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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의 힘을 뺀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다루는 데서 비롯됩니다. 긴장하지 말고 평상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너무 잘 하려고 조바심을 갖다보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해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앉는다’
‘해의반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자(莊子)의 ‘전자방(田子方)편’에 나오는 말로 ‘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앉는다’는 뜻입니다. 중국 전국시대 때 송의 원군(元君)은 예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화공을 초청해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다들 일찍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먹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늦게 온 화공 하나가 원군에게 잠시 허리를 숙인 뒤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방약무인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보게 했더니 “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원군은 무릎을 치며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화공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해의반박은 자연을 따르고 세속적인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유교가 ‘치자(治者) 철학’이라면, 도가사상은 예술가의 철학입니다. 동양의 시(詩)·서(書)·화(畵)의 세계에서 해의반박은 예술가가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해의반박의 경지가 가장 잘 나타나는 분야가 산수화입니다. 호방하고 자유로운 붓질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 사상이 잘 드러납니다. 애써 꾸미지 않지만 사실적이고, 수묵화에서도 색이 느껴지고, 여백조차 사유의 공간이 됩니다.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대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녹아 있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②] 사람 대하듯 자연 대하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가는 대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며 성장합니다. 첫째는 사람이나 사물의 형상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동양미술에서는 이를 형사(形似)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대상 자체에 담겨 있는 고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사(神似) 또는 전신(傳神)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상에 화가 자신의 뜻을 부치고(寓意·우의), 정을 펴내는(抒情·서정) 것입니다. 그리고 표현 기법에서는 처음에는 정교하고 현란한 것으로 시작해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평이하고 담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는 서양화에서 말하는 구상과 추상의 개념과도 비슷합니다. 동양화 이론에서는 이를 ‘熟(숙)’과 ‘生(생)’으로 표현합니다. ‘熟(숙)’이란 ‘익을 숙’자 입니다. 오랫동안 기본기를 닦아서 형사(形似)가 일정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生(생)’이라는 한자의 개념이 재미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날 것’ 또는 ‘설익었다’는 뜻인데 이를 그림의 최상위 개념으로 둔 것입니다. 동양철학과 동양미학의 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른바 마음의 근육, 감성의 근육에서 힘을 뺀 자유로운 경지를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대교약졸(大巧若拙)’이 있습니다. ‘큰 기교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졸(拙)은 역설적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정말 좋은 그림은 마치 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설 익은 듯한’ 구석이 있다는 뜻입니다. 추사의 세한도를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소나무 밑에 있는 집을 자세히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 서툴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세한도를 보면서 집을 잘못 그렸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사진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사진은 덧셈으로 시작해서 뺄셈으로 끝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덧셈이란 사진을 찍을 때 가급적 많은 요소를 넣고 그 인과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달리 뺄셈은 화면을 단순화시켜 추상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덧셈이 ‘숙(熟)’이라면 뺄셈은 ‘생(生)’의 개념과 비슷합니다. 좋은 구도는 사진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하나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뺄셈의 사진은 압축되고 정제된 어느 한 부분을 포착해 전체를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감상자는 이미지에 살을 붙여가며 보이지 않는 장면까지 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감상의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풍경사진을 찍을 때는 풍경에 압도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덧셈의 사진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저것 다 넣다 보면 구도의 틀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전체도 보고, 부분도 봐야 합니다. 풍경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감흥을 형용사 한 마디로 정리하거나 연상되는 뭔가를 떠올려 보는 것이 좋습니다. 덧셈에서 뺄셈으로, 추상성이 강조됩니다.
감상자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하게 만들어야
몇 년 전 가을, 전북 임실 국사봉에 올랐습니다. 옥정호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가 산을 타고 넘습니다. 물안개는 운해가 돼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아찔한 풍경을 연출해 냅니다.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운 풍광이 넓은 지역에 걸쳐 펼쳐졌습니다.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렌즈의 화각이 자꾸만 넓어졌습니다. 잠시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다시 풍경을 살폈습니다. 일정한 농담의 차이로 첩첩이 이어지는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수화에서나 볼 듯한 아스라한 풍경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깊이감이 느껴졌습니다. 망원렌즈로 갈아 끼우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모노톤의 사진이 수묵화 분위기가 납니다. 이 사진은 우리의 수묵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사진에 ‘선(線)’과 ‘선(禪)’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감상자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하게 만들어야
몇 년 전 가을, 전북 임실 국사봉에 올랐습니다. 옥정호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가 산을 타고 넘습니다. 물안개는 운해가 돼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아찔한 풍경을 연출해 냅니다.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운 풍광이 넓은 지역에 걸쳐 펼쳐졌습니다.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렌즈의 화각이 자꾸만 넓어졌습니다. 잠시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다시 풍경을 살폈습니다. 일정한 농담의 차이로 첩첩이 이어지는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수화에서나 볼 듯한 아스라한 풍경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깊이감이 느껴졌습니다. 망원렌즈로 갈아 끼우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모노톤의 사진이 수묵화 분위기가 납니다. 이 사진은 우리의 수묵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사진에 ‘선(線)’과 ‘선(禪)’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③] 소양·연구·체험의 삼박자 갖춰라
철학·문학·과학 등 인문학적 기반 필요... 발로 찍고, 땀으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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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특히 이 시기에는 화가들의 수양이 강조됐습니다. 붓질의 기교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배경과 경험을 중시했으며 이를 회화비평과 창작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로 인해 산수화·화조화·인물화 등 그림이 꽃을 피웠습니다. 남송의 비평가인 조희곡은 자신이 쓴 ‘고화변(古畵辯)’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눈 앞으로는 진기한 명적(名迹)을 실컷 보며, 또한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만 바야흐로 붓을 댈 수 있다.’
여기서 ‘만권의 책’은 인문학적인 소양을 말합니다. ‘진기한 명적’을 실컷 본다는 것은 예술 전통에 대한 연구를 강조한 말입니다. 또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노력과 체험이 밑바탕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디 그림에만 해당되는 말일까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은 위 세 가지를 몸소 실천한 화가로 생각됩니다. 그는 화원화가가 아닌 양반 출신입니다. 당시 쟁쟁한 문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창협·창흡 형제와 교류하며 학식을 쌓았습니다. 절친인 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하면서 한층 더 성숙한 붓질을 선보였습니다. 또 중국의 산수화 이론을 섭렵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새로운 화법을 창안했습니다.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 전국의 이름난 명승지를 누비고 다니며 실제 눈으로 본 우리나라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겸재는 생전에 금강산을 세 번이나 올랐습니다. 겸재의 금강산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겨우 세 번?”이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간다는 것을 요즘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은 시절입니다. 조선시대 때 금강산을 오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봅니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사람을 물어가던 시대입니다. 곳곳에서 산적이 출몰하기도 합니다.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칼 잘 쓰고, 활 잘 쏘는 호위무사가 동행해야 합니다. 험한 산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산에서 먹고, 자는데 필요한 음식과 침구 등을 져 날라야 하는 노복도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수십 명이 동원됐을 겁니다.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나귀도 필요할 것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치면 히말라야 등정쯤 되지 않을까요. 세도가의 양반이 아니면 금강산행은 꿈꾸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행히 겸재는 영조의 후원과 함께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가문의 지원을 받아 금강산에 세 번이나 오를 수 있었습니다.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부감으로 그려진 ‘풍악내산총람’은 마치 지도를 그리듯 그림 속에 명승지 이름을 써 넣기도 했습니다. 몇 해 전 독일의 과학자들이 최신 장비를 동원해 겸재 정선이 어느 지점에서 금강산을 그렸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점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돌베개, 2011). 겸재는 자신이 실제 경험했던 금강산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재 조합해 하늘에서 내려다보듯이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그가 험한 산길을 얼마나 누비고 다녔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아는 만큼 더 보인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시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겸재는 위대한 사진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진은 시간과 공간의 전략적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시간은 사진을 찍는 시점을 뜻하며, 공간은 사진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시간은 빛을 의미합니다. 빛에 따라 공간은 달리 보입니다. 아침 빛이 다르고, 저녁 빛이 다릅니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시간은 공간을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울주에서 찍은 다락논 사진입니다. 막 모심기가 끝난 시점입니다. 해가 뜨자 논에 고인 물에 노을빛이 반사됩니다. 판화의 질감과 비슷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산을 깎으며 논밭을 일군 농민들의 피땀이 서려있는 듯 합니다. 논에 고인 무채색의 물과 초록의 모가 아침 빛을 받아 전혀 다른 형태와 질감을 만들어 냅니다. 시간이, 빛이 공간의 형상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시간과 맞물려 돌아가는 공간의 선택도 치밀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사진은 프레임의 예술입니다. 프레임의 안과 밖, 즉 공간의 취사선택도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온전하게 숲을 보여줄 수도 있고, 나무를 보고 숲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상징적인 기법도 있습니다. 사진에서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 조합을 만들어 냅니다. 사진 작품은 그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시간을 달리하며 수십, 수백 번 찍어 봐야 합니다. 조희곡의 말처럼 사진가의 ‘발자국이 천하의 반’이 되어야 카메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풍경사진은 발로 찍고, 땀으로 완성됩니다.
철학·문학·과학·수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진은 보는 것이 반입니다.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탐구이자 자기 성찰입니다. 아는 만큼 더 보입니다. 특히 현대사진은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또 문학과 미술과 음악 등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해야 합니다. 그 감동으로 가슴이 흥건히 젖어 있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기능적인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사진으로 이르는 길은 사진 밖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④]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사진과 시의 창작 과정 닮아... 옛 선비의 ‘시화상간(詩畵相看)’ 배울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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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시적 감성 키우고 시인은 이미지 문법 익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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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시와 그림을 동일시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는 송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소식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에서 비롯됐습니다. 소식이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와 그림을 감상하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말한 데서 유래합니다. 이 말은 문인화가 산수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문인화는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장르입니다.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시와 그림, 시와 사진을 엮어서 ‘시화집’으로 책을 냅니다. 또 잡지를 보면 앞 부분에 ‘포토포엠’이라던가 ‘시가 있는 풍경’ 같이 서로 감성이 통하는 시와 사진을 짝지어 연재하기도 합니다.
시사지 월간중앙에도 시와 사진을 엮은 ‘포토포엠’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시인에게 사진을 보여 주고 시를 쓰게 하는 방식입니다. 지난 2월 시인 이원규에게 필자가 찍은 덕유산 상고대 사진을 보냈습니다[사진1]. 추사의 [세한도]를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고사목에 핀 하얀 서리꽃에서 선비의 꼿꼿한 절개가 느껴지는 사진입니다. 그는 상고대를 ‘정신의 흰 뼈’ ‘영혼의 희디 흰 밥’으로 표현했습니다. 참 멋드러진 표현입니다. 현대판 ‘시화상간’이 아닐까요.
사진은 시와 그림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미술의 한 분야로 취급하지만 창작 과정을 보면 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좋은 시는 압축되고 정제된 언어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시를 읽으면 시가 묘사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영화 [동주]가 개봉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을 옮겨 볼까요.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우물 속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잔잔한 물은 거울이 돼 하늘을 비춥니다. 달이 있고, 구름이 흐릅니다. 그리고 우물을 들여다 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시를 읽으면 우물을 들여다보며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는 거울이나 물그림자 등 ‘반영’을 소재로 즐겨 다루는 사진의 형식과 많이 닮았습니다.
어떤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묘사하는 방식도 서로 비슷합니다. 다음은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수분과 섬유질, 그리고 색소로 이루어진 ‘물질(몸짓)’이 시인과의 교감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의 ‘꽃’으로 다가옵니다. 사진의 정신 역시 피사체와의 대화이자 교감입니다. 이를 통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담습니다. 사진도 시 ‘꽃’과 같이 피사체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입니다.
무엇보다도 시와 사진을 가깝게 연결시키는 것은 수사법입니다. 사진은 대상을 보고 느끼는 연상작용을 통해 의미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푸른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자유’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장미’를 보고 ‘유혹’을 느끼거나 하는 겁니다. 자유나 유혹은 원관념 새와 장미가 불러온 마음의 상 즉 ‘심상’입니다. 그리고 비교되는 두 대상의 개념이 서로 거리가 멀수록 비유법이 신선해집니다. 문학에서는 이를 직유법·은유법·의인법·제유법 등으로 표현합니다.
사진과 시의 창작 과정 닮아
사진의 표현형식 역시도 연상작용과 비슷합니다. 이미지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담고, 메시지를 전합니다. 감상자들은 한꺼풀 가려진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진 속에 숨겨진 비유의 뜻을 풀게 되면 희열을 느낍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비유가 풍부한 시를 많이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경북 예천에서 회룡포가 내려다 보이는 산정에 올랐습니다. 신새벽입니다. 마을을 감아 도는 곡성천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구름바다가 됐습니다. 운해를 뚫고 나온 가로등 불빛이 마치 알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사진2]. 나는 이 사진에 ‘부화(孵化)’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자연은 거대한 인큐베이터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넉넉하게 품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⑤] 아름드리 노송에서 비룡의 기품 포착
수화에서 사물 특징 포착한 추상적 표현 발달... 패턴인식→연상작용→레토릭
수화에서 사물 특징 포착한 추상적 표현 발달... 패턴인식→연상작용→레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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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에서 바위를 그리는 회화이론인 ‘준법(峻法)’이라는 것도 추상적인 표현방법입니다. 암석의 구조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패턴을 파악한 후 그 특징을 간략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피마준’의 ‘피마’는 ‘삼나무의 껍질’로 삼베 실을 뜻합니다. 삼베 실은 뻣뻣해서 구불구불합니다. 바위의 윤곽과 금이 간 모습을 삼베 실이 늘어지듯이 그리는 방법입니다. 또 ‘부벽준’의 ‘부(斧)’는 ‘도끼 부’ 자입니다. 바위의 질감이 마치 도끼로 쪼갠 듯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지층 활동이 왕성했던 바위를 보면 각이 져 있습니다. ‘미점준’이라는 준법도 있습니다. ‘쌀 미’ 자를 씁니다. 바위의 윤곽선을 그린 다음 붓을 옆으로 눕혀 마치 쌀알처럼 툭툭 찍는 기법입니다. 낮은 것은 먹이 짙게, 높은 것은 엷게 찍습니다. 바위 절벽에 듬성듬성 있는 나무의 모습이 그럴 듯하게 나타납니다.
바위 그리는 회화이론인 ‘준법’
나무도 칩엽수·낙엽수·고목 등 수종에 따라 특징을 포착해 서로 다른 붓질을 구사합니다. 나무를 그리는 방법을 ‘수지법(樹枝法)’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는 ‘해조묘(蟹爪描)’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나무나 죽은 고목을 그릴 때 즐겨 쓰는 방법입니다. 한자어 그대로 ‘게의 발’처럼 다소 거칠고 날카롭게 나뭇가지를 묘사합니다.
피마준의 ‘삼베 실’이나 부벽준의 ‘도끼 자국’, 미점준의 ‘쌀’, 해조묘의 ‘게의 발’은 자연계에서 따온 일종의 패턴입니다. 바위의 모양은 지형과 지세에 따라서 각기 다르지만 공통분모를 가진 어떤 특징, 즉 패턴이 있습니다. 준법이라는 것은 결국 패턴을 활용한 회화이론입니다.
산수화에서 추상적인 표현이 발달한 것은 문자의 영향도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한자는 상형문자로 사물을 본 떠 만든 회화문자에서 출발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자 자체가 ‘추상’의 개념과 통합니다. 그래서 사물의 특징을 포착하는 패턴인식이 남다릅니다.
산수화 이론의 대부분은 어떤 대상에 대한 관찰의 결과를 기록한 겁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화가인 형호(荊浩)는 그의 화론인 ‘필법기(筆法記)’에서 소나무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름드리 큰 노송은 껍질이 묵어 푸른 이끼가 끼어있는데다, 넓적한 비늘을 번득이며 공중으로 치솟아 있는 것이 마치 서리어 있던 ‘규룡(뿔이 있는 어린 용)’이 은하수를 향해 올라가는 기세였다. 숲을 이룬 것은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의기가 양양한 듯이 보이며, 그렇지 못해 외따로 서 있는 것은 마치 절개를 지키는 고사(高士)가 짐짓 구부리고 있는 듯했다. 또 어떤 것은 뿌리가 구불구불 땅을 뚫고 나와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크게 흐르는 물 위로 비스듬히 누워있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언덕에 걸려 있는 것, 시내에 구부러져 있는 것, 이끼를 헤치고 나온 것, 바위를 찢고 서 있는 것 등 그 기이한 절경에 나는 경탄하면서 두루 그것을 관상하였다.’
소나무 껍질을 ‘용의 비늘’에 비유합니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소나무를 ‘고사(高士)’가 구부리고 있는 듯하다며 의인법을 사용합니다. 산수화가 선 위주로 대충대충 그린 것 같지만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거의 소나무가 등장합니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 찬 숲을 그릴 때는 지그재그로 대충대충 그린 듯합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소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습니다.
송나라 곽희(郭熙, 1001~1090년)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과 물의 형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산은 큰 물체이다. 그 형상이 솟아 빼어난 듯, 거만한 듯, 조망이 널찍하여 툭 터져 있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듯, 다리를 펴고 앉아 있는 듯, 둥그스럼하게 큰 듯, 웅장하고 호방한 듯, 정신을 전일하게 한 듯, 엄중한 듯, 눈이 예쁘게 뒤돌아 보는 듯, 조회에서 읍하고 있는 듯, 위에 덮개가 있는 듯, 아래에 무엇을 타고 있는 듯, 앞에 의거할 것이 있는 듯, 뒤에 기댈 것이 있는 듯 해야 한다. 또 아래로 조감하면서 마치 무엇에 임해서 보는 듯 하게 해야 하고 아래에서 노닐면서 마치 무엇을 지휘하는 듯하게 해야 이것이 곧 산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물은 활동하는 사물이다. 그 형상이 깊고 고요한 듯, 부드럽고 매끄러운 듯, 살찌고 기름진 듯, 넓고 넓은 듯, 빙빙 돌아 흐르는 듯, 살찌고 기름진 듯, 용솟음치며 다가오는 듯, 격렬하게 쏘는 듯, 샘이 많은 듯, 끝없이 멀리 흘러가는 듯하게 해야 하고, 또 폭포는 하늘에서 꽂히듯 하고, 급히 흘러 부딪히며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 안개와 구름이 끼어 빼어나게 고은 듯, 계곡에 햇빛이 비치어 찬란한 듯하면, 이것이 곧 물의 활동하는 모습이다.’
산수화의 놀라운 사실성
세심한 관찰과 패턴인식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그림에 반영됩니다. 패턴인식이 연상작용을 불러 일으키고, 연상작용은 이미지의 레토릭으로 이어집니다. 그림이건 사진이건 풍성한 비유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미지에 한풀 가려진 이야기를 담습니다.
무릎을 치게 하는 비유는 사실성을 담보합니다. 풍경사진을 찍다 보면 우리의 산수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감탄하게 됩니다. 사진은 속성상 산수화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의 특정 대상의 패턴을 인식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면 추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빛의 활용, 피사계 심도, 렌즈의 선택과 활용 등 사진적인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세심한 관찰력입니다.
사진은 함백산에서 바라 본 만항재 일대의 모습입니다. 곽희는 산이 높게 보이려면 허리 춤에 운해가 드리워져 있어야 하고, 강이 길어 보이려면 끊김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산 봉우리를 에워싸듯 드리워진 운해가 산의 높이와 깊이감을 더해 줍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⑥] 그림에서 버려야 할 네 가지 ‘사첨속뢰’(바르지 않고 달콤하고 속되고 의지하는 것)
일관된 미의식 갖고 기본기에 충실해야... 감탄 넘어 감동 전해야
![]() ▎겨울나무, 2012 |
‘근본도 없이 사기치지 말라’
어려운 한자어입니다. 뜻풀이를 하면 그림뿐만 아니라 사진에서도 큰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황공망은 ‘사첨속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후대의 화가나 비평가들이 이를 나름대로 해석한 글이 전해집니다. 명나라 초 왕불(1362~1415)은 ‘사(邪)’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혹 어떤 등급의 사람들은 일에 옛 것을 배우지 않은 채 자신의 법을 행한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처발라 윤을 내고는 천취에 맞았다고 말하며, 그 아래 등급의 사람들은 붓끝을 뒤섞고 망령되이 가지와 마디를 만들어내며 음양을 이해하지 못하고 청탁도 구별하지 못하는데, 이는 모두 사(邪)라고 개괄할 수 있다.”
이 말은 기본기를 닦지도 않고, 공부도 않으면서, 철학적인 바탕도 없이 함부로 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근본도 없이 사기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진, 특히 현대사진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진이 난해하다 보니 난해함에 편승해 무임승차를 하는 것입니다. 생경하고 조잡한 사진에 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출품하는 것이지요. 또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진에 가해지는 지나친 ‘뽀샵질’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느껴집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사진강의 노트]의 저자 필립 퍼키스도 황공망과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보여 지는 것, 그 자체.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
기본기부터 다듬으라는 얘기입니다. ‘걷지도 못하면서 뛰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처음 사진을 찍을 때는 피사체의 밝고 어두움만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똑같이 찍을 것인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빛의 종류나 방향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느낌은 어느 정도 훈련을 거친 다음에야 알 수 있습니다. 사진에 ‘왕도’는 없습니다.
‘첨(甛)’과 ‘속(俗)’에 대해서는 ‘전신(傳神, 정신을 전한다는 뜻)을 소홀히 하고, 화려한 색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첨(甛)’은 ‘달다’는 뜻입니다. 영화 [첨밀밀(甛蜜蜜)]에 나오는 것과 같은 한자어입니다. 주제가를 들어보면 그 선율이 글자 뜻처럼 꿀처럼 달콤합니다. 깊이가 없는 단맛은 금세 식상하게 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초딩 입맛’이지요. ‘속(俗)’은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풍경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비록 자연의 색이라도 너무 화려하면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프레이밍을 달리하거나 흑백으로 처리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진가의 일관된 미의식입니다.
청나라 때 화가이자 비평가인 심종건(沈宗騫)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붉고 푸른 아름다운 광채를 일러 ‘華(화)’라고 하는데 이 또한 畵道(화도)에서 폐할 것은 아니며, 내가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곧 필묵 사이의 일종의 고운 태이다…(중략)…무릇 ‘華(화)’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고, ‘質(질)’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안에 감추어진 것이다. 그러한 즉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난 화는 한때 널리 떠다니는 허황한 명성을 얻지만, 아름다움이 안에 감추어진 ‘質(질)’은 천고에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다.’
요즘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SNS에서 ‘좋아요’를 많이 얻기 위해 화려한 색채만을 추구하지 않나요? ‘좋아요’가 많다는 것은 대중적인 인기의 척도는 될 수는 있지만 사진의 품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SNS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그 화려한 색채로 인해 눈길을 사진이 있는가 하면, 보면 볼수록 좋아지는 것도 있습니다. 좋은 사진은 ‘감탄’을 너머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뢰(賴)’는 ‘의지한다’는 뜻으로 ‘모방과 표절’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처음 사진을 배울 때는 유명 사진가들의 작품을 흉내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훈련’의 개념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지만 자기만의 창의성이 더해져야 비로소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청대의 소매신(邵梅臣)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능히 옛 사람과 합일될 수 있고, 또한 능히 고인을 벗어날 수 있는 것, 이것이 옛 것을 먹되 옛 것에 의해 목이 메지 않는 것이다.”
모방은 훈련에 그쳐야
세계적인 풍경사진가 마이클 케냐의 ‘솔섬’ 사진이 국내에서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습니다. 한 대기업이 국내 작가가 촬영한 솔섬 사진을 광고에 썼기 때문입니다. 논란 끝에 원고인 마이클 케냐 측이 패소했지만 뒷맛이 개운치는 않습니다. 법적인 판단은 존중하지만 사진가의 직업윤리로서는 원고 측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케냐는 몇 년 전 한국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석해서 이 사건에 대해서 “아마추어는 그럴 수 있지만 프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뼈아픈 말을 남겼습니다.
-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