관계없을 것이니 자기와
對者가 되어 어언간 한달이 지나갔다.
老宰相은 金을 보고 「여보게 심부름 같으나 내 便紙를 가지고 서울좀 갔다오지 않겠나.」하니 金은, 「大監분부시면 어디든지 가오리다.」하여 이튿날 片紙를 가지고 서울로 가려는데 老宰相 은 「이 片紙는 꼭 李朝判書大監께 親히 보시게 하소. 만일 詣闕(예궐) 하셨으면 退闕(퇴궐) 하시기를 기다려 드리게.」하니 金은, 「大監分付시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여 이튿날 便紙를 가지고 서울로 가려는데 老宰相은
「이片紙는 꼭 李朝判書大監께 親히 보시게 하시오. 만일 詣闕(예궐) 하셨으면 퇴궐하시기를 기다려 드리게.」하니 김은, 「네 분부대로 하오리다.」하고 온종일 걸어 장안에 도착하니 날씨는 저물고 李朝判書는 아직 退闕 아니하셨다. 李朝判書 집에서 기다리든 김정국은 結局(결국) 退闕(퇴궐)한 李朝判書에게 가오실대감 서한을 수교하였다.
李朝判書는 그 편지를 읽어보면서 金鼎國을 흘끔흘끔 보더니 당장에 벼루에 먹을 갈어 答狀을 써서 주며 가오실 大監께 직접 傳達하라고 付託하였다.
김은 그 날 밤 李朝判書와 같이 김을 흘끔 바라보며 「자네가 풍기군수가 되었네. 來日이라도 故鄕으로 돌아갔다가 보룸후에 내집에서 新年을 맞고 풍기에 赴任(부임)하게.
開城집에서 新年을 맞일 生覺은 마소.」하고 分付하였다.
김 정국은 바둑相對者로 한 달이나 가오실 大監宅에 유하다가 이튿날 떠나서 故鄕 開城
으로 돌아가서 풍기군수란 희소식을 전하고 근 보름 잘 休養하고 다시 가오실대감댁에
올라가니 벌써 풍기에 기별하여 풍기이방은 新年을 맞으러 올라왔다 三日間 바둑을 두다가 來日쯤 하직할 터인데 가오실대감은 「여보게 풍기 이번 到任하면 裵生員의 怨讐(원수)를 꼭 갚게」하였다. 김은,
「네 그리하오리다.」하고 對答하였다. 食盤後(식반후) 또 바둑을 두었을 때 또 배생원의 怨讐(원수) 꼭 갚으라고 권유하였다. 이튿날 하직할 때 대감은 또 배생원의 원수를 갚으라고 당부하였다. 김풍기는 가오실 대감댁 대문을 나서면서 「저렇게 인자하신 어른이 나더러 원수 갚으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하시니 이것은 원수를 갚으면 아니 된다는 意味인 것이다.」라고 혼자 解釋(해석)하고 부임의 길에 올랐다.
풍기에서는 한달 전에 松房(송방)으로 장사 왔던 靑年이 배생원과 언쟁 끝에 장사를 집어치우고 上京해서 풍기군수로 임명이 되었다는 所聞(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동안 배 생원은 윈새끼를 꼬고 있었다. 當時 郡守는 生殺與奪(생살여탈)의 權利를 장악했을 때이다.
그러나 김정국은 부임하면서 즉시 이방을 불러 배생원을 예방하겠다는 命令을 내리고 배생원집에 예고하였다. 배생원은 설마 새로운 원님이 자기를 예방할 이치가 있는가 하고 불 신중에 예라께라하는 벽제소리가 들리며 과연 새로 부임한 군수가 내방하는 것이었다. 배 생원은 貧寒(빈한) 한 生活로 住宅도 草家 몇 칸으로 郡守를 迎接(영접)할 사랑도 변변치 못한 처지이다. 맨발로 대문까지 나가며.
「성주께서 천만 의외로 행차하시니 여줄길이 없습니다. 한즉 군수는,
「왕사는 물을 것도 없고 이 미거한 위인이 대임을 맞고 왔으니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기는 배생원께서 지도하시기에 있으니 재임 시에 특별히 애호하시기를 바라오」하고 돌아갔다. 한달 전에 자기와 말타 틈하고 갔던 청년이 군수로 부임하여 第一着으로 裵 生員 심방하여 후원을 청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 感情相 實行못할 일이니 인 제야 名官이 오셨다고 各地區間에 일부러 선전을 하고 다니니 그 효력이 실로 컸다.
물론 행적은 바르게 하고 또 배 생원이 여론을 명 군수로 일으켰으므로 훌륭한 성적을 냈고 그 뒤에 여러 골을 살다가 최후로 豊德副使에 임명되어 김풍덕집이 되었다.
그의 인물은 宰相資格이 充分하였으나 開城 사람이 昇進을 못하고 豊德副使로 벼슬은 끝맞추었으니 이것이 李朝 五百年에 보이지 아니한 三八線이 있었던 것이라 해도過言이 아니다.
金秋史와 金豊德은 모두 桑村의 十五代孫이다. 김풍덕 孫婦 김정혜(金貞惠)女史는 시집재산을 女子敎育에 전부 희사하여 정화여학교를 創設하니 근대 우리나라 女子 敎育에 先覺者이다. 지금 淸凉里 정화여자 商業高等學校가 김정혜여사의 사업이오 김풍덕의 유산으로 성취한 것이다.
이유원(李裕元)《가오실대감》
李裕元[【가오실대신】本貫 慶州 西紀1814年∼1888年]
흥선大院君에게 정치에서 물러날 것을 건의 조선 말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막고 書院을 철폐하는 등 많은 공적을 쌓았으나 10년동안 권력을 휘두르면서 잘못한 일도 많았다. 세계 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민씨일파와 권력다툼을 벌이는 등 나라의 정치에 정치에 폐단을 낳았다. 그래서 대원군이 정치에서 손을 떼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감히 그런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는데 고종초 좌의정으로 있던 이유원이 그 말을 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그를 수원유수로 쫓아보냈다. 얼마뒤 대원군이 권력에서 밀려나자 돌아와돌아와 영의정이 되었고, 고종13년에 일본과 재물포조약을 맺을 때 우리나라 대표로 활약했다.
호는 橘山(귤산), 부정 鼎佐(정좌)의, 5세손, 吏曹判書 석귀 ( 5세솜, 이조판소 석규의손자, 이조판서 啓朝(계조)의 아들, 시교 壽榮(수영)의 아버지.
첫댓글좋은 자료입니다. 근데 글 중에 맨 끝 부분에 있는 이유원 편에 吏曹判書를 李朝判書라고 잘못 쓰여진 듯하고 다행히도 경순대왕께서 나라를 넘겨주셨다라고 내용을 올바르게 쓰여졌으나 안타깝게도 조선왕조를 '李朝'라고 일가의 왕가로 쓰여진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경주김씨의 후손들이 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지내며 중국의 천자도 알아 줄 정도로 고려 때의 김부식이나 상촌공 김자수 선생, 조선왕조(朝鮮王朝) 때 계림군 김 균公과 조선조 정종대왕의 장인이신 월성부원군 김천서 분, 추사 김정희 선생 그리고, 대한제국 때 총리대신을 역임하신 김홍집 같으신 분들이 우리 경주김씨 가문을 빛내 주셨습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근데 글 중에 맨 끝 부분에 있는 이유원 편에 吏曹判書를 李朝判書라고 잘못 쓰여진 듯하고 다행히도 경순대왕께서 나라를 넘겨주셨다라고 내용을 올바르게 쓰여졌으나 안타깝게도 조선왕조를 '李朝'라고 일가의 왕가로 쓰여진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경주김씨의 후손들이 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지내며 중국의 천자도 알아 줄 정도로 고려 때의 김부식이나 상촌공 김자수 선생, 조선왕조(朝鮮王朝) 때 계림군 김 균公과 조선조 정종대왕의 장인이신 월성부원군 김천서 분, 추사 김정희 선생 그리고, 대한제국 때 총리대신을 역임하신 김홍집 같으신 분들이 우리 경주김씨 가문을 빛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