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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를 봉했다는 조선과 단군이 건국한 조선은 서로 다른 곳이다.
『사기』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주(周) 무왕이 은(殷)을 평정한 후, 초(焦)·축(祝)·계(薊)·진(陳)·기(杞)·제(齊)·노(魯)·연(燕)·관(管)·채(蔡) 등에 선대의 후손과 공신들을 봉했는데 기자에 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사기』주본기(周本紀)에 기록되어 있는 기자에 관한 내용은 '주 무왕이 은을 평정하고 2년 후에 기자에게 은이 망한 이유를 물었는데, 기자는 하늘의 이치에 대하여 대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내용은 『사기』주본기(周本紀)에는 아예 없고,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그러나 신하로 삼은 것은 아니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봉(封)했다.'는 것은 신하로써 제후를 봉하는 것일 터인데, 신하로 삼은 것이 아니라면, 별도로 천제국이 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또는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는 하지만, 조선이 주(周)의 통치권력이 통하지 않는 별도의 천제국이므로, 조선으로 간 기자가 이제는 신하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무튼 기자에 관한 기록이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으므로 '기자를 조선에 봉하기는 봉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조선이라는 곳이 어디인지를 찾기 위해서 그 당시 주 무왕이 전쟁이 끝나고 선대의 후손과 공신들을 봉(封)한 곳이 어디인지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즉, 『사기』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무왕(武王)이 선대의 성군들을 추념하여 신농의 후손을 초(焦)에, 황제의 후손을 축(祝)에, 요의 후손을 계(薊)에, 순의 후손을 진(陳)에, 우의 후손을 기(杞)에 포상하여 봉했다고 한다.
또 상보를 영구(營丘)에 봉하고 제(齊)라고 했으며, 동생 주공 단(旦)을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고 했고, 소공 석을 연(燕)에 봉했으며, 동생 숙선을 관(管)에 봉했고, 동생 숙탁을 채(蔡)에 봉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기한 지명들을 『대청광여도』에서 찾아보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연(燕)·계(薊)·제(齊)·곡부(曲阜)·노(魯)·기(杞)·진(陳)·송(宋) 등이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 주 무왕 분봉지
또 은의 도읍지로 추정할 수 있는 은허가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에게 발굴되었으므로, 현재까지 은의 도읍지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인근주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기』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주 무왕이 은을 평정한 후, 은 주왕의 아들 녹보(祿父)에게 은의 유민을 봉해 주고, 주 무왕의 동생 숙선과 숙탁에게 관(管)과 채(蔡)를 분봉하고 녹보를 도와 은을 다스리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관(管)과 채(蔡)의 위치는 은의 도읍지 인근지역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은 주왕의 아들 녹보(祿父)는 은의 중심 강역인 현재의 안양시 인근지역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 1]에서 보면, 채(蔡)가 현재의 하남성 남쪽지역(현 주마점시 인근)에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은허가 발굴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이 과연 은의 도읍지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사기』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무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하자, 숙선과 숙탁이 녹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 성왕의 명을 받들어 주공은 은의 신하였던 미자(微子)에게 은을 계승하여 송(宋) 지역에 나라를 세우게 했으며, 무왕의 막내동생 봉(封)을 위강숙(衛康叔)에 봉했다고 한다. 즉, 미자는 은의 도읍지 인근지역에서 은을 다스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송(宋)의 위치도 은의 도읍지 주변 인근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송(宋)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동쪽지역(현 상구시 인근)에 표기되어 있다. 특히 현재의 하남성 상구시에 해당하는 곳에 주 무왕이 미자(微子)를 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은허가 발굴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이 은의 도읍지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대청광여도』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 중 대략 80% 정도는 위치가 변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거: 다음카페 동북아역사연구소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결정적인 위사들 1, 2, 3' 참조)
즉, 상기한 지명 중 변이된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찾아보면, [그림 2]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그림 2] 연, 제, 노 등의 본래 위치 추정지역
다시 말해서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는 계(薊)라고 불리던 지역인데,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북경시 주변지역으로 로 변이되어 있으나 본래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제(齊)의 도읍지 익도(益都)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청주시로 변이되어 있으나 본래 현재의 하남성 개봉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사기』에 따르면, 제(齊)가 남쪽으로 노(魯)와 채(蔡)를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노(魯)·곡부(曲阜)·채(蔡) 등의 본래 위치는 제(齊)의 남쪽지역으로서 현재의 하남성 개봉시 남쪽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채(蔡) 인근지역에 노(魯)와 곡부(曲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채(蔡) 인근지역에 관(管)과 송(宋)이 있었으며, 송(宋)의 도읍지가 은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주(周) 무왕이 기자를 봉한 곳이 옛 은(殷)의 강역으로서 주(周)의 통치권이 통하는 곳이었다면,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이 상기한 지명들이 형성하는 지역 내부 주변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반면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이 주(周)의 통치권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라면, 상기한 지명들이 형성하고 있는 지역에서 외곽으로 벗어난 지역에 조선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조선·연·제·부여 등의 위치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3] 연의 주변 상황
즉, 연(燕)의 동쪽에 예·맥·조선·진번 등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한(漢) 무제가 조선의 왕검성을 공격할 때, 연(燕)과 대(代)의 군사들이 조선의 서북쪽을 공격하고, 제(齊)의 군사들이 조선의 남쪽을 공격했으므로, 조선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산해경』해내경(海內經)과 해내북경(海內北經)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천독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사람을 어여삐 여긴다."
"조선이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海)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즉, 조선은 연(燕)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燕)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에 도읍지 연도를 두고 있었다면, 조선은 그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기』, 『한서』, 『후한서』, 『산해경』등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은 왕검성(王儉城)이 있었던 조선으로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인근지역에 있었던 나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기이제일(紀異第一) 고조선(왕검조선)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단군(檀君)이 조선을 건국했는데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庚寅年, 당요가 즉위한 원년이 무진년이니, 50년은 경인년이 아니라 정사년이므로 아마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서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즉, 단군이 세운 조선은 고려의 서경(西京)이 있었던 곳으로서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고구려 평양성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또 대동강이 패수임에 틀림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단군이 세운 조선의 도읍지를 평양성이라고 불렀건, 아니건 간에 단군이 세운 조선의 도읍지는 고려의 서경이 있었던 곳으로서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 그 곳에 흐르는 강이 패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대동강이 흐르고 있는 현재의 이북 평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청광여도』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 중 대략 80% 정도는 위치가 변이되어 있으며, 1512년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재간행하면서 뜯어고쳤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근거 (근거: 다음카페 동북아역사연구소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결정적인 위사들 1, 2, 3' 참조)
즉,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녕진현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 위치는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다.[근거: 다음카테 동북아역사연구소 논문 「낙랑(맥국)과 옥저(예국)의 위치에 관한 연구」 참조]
[그림 4] 평양성 등의 추정지역
그런데 『삼국유사』기이제일(紀異第一) 마한(馬韓)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삼국사기』를 인용하면서 예국과 맥국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명주(溟州)는 옛날 예국(穢國)이었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印章)을 얻어 바쳤다."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이며, 옛날의 맥국(貊國)인데, 어떤 이는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 하며, 어떤 이는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 한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청광여도』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 중 대략 80% 정도는 위치가 변이되어 있으며, 1512년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재간행하면서 뜯어고쳐져 있으나, 중국 23사 각 지리지 등에 삽입되어 있는 위사(僞史)들을 분별해서 솎아내고 남아있는 원본(原本)들의 기록에 근거하면, 명주(溟州)·삭주(朔州) 등 신라 9주의 위치를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근거: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6. 2. 11. 참조)
[그림 5] 신라 9주의 추정지역
다시 말해서 명주(溟州)와 삭주(朔州)는 신라 9주에 해당하는 주(州) 명칭으로서 각각 현재의 산동성 빈주시와 덕주시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4]와 [그림 5]를 비교해 보면, 명주(溟州)는 하슬라주라고 칭했던 곳으로서 예국(穢國)이 있었으며, 삭주(朔州)는 우수주라고 불렀던 곳으로서 맥국(貊國)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맥국이 있었던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녕진현 인근지역에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그림 3]과 [그림 4]를 비교해 보면, 연(燕)의 동쪽에 예(穢)·맥(貊)·조선(朝鮮) 등이 있으므로 『사기』와『삼국유사』의 기록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진번(眞番)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이 별도로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 기이제일(紀異第一) 위만조선(魏滿朝鮮)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연(燕)이 항상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범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진번과 조선은 연(燕)에 인접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의 위치를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진번(眞番)의 위치는 연(燕)과 조선에 인접해야 하므로 조선의 남쪽지역으로서 황하 강변 북쪽지역인 현재의 하남성 초작(焦作)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상기한 『삼국유사』기이제일(紀異第一) 고조선(왕검조선)에 관한 기록을 보면, 단군이 건국한 조선이 고조선, 또는 왕검조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조선'은 근세 조선이 있으므로 '옛 고(古)'자를 추가했다고 볼 수 있으나, '왕검(王儉)'을 추가하여 '왕검조선' 이라고 기록하고, '단군'을 '단군왕검'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한 것은,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과 단군이 건국한 조선이 동일한 '조선'인 것처럼 꾸며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사기』, 『한서』, 『후한서』 등에서 한(漢) 무제가 조선을 공격할 때 패수(浿水)를 건너갔다고 기록한 것은 기자를 봉하고 왕검성이 있었던 조선이 마치 단군이 건국한 조선인양 꾸미기 위하여 강의 명칭을 바꿔치기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즉, 연(燕)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에는 요수(遼水)가 흐르고 있는데, 현재의 청장하와 탁장하로 추정할 수 있다.
어쩌면 현재의 청장하와 탁장하가 합류하여 하류로 내려가면서 패수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산동성 오경하와 이어져 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난 수천년간 황하가 범람하여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도 하고 황하 수로(水路)의 방향이 남북으로 변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과 단군이 건국한 조선의 위치는 서로 다른 곳임을 알아챌 수 있다. 또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의 도읍지가 왕검성이었다면, 단군이 건국한 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기』, 『한서』, 『후한서』 등에서 '요수'를 '패수'라고 바꿔치기하여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이 마치 단군이 건국한 조선인양 왜곡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서는 '왕검조선'과 '단군왕검'을 삽입해 넣음으로써 단군이 건국한 조선이 마치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과 동일한 나라인양 의도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두 나라의 국호가 모두 조선이었겠는가?
여기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단군(檀君)'의 '임금 군(君)'은 임금을 의미하는 칭호라고 볼 수 있다. 즉, '단(檀)'이 국호였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에 따르면, 요(堯)가 동쪽으로 가서 동방(東方)의 군장(君長)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기』에서 '임금 군(君)'자를 기록한 것은 몹시 특이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첫댓글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고 했었는데, 만일 周武王의 시기에 ‘조선(朝鮮)이 있었었다’고 하더라도, 우선 먼저, '기자(箕子)'라는 작위가 어떻게해서 부여된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즉, '기(箕)'라는 지방에 사는 어떤 인물이 殷王으로부터 작위[子爵(자작)?]를 부여받았으므로 '기자(箕子)'로 불리웠었을 수도 있겠고, 殷王이 어떤 인물에게 작위[子爵(자작)?]를 부여하고서 '기(箕)'라는 지방을 주어 다스리도록 하였었더라도 마찬가지로 '기자(箕子)'라고 했었을 것이므로 ‘조선(朝鮮)’을 찾기전에 먼저 '기(箕)'를 찾아서 그곳을 ‘조선(朝鮮)’이라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봅니다
백번 맞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꼼곰하시군요. 조선이 요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하니 이미 조선은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단군이 세운 나라 이름이 과연 조선인가? 또 기자가 온 조선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단군왕검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미 나왔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다해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000 했다고 하더라.'라는 정보는 전혀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으면,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윗글에서 보시다시피 '기자조선'이란 별 가치없는 역사해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고 조선의 실체를 찾아가고 있어요.
@다해 범어로 푼다면, '다해'는 '모두 다 해결한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군요. 중국 조선족인가 보군요. 함경도 사투리를 하고 있으니. 아무튼 걱정할 필요 없어요. '태학'을 방문하면, 제가 연구한 것을 순서대로 게재해 놨어요. 하나하나 읽으면서 공부하면 되겠죠. 제 학설이 황당하다고 느껴질 수록 왜 그럴까? 의문이 든다면,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자질이 충분한 것이죠. 앞으로 통일되면, 적어도 대략 1억 명에 대한 역사교육을 다시 해야 할 터이니 공부해 보셔요. 전공이란 학교 다닐 때 선택한 것이고, 관심과 취미가 있는 것을 하나 잡으면, 누구든지 1인자는 아니어도 전문가 반열에 들 수는 있을 겝니다.
@다해 한문은 우리 조상님들이 만든 글자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이처럼 지식들이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한문이 단음절로 발음되는데, 중국과 일본은 발음이 잘 안돼서 이 음절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치요. 즉, 자기들 말에 맞춰서 만들어진 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일이 되도 할 일이 많고, 안돼도 그 전에 할 일은 무지 많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