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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좌에 올라 양구한 후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세 번 내리치고 이르시길.
오늘은 석가세존께서 밝은 별을 보시고 도를 깨달으셨다고 하는 납월 팔일 <음력 섣달 12.8> 입니다.
그러면 우리 대중은 세존께서 밝은 별을 보시고 도를 깨달으신 도리를 한 번 봅시다.
대체 석가모니부처님이 별을 어떻게 봤으며 무슨 일을 했는가. ?우리 한번 따져 봅시다. 이게 참말인가? 거짓말인가?
대중아, 하나도 빠짐없이 이 주장자 머리를 봐라!.이걸 바로 봐야 돼. 그냥 고개 수그리고 앉았으면 내 얘기를 잘 몰라.
분명히 이 주장자 머리를 대중이 모두 다 보고 있어.
그러면 석가세존께서 보신 별과, 내가 이렇게 들고 있는 이 주장자 머리와 다른가 같은가?
주장자 머리에 눈이 있으니 만약 이 주장자 머리에 눈이 있다는 것을 아는 납자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석가여래와 미륵 부처님이 도망갈 문이 없고 임제와 덕산스님이 몸 감출 곳이 없어. 그것이 어떠한 도리인고?
악! 법좌에서 일갈하시다.
용맹스러운 사자입 속에 든 밥을 뺏어 오는 도리요, 신령스러운 용의 턱 밑에서 여의주를 꿰어 목에 걸어오는 도리더라.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탕!>
법좌에서 주장자를 세워 법상에 한 번 내리치시고.
세존견성시하사 일물원래무면목
世尊見星是何事 一物元來無面目
덕숭의구성총림 설리매향촉비래
德崇依舊盛叢林 雪裡梅香觸鼻來
세존께서 별을 보시니 이 무슨 일이냐?
한 물건이 있으되 원래 모습이 없어
덕숭산은 의구하여 총림이 무성하니
눈속의 매화꽃 향기 코를 찔러 오더라.
석가세존께서 새벽녁 밝은 별을 보시고 도를 깨달으셨다고 하는 일이 대체 무슨 일이더냐? 작은 일이 아니고 큰 일이야. 큰 일이어도 천상천하에 이것보다 더 큰 일이 없어. 제일 큰 일을 하셨어.
큰 일을 하셨다고 하는 그 일이 대체 무슨 일이더냐? 한 물건이 있으되 본래 모양이 없어.
덕숭산에 선원을 연 지가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되는 기간 동안에 경허선사가 열반 하셨고, 만공선사가 열반하셨고, 용음선사가 열반하셨고, 고봉선사가 열반하셨고, 금봉선사가 열반하셨습니다.
여기에 아주 훌륭한 선지식들이 출현을 해서, 많은 선객과 정안 남자를 길러낸 도량입니다. 그런데 70년 후의 오늘날까지도 이 덕숭산 산림 대중은 무성할대로 무성해서, 이와 같이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덕숭산은 의구하여라!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이 덕숭산 상없는 가풍이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난 곳에 '눈 속에 매화꽃 향기가 코를 찔러 오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의 견성오도에 대해서 조금 더 주석을 달겠습니다.
일견명성몽변회 천년도핵장청매
一見明星夢便廻 千年桃核長靑梅
수연불시조강미 증여장군지갈래
雖然不是調羹味 曾與將軍止渴來
별을 한 번 보고 꿈을 문득 돌이키니
천 년 되는 복숭아씨 속에 길이 매화꽃이 푸르렀더라.
비록 국 맛이 고르지 아니하나
일찍이 장군으로 하여금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더라.
석가세존께서 도를 통하신 까닭이 별에 있는 게 아니야.
그 까닭은 별을 보는 놈! '별을 보는 놈' 여기에 까닭이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신 것은 별이 아니야. 바로 별을 보는 놈을 보셨어. 분명히 이것은.?
내가 비록 지옥으로 화살같이 가는 구업을 짓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이보다
더 가깝게 할 말은 없어. 석가여래가 별을 보신 것이 아니야. 별 보는 놈을 봤어.
그래서 별을 인해서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문득 꿈을 돌이킨 거야. 꿈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잖아. 사실이 아닌 그게 꿈이라고 하는 거야. 여러분들은 이렇게 얘기를 하면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얘기야. 꿈이라고 하는 게 사실이 아니잖아.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돌이킨 거야.
?사실이아닌 것을.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좋고 싫고, 이렇게 보고 듣고, 나고 죽고 온삼라만상이 틀림없이 역력분명하되, 또한 그 근본 자리에 돌아가서 사실이 아닌 도리가 있어. 사실 속에 사실이 아닌 도리가 있어. 사실 아닌 도리를 바로 깨달아야 사실을 알게 되는 거야.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별로 인해서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문득 꿈을 돌이키셨더라 이 말이야. 천 년이나 되는 복숭아씨 속에 길이 매화꽃이 푸르렀더 라. 이러한 도리가 있습니다.
비록 국 맛이 고르지는 아니하나, 그 국 맛을 가지고서 만족하게 기갈을 면할 수는 없으나, 일찍이 장군으로 하여금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니, 이것이 대체 무슨 도리냐?
옛날에 어떤 장군이 백만 대병을 인솔해 사막을 통과하는 중에 물도 없고 허기도 지고 다리도 아프더란 말이야. 물을 먹어야 살겠는데 사방에 사막이라 물이 없어. 물은 없고 끝없이 햇볕이 쬐어 기갈이 극에 달해 병사들이 퍽퍽 쓰러져 죽어. 도저히 갈 수가 없게 되었어.
이렇게 절박한 경계에 다다라서, 그들에게 물 한 모금도 먹이지 아니하고, 갈증을 면하게 만드는 도리가 있다 이 말이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장군이 백만 대군을 불러 앉혀 놓고서는 입담 좋게, 아주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고 하니,
“내가 매화 숲 속에 들어가서 매실을 따먹었느니라. 매실을 따먹으니 그 매화 열매의 시구러운맛이 기가 막히더라.”
병사들이 그 얘기를 멍하니 듣고서는 상상을 해. 상상을 하니까 입안에 침이 막고여서 그 침을 넘겨 가지고서 갈증을 면했어.
그것 참 묘한 도리야. 목말라서 쓰러져가는 군대를 구해준 것은 진짜 물이 아니란 말이야. 장군의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어. ‘시다’고 하는 그 마음이 움직이니까 침이 생겼어.
그 ‘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움직이는 이 묘한 도리를 대중이 알아들을 것 같으면, 영원한 생사의 기갈에서 진락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야.
오늘 법회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오셨고, 우리 정진대중도 용맹정진을 계속해서 잠을 자지 아니 했는데, 그러면 대체 불교라고 하는 것이 왜 이 세상에 이렇게 존재하느냐? 밥 먹고 살면 되는 일이지 무엇 때문에 불교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찾아야 하느냐 말이야.
불교라고 하는 것은 냉정하게 말해서 등신불을 믿는 것도 아니고, 경전을 외우는 것도 아니고, 주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 깎는 것도 아니고, 가사장삼입는 것도 아니고, 청정한 계행 지키는 것도 아니야.
그런 건 다 불교가 아니야. 필요에 따라서 하는 것이지. 또한 사찰도 불교가 아니고. 그러면 무엇이 불교냐 이 말이야. 과거에 도를 깨달았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불교인가? 그거 불교 아니야. 세음보살이 불교인가?
그것도 불교가 아니야. 그러면 뭐가 불교냐? 다 불교가 아니라면, 나보고 미쳤다고 할는지도 몰라.. 절대로 그걸 불교라고 할 것 같으면 불교를 잘못 믿는 외도야. 그것이 바로 외도야. 러면 어떻게 불교를 믿어야 하느냐?
여기에서 우리 대중들이 진실하게 똑바로 알아들어야 돼. 내가 불교야. 부득불 불교라고 이름을 붙여서 얘기를 하지만, 하나님도 불교가 아니고 부처님도 불교가 아니야. 내가 불교야.
모두가 다 '나'를 가지고 삽니다. '나'를 가지고 태어났고, '나'를 가지고 살고, '나'를 가지고 죽습니다. 누가 '나'를 만들어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살려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죽이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생겨나서 내가 살다가 내가 죽는 거야.
그러니 모든 것이 '나'야.? 나 말고 다른 물건이 있다고 하면 거짓이야. 전부가 나야. 지금 우리가 진실로 나를 알지못했기 때문에 너와 내가 있고 하늘, 땅이 있고 부처와 범부가 고, 생과 사가 있고, 이리저리 너절한 것이, 호화찬란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진실로 나를 안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이 분명히 없어. 거짓말로 없는 게 아니라 분명히 없어. 나님을 여의고서도 살 수 있고, 부처님을 여의고서도 살 수 있고, 옷 하나도 안 입고 살 수 있고, 부모처자 없어도 살 수 있어.
그러나 '내'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이 내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이렇게 가깝고, 이렇게 긴요하고, 이렇게 진실한 나를 우리가 아느냐?
그렇게 현묘한 나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 그러면 '나'를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떠냐? 이게 문제입니다.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삼라만상이 벌어져 가지고 피와 차가 생기고, 나와 남과, 생과 사가 생겨. 그러니까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바로 범부요, 생사고해에 영원히 떨어져 버리는 거야.
나를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생사에 상관이 없는 것이고, '나'를 안다고 할 것같으면 저 삼라만상과 내가 둘이 아니야. 내가 둘이 아니야! 하늘 땅이 생기기 이전의 그 면목이 '나'야.
불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필요해서 믿고 닦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본을 찾아 들어가는 법이 불교야. 이것을 알아야 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지 불교는 아닙니다.
오늘 여기 처사님들이 많이 있으니까 처사님 얘기를 한 마디 하겠습니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의 소동파는 유불선 삼도에 무불통지?한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이 소동파가 자기에 대해 생각해 보니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걸림이 없어.
그러고 보니 그 이치에 대해서 누군가와 그 진리에 대해서거량을 해 보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상대가 없어. 어느날 자기 계획대로 동림사의 상총선사를 찾아갔어. 찾아가서,
“스님의 이름이 무엇이요?” 하고 물었어.
“아무개올시다.”
그 스님이 자기 성명을 대 줘.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남의 이름만 물어 보고 자기 성명은 대지를 않거든. 그러니까 상총스님이 소동파의 이름을 물었어.
“당신 성명은 뭐요?”
“예, 나는 칭거사올시다.”
“그래 무슨 칭자요?”
“저울대 ‘칭자올시다.”
“하고 많은 문자를 다 두고서 어째 저울대 ‘칭’자를 쓰시오?”
“천하 도인들을 저울질하고 다니는 처사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울대 ‘칭’자를 놨소이다.”
이렇게 말을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스님이 느닷없이 ‘악!’ 하고 소리를 냅다 한 번 지르고서,
“이 소리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달아 봐라.”
거기서 꽉 막혀 버렸어. 고승이 아니라 고승대덕 할아버지라도 한번 해 볼자신을 가지고 갔는데 그 한 마디에 그냥 꽉 막혀버렸어.
그러나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소동파가 아니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하고는 휑하니 나갔어. 자존심을 꺾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거기서 완전히 죽어 버렸어.
가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런 봉변이 없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정신없이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꼬비를 당기지 않으니 제가 가고 싶은 대로 가다가
말이 물이 먹고 싶어서 쏴하고 떨어지는 폭포 앞에 와서 물을 먹고는
꼬비를 당기지 않으니 그대로 서 있을 수 밖에...
정신 잃은 소동파가 쏴 하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서 그만 깨달았어.
물소리를 듣고.. ‘한 번 소리지른 무게를 달아 보라’는 말의 이치를 알았어.
그러고는 오도송을 지었어.
계성변시광장설 산색기비청정신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갈 타일여하거사인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폭포 물소리 부처님의 다함없는 법문이요
산 빛이 그대로 부처의 몸일세.
어젯밤 깨달은 팔만사천 가르침을
어떻게 그대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게송을 지어 놓고 보니까 참 근사하거든. ‘야, 이것 가지고 가서 또 한 번 적을 해 봐야 되겠다’ 하면서 가다가 다시 돌아왔어. 다시 와서는 “내가 이 게송을 지었으니 한 번 감정해 보시오.” 하며 내놨어.
그러나 스님은 그냥 치워 버려. 쓸데없는 도깨비짓 하지 말라는 거야. 근사하게 오도송을 지었는데 또 쫓겨났어. 집으로 돌아가서 밤잠을 안 자고 공부를 했어. ?그 때 터져 나온 오도송이 이거야. 참 견성구지.
여산연우절강호 미도천반한부소
廬山煙雨浙江潮 未倒千般恨不消
도득환래무별사 여산연우절강호
到得還來無別事 廬山煙雨浙江潮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이르지 못했을 땐 천가지 한이었네.
이르고 보니 별다른 것이 아니라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네.
이 게송을 가지고 또 상총스님한테 갔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끄덕 했어.
그렇게 소동파가 두 번 오도를 했는데, 이 게송이 두 번째의 오도송입니다.
용맹정진을 하고 어려운 법문을 듣고 할 적에는, 등에 땀이 나고 이마에 땀이 나고 답답하고 어렵지만, 중국의 소동파 같은 이도 상총스님한테 주장자도 맞고 야단도 듣고 이렇게 많이 애를 썼기 때문에 위대한 재가의 선지식이 된겁니다.
그러니까 이번 수련법회에 참석한 모든 불자들이 과거의 소동파처럼 된다면, 우리나라는 세상을 밝게 하는 국가가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앞으로 온 세계에 나를 깨달아서 '참나'를 아는 그러한 정신문명의 맹주가 될 있기를 당부드립니다.
이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방편설도 많고 이러저러한 말도 많습니다만 속지를 않아야 공부를 바로 하게 됩니다. 말에 속고, 형식에 속고, 법문에 속고, 전부 속아. 아서 그냥 일생을 흘려보내.
속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비유컨대 무엇과 같은고 하니 원숭이라고 하는 놈과 같다 이 말이야. 그놈이 제 그림자를 보고서 자꾸 잡으려고 그래. 잡으려고 자꾸 헛손질을 한단 말이야. 암만 잡으려고 애써 봐야 그림자가 어디 잡히나.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잡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도 원숭이란 놈은 제 그림자를 제가 잡으려고 그런단 말이야. 우리 선객들이 노력을 하는 것이 마치 원숭이가 제 그림자 붙들려고 하는 것과 같아.
이 붙들려고 하는 놈이 바로 저야!
그 그림자 암만 붙들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그림자를 붙들려고 노력하는 요게 바로 저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림자가 저인 줄 알고 붙들려고 하네. 허 참.... 이게 참 묘한 비유야.
이 그림자에 따라가지 말고, 이 그림자를 잡으려고 하는 요놈을 돌이킬 줄을 알아야 해.
‘일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이 하나가 무엇인고?’
‘조주스님이 '無'라 일렀으니, 어째서 무라고 이른 뜻이 무엇인고?’
모든 화두를 이렇게 외고 앉았는데, 화두를 하되 그 화두를 쫓아가지 말고 화두 드는 ‘그 놈’을 돌이킬 줄 알아야 됩니다.
오늘은 성도재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날마다 별을 보셨지만, 오늘 별을 보신 것은 반짝거리며 허공에 있는 그 별을 본 게 아니고 별을 보는 ‘놈’을 보셨어. 그렇듯이 우리 대중들도 자꾸 화두만 들고 앉았을 게 아니라 화두 드는 놈을 한 번 들어봐.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해서 생사영단을 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일이에요. 그러나 그 문제가 그렇게 복잡하지를 않아. 간단해. 모든 것은 다 생각이야.
참선을 하느니, 주력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그것이 다 우리 생각으로 하는 거야.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으로써 생각을 다 하는 것이야. 생각을 잡고 그것을 연속하는 것이 참선이 아니라, 생각으로써 생각 다한 곳을 돌이켜.
이것이 아주 참 간절한 소리라. 생각은 생각이야. 사실, 세속 생각하는 거나, ‘이 뭣고’ 생각하는 거나, 생각은 똑같은 생각이야. 그러나 이 참선한다고 하는 생각은 생각으로써 생각 다한 곳을 돌이키는 거야.
세상 생각은 자꾸 생각으로써 생각이 번져나가는 생각이지마는, 이 참선이라고 하는 이 공부는 생각으로써 생각을 다 하는 곳에 돌아가.
생각으로써 생각 다 하는 곳에 돌아가되, 다 했다고 하는 놈마저 아주 없어야 돼. 영 없어야 돼. 참 이게 기막힌 말이야. 없다고 하는 놈이 있어서는 안 돼. 아주 없어야 돼.
그 자리에 이를 것 같으면 이사가 무이야. 깨달음覺과 미한 것이 둘이 아니야.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야. 제불조사와 내가 또한 둘이아니야. 옛과 지금이 둘이 아니야.
그러면 하나냐? 하나도 아니야. 이렇게 되는 그 자리에 이르면 다 되었느냐?
‘이러한 땅에 내가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삼생육십겁을 참선 해야 얻는다.’ 이랬어. 진실해야 돼.
불법문중에서 가장 큰 죄가 있는데 사람을 죽이는 죄보다도 더 크고, 세상을 불사른 죄보다 더 큰 죄가 있는데, 정법을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없어. 참 그것이 큰 죄야. 그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삼생육십겁 참선해야 비로소 일이 돼요.
그렇게 된 후에야 밑 없는 배를 타고 큰 바다를 자재롭게 떠다닐 수 있어요. 이렇게 된 뒤에 비로소 불조의 은혜를 갚고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거야. 우리스님들의 책임이 과연 얼마나 무거운가를 깨닫고, 내 마음을 밝히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무서운 줄을 알아야 돼요.
참말로 무서운 줄을 알아야 돼. 차라리 팔팔 끓는 쇳물을 한 사발 먹을지언정, 시주의 밥 한 그릇을 공부 안하고 먹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 말이야.
요새 스님들은 신도들이 자꾸 바치니까 이게 무슨 공짜인 줄 알고서 자꾸 수용하고 그러는데 그거 큰일난다고. 그거 먹고서 당장 죽으면 그 업이 가볍지만, 그거 갚아주려고 그 집에 가서 종노릇 하려면 일생동안 해도 안돼요. 몇 생을 드나들어 종 노릇 할 생각을 해야 돼요.
지금은 신도들한테 절 세 번씩 받고, 뭐 공양을 받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공부 없으면 그게 모두 그 사람한테 갚아야 할 빚인 것을 알아야 돼. 큰일 난다고. 절대로 공짜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 스님네들은 시주물을 무서워해야 하고, 시간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 돼.
이 시간이 짤깍짤깍 가는 대로 나에게는 죽음이 그만큼 가까워져요. 한번 죽은 다음에 이 몸뚱이를 다시 얻을 수 있느냐? 이 몸을 다시 얻기가 어려워.
사람의 몸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출가를 해서 부처님의 무상정법을 만나기가 어려워. 정법을 깨닫기가 어려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사람 되어 출가하여 이 무상정법을 닦아 가는 마지막 어려운 고비까지 올라 왔는데,
이렇게 여기에서 몇 억만 년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이렇게 다행스럽고 이렇게 좋은 호화를 멍하니 시줏밥만 먹고 그냥 졸고 망상 피우고 허송세월 한다고하면 이게 얼마나 한심하고도 가련한 인생이냐 이 말이야.
공연스레 큰방에 앉아 있으니까 무슨 부처 된 것처럼 허송세월하며 속지를 말고 속으면 큰일납니다.
어쨌거나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깨달았건 못 깨달았건 이 무상정법?을 한 번 닦겠다고 시늉만이라도 낼 것 같으면 다 조사가 될 수 있느니라.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세 번 내리치시고 내려오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