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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흉노는 바로 부여
『사기』열전 중에 북흉노전과 남흉노전이 있는데, 남흉노전만 남아있고 북흉노전은 멸실되어 아쉽게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남흉노전에 따르면, 흉노의 거주지 지명으로서 임조, 농서, 북지, 상군, 대, 안문, 운중, 상곡, 어양, 요서, 북평, 요동 등 12개의 지명들이 나타난다.
상기한 지명들의 위치를 청(淸) 대에 제작한 『대청광여도』에서 찾아보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1] 흉노 거주지역(근거:『사기』흉노열전)
또 상기한 지역의 흉노를 내쫓고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데 상기 지명들의 위치는 모두 변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마치 북경시에 있었던 것처럼 알려져 있는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연도(燕都)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에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근거; 다음카페 동북아역사연구소 '역사를 왜곡시고 있는 결정적인 위사들' 참조)
즉, 유주(幽州)에 속했던 지명들인 상곡, 어양, 요서, 북평, 요동 등의 본래 위치가 모두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가 있었던 산서성 남부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흉노 거주지역의 본래 위치 추정지역
또 대, 안문, 운중 등은 병주(幷州)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본래 위치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서남부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병주는 유주의 서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代)는 유주에 속하기도 했던 지역으로서 병주와 유주의 경계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대, 안문, 운중 등은 매년 흉노 선우가 회합을 가졌다는 선우정에 속하는 지역인데, 유주의 서북쪽에 인접해 있었던 지역으로서 현재의 산서성 북평진 인근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태원(太原)이란 지명의 본래 위치는 현재의 산서성 홍동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사기』흉노열전에 따르면, 한(漢) 고조(서기전 206~195년)와 모돈 선우(서기전 209~174년)가 전쟁을 할 때, 모돈 선우가 대(代)에서부터 군사들을 이끌고 구주산(현 산서성 태악산으로 추정)을 남서쪽으로 넘어갔는데, 남쪽을 바라보니 한(漢) 고조의 군대가 평성(현 임분시로 추정)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유인하기 위하여 패주하는 채하고 다시 구주산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그 당시의 상황과 지형들을 고려하면,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태원(太原)의 본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홍동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평성은 현재의 산서성 임분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3] 한 고조와 모돈 선우 전쟁 추정경로
그러나 임조, 농서, 북지, 상군 등은 『사기』 또는『한서』지리지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므로 본래의 위치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없다.
그런데 북흉노를 막기 위해서 장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장성의 위치는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홍동현 바로 북쪽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림 4] 만리장성 등의 추정지역
한편,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낙양에서 동북쪽 4,000리 거리에 현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후한서』동이전에 따르면,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부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부여의 위치가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치 현재의 길림성 장춘시 주변 인근지역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림 5] 부여의 위치(근거:『후한서』 군국지 및 동이전, 위사임.)
그러나 고구려 부여성의 위치가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남쪽 인근지역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천리장성(千里長城)의 길이가 1,000리에 달했으며, ‘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東北自扶餘城 東南至)’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 구절에서 ‘동(東)’자가 본래 ‘서(西)’자였음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가 방어해야 하는 당(唐)의 위치가 고구려의 남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동북자부여성동남지해'가 그대로 맞다고 한다면, 천리장성이 고구려의 동쪽에 있어야 하며, 신라를 방어하기 위한 장성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 연개소문 장군이 ‘서북쪽 부여성(扶餘城)에서부터 동남쪽 해(海)까지’ 장성을 쌓았는데, 천리장성과 부여성의 위치를 [그림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그림 6] 부여성의 본래 위치 추정지역
특히 요수(遼水)를 [그림 6] 보는 바와 같이 빨간색으로 표시된 현재의 산서성 청장하(淸漳河)와 탁장하(濁漳河)로 추정할 수 있는데, 당(唐)과 고구려는 그 당시 요수(遼水)를 국경선으로 삼아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요수 주변 인근 지역에서 요수와 평행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천리장성은 현재의 산서성 동남부 지역과 하북성 남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해(海)라고 불렀던 현재의 황하에서부터 부여성까지 1,000리(당척)라고 했으므로, 해(海, 황하)에서부터 서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부여성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즉, 중국 23사에 기록되어 있는 해(海, 황하)는 황해가 아니고 황하 중류 지역이므로, 황하 중류에서부터 서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있는 지역에 부여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고황하수로는 『대청광여도』에 표기되어 있는 것처럼 '고황하수로'로 흐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①의 위치가 아니라 ②의 위치에서 흘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②의 '고황하수로'로부터 서북쪽 1.000리 지점에 부여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그 당시 당척 1리는 약 540m이었으며, 굴곡지수(실제이동거리/직선거리)를 1.725로 볼 수 있으므로, 실제이동거리 1,000리는 직선거리 약 313km로서, 고황하수로에서부터 서북쪽으로 직선거리 313km 지점인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남쪽 주변 인근지역에 부여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 안문, 운중 등이 있었던 현재의 산서성 북평진 바로 북쪽 인근 주변지역으로서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남쪽 지역에 고구려 부여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흉노 선우의 거주지라고 할 수 있는 북흉노 지역에 고구려 부여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바로 부여의 도읍지가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연(燕)과 주변국 간의 배치관계가 [그림 7]과 같다. 즉, 진(晋)이 서기전 453년에 조(趙)·한(韓)·위(魏) 등 3개국으로 분리되었으므로 [그림 7]의 상황은 서기전 453년 이후로서 한(漢)무제가 조선을 공격한 서기전 109~108년 이전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림 7]『사기』화식열전
다시 말해서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오환(烏桓)과 부여(夫餘)가 예(穢)·맥(貊)·조선(朝鮮)·진번(眞番)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한 나라들임을 알 수 있는데, 부여는 최소한 한(漢) 무제가 조선(朝鮮)을 공격했던 서기전 109년 이전에 건국되었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여와 조선은 연(燕)이 진(秦)에 의해 멸망당한 서기전 221년 이전에 함께 존재하였으므로, 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부족 또는 한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여 모두 몰살당했거나 외부로 이주하지 않은 이상,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부족은 시대별로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더라도 같은 부족 또는 그 부족의 후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사기』흉노열전에 따르면, 당요(唐堯)·우순(禹舜) 시대 이전부터 산융·험윤·훈육 등 여러 부족이 북쪽 미개지에서 목축을 하며 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산융(山戎)의 역사는 요·순(堯·舜)시대보다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산융의 역사는 바로 흉노의 역사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리적 위치로 보나, 시대적으로 보나, 서기전 221~108년 기간 중에 현재의 산서성 중서부 지역에 살고 있었던 주체는 흉노인 동시에 부여임을 알아챌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부여는 『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국명이지만, 유일하게 『사기』 화식열전에 ‘부여’라는 국호와 위치가 단 한 군데 기록되어 있음으로 해서, 부여의 역사를 알아챌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흉노가 부여이며, 부여가 흉노의 국호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다만, 부여를 건국한 통치세력이 산융의 거주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을 수도 있으며, 외부에서 이주해 들어간 세력이 산융을 통치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했고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국한 것을 고려해 볼 때, 부여의 건국 세력이 누구이겠는가?
또 흉노 호한야 선우와 부여 금와왕의 기록을 고려해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는 바로 동일인임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호한야 선우의 아들이 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금와 왕의 아들도 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역대 최고의 미인이라는 왕소군이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가서 1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바로 해모수의 후손들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예, 상당히(?) 근접된 견해를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즉, 중국측의 사서를 살펴보면,... 전한 중기에 편찬된 사마천의 사기에 '흉노열전'은 있지만, '선비열전'이 없는 점을 보더라도 흉노가 거의 사라지는 시기인 대략 전1세기 정도에서 '선비'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한국측 사서에서는... 이 시기에 부여에서 고구려,백제,신라로 바톤터치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 부여를 승계했다는 고구려나 백제는 물론이고 秦之亡人(진지망인)이라는 신라와 중국사의 燕(연)나라도 역시 '흉노->선비의 카테고리'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즉, '흉노->(선비/부여)'로 볼 수 있으므로 한국사에서는 '흉노=부여'로 보는 것이 가능.
한국사가 아니라 아시아사에서 흉노=선비임을 알 수 있겠지요. 살았던 지역이 같은데...
@광화세계 예, 같은 표현이지만,....한국사에서는 흉노나 선비가 나타나지 않고 부여만 나타나니 " '흉노=부여'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사를 보아서, '흉노->(선비/부여)'로 표현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여의 어원'과 '흉노의 어원'을 추적하면, '부여의 어원'이 더 포괄적이어서 '흉노의 일부를 부여라 한 것'이 아니라 '부여의 일부를 흉노라 한 것'이 더 타당할 것 같고 또 '흉노를 대신한 선비도 부여의 일부'로 보지만 일단은 통설을 기준해서 말한 것입니다. 다만, 이런 혼동은 중국측에서 '부여의 어원'을 없에버리고 '중국사에서는 흉노,선비'로, '한국사에는 부여,고구려'로 한정한 것에 기인된다고봅니다
카오스님의 높은 수준과 숭고한 의도를 이해할 만합니다.카오스라고 별명을 붙인 이유도 알만 하군요. 단군건국 신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좋았을 터인데 아쉬움이 흐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