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1482-1519)는 죽은지 500년 가까이 되었으나 정치판에서 왕도정치, 지치주의라는 말이 자주나온다. 그의 죽음을 이르게 한 신념이 무엇이며 또 그는 누구인가?
그느 조선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세손으로 아버지 조원강(趙元綱)의 아들로 때어나 18세 때 아버지가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니 따라가 마침 희천(熙川)에 귀양와 있는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을 찾아가 소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배웠다. 이것이 후일 그의 도학사상(道學思想)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510년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고 1515년에 증광문과에 을과 급제 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이때부터 지치주의(至治主義)애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역설하였다.그가 개혁을 추진한 햇 수는 4년간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란 유교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는 나라를 다스리는 중심에 서 있는 즉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이 정체가 바로 서야 국가의 정체성이 바로 섬을 말하는 것이다.
왕도(王道)란 말은 맹자(孟子)에게서 부터 시작되었는데 유교적 가치(儒敎的 價値)를 정치에 적용하여 이상적(理想的)인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여기서 이상사회(理想社會)에 도달하게 하는 정치를 지치(至治)라고 말한다.
군주정치 시대에 이상사회에 이르는 정치를 하자면 자연히 군주의 마음이 중요한 관건이 되었으며 군주의 마음 여하에 따라 정치체제와 정치적 교화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관료와 백성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도학이 학문적 맥락은 정몽주를 비롯하여 길재, 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져
이황,이이 등 대석학이 나오는 토대가 되었으며 훗날 선비정신으로 이어진다.
조광조의 이러한 명분도 기득권을 가진 훈구대신(勳舊大臣)들에게는 정권을 내 놓으라는 것과 같으니 반대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광조의 개혁은 계속되었다.
첫번째로 1515년 훈구세력의 지지기반인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1518년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18명의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때 부터 조정은 시끄러웠다. 조광조가 자기 사람을 뽑아 붕당을 만든다는 것이다. 1519년에는 반정공신 중에 부당하게 공신 반열에 올라 있는 76명의 공신들을 공훈을 삭제하고 토지를 몰수하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때 벌써 공신이 너무 많아 국가의 토지가 모자라 새로 임명되는 관료에게 지급 할 토지가 경기지역에서는 절대 부족하였다.그래서 새로이 임명되는 관료에게 토지를 지급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를 수 밖에 없어졌다. 기득권 세력을 가진 훈구세력들이 그냥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조광조가 죽음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현량과의 신설과 가짜 공신들의 토지 몰수였다.
훈구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홍경주(洪景舟)의 딸 희빈 홍씨를 쑤셔 중종 임금의 귀에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 갔다"라고 일러 바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홍경주는 조광조가 왕실에 가까운 신하를 제거한 후 임금 자리를 노린다고 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주초위왕(走肖位王)" 이란 나뭇잎 글자를 궁궐 나뭇가지에 매달아 모함을 시작하고 이어 심정(沈貞)1471-1531, 남곤(南袞) 1471-1527,등과 함께 결국 1519년 11월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조좡조,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을 귀양보내고 또는 사형,자결케 하였다.
남곤은 의령 南氏로 호는 지족당이다.김종직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이후 영의정에 오르고 호의호식 하다가 말년에 자기의 죄를 자책하고 서책을 모두 불살라 버리는 등 기묘사화의 잘못을 뉘우쳤으나 죽고 난 뒤 사림파의 공격으로 삭탈관직 되었다.
심정(沈貞) 은 풍산(함경도의 풍산현) 심씨로 기묘사화 이후 이조판서, 좌의정에 올랐으나 1530년 김안로(金安老)의 탁핵으로 유배되었다가 1531년 경빈 박씨와 통정하였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조광조의 유배지-전라남도 능주 이곳에 유배와 있다가 한 달 뒤에 사사되었다.
첫댓글 좋은 사료 실어서 배움의 기회를 주어 참으로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