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泉州) 절도사 왕봉규는 고려 태조 왕건:
천주(泉州)는 현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8년(924년)에 따르면, '신라왕이 후당(後唐)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천주(泉州) 절도사 왕봉규(王逢規)가 역시 사신을 보냈다.'고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삼국사기 』에 웬 천주절도사가 튀어나오는가?
그 당시는 요(遼)가 916년에 산서성 태원(요 상경으로 추정)시 인근지역에서 막 건국되었으며, 왕건이 918년에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 태조가 된 시기였다.
또 후량(後梁, 907~923년)이 망하고 후당(後唐, 923~936년)이 들어선 시기로서 5대 10국 시대에 해당한다. 후량은 도읍지를 현 하남성 개봉시에 두었지만, 후당은 도읍지를 현 하남성 낙양시에 두고 있었는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즉, 당(唐, 618~907년) 말기에 신라 5소경과 진국(발해) 주요 지명들의 위치는 [그림 1]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근거: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6. 2. 11.).
[그림 1] 신라 5소경과 진국(발해) 주요 지명들의 추정지역
절도사(節度使)란 당(唐)에서부터 오대(五代)를 거쳐 북송(北宋)까지 존재했던 지방 군사조직 번진(藩鎮)을 통솔했던 수장을 말한다. 안사의 난(755~763년)을 일으킨 안록산은 현재의 하남성 낙양시에서 국호를 연(燕)이라 하고 황제를 칭했는데, 그 휘하에 있던 평로군이 황하를 건너와 청주(靑州, 현 하남성 개봉시로 추정)를 점령하고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서 평로절도사는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을 관할하는 치청(淄靑) 절도사 지위를 추가로 얻게 되었다.
이 때, 치청(淄靑) 절도사의 번진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 하남성 개봉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치청절도사 이정기는 당(唐)으로부터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라는 직위를 추가로 받아 진국(발해)과 신라와 외교교섭을 관장하였다.
또 치정절도사 이정기 3대는 점점 부를 축적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전국시대 '제(齊)'를 국호로 표명하였다. 즉, 치청절도사 번진의 위치는 현재의 하남성 개봉시로서 전국시대 '제(齊)'의 도읍지였던 익도(益都)와 같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에 이르러 819년에 당(唐) 토벌군에 진압되었다.
그 후, 많은 이들이 치청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후량(後梁, 907~923년) 때 882~902년 기간 중에 왕경무·왕사범 부자가 치청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후당(後唐, 923~936년) 시기에는 왕건립·왕안구 등 왕씨들이 치청절도사를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건이 918년에 고려 태조로 추대되고 견훤과 전쟁을 하던 시기가 후당(後唐, 923~936년) 시기에 해당하는데, 왕건립이란 자가 후당(後唐)의 치청절도사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왕건과 왕건립이 성이 같고 이름도 유사한데,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왕건은 고려 태조이고 왕건립은 후당(後唐)의 치청절도사로서 서로 동일인은 아니어도 최소한 같은 왕씨 집안에서 형제 또는 사촌 등등 서로 밀접한 관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唐) 시기에 절도사가 가장 많았을 때에는 50명에 이르기도 했는데, 천주(泉州) 절도사란 중국 23사에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천주(泉州) 절도사가 어느나라 절도사인가?
또 천주(泉州)란 도대체 어디인가?
그 당시 요(遼)가 후진의 건국(936년)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 16주를 할양받았는데, 연운 16주는 유(幽), 계(薊), 탁(涿), 단(檀), 순(順), 영(瀛), 막(莫), 신(新), 규(媯), 유(儒), 무(武), 울(蔚), 운(雲), 환(寰), 응(應), 삭(朔) 등 16개주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중에도 천주(泉州)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유주(幽州)가 현재의 북경시로 알려져 있으며, 삭주(朔州)는 현재의 산서성 삭주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가 유주(幽州, 계)에 있었으며, 당(唐) 대의 유주 총관부도 유주(幽州)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유주(幽州, 계)의 본래 위치가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幽), 계(薊), 탁(涿) 등 연운 16주의 본래 위치는 모두 현재의 산서성 남부 지역임을 알 수 있다.(근거:『조선 600년간의 비밀 요동과 부여 』,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3. 1. 10.)
아무튼 치청절도사 번진의 위치는 현 하남성 개봉시임을 알 수 있는데, 천주(泉州)는 도대체 어디인가?
그런데 『삼국사기 』에 따르면, 그 당시 양길과 궁예가 반란을 일으킨 지역이 신라의 북원소경으로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의 삭주에 해당하는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지역은 신라 무주 동남쪽 지역으로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안휘성과 산동성 경계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 무주 지역은 본래 마한의 땅으로서 백제가 차지한 지역인데, 신라가 무주를 두었으며, 견훤이 반란을 일으키자 무주 동남쪽 지역에서 호응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근거: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6. 2. 11.)
[그림 2] 양길과 견훤의 반란지 및 세력 확장 추정방향
또 『삼국사기 』에 따르면, 양길과 궁예는 북원소경에서 동쪽으로는 하슬라주를 공격했으며, 서남쪽으로 한산주에 속하는 30여 개의 성을 취하고 송악군(松岳郡)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양길과 궁예의 반란군은 북원소경에서 [그림 2]의 화살표 방향으로 세력을 키워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송악군(松岳郡)의 위치에 관해서는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과연 송악군(松岳郡)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또 『삼국사기 』에 따르면, 견훤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907년에 무주 동남쪽 지역에서 전주를 거쳐 신라 상주 방향으로 세력을 넓혀갔으며, 901년과 916년에는 남쪽으로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야성은 대가야의 도읍지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안휘성 합비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궁예가 처음에 도읍지를 송악군(松岳郡)에 두었으나 903년에 철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즉, 궁예가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하 이북 지역으로서 명주(하슬라주), 삭주(우수주), 한주(한산주) 등에 해당하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도읍지를 옮긴 철원은 한주(한산주)에 속하는 지역이다.
철원(鐵圓)은 중국 23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지명이다. 그러나 철원은 한주(한산주)에 속하는 지명으로서 백제의 관미성이었다가 신라의 매초성이 되었으며,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 광부고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백제의 관미성이 바로 대방이었으며, 백제 초기의 미추홀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근거: 『백제 900년의 비밀 관미와 고평 』,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5. 4. 29.)
또 궁예가 910년에 수군을 보내어 습격한 나주성(羅州城)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하택시로 추정할 수 있다.
이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은 919년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으며, 920년에 신라의 강주(康州)가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즉, 신라 9주 중에 강주(康州)는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강소성 서주시로 추정할 수 있는데, 옛 가야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 강주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주(康州)는 현 강소성 서주시에서부터 현 안휘성 합비시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서주시 주변지역은 성산가야로 있었으며, 합비시 주변지역에는 대가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합비시에 대야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견훤이 920년에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즉,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 태조 왕건이 황하를 건너 나주성을 차지하고, 남쪽으로 강주(康州)까지 차지하게 되자, 견훤은 남쪽으로 말려갔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8년(924년)에 따르면, '신라왕이 후당(後唐)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천주(泉州) 절도사 왕봉규(王逢規)가 역시 사신을 보냈다.'고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927년)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몸소 백제를 정벌하였는데,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강주(康州)의 항복을 받고 백제를 공격하고 있는데, 후당(後唐)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의 직위를 주었다면, 누구에게 주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 』에 기록되어 있는 왕봉규는 바로 고려 태조 왕건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후당(後唐)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라는 직위를 실제 주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대 역사적인 지명들을 동쪽 또는 동북쪽으로 변이시키면서 고대 국가 간의 위상도 변이시키지 않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부여와 가야 및 삼국의 건국년도를 최소한 200년 이상 뒤로 늦추어 놓았는데, 왜 늦추어 놓았겠는가?
바로 유구한 역사와 앞서 가는 문명국의 위상을 깍아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쳤다는 기록들은 모두 갑과 을을 바꾸어 논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명(明) 대 초 1421~1512년 기간 중에 명(明)이 옛 고려 땅을 차지하게 되자, 비로서 중국 23사를 뜯어 고쳐 위사(僞史)들을 삽입하고 지명 변이를 시도했으며, 조선의 사관들은 『삼국사기 』 등을 뜯어 고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때 단순히 지명 변이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위상도 바꿔치기 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3] 고려 태조 왕건의 세력 확장 추정방향
그런데 『후한서 』 군국지에 따르면, 어양군(漁陽郡)에 천주(泉州)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연국(燕國, 광양군)에 천주(泉州)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운 16주에 어양군(漁陽郡) 또는 연국(燕國, 광양군)에 포함되는 지명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천주(泉州)는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천주(泉州)는 연운 16주의 동쪽 지역으로서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675년)에 따르면, 칠중성(七重城)과 매초성(買肖城) 등지에서 당과 신라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칠중성은 고구려 요동성으로서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에 위치하고 있는 광부고성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매초성은 백제 관미성으로서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에 위치하고 있는 요성노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상기한 신라본기 675년의 기록에 따르면,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唐軍)이 천성(泉城)으로 공격해 왔는데, 우리가 이겨서 1천,400명의 목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았았으며, 전마 1천필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군(唐軍)이 고황하수로를 따라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방향으로공격해 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바로 천성(泉城)이 그 당시 천주(泉州)였던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인근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4] 고려 초기 도읍지 천성(송악군)과 도읍지 이동 추정 경로
즉, 고려 개국 초기에 둔 도읍지는 천주에 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송악군(松岳郡)란 지명은 지리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더우기 '송악군(松岳郡)'은 고려 태조 왕건의 출신지로서 가장 비중이 큰 지명 중의 하나인데, 기록 자체가 부실하다는 것은 그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송악군(松岳郡)'을 현재의 황해도 개성(開城) 인근으로 기록한 것은 『삼국사기 』를 뜯어 고친 1512년 당시의 조선의 지명인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첫댓글 그런데 카오스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고려 초기 서경이 서경이 아니고 동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려의 입장에서 '西京(서경)'이므로 '주도성의 서쪽에 있으므로 西京(서경)이라고 한 것'이지만, 사실은 '고구려의 주도성이었었던 평양성(사실은 장안성=안시성)'을 말한다고 봅니다. 즉, 당시 왕건고려의 주도성은 현,요녕성요양[=소위,고려제2개경]에 있었었으므로 옛고구려의 주도성인 평양성(장안성=안시성)인 현,하북성노룡현이 서쪽이므로 '西京(서경)'이라고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왕건고려'는 국호를 '고구려(=주몽고려)'를 계승해서 '고려'라고 한 것이므로 '옛고구려의 주도성인 평양성(장안성=안시성)'을 꼭 부흥시켜야 했었었는데, 당시 후진과 거란(요)이 이를 극구 반대했었으므로 왕건이 훈요십조를 남기고 죽은 것임.
@카오스 그런데, 나중(1018년 거란의 3차침략이후)에 고려는 할 수 없이 서경[현,하북성노룡]을 완전히 포기하고, 현,대동강평양을 서경이라고 고치게 되었었고, 이 이후에 '송+거란(요)+고려'가 작당해서 '현,하북성노룡(=옛,고구려주도성=고려서경)'을 '거란의 東京(동경)'으로 고치게 된 것이므로 '고려초기,서경=거란중기,동경'이 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명나라 시기에 현,요하요양[고려초기,주도성=고려제2개경=발해해동성국,동경]으로 '거란의 동경'이 또 한번 더 이동해 와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려초기 서경은 (고려)서경이 아니고 (고려)동경이 되어야 한다'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카오스 장안성이 안시성이 되었군요.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또 요양성요양에 고려 제2개경이 있었다면, 고려 제1개경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보다도 요 상경이 어디여야 됩니까? 또 압록수가 어디여서 강동 6주가 나왔나요? 또 요동을 거란에게 빼았겼는데, 요동은 어디가 되어야 하나요?
@광화세계 '평양성'이 고구려의 주도성이 된 적이 없으므로...고구려 주도성은 '장안성=안시성'일 수 밖에 없고요...'근거'는 차차 말씀드리지요....고려제1개경은 소위 918년에 궁예를 축출한 이후에 자리잡았엇던 곳인데, 원래 왕건의 출자지인 송악군이 됩니다. 물론 당시 궁에의 도성인 철원과 송악(제1개경,발어참성)이 모두 초기고려의 도성이었었지만, 철원을 태봉의 도성으로 취급하는 입장에서 송악(발어참성)을 제1개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요상경'은 너무복잡해지니...생략하고요... 원래 '강동6주에 해당하는 강(=압록수)'은 현,대릉하인데, 현,압록강으로 이동시킨 것으로 봅니다. 거란에게 빼앗긴 '최영의요동'은 현,요하서쪽
@카오스 카오스님의 학식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명의 위치와 강역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다시 보시도록 하시지요. 이제 기회를 놓치고 나면 더 어려워질 수도 있구요. 국민을 속이는 역사학자들이 있다면 커오스님께서 단호히 단도리를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제대로 교과서가 고쳐지지 않으면,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론 무장이 됐지. 네트워크가 계속 자라고 있지. sns 한 방에 날라갈 것입니다. 그 책임을 카오스님께서 지시겠다고요?
@광화세계 카오스가 보는 각도에서는, '광화님께서 아주 좁은 부분만 보고 계시다'고 생각됩니다. 즉, '역사왜곡의 범위와 기간 그리고 그에 관여된 인물Pool의 규모 등등'...즉, 역사왜곡의 범위는 간단히 ' 광화님의 굴곡지수(=카오스의 DMf)' 정도로서 규명되기 어려운 규모와 깊이가 있음을 간과하시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역사왜곡은 '지명의 위치와 강역' 보다도 '왜 역사왜곡을 했었는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실제지명의 위치(강역포함)'가 논란이 되겠지만, 중,고,상대의 시기에는 '강역(국경선)'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카오스는, 현,통설이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할 뿐입니다...
광화님께선,...'왕건=왕봉규'...'泉州=현,하남성안양일대'로 보시는 것 같은데,...카오스는 조금 달리 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즉, 청주(菁州) 또는 강주(康州)는 신라의 9주5소경의 한 주(州)로서 원래는 현,강소성지역이었었는데, 현,한반도로 지명이동한 이후에 청주(菁州) 또는 강주(康州)에 해당하는 현,강소성의 지명들은 현,강소성이남지역의 해안가 지역으로 지명이동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청주(菁州) 또는 강주(康州)가 한반도로 지명이동됨과 동시에 (대략) 같은 지명들이 중국땅 안에서도 양자강 남쪽지역으로 지명이동된 것이므로 '왕봉규의 강주(康州)'도 원래 당나라의 절도사가 임명되었었던 지역으로 봅니다.
그러다가 당나라가 망한 뒤, 후량말에 현,복건성泉州(천주)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왕봉규가 옛,당나라를 계승한 후당이 건국되자 사신을 보내서 신속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고, 이때 현,경주의 신라도 역시 모처럼 당나라를 승계한 후당에 사신을 보냈었던 것이 삼국사기 924년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당시 후당은 아직 미약해서 현,복건성까지 직접통치할 수 없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온 '후량의 천주(泉州)절도사'였었던 왕봉규에게 ‘후당의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지위를 부여하게 된 것입니다.
@카오스 따라서 당시 궁예로부터 현,산동성지역을 물려받은 왕건이 비록 견훤을 공격해서 현,강소성의 남부지역까지는 확보했었으나 ‘강주(康州=泉州를 포함한 양자강일대)’지역은 '후당의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인 왕봉규의 관할지역'이었었으므로 왕건과 왕봉규를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무리이며, 그 이유에서 보면,... 역시 현,하남성안양일대를 泉州(천주)로 보는 것도 맞지 않다고 봅니다. 재검토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신라 9주에 속하는 강주가 고려 땅이 되었는데, 언제 한반도로 이동했나요? 당나라절도사 중에 강주절도사는 없던데요?
@광화세계 허허,...누가 '강주절도사'라고 했었나요? '천주절도사'이고,...'권지강주사'이지요...즉, '천주절도사'는 아마 후량시기의 실제로 있었던 절도사이고, '권지강주사'는 후당이 왕봉규에게 '이름뿐인(립써비스 한것)' 벼슬이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겹치는 곳도 있을 수 있지만, '후량의 천주'와 '후당의 강주'가 같은 지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마 '후당의 강주'가 더 넓을 것으로 추측합니다만, 잘 모르겠네요..'신라9주에 속하는 현,한반도의 강주는 936년도 이후에 고려땅이된 것'이고, '신라9주에 해당하는 현,강소성지역은 당시 견훤,왕건 등등의 세력들이 다투던 지역'으로 대체로 왕건이 열세였었을 것으로 봅니다
@카오스 '신라9주에 현 강소성지역이 해당했군요. 저와 동감입니다. 또 견훤이 현 강소성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며 전쟁을 했군요. 저와 동감입니다. 그런데 왕건은 현 한반도에서도 전쟁을 했고, 또 현 강소성에서도 전쟁을 했군요. 그러면, 견훵이 반란을 일으킨 무주는 현 강소성에 있었나요?
@카오스 궁에가 현 산동성 지역을 갖고 있었다면, 거기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고 신라의 북원소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북원소경은 바로 산동반도 인근에 있었군요. 제 의견과 유사합니다. 제 의견은 북원소경은 현 산동성 덕주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주(康州=泉州를 포함한 양자강일대)’를 천주하고 거의 동일하게 보시는 것 같은데, 제 의견은 전혀 다른 곳이죠. 저는 천주를 현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온천이 철철 넘쳐 나오는 곳이죠. 윗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왕건과 왕봉규가 같든, 다르든 간에 천주와 강주의 위치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그리 영향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오스님의 학식은 대단하십니다.
@광화세계 왕건은, [다만, 견훤이 경애왕을 경순왕으로 교체시키고 가버린 다음에 한번 현,경주에 들른 적은 있지만,]... 현,한반도에서 전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무주는 그 중에서 조금 북쪽에 해당하지만,]...견훤은 옛,가라지역(현,강소성서남부지역)을 기반으로 궐기를 한 것이지요...그래서 나중에 옛,가라지역 세력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금산사에 유폐되었었다가 '후당의 주선으로 왕건(고려)에게 인계된 것'이고...그 후속작업으로 왕건과 견훤이 함께 견훤의 아들(신검=親子가 아니라 義子로서 옛,가라세력들임)과 일리천에서 영토(국경)협상하여 탄현[훈요10조참조]을 경계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일리천전투라는것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광화세계 천주절도사 왕봉규가 다스리던 천주가 현,복건성 천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었다고 봅니다. 최소한 현,양자강을 넘어서 북상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궁예가 처음 궐기한 곳은 ' 신라의 북원소경=고구려 광개토대왕을 모시던 사당이 있던 곳=현,산동성 태산부근'이었었지만, 마지막에 도읍을 했었던 곳은 철원인데, 그,곳도 역시 현,산동성 태산줄기의 한 부분입니다. 현,산동성덕주시는 아니라고 봅니다.
@카오스 아하, 후삼국 전쟁은 한반도가 아니라 현 중국인민국 땅에서 있었다구요? 저와 의견이 똑 같습니다. 견훤이 현 강소성 남부지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구요? 그건 이상한데.... 탄현이 현 중화인민국 땅에 있었군요. 저와 의견이 똑 같습니다.
@카오스 그런데 고려 개경은 요령성으로 올라갔군요? 그래서 전반적으로 다시 보시기를 권합니다. 물론 저도 카오스님 말씀에 따라 열심히 뒤집어까보고 검토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깊이깊이 밝혀지는군요. 아주 재미있어요.
@광화세계 예, '견훤이 현 강소성 남부지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것은 '경순왕이 한반도 현,경주에서 고려왕건에게 항복하러 현,요하요양으로 배타고 간 것'이므로 아주 명확합니다. 그리고 견훤이 왜 경애왕을 자살시키고 경순왕을 옹립했었는지를 알게되면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광화세계 왕건이 왜 '옛,고구려의 주도성인 평양성[안시성=장안성]'에 도읍을 정하지 못하고 현,요하요양으로 올라갔었는지에 대해서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즉, 왕건은 '고려'라는 국호 때문에 현,요하요양에 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고려'라는 국호 때문에서라도 '옛,고구려의 주도성인 평양성[안시성=장안성] = 즉, 고려의 서경'을 되살리려고 그렇게 노심초사했었던 것인데, '당시 후당을 멸하고 들어선 후진'과 '자칭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햇었던 거란(요)'이 '왕건고려의 현,하북성노룡 定都'를 극력 방해해서 결국 왕건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훈요10조에 남겼는데, 4광종이 이를 어기고 많은사람들을 죽이고서 서경천도를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카오스 그 이유를 논하는 것이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국호를 찾아 요하요양으로 올라갔다니 유치원 애들하고 장난하시나요. 내원참.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 때 살아본 것도 아니고... 그런데 '924년 기록'이라는 표현을 3번이나 쓰셨는데, 카오스님답지 않게 왜 그렇게 황급하십니까? 그 당시 복건성에는 5대 10국 중 아마 민월이 세워지지 않았던가요? 아마 남당이 고려 왕건에게 조공을 했을 것으로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을 겝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삼국사기를 뜯어 고쳤지만, 후학들이 동방의 역사를 올바르게 전달하기를 희망했지, 뜯어 고쳐진데로 교육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글을 따로 작성해서 옮겨 붙이다보니 중복되어 이상해 졌었더군요. 이제 고쳐진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예, 당시 5대10국 시기의 강주, 천주 등이 현재의 천주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조금 혼란스럽긴 합니다만, 모두 당나라의 절도사들이었었는데, 당나라가 후량에게 망한 뒤 자립했었었다가 후당이 후량을 몰아내자 다시 신속하려고 했었던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워낙 먼 지역이어서 결국 왕봉규는 후당으로부터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라는 이름뿐인 벼슬만 얻었을 뿐이므로 결국 실질적으로는 민월, 남당 등 5대10국시대의 남부지역 국가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연히 소멸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5대10국의 남부지역국가 중에서 (지역적으로) 왕건과 관련될 수 있는 국가는,... 오월(吳越;908~931)과 민(閩;933~945) 정도인데, 그동안 권지국사였었던 왕건은 '閩이 건국되는 933년의 1년전인 932년에 겨우' 후당으로부터 고려왕을 책봉받았으므로 924년경에 왕건과 閩은 무관하다고 보입니다. 대체로 오월(吳越;908~931)과 관련된다고 보이는데, 왕봉규와 오월(吳越;908~931)의 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시 5대10국의 모든 국가들은 완벽하게 단일한 통치력을 구사했었던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해당실력자들 사이의 합종연행을 했었던 것을 후대 사가들이 적당히 5대10국으로 분류했었던 것이므로 단순히 판단하긴 어려워보입니다.
그렇다치더라도 위에서 제기하시는 내용들은 여전히 플롯이 구성되지 않고 있군요. 왜 그리 황급하셨어요? 왕건이 강주의 항복을 받았는데, 그 강주는 어디고, 권지강주사의 강주는 현재의 복건성 천주라는 말씀인 것이죠? 근본적으로 현재로서는 대화가 곤란한 지경이 된 셈인 것이죠?
'왕건이 강주의 항복을 받았다'라고 하더라도 후당이 후량의 천주절도사인 왕봉규에게 '권지강주사'라는 이름뿐인 벼슬을 내리는 것은 가능합니다[즉, 후량시기에도 왕봉규는 거의 독자세력이었었던 것입니다]. 즉, 당시 왕건은 후량으로부터는 토벌대상이었었지만, 후당이 들어서자 어떻게해서든지 권지국사라는 꼭지를 떼어내고 고려국왕을 공식적으로 책봉받으려고 했었던 상황이므로 한때의 전투에서 항복을 받긴했었지만, 제대로 다스릴 수도 없이 아주 멀리 떨어진 강주를 후당이 왕봉규에게 이름뿐인 벼슬(권지강주사)을 줬다고 하더라도 이이를 제기하거나 불평할 상황이 아니었었다고 봅니다. 어쨋든 한번 다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신라 강주가 한반도로 이주했는데, 왕봉규의 강주를 천주로 보고 계신 것인가요? 강주는 강주이고, 천주는 천주인데, 두 가지를 헷갈리신 게 아닌가요?
아닙니다. '신라의9주5소경'은 강소성신라가 한반도신라로 이동하기 위하여 '강소성지역의 지명을 모델로 해서 만든 지명'을 현재의 한반도에 배치한 것입니다. 즉, '신라의9주5소경'은 애당초부터 현,한반도에만 있었던 지명인데, 그 모델이 된 지역이 현,강소성이므로 대체로 당시,강소성지역의 지명들이 이용되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서로 완전히 다르곳이지만,.. '강주'라는 같은 지명이 강소성과 한반도 양쪽에서 거론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물론 924년도에도 같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주'는 현,복건성에만 있는 지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광화님이 '후량의천주절도사'와 '후당의권지강주사'를 혼동하시는 듯.
@카오스 '후량의천주절도사'가 아니고 '후당의 천주절도사입니다. 년도가 924년이니까 후량이 아니라 후당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견훤과 왕건이 강소성에서 전쟁을 했고, 또 신라가 강소성에서 한반도로 이동했다고 하셨죠? 그러니 앞과 뒤가 잘 안 맞는군요. 오늘 애쓰셨습니다.
@광화세계 후당은 923년에 후량에 이어서 건국되는데, '924년의천주절도사'는 후당에게서 받은 벼슬이 아닙니다. 그래서 편의상 '후량의천주절도사'라고 한 것입니다. 즉, 당시의 정세로서는 '천주절도사왕봉규'는 후량이든 후당이든 손을 쓰지 못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왕봉규가 천주절도사라고 하면 후량이 인정했었던 것이어서 923년에 후당이 들어섰었더라고 '천주절도사왕봉규'는 그대로였었습니다. 즉, 당나라 말기부터 중국대륙 전체는 각지역의 절도사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었었고 조정의 '천자'는 절도사들이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서 임명하던 시기였었던 것입니다. 923년 건국인 후당이 924년에 왕봉규에게 절도사벼슬을 내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카오스 그런데 중국인민국 역사책에는 천주가 없고, 천주절도사도 없습니다. 하하하.
@카오스 어쨋든 중요한 것은 '權知(권지)'라는 '조건부' 직위명칭에 있습니다. 즉, 아직 정식직위를 내리기 전에 내리는 벼슬이기도 하지만, 왕왕 벼슬을 내릴 권한도 없는 왕(천자)이 이쁘게 보이는 자들에게 립서비스로 써먹던 숫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후당이 천주지역에 실제 통치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지역의 과거 절도사였었던 왕봉규가 사신을 보내서 후당을 섬기겟다고하니 '이뻐서' 내린' 명예직 정도로 보면 됩니다. 물론 후당의 통치력이 '천주는 물론이고 강주에까지라도' 미칠 수 있다면, 아마 왕봉규에게 '권지강주사'라는 명예직위를 주지 않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후당이 제것도 아닌것을 인심만 쓴것이지요
@광화세계 예, 그럴 것으로 봅니다. 애당초 왕봉규라는 천주지역 실력자가 자칭 '절도사'라고 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에서 '천주절도사'와 '신라'가 함께(동시에) 후당에 사신을 보냇다는 것을 기록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강소성신라가 한반도로 이동하던 과정 및 한반도로 이동한 이후에 신라가 당나라 조정에 통하는 창구가 바로 천주지역이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기록이라고 봅니다. 특히 한반도신라가 배를 타고 천주를 거쳐서 당나라로 들락거렸었다고 보는 것입니다....그래서 의미있는 기록인 것이지요...그리고 아마 왕봉규는 '친신라파'였었던 것으로 봅니다.
@카오스 중요한 관점은 천주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겅성 천주라고 하셨는데, 그리 돌아가야 할 일이 있나요? 고대 지명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명은 유주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유주가 춘추전국시대부터 청 시대까지 전부 도읍지로서 현 북경시로 알려져 있지만, 제 의견으로는 현 산서성 둔유현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틀렸다고 보신다면 왜 틀렸는지 논해 볼까요? 기획은 제가 하겠습니다. 댓글은 좁으니까 링을 좀 크게 만들어서 해 보죠. 아무튼 카오스님께 배우는 입장입니다만 작금의 학계처럼 하는 자세로서는 학문이 되지 못하죠.
@광화세계 카오스는 일단, 후당으로부터 '권지강주사' 벼슬을 받았었던 '왕봉규의 천주'는 현,양자강 이남지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데, 추측컨데, 현,복건성 천주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즉, 대략 당나라 말기 정도에서는 (현,하북성,요녕성,북한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지명이동이 일단락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그리고 현,통설에서 현,하북성 정도로 보는 '幽州(유주)'를 광화님께서는 현,산서성 정도로 보시는 것 같은데,... '幽州(유주)의 최초 위치'를 카오스는 더 서북쪽[대략,현,섬서성중북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논란하는 것은 범위가 너무커져 에너지소모가 너무 커지므로 이정도에서 앞으로를 위해서 남겨두시지요...
@카오스 당나라 말기 이전에 지명이 왜 이동되었을 까요? 누가 이동시켰을까요? 그 근거라도 있나요?
@광화세계 '지명이동이라는 객관적인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명이동의 '이유(why=왜?)', '주체(who=누가?)' 뿐만아니라, '시기(when=언제?)', '장소(where=어디서?)', '대상(what=무엇을?)', '방법(how=어떻게?)'이라는 6하원칙을 모두 함께 설명할 수 있어야만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역사왜곡의 범위'가 생각보다 너무 광범위하므로 어느 한두가지 근거(증거)만으로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므로 이 6하원칙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달콤한(쌈박한) 한두가지의 근거'를 찾아 한방에 해결하실 생각은 무리가 될 것으로 봅니다. 일단은 '인간본연의 속성'을 생각하시길...
@카오스 이제 철학으로 가시는군요. 멀고 먼 길을 가실려면 매우 적적하실 겝니다. 그간 많이 배웠습니다.
@카오스 어쨋든, 카오스는 역사왜곡이 3번의'대왜곡'과 여러번의 '소왜곡'이 겹쳐져 있다고 파악하고 잇습니다... 당나라 시기의 왜곡은 아마 '두번째의 대왜곡'일 것입니다...그런데, 아직 아무도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차차 알게 되겠지요...
광화님께서도 '역사왜곡자들'의 지적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시기를 조언드립니다...아마, 그분들(우리의 조상들입니다)은 현대인 그 누구보다도 IQ가 높고 또 감성이나 정의감이 투철한 분들입니다. 결코 '역사왜곡'을 쉽게 보시지 마시길 조언드리는 바입니다....[참, 日帝시대와 같이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역사왜곡은 반드시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을 첨언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