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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쓴 글들이 많이 중첩되지만 글의 전개 과정상 필요해서 쓴 글이므로 이점 양해 바랍니다.)
역사를 연구하면서 역사서에 나타난 지리와 그 강역을 비정 한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현재 역사학에 있어서의 지리비정은 대단히 잘못된 지리 비정 입니다.
과거 역사의 그 강역 판도는 현재의 역사와 극명히 다릅니다. 특히 동양사에 있어서 대륙사와 조선의 역사에 대한 지리비정을 함에 있어서 현재의 중공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지리비정함은 크나큰 오류를 양산하게 됩니다.
현재까지 역사를 연구한 잠정적인 결과치는 대륙사와 조선의 역사의 그 강역은 현재 중공대륙과 중앙 아시아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입니다.
현재의 대륙사와 조선사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중공대륙과 한반도에 끼워 맞춰진 역사에 불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간행된 사서가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입니다.
현재의 왜곡된 사관에 맞춰진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은 좁은 틀에 갖힌 편협된 역사관으로 인해 넓게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넓게 사고하게 되면 진정한 역사를 알게 될 것인데 그 좁은 울타리를 넘기가 그토록 어려운가 봅니다. 현재 역사학에 있어서의 지리비정이 왜? 대단히 잘못된 지리 비정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조선과 사막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조선에 사막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또한 한반도 사관을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 또한 조선에 사막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또한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과 한반도 사관을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북경(北京)과 사막은 관련이 없습니다. 과연그럴까요? 다음의 기록을 봅시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도리(道里)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요동 벌판을 들어선 뒤부터 오가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고 모래가 먼지처럼 가늘어, 바람이 살짝 불어도 곧 휘날려 흡사 연기나 안개 같고, 이따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산해관 안은 더욱 심하여, 수레바퀴가 닿는 곳에는 마치 잿가루를 키로 부친 듯 자욱하고, 사람의 의복ㆍ모자ㆍ얼굴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으며, 입안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그래서 비록 열 벌 바른 상자일지라도 모두 스며든다. 또 시장 점포나 인가에 둔 기물과 수레 안의 자리는 닭꼬리비[鷄尾箒]로 끊임없이 털어 버려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한 치 남짓 쌓인다. 도성의 큰 거리는 매양 물을 뿌려 적셔 주고 있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2권
영평부(永平府)-서쪽으로 연경이 500리 떨어져 있다.(중략)
사하역(沙河驛)-이곳에서는 길이 모래돌 가운데로 나 있는데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힌다. 만약에 바람을 만나게 되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사람은 길을 가지 못한다. 연(燕) 땅의 길 중에서 가장 괴로운 곳인데, 모래 길이 수십 리나 된다. 역 마을에는 역시 무너진 성이 있다.
찬바람 눈을 불고 들판 길 평평한데 / 寒風吹雪野途平
바다 넓어 하늘 같고 해는 멀리에 가로놓여 있다 / 海闊如天日遠橫
말을 묻어 버리는 황사 삼십 리 / 沒馬黃沙三十里
넓은 수레바퀴 느려서 소리 없이 구른다 / 廣輪遲轉不成聲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이고, 책의 저자도 서로 다른 사람 입니다. 그런데 거의 동일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의 대륙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다른 기록입니다. 현재의 대륙은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지금의 북경까지는 모래땅이 아닌 거의 초원지대가 주를 이룹니다.
지금의 대륙이 사막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지만,이는 산업이 발달되면서 환경공해로 인한 환경재앙의 결과입니다. 이 책들이 기록된 시기가 약 250년 전후인데,250 여년 전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이고,
지금처럼 환경공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지금처럼 사막화가 진척되기 훨씬 이전의 상황입니다. 어느 혹자는 제가 위의 기록을 토대로 청나라의 북경까지 가는 길은 사막의 길이었다.라고 말하자,
구체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단순 모래일수 있으므로 근거로서 빈약하므로 사막일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일반 평지의 단순모래라고 가정 합시다.그런데 어찌해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의 기록처럼,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일반 평지의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지역이 사막 말고 그 어느 지역에서 가능하냐?고 묻자,
어느 혹자는 아무 답변을 하지도 못했습니다.사막이 아닌 지역에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압록강 건너서 부터 모래지역 즉 사막지역인데,북경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사막의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그 여정중에 요동,산해관이 아주 심하며 더더욱 심한 지역은 영평부의 사하역으로 이곳은 북경지역 연(燕)의 땅으로 말의 배까지 모래가 묻히는 지역이 30여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위의 기록처럼 조선의북쪽은 사막지대 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중종실록 59권 22년 의 기록을 보면,
"신이 또 보면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 지방은 사막(沙漠) 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인물(人物)이 쇠잔한데도 오히려 이엄(耳掩)을 만든 털과 몸을 따스하게 하는 모물(毛物)을 수없이 구색하여 끝없이 징렴(徵斂)하고 있습니다."
(臣又觀, 平安、永安, 地濱沙漠, 人物凋殘, 猶以掩耳之毛; 溫身之物, 求索如林; 徵斂無極.)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송김안변(送金安邊)
鐵嶺橫天限一隅。麗時爲界卽通衢。北連沙塞三千里。南擁函秦百二都。
또, 철 령은 좌우 하늘을 경계로 한 모퉁이다. 고려 때의 지경으로 곧 갈림길이다(衢). 북쪽으로 사막변경(요새) 3,000리가 이어져 있다. 남쪽으론 진의 함 관 102개 도회지를 끌어안고 있다.
철관은 북쪽 사막으로 통하고 / 鐵關通朔漠 압록강은 유연 지방과 연접했나니 / 鴨水接幽燕 -"상촌집 9권"
사조(四祖 이 태조 이상의 사대조)께서 막북(漠北)에서 일어나 대대로 원(元)의 천호(千戶)ㆍ만호(萬戶) 등 직책을 갖고 있었으므로 북쪽 지방 노인의 마음을 본디부터 끌고 있었다.-"상촌집 34권"
"...회령은 곧 막북(漠北)의 춥고 고통스러운 지역이어서 누구나 온갖 계책으로 피하기를 힘쓰게 되는데..,"-"중종실록 18년"
"...명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성종실록 134권, 12년"
위의 동사강목의 기록을 보면,고려시대의 동북면은 사막(沙漠)지대 였습니다. 왜냐하면 "상촌집 34권"을 보면 "(조선의)사조(四祖 이 태조 이상의 사대조)께서 막북(漠北)에서 일어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막북(漠北)은 사막을 말합니다. 조선 태조의 선대는 고려의 동북면에 즉 함경도 일대에 살아왔는데 그 동북면 지방을 막북(漠北)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고려의 동북면은 한반도 일수는 없고,
현재의 만주 즉 동북삼성 지역일수도 없습니다. 동사강목에서 같은 고려시대 관련 기록에서 막북(漠北)에 대한 사용 용례를 보면,
"몽고는 막북(漠北)의 북쪽 땅, 외몽고(外蒙古))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를 멸하고 완안(完顔 금나라의 전신인 완안부(完顔部)를 말함)을 강압하여 문득 중국의 반을 차지하자 동진(東眞)도 항복하여 요심(遼瀋 요양(遼陽)ㆍ심양(瀋陽)) 일대가 또한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동사강목 제10하"
조선 태조의 선대가 살았던 막북(漠北)지역은 고려의 동북면 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실록"의 기록에서 "(함경도 지역)회령은 곧 막북(漠北)의 춥고 고통스러운 지역"이며 평안도와 함경도가 사막에 접해 있다고 기록했고,
"상촌집 9권"에서는 "철관은 북쪽 사막으로 통한다"고 했고 "해봉집"에서는 철령이 고려때의 경계로 사막 변경 3000리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한반도 관점에서 보면 세종실록 지리지 안변도호부 의천군의 역(驛)인 철관(鐵關)지역이 사막지대와 통할수 없습니다.
또한 한반도 관점에서 회령 지역이 막북지역 즉 사막지역 일수는 없습니다. 또한 한반도 관점에서 평안도와 영안도(함경도)가 사막과 접할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반도 관점에서 압록강이 유연(幽燕)지역과 접할수도 없습니다.또한 한반도 관점에서 보면 조선이 북원과 국경을 접할수가 없습니다.
이 고려의 동북면을 고려시대에 윤관장군이 개척을 했는데,이 동북면에 대해 현재의 사학(史學)에서는 한반도를 벗어날수 없고,현재의 재야사학 조차도 동북삼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려가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를 어느정도 알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동사강목 제8상갑신 고려 숙종(肅宗) 9년부터, 병인 고려 인종(仁宗) 24년까지 43년"의 기록을 보면,
"임의(任懿)를 권판동북면 병마사(權判東北面兵馬使)로, 김연을 부관(副官)으로 삼았다.
추7월 왕이 구성을 장차 철폐(撤廢)하려고 하여, 임의 등으로 하여금 변사(邊事)를 조치하게 하려고 부월(鈇鉞)을 친히 주고 교외에 나아가서 전송하였다. 이때 최홍정(崔弘正)이 이미 구성을 철폐했는데 임의 등은 행동이 느려서 국경에 관한 일을 한 가지도 조치한 것이 없으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 구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중략)...........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변방을 개척한 실수는 숙종(肅宗)에게서 시작되어 예종(睿宗) 때에 이루어졌는데, 재물을 한없이 낭비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사역(使役)하여 북쪽 사막(沙漠)을 정복한 것은 다만 우리나라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오랑캐의 분심만 돋우어 놓은 것뿐이니, 얻은 것이 어찌 잃은 것을 보상(報償)하겠는가?”
여기서 변방개척은 숙종에서 예종까지 이루어졌고 북쪽사막을 정복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의 동북9성이 사막(沙漠)지역이었다는 근거의 기록입니다. 이는 한반도와 동북삼성 지역을 대입해도 있을수 없는 기록입니다.
과연 조선의 북쪽만 이러한 상황 일까요? 북경은 완전한 사막 지대 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봅시다.
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북경(北京)은 아무리 추워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와 비슷하다.
인구가 조밀하여 내뿜는 입김이 따뜻한 기운을 퍼뜨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중략)
무릇 이 지방 토질은 요동에서 북경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霧)처럼 먼지가 인다.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이것이 사람의 의복이나 모자에 붙으면 잠깐 사이에 모습을 변화시켜서 동행자끼리도 언뜻 보면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붙으면 닦아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으로 들어간 것을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기도 한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 먼지가 종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불 위에 쌓여 있다. 심지어는 겹겹으로 된 장롱이나, 두세 겹씩 봉해 놓은 병 속에까지 뚫고 들어가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저자 가게나 인가에 벌여 놓은 기물들은 닭털로 된 털이개를 가지고 끊임없이 털어 내는데, 잠시라도 멈추면 또다시 쌓이곤 한다.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담헌서(湛軒書) 외집 8권(外集 卷八) 연기(燕記) 경성기략(京城記略
"북경의 토질은 검고 부푼 데다 수레와 말이 갈고 다니는 통에, 바람이 불 때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바로 앞에 있는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의 점포들이 모두 닭털 총채를 들고 손 놀릴 새 없이 물건에 쌓인 먼지를 턴다.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불때고 숨쉬는 훈훈한 기운이 따뜻한 기운을 펼치는 것인가 보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6권 기미년(1799, 정조 23) 2월[7일-30일] 15일
"대개 산해관 안팎이 다 너른 들이요, 검은 흙이라. 여기에 이르러 지기(地氣)가 명랑(明朗)하여 갑자기 별계(別界)를 이루었으니, 먼 산이 푸른빛을 띠어 출몰(出沒)하여 고움을 드리우며, 일대 난하 물이 둘러 반월형(半月形)이 되었는지라."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1720년) [잡지(雜識)]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통군정(統軍亭)에 올랐다. 이 정자는 북경 지방과 요동(遼東) 지방을 바로 누르고 있어 넓고 기이하고 웅장함이 다른 누각(樓閣)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마이산(馬耳山)이 가장 가까워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고, 먼 산이 어렴풋이 보이는 가운데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송골산(松鶻山)이라고 했다. 호인(胡人)들이 사신 일행을 구련성(九連城)에서 기다리고 있어 밥 짓는 연기가 하늘에 떠 있다. 세속(世俗)에서는, 북경에 가는 사람이 이 정자에 오르는 것을 꺼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오르지 말라고 권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그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올라가 보았다. 거기서 계속하여 취승정(聚勝亭)에 올라가 보았다. 이 정자는 전배(前輩)들의 시에 여러 번 들어 있어 가장 유명한 곳인데, 지금은 이미 퇴락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중강(中江)에서부터는 길을 따라 갈대가 있는데, 그 길이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크고 노목(老木)들이 많은데 그 가지에 의관이 걸린다. 어떤 것은 길가에 가로누워 있고 그 사이에 조그만 길이 열려 있기도 하다. 땅은 모두 검은 모래이고, 더러 습한 곳도 있다. 대개 하루 종일 가는 길이 모두 거친 벌판과 황량한 들판뿐이어서 보이는 것마다 모두 쓸쓸하다. 구련현(九連峴)을 넘어서 신시(申時)에 구련성에 도착했다. 이곳은 비록 성(城)이라고는 하나 어느 해에 허물어졌는지 알 수가 없고, 거친 빈터에 사람 하나 살고 있지 않았다."
연행일기(燕行日記) 제4권 계사년(1713, 숙종 39) 1월 5일(계미)
"이곳은 비록 엄동이라도 매우 춥지는 않고, 금년은 앞서와 같이 온화하지는 않으나 오늘처럼 바람이 세었는데도 일기가 따뜻함이 우리나라의 2월과 거의 같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다."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2편 오화연필(五花沿筆)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7일-27일] 25일(갑신)
길에서 낙타에 물건을 싣고 가고, 또 사람을 태우고 가는 것을 보았다. 낙타는 머리는 작으면서 위로 쳐들었고 목은 길고 굽었으며 등에는 두 봉우리가 마치 안장을 얹은 듯하며, 다리는 세 마디가 있다. 먼데서 바라보면 거북과 같고 가까이서 보면 학과 같다. 700근을 실을 수 있고 하루 300리를 간다고 하는데, 실은 것은 거의가 석탄이다. 북경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쓰는데 한 번 불을 붙여 놓으면 며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하며, 수삼십 필씩 줄을 이어간다.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촉에는 죽탄(竹炭)이 많고 남방에는 목탄이 많고 북방에는 석탄이 많다.” 하더니, 그 말이 과연 그렇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1권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1일-6일] 4일
해가 뜰 무렵에 길을 떠나 양장하(羊腸河)에 이르니, 물이 그다지 넓지는 않으나 여러 가닥이 있어 여름에 물이 지면 큰 들이 다 잠기며 배로 10여 리를 지난 후에 비로소 뭍에 오를 수 있다 하더라. 중안보(中安堡)에 이르러 하가(何哥)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떠나려 할 때 하가가 밥값이 적다 하여 종이와 부채를 달라 하고 온돌방 앞에 들어와 간청하니, 사람됨이 극히 불량하여 보기에 매우 불쾌하더라. 온돌방 아래 흙 화로를 놓았으니 부리가 좁아 겨우 다관을 놓을 정도였으며, 석탄(石炭)을 피웠으니 석탄이라 하는 것은 멀지 않은 산에서 나는데, 처음 땅에서 파내면 검은 흙 같다가 땅 밖에 나오면, 굳어 돌과 같으니, 불을 피우면 오래 사그러지지 아니하고, 물을 뿌리면 더욱 잘 피니, 음식 만들 때나 온돌에 불 넣을 때 이것을 쓰는 곳이 많으니 매우 중요하고, 타고 남은 것을 물에 축여 나무로 틀을 만들어 벽돌 모양같이 박아 내어 도로 피우면 나무 숯보다 화기가 좋으니, 심양부터는 이것이 아니면 불 때기 어렵더라.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 밭에 또한 조 짚으로 우마(牛馬)의 양식을 삼으니, 지나는 밭 길가에 조와 수수밖에 다른 것이 없고 간혹 밭벼를 심은 밭이 있으니, 밭벼의 쌀은 노미라 하며, 면화(綿花) 밭이 아주 드물게 있으니, 이는 중원(中原) 사람이 아주 춥더라도 옷을 두껍게 입는 일이 없고, 짐승의 가죽으로만 여러 겹을 입으며, 바지는 다 겹으로 하였으며, 가난한 백성(百姓)들은 웃옷이 변변치 않아서 우리나라 엷은 차렵 바지만 하게 만들어 입었더라.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의 공통된 기록은 북경(北京)과 북경 인근의 토질이 검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위의 기록들처럼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었습니다. 즉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는데 그 모래의 특징은 검은빛의 토양=회색빛의 토양을 지닌 지역 입니다.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지질적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아주 독특한 특질의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북경은 검은 모래 사막(회색빛 모래 사막)의 토양 입니다.
세계적으로 검은 모래 사막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이 유일 합니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위의 기록상에서 전하는 어떠한 조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기록처럼 겨울에도 춥지 않다고 합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각기 다른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서로 공통된 기록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북경의 겨울이 마치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막지방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북경 지역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고 그 흔적 조차 없다고 합니다. 지금의 북경이 그렇습니까?
지금의 북경의 겨울이 마치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아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는 지역 입니까? 제가 아는 지인 중에 북경에 사업차 자주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현재의 북경의 겨울이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아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는 지역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지인이 저보고 뭔 만화 같은 소리냐며 저에게 핀잔을 준 적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계산기정 2권의 기록을 보면,북경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사막의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그 여정중에 요동,산해관이 아주 심하며 더더욱 심한 지역은 영평부의 사하역으로 이곳은 북경지역 연(燕)의 땅으로 말의 배까지 모래가
묻히는 지역이 30여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현재의 북경은 절대로 이러한 환경이 아닙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지역 사막의 겨울 날씨가 보기 보다 온난한 날씨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을 근거해서 보면,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이며,역사에서 말하는 진정한 북경이 있었던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 일대로 추론 됩니다. 여기서의 카라쿰 사막의 카라쿰 이라는 뜻은 터키어로 "검은 모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카라쿰 사막의 주변을 경유하며 흐르는 강은 역사상의 난하이며 열하로 생각됩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를 기록한 연대가 서기 1832년 이므로 1830년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청(淸)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서 러시아와 관련된 영토분쟁에 관한 모든 사건은 주로 흑해와 카스피해 방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늘날의 동북삼성 지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건들 입니다.
또 위의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의 기록을 보면,북경(北京)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고 사막을 대표하는 동물인 낙타가 나오는데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축중에 하필이면 왜? 낙타를 이용했을까요? 사막지대에서 사막에 적응된 동물인 낙타가 물자수송에 가장 적격이었다는 그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므로,즉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의 기록을 보면,북경(北京) 부근에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위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북경과 그 부근이 사막지역임을
알수 있는 기록입니다. 사막이 아니고서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는 기록이 성립될수 없으며,또한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는 기록이 성립될수 없습니다. 또한 낙타는 혹한의 지역에서 살수 없는 동물 입니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北京)은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위의 사실 그 어느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즉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의 허구의 북경(北京)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겁니다. 위의 기록들에서 역사상의 북경(北京)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헌적으로 조선의 북쪽과 북경은 사막지대임을 알수 있는데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과 한반도 사관을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편협된 사고방식으로
이러한 문헌적인 증거들을 애써 무시 합니다. 위의 고증으로 현재의 북경과 한반도 조선의 그 허구성을 알수 있습니다. 즉 현재의 북경과 조선의 강역 상황이 왜곡된 역사관에 의한 지리비정 이므로 왜곡된 지리비정을 옹호하는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은 왜곡된 사관을 양산하는 서책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헌은 단순 참고용으로 쓸수있지만 전적으로 신봉할수 없는 문헌 입니다. 더욱더 한심한 일은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은 편협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자신들의 오류를 알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2.총령과 인도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과 한반도 사관을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현재의 총령과 인도가 고대의 총령과 인도라 말합니다. 또한 청나라에 의한 신강지역 또한 현재의
신강지역이 맞다고 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다음의 기록을 봅시다.
청사고(淸史稿) 권 오십칠,지 제삼십이(券 五十七,志第三十二) 지리사(地理四)의 기록을 보면,
"外興安嶺為崑崙北出之大幹。蓋崑崙山脈南幹,為涼州南山,為賀蘭山,為陰山,為內興安嶺。北幹為蔥嶺,為天山,為阿爾泰山,為墾特山,為外興安嶺。"
"외흥안령은 곤륜산의 북쪽에서 나오는 대간인데,이는 곤륜산맥의 남간을 덮어 량주 남산이 되며,하란산이되며,음산이 되며,내흥안령이 된다. (곤륜산의)북간은 총령이 되며,천산,아이태산,간특산,외흥안령이 된다."
청사고의 기록을 보면 곤륜산의 북쪽 줄기가 총령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총령이 감숙성에 있었다는 것은 확고 부동한 사실 입니다.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거등만록(車燈漫錄)》
"효람(曉嵐) 기윤(紀昀)이 일찍이 황하의 물 근원을 가서 찾아보고 하원기(河源記)를 지어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곤륜(崑崙)은 곧 지금의 화전(和闐 신강성에 있는 땅 이름)의 남쪽 산인데 황하의 물이 여기서 나온다. 원 세조(元世祖)가 도십(都什)을 보내어 찾았으나 겨우 성수하(星宿河 운남성에 있음)에 이르러 그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곧바로 발원처(發源處)에 이르러 그 땅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인데, 무릇 그 범위가 2만 리로서 지금은 전부 중국의 군현에 들어 신강(新彊)이라 부른다.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서쪽은 동궐(突厥)을 지나가고 서남쪽은 토번(吐蕃)에서도 2, 3천 리를 더 나아간다. 신독(身毒)은 곧 인도(印度)이며, 현도(懸度)는 피산(皮山)에 있어 판도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감숙(甘肅)은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이고, 약수(弱水), 흑수(黑水)는 함께 감숙 내지에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5권 지리고(地理考) 15 산수(山水) 3 경계 바깥의 산수
○ 흑수(黑水)
흑룡강(黑龍江)은 흑룡강성(黑龍江城)의 동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고, 완수(完水)라고도 한다. 또 실건하(室建河)라고도 하고,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객이객(喀爾喀) 북쪽 경계의 긍특산(肯特山)에서 나오는데, 그 지방 토착인들은 오란하(敖嬾河)라고 한다. 여러 개의 작은 물을 모아서 동북쪽으로 흘러 이포초성(泥布楚城)의 남쪽을 지나 내지(內地)로 들어와 흘러 아극살성(雅克薩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흑룡강성을 감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과 합류한다. 《북사(北史)》 오락후국열전(烏洛侯國列傳)을 보면, “오락후국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류한다.” 하였고,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조주(肇州) 시흥현(始興縣)에 흑룡강이 있다.” 하였고, 《원사》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1년에 황제가 알난하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흑룡강은 개원성(開原城)에서 북쪽으로 25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흑수말갈이 예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라는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시작되었으며, 흑룡강이란 이름은 《금사》에서 나온다. 그 상원(上源)은 《북사》에 나오는 완수이며, 《구당서》에 나오는 실건하이다. 지금의 오란하가 정원(正源)인데, 오란하는 바로 《원사》에 나오는 알난하(斡難河)가 음이 변한 것이다.
위의 심전고는 조선 순조때의 박사호(朴思浩)가 지은 청나라에 대한 견문기 입니다. 위의 심전고에서 청나라의 학자인 효람 기윤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위의 기록에서 "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인데, 무릇 그 범위가 2만 리로서 지금은 전부 중국의 군현에 들어 신강(新彊)이라 부른다.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서쪽은 동궐(突厥)을 지나가고 서남쪽은 토번(吐蕃)에서도 2, 3천 리를 더 나아간다. 신독(身毒)은 곧 인도(印度)이며, 현도(懸度)는 피산(皮山)에 있어 판도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감숙(甘肅)은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이고, 약수(弱水), 흑수(黑水)는 함께 감숙 내지에 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서는 청나라가 개척한 서역국이 신강(新彊) 지역인데 이 신강 지역에 대해 원문에서는 연무(延袤) 2만리라고 했으므로 즉 동,서로 1만리 남,북으로 1만리를 나타내는 기록 입니다. 참고적으로 오늘날의 신강지역은 돌궐과 토번,인도등 포함되어 있지도 않으며 위의 심전고가 인용한 효람 기윤의 기록처럼 연무(延袤) 2만리가 절대로 될수도 없는 지역입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심각한 모순을 모르고 있고,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흑수(黑水)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말하는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을 말합니다. 위의 해동역사(海東繹史)가 인용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기록에 의하면 흑룡강(黑龍江)의 옛이름은
흑수(黑水)라 기록하고 있으며,청(淸)나라의 학자인 효람(曉嵐) 기윤(紀昀)은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백과에 의하면 현재의 역사에서 흑룡강은 "최상류부의 오논강은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하여 야블로노이 산맥에서 발원하는 실카강과 합류하며 이어서 우안에서 아르군강을 합쳐 블라고베셴스크 부근에서 좌완으로 부터 재야강이 합류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역사에서의 흑룡강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에서 감숙성에는 흑룡강이 없습니다. 또한 현재의 역사에서 흑룡강이 있는 지역은 감숙성 지역이 아닌 전혀 엉뚱한 지역인 극동지역에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심각한 역사왜곡의 결과물 입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모순을 외면하고 엉뚱한 말만 합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외집권58 필기류,난실담총(筆記類,蘭室譚叢)
淸國徵我兵。助攻車漢賊。車漢者羅禪也。按羅禪卽鄂羅斯地。在極北。秦漢之間。服屬㐫奴。在漢爲堅昆,丁零。在唐爲點戛斯.......骨利幹等國。元時阿羅思及吉利吉思.......淸順治初。其衆曰羅刹。竊據黑龍江雅克薩之地。築城居之。......."
(청나라에서 조선병력을 징발해서 차한공격을 돕게 했다. 차한이라는 것은 라선이다.살펴보건데,라선은 즉 악라사 땅이며 북극지역에 있다. 진나라 한나라 연간에 (차한은)흉노에 복속되었고,한나라때 견곤,정령이다. 당나라때 힐알사 이다.
골리간등의 나라가 있다. 원나라때 아라사,길리길사였다. 청나라 순치초에 그 무리들을 나찰이라 일컬었다. 흑룡강 아극살의 땅에서 성곽을 지어 노략질하며 살았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지56 초사담헌삼(草榭談獻三)
" 時淸人徵我兵攻車漢。車漢者羅禪也。在極北鄂羅斯地。在漢爲堅昆丁零。在唐爲黠戛斯。其人皆長大赤髮晢面。綠眼而黑瞳者曰李陵之後也。窃據黑龍江上。"
(당시에 청나라는 우리의 병력을 징집하여 차한을 공격하게 했다.차한이라는 것은 라선이다. 북극 악라사의 땅이다. 한(漢)나라때 견곤,정령이다. 당나라때 힐알사 이다. 그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며 붉은 머리에 흰 얼굴을 하고 있다.
푸른 눈에 검은 눈동자가 있으며 한(漢)나라때의 이릉의 후예라고도 한다. 흑룡강의 위에 근거해 살고 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9권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아라사국(俄羅斯國)
"아라사국(俄羅斯國 러시아)은 북쪽 맨 끝에 위치해 있는데,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다. 명(明)나라 300년 동안은 중국과 통하지 못하다가 청(淸)나라 강희(康煕) 때에 이르러 중국에 들어와 조공을 바쳤다. 8도(道)를 두어 ‘사과(斯科)’라고 칭하고, 사과마다 또 각각 소사과(小斯科)로 나누었다."
계산기정 제5권 부록(附錄) 호번(胡藩)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이라고도 이름 한다. 그 나라는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과 교통하여 상인이 해마다 온다.
심전고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제국(諸國)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이라고도 하며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 있으니, 중국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은 조선의 학자인 성해응의 저작 이며,위의 임하필기는 조선의 학자인 이유원의 저작 입니다. 위의 기록과 또한 본인이 언급한 위의 또 다른 기록을 비교해서 보면 흑수=흑룡강은 감숙성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연경제전집,임하필기,계산기정,심전고의 기록을 보면 감숙성 흑룡강의 북쪽에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던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연경제전집에서는 구체적으로 러시아민족이 북극지역에 살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북극지역이 흑룡강의 아극살 지역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을 차한 또는 라선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산기정에서도 악라사 즉 러시아 라는 나라는 흑룡강 북쪽에 위치해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심전고에서도 러시아=악라사가 흑룡강의 북쪽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고, 황당하게도 중국에서 2만여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황당한 기록일까요? 위의 기록을 현재의 상황에 대입하여 보면,현재의 역사판도에서 청나라의 수도 였다는 현재의 북경에서 감숙성까지의 거리가 2만여리가 된다는 기록인데, 이는 말도 안되는 기록 입니다. 현재의 북경에서 감숙성까지의 거리는 1만리도 되지도 않는 수천리의 거리에 불과합니다. 위의 기록들을 보면 분명히 흑룡강=흑수는 감숙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감숙성 흑룡강의 북쪽에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그 지역은 북극지역으로서 흑룡강 북쪽 아극살성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러시아 민족의 터전은 위의 기록처럼 북극지역 입니다. 현재의 감숙성이 북극지역 입니까?
현재의 역사관과 그 지리비정은 아주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역사상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살던 지역에 특이한 자연적인 환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 권지12 잡저(雜著) 자집고이의(子集考異議)
" 唐太宗用兵。至骨利幹。置堅昆都督府。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
(당 태종이 군사를 부려 골리간에 이르러 견곤에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 온성론(穩城論)
《당서(唐書)》 회흘전(回紇傳)에 이런 말이 있다.
"몽고(蒙古)의 사막(沙漠) 북쪽에 골리간(骨利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가 지고 나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해서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해가 뜬다." 여기에서는 시기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때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의 전후(前後)였을 것이다. 북쪽 끝의 지역에는 여름날이 이렇게 긴데,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보다 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고의 북극(北極)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時期)는 춘분 전과 추분 후로 이때에는 순전히 낮만 계속된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6권 경사강의(經史講義) 53 ○ 강목(綱目) 7 [당 태종(唐太宗)]
"양고기가 겨우 익자마자 하늘이 벌써 밝아졌다고 한 것은, 북극(北極)이 지평으로부터의 고도(高度)가 60도(度) 이상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3개월이 낮이고 3개월이 밤이 되는 나라가 나오며, 다시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반년이 낮이 되고 반년이 밤이 되는 나라가 나온다. 아침에 밭을 갈아 저녁에 수확한다는 말이 《주비산경(周髀算經)》에 나오고, 낮과 밤이 반대된다는 말이 《역서(曆書)》에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이치를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데, 선유(先儒)들이 여전히 그것을 믿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골리간(骨利幹)의 사신이 당 나라에는 밤이 40각(刻)이라는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하며 비웃었으니, 이것은 이른바 피차간에 처지가 달라 상대방을 서로 비웃은 것이리라."
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이형상의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사는 곳은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처럼 "백야(白夜)"현상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백야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신당서(新唐書)"입니다.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당나라때 당 태종이 골리간 지역에 이르러 견곤도독부를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고문헌에서 이 지역의 백야현상에 대해 비유하여
시문(詩文)등에서 주로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을 표현하는 기록이 참으로 많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해가 넘어가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하여 다 익을 때쯤이면 해가 다시 뜬다."는 기록을 생각해 보면, 고기를 삶아 익힐때 까지 불과
몇 시간 정도에 불과 한데 벌써 해가 뜬다는 기록으로 그 만큼 밤이 짧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골리간 지역은 그 밤도 어둡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도 골리간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가 되면 순전히 낮만 계속되는 시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는 북쪽의 골리간(骨利幹)지역이 완연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조대왕의 저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도 백야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재전서에서도 백야현상 관련 기록인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일부 인용했고,당나라에 온 골리간(骨利幹)의 사신이 "당 나라에는 밤이 40각(刻)이라는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하며 비웃었으니,"라는 기록은 골리간 지역에 백야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비웃었던 겁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문헌적으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통해 흑룡강 골리간(骨利幹)지역의 백야현상을 알게 되었겠지만, 구체적으로 알수 있었던 계기는 조선과 청(淸)에 의한 "라선정벌"입니다. "성호사설"에서 나선정벌에 대한 기록인 "차한일기"를 기록했는데,그 기록의 일부를 보면,"효종(孝宗) 9년에 중국(中國 청(淸) 나라)이 우리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도와 차한(車漢)을 치라 하였으니, 차한은 나선(羅禪)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혜산첨사(惠山僉使) 신류(申瀏)를 북우후(北虞候)에 이배(移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그리고 조선 군대의 이동경로를
보면, "무술년 봄 3월 1일에는 두만강(豆滿江)을.......19일에 영고탑(靈古塔)에 당도하였다......... 6월 5일에 배를 출발하여 10일에 흑룡강에 도착하였다.........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하였다." 이 기록의 달과 날짜를 기점으로 러시아에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6∼7월 이므로 고문헌의 기록들이 음력에 의한 기록일지라도 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그 지역의 백야현상을 생생히 목격했고,"신당서(新唐書)"라는 고문헌등과 목격한 기록등을
통해서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등에서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라는 백야현상에 관련된 기록들을 남긴 것입니다. 역사상의 기록에서는 감숙성 흑룡강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 입니다. 네이버 지식을 보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웨덴 지역등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은 감숙성 흑룡강 일대에 살았고 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에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보면 현재의 감숙성 지역은 북극지역도 아니며 백야현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역 입니다. 또 현재의 흑룡강이 역사상의 흑룡강이라면 이 또한 모순 입니다. 현재의 흑룡강은 감숙성 지역에 있지 않습니다.
즉 백야현상이 그것도 "다산시문집"의 기록처럼 완연히 나타나는 지역이 진실의 총령과 곤륜산이 관련된 감숙성 흑룡강 일대이므로 가장 부합한 지역은 오늘날의 러시아와 가까운 코카사스 산맥 밖에 없습니다. 역사상의 진정한 총령은 코카사스 산맥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과 기록을 토대로 다음의 기록을 보면,
청(淸)나라 소연(昭木+連)의 소정잡록(嘯亭雜錄)의 기록을 보면,
"卷六《平定回部本末》一條開頭多出一段文字為:回部祖國曰天方,在蔥嶺西數千里,古筠沖地,一名天堂,又名默伽。國主馬哈麻始創回教,死後墓常有光,日夜不熄,國人異之。世傳其教至隋、唐間分為默德那國。"
"회부의 조국은 천방이라 한다.총령의 서쪽으로 수천리 떨어져 있으며,옛날 균충의 땅이다.일명 천당이라 하며,또한 묵가(<맥가(麥加)=메카>)라고 한다.국왕 마함마는 회교를 창건하였다..............대대로 전해져 온 회교는 수,당 연간에 이르러 묵덕나국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사일기 곤(東槎日記坤) 강관필담(江關筆談) 서(序)
“미장주(尾張州) 열전궁(熱田宮)은 공들께서 거쳐 온 곳입니다만, 이 궁 안에도 죽간(竹簡)에다 칠서(漆書)한 것이 두서너 책 있는데, 대개가 과두문자(蝌蚪文字)라 합니다.”
하였다. 남강이 묻기를, “귀국할 때 좀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이미 비장되어 있는 문자이거늘, 어떻게 보여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제가 불민하지만 스스로 다행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서양(大西洋), 유럽[歐邏巴] 지방의 이탈리아[意多禮亞] 사람과 네덜란드[和蘭] 사람과 유구(琉球) 사람, 또는 당산(唐山) 등 여러 산과 여러 항구의 사람들을 제가 다 직접 보았고, 지금에는 또 공들과 한집안에서 단란한 모임을 가졌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대서양은 나라 이름인데 서쪽에 있는 큰 바다라는 말이고, 이탈리아 사람ㆍ네덜란드 사람ㆍ유구 사람이란 그 지방의 사람들을 말한 것이며, 당산도 지명이고, 여러 항구란 여러 나라 항구의 사람을 말한 것이다.청평이 묻기를, “대서양은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 이름이지만, 유럽ㆍ이탈리아ㆍ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하니, 백석이 말하기를, “귀국에는 만국전도(萬國全圖)가 없습니까?” 하였다. 남강이 대답하기를, “고본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나라들이 모두 기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니, 백석이 말하기를, “서양이란 곳은 천축(天竺 인도(印度))에서도 수천 리나 되는데, 이른바 대서양ㆍ소서양이 있습니다. 저의 집에 지도 한 장이 있으니 필요하다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서번(西番)에서 천방국(天方國)ㆍ묵덕나(黙德那)가 가장 먼 곳으로, 현장(玄奘 당(唐) 나라 때의 중)이 불경(佛經)을 가져온 지역이므로 서로 전하기를 불국(佛國)이라 한다. 그 경(經)은 36장(藏)으로 되어 3천 6백여 권이나 되고, 그 글씨는 전서(篆書)ㆍ초서(草書)ㆍ해서(楷書) 세 가지 법이 있다." 하였다."---(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1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
"현장 법사(玄奘法師)에 대하여는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다. 당 나라 정관(貞觀 태종의(太宗)의 연호) 3년(629)에 삼장(三藏) 현장이 서역(西域) 여러 나라에 들어갔으니, 곧 서번(西番)의 천방(天方)ㆍ묵덕나(黙德那) 등 지방이며, 그곳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계현(戒賢)을 만나 유식(唯識)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아 돌아왔었다."---(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석전잡설(釋典雜說) 서유진전(西遊眞詮)에 말한 오지 석후(五指石猴)에 대한 변증설)
"명(明) 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정효(鄭曉)가 지은 《오학편(吾學篇)》에 이르기를,
“서역에 묵덕나(默德那)라는 나라가 있는데 곧 회회국(回回國)이다. 처음에 국왕 모한맥덕(摹罕驀德)이 태어날 때부터 영성(靈聖)하여 서역의 나라들을 신복(臣服)시켰으므로, 이들 나라들이 높여서 별암원이(別諳援爾)를 삼았으니 중국말로 천사(天使)란 뜻이다. 나라 안에 불경 30장(臧)이 있는데 모두 3천6백여 권이다. 글은 전서(篆書)·예서(隷書)·초서·해서(楷書) 등이 혼합되어 있는데, 서양이 모두 이것을 사용한다. 그 땅이 천방국(天方國)에 접해 있는데, 일명 천당(天堂)이라고 한다."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고(天學考))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현장 법사(玄奘法師)가 불경을 구하러 간 지역은 현재의 인도 입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을 금과옥조 처럼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과 한반도 사관을 철저히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현장 법사(玄奘法師)가 불경을 구하러 간 지역은 현재의
인도 라는 사실은 절대 불변의 당연한 사실 입니다. 특히 중공의 향달(向達)이라는 사람은 역사의 기록에서 왕사성(王舍城)은 현재의 인도에 있는 것인데 송,명대에 왕사성이 점성국(占城國) 지역에 있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역사상의 인도는 현재의 인도가 아닙니다.
위의 기록에서 현장 법사(玄奘法師)가 불경을 구하러 간 지역은 천방(天方)ㆍ묵덕나(黙德那) 등 지방이며, 그곳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계현(戒賢)을 만나 유식(唯識)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아 돌아왔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방은 당대(唐代)의 대식국(大食國)이며 명대(明代)에는 천방국(天方國)이었습니다. 천방을 다르게 표기해서 묵가(默伽) 또는 맥가(麥加) 라고도 하며 이는 음차표기 로써 오늘날의 아랍의 성지는 "메카"라고하며 묵덕나(黙德那) 또한 아랍의 성지인 "메디나"였습니다.
즉 현장 법사(玄奘法師)가 불경을 구하러 간 지역은 현재의 인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아라비아 지역이었으며 이 아라비아 지역의 옛날의 인도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철학자인 최한기의 "기측체의"에서
"서방의 교술(敎術)은 불교(佛敎)가 변하여 회회교(回回敎)가 되고, 회회교가 변하여 서양교(西洋敎)가 되었는데, 주재설(主宰說)로서 불교를 물리친 것은 잘 변한 것이나, 영괴(靈怪)의 설로 대중을 미혹하는 것은 잘못 변한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 잘못 변한 것을 잘 변화시키면 상도(常道)에 이를 수 있다." 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과거 아라비아 지역과 그 주변의 지역인 이란지역등은 과거에 불교를 믿는 나라 였습니다.
삼봉집 제5권 불씨잡변(佛氏雜辨) 불씨 걸식의 변[佛氏乞食之辨]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어느 때 세존(世尊)이 식사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鉢]를 가지고는 사위성(舍衛城)에 들어가 그 성(城) 가운데에서 걸식(乞食)을 하였다.”
【안】 사위는 파사국(波斯國)의 이름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석전잡설(釋典雜說) 불상(佛像)에 대한 변증설,
"《증익아함경(增益阿含經)》에는 "우전국왕(優塡國王)은 공교한 장인(匠人)들을 선출 회합시켜 소머리만한 향나무로 불상을 만들도록 하여 공양을 올리고 새벽과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때에 파사국왕(波斯國王)도 공교한 장인들을 소집하여 석가여래의 형체를 일러주면서 진금(眞金)으로 불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고, 즉시 자마(紫磨 황금의 최상품을 말한다)로 석가여래의 불상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역시 5척 남짓되었다."
고종 39년 임인(1902, 광무 6) 7월18일 (병자, 양력 8월 21일)
상이 이르기를,
삼봉집의 주석에 의하면 사위성(舍衛城)은 파사국(波斯國)으로 페르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삼봉집이 인용한 금강경의 기록을 보면,페르시아인 파사국은 불교의 초기부터 불교와 관련이 깊었습니다.또한 파사국의 왕이 불상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과거에 페르시아가 불교를 믿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불교를 믿다가 "기측체의"의 기록처럼 불교가 변해 회회교가 되었던 겁니다.역사에서 전하는 서천축국 중천축국 관련 기록은 거의 다가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과 메디나, 페르시아"에 관련된 기록이었던 것입니다.
또 위의 기록 소정잡록의 기록에서 오늘날의 아라비아인 천방국이 총령의 서쪽으로 수천리 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 기록을 현재의 총령에 대입하여 볼때 말도 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총령이라는 히말라야 지역에서 서쪽으로 아라비아 지역까지의 거리가 불과 수천리에
불과 합니까? 적어도 1만리 그 이상의 거리 입니다. 또 위의 동사일기의 기록에서 현재의 인도에서 이탈리아,네덜란드가 있는 유럽까지의 거리가 수천리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1만리 이상의 거리 입니다. 또한 위의 고종실록을 살펴보면,
오인도 부근에 홍해(紅海)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인도에 홍해가 있습니까? 특히 고종실록은 그 현지를 직접 갔다온 경험의 기록 입니다. 현재의 사관에서 역사강역에 대한 지리비정은 참으로 모순과 오류 그 자체 입니다.
소정잡록과 동사일기의 저자는 서로 다른 사람 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일치하는 기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고증한 사실들과 소정잡록과 고종실록,동사일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현재의 역사의 지리와 그 강역은 잘못된 지리 비정임을 알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중공의 향달(向達)이라는 사람의 역사인식은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과 같은 결론이자 같은 맥락 입니다.
중공의 향달(向達)이라는 사람의 역사인식,역사관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역사관으로 굳어진 과거 서세동점기 사관의 답습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과 같은 역사인식을 하는 사서가 바로 중국역사지명대사전,고금지명대사전 등과 같은 서책 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이들 사서를 단순 참고는 할 지언정 전적으로 믿을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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