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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철
미국에는 카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무비라인'이라는
상담전화가 있다. 말 그대로 영화 상담 전화로 특정 영화에 대한 관람
여부를 상담해 준다. 그런데 십중팔구는 영화를 보지 말라고 한단다.
그 영화에는 정사장면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 영화에는 폭력이 너무 난무하다, 그영화는 내용이 너무 지저분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관람을 금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전화를 건 사람은 무비라인에서 권장하는 영화는 무엇인지 묻게 되고, 무비라인은 월트디즈니사가 제작한 '라이언 킹' 같은 영화를
권 한다고 한다.
그런 종류의 영화는 매우 교육적이고 교훈적이므로 크리스천 들이 마음 놓고 불 수 있는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활발하게 기독교 문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어느 단체는 '라이언 킹'을 보지 말라고 한다. 그 영화는 대표적인 뉴에이지 영화이며,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그 영화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동물을 우상으로 섬길 수 있으므로 기독교인과 주일학교 어린이는
그 영화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쪽 말이 맞는 것인가?
미국 카톨릭이 운영하는 무비라인의 말이 맞는가?
아니면 한국의 기독교 문화 운동의 단체의 주장이 옳은가?
몇 해 전에 지방에 사는 한 주부가 나에게 상담전화를 걸어 왔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은 이 세상의 음악은 다 사탄의
음악이므로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단다.
그런데 그녀는 서울에 있는 모 여대 음대를 졸업한 음악인이지라 하루라도 음악감상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음악을 즐기는 자신이 정말 사탄을 섬기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고자 함이 상담의 요지였다.
요 근래 기독교 일각에서 문화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소위 사탄 문화와 세속문화, 그리고 기독교 문화를 나누는 이분법이
성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모호하다.
앞서 언급한 '라이언 킹'이 좋은 예다.
같은 크리스천인데도 한쪽에서는 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보면
안된다고 한다.
심지어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 선교단체에서는 하나님의
'하'자나 예수님의 '예'자가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무리 훌륭해도
다 사탄 문화라고 속단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질이 형편 없고 수준이 저급한 문화라도 하나님의 호칭만
들어가고 예수님에 대한 언급만 있으면,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기독교 문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역사적으로 교회가 사회와 문화, 소위 크리스천이 말하는 세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 왔는지를 살펴 보면
이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12월 25일이 성탄절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날은 기뻐한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의 한 종파인 그리스 정교회는 지금까지도
1월 6일을 성탄절로 삼고 있다.
그들에게는 12월 25일이 성탄절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교회는 12월, 1월 3월 4월 그리고
5월에도 성탄절을 지킨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예수님의 탄생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몇월 몇일에 태어나셨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게다가 학자마다 견해가 다 다르다.
그들 나름대로 일리 있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주장이 정확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12월 25일이 거의 모든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성탄절이 되었는가?
본래 12월 25일은 로마인이 섬기던 태양신을 기념하는 축제일이었다.
태양신을 위한 축제일이었기에 그 날은 로만인들이 모두 쉬는 휴일이었다.
따라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따로 날짜를 정할 필요가 없이, 그 때까지 그들이 섬겼던 태양신의 축제일이 성탄절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성탄절에 고깔모자를 쓰고 등불을 밝히는 것은
로마 시대에 로마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며 행하던 축제 행사의 관습들이다. 즉 태양신을 위한 관습마저 성탄절을 위한 관습으로 바뀐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의 탄생을 기리는
사월 초파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일로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가 된다.
과연 우리 나라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렇지만 초기 크리스천들은 이처럼 세속적인 축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그 관습까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대다수 교회의 강대상에는 십자가가 붙어 있다.
교회 지붕위에도 십자가가 자리잡고 있다.
십자가는 크리스천들이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기독교 상징물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 성경의 유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구약에서 십자가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삽자가라는 형틀이 본래 유대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로마인과 페르시아인이 쓰던 이방인의 형틀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형틀 위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 형틀을 의미 없다고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의 형틀을 구원의 상징으로 적극 수용하였다.
만약 2000년 전 주님께서 프랑스제 기요틴 위에서 돌아가셨다면
지금 우리는 예배당 앞에 기요틴을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릴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옛날 우리 나라의 중죄수에서 씌웠던 칼을 쓰고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지금 분명히 한국식 칼을 걸어 놓고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교회는 그 이방인의 형틀인 십자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기독교의 거룩한 상징물이 되게 했고,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메세지를 이 십자가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오늘날 이 십자가가 본래 이방인의 형틀이었다고 해서 비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을 기록한 언어도 그렇다.
본래 유대인들이 쓰던 언어는 히브리어였지만 주전 1000년 경부터
앗수르 제국이 사용하던 아랍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구약성경의 일부가 이방 언어인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부분을 구약이 아니라고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어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것 역시 유대인의 언어가 아닌, 이방인의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와는 전혀 이질적인 언어다.
세속언어를 도구로 삼아 성경이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 역시 성경이다.
로마 제국시대에 성경은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이 되었다.
그래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성경 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성경은 수없이 많은 언어들로 번역이 되어 있다.
그 모두가 이방인의 세속적인 언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때 곧 성경의 언어가 되었다.
유럽에 가면 도처에 웅장한 예배당들이 세워져 있다.
고딕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그리고 도리아식 등 그 양식도 다양하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도 성경 속에 있었다는 양식은 없다.
그것은 모두 성경 밖의 양식들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때의 양식이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세속적인 건축양식으로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예배당은 거룩한 하나님의 예배당이 된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그 유명한
카타콤 지하 묘지에서 예배를 드렸다.
시체가 안치 되어 있는 지하 묘지에서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다.
그 곳에 쌓여 있던 시체들은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의
시체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의 시체였다.
그렇지만 그 지하 묘지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쓰였을 때,
카타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예배당보다도 더 거룩한 예배당이 되었다.
악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오늘날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피아노나
오르간 그 어느 것도 성경 속의 악기는 아니다.
다 세속적인 악기이다.
그렇지만 그 악기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악기가 된다.
기와집 형식으로 예배당을 지으면 은혜가 덜 되고 가야금으로
연주하면 은혜가 반감된다는 생각이야말로 철저하게 비성경적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사복은서 중에서 사도 요한에 의해 가장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말씀'으로 계시던 바로 그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어 원문에는
'로고스'로 기록 되어 있다.
로고스라는 단어의 본뜻은 '만물을 지배하는 이성적인 원리'이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만물이 어떤 이성적인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도 요한은 그와 같은 사고 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만물을 지배하는 이성적인
원리, 곧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을 한 것이다.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성경의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세속적인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용어는 곧 성경의 용어가 되었다.
오늘날 로고스라는 단어를 놓고서 '아, 이것은 이성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로고스라고 하면 전능성과 인격성과 영원성을 갖춘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선교여행을 하던 바울이 그리스의 아덴에 도착했다.
그가 아레오바고에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아레오바고한 사람을 재판하던 언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사도행전 17장 22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는 '신화'의 나라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포세이돈, 아폴론,디오니소스 등 하늘에도
신, 따에도 신, 바다에도 신, 수없이 많은 신들을 만들어 냈다.
가히 신들의 나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종교성이 많으면 그처럼 많은 신들을 스스로 만들었겠는가? 바울은 그 종교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23절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 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 만들어 둔 제단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신들을
다 만들고 나서, 그래도 혹시 빠졌을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알 수 없는
미지의 신을 위한 제단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우상을 위한 제단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어리석은 제단을 헐어 버릴 것을 종용하거나,
파괴하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도리어 그 제단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로 삼았다.
"너희들은 '알 수 없는 신'을 알고 있구나.
너희들의 지성으로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이란 말이겠지. 너희들이 이제껏 알지 못했던 그 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세속적인 제단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의 도구로
수요한 것이다. 성경은 그렇다고 바울이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고 매도하지 않는다. 도리어 뒤에 나오는 33절에서 34절이 이렇게 밝히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가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세속적인 제단을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교의 도구로
수용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자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무엇이든지 중심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그 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쓰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모습이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중심이 중요하다. 누구를 위해서 쓰이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할지라도 인간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로 신앙적이거나 기독교적인 문화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았다 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속에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비기독교적인 문학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속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왜 그의 소설만 보면 영혼이 정화되고 마음이 순화 되는가?
지드는 언제나 하나님을 위하여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속에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속에 인간을 향한,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 있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형식을 떠나,
정말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진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는 것만으로 참다운 기독교 영화가 될 수는 없다.
정말 믿음의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면 스필버그 같은 진짜 감독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는 모두 뉴에이지 영화라며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유대인 어머니 밑에서 철저하게 성경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성경의 뚜렷한 메시지가 있다.
'ET'에서는 사랑이다.
죽은 ET를 소년이 손으로 만지며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ET는 살아난다. 사랑보다 더 큰 생명, 더 위대한 힘은 없다는 메시지이다.
'레이더스'너 '쥬라기 공원'같은 영화를 통해서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 유명한 '쉰들러 리스트'에서 주인공 쉰들러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쉰들러가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만지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쉰들러의 그 행위가 인본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진짜 감독이 되어 이와 같은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가 될 수 있다.
정말 청년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공이 무엇이든지 간에
진짜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두 라인의 사람을 쓰신다.
한 라인은 진짜 행동파 사람이다.
베드로, 엘리야, 엘리사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행동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라인은 진짜 실력파들이다.
모세 오경을 기록한 모세는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인 애굽 왕궁에서
왕립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다.
다니엘서를 기록한 다니엘
역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총명한 청년으로 뽑혀서, 바벨론 왕궁에서
바벨론 왕립 교육을 받았다.
예언서를 기록한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은 제사장들 역시 모두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신약을 삼분의 일이나 기록한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하나님께서는 진짜 실력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두 라인의 사람을 쓰신다.
따라서 그대들은 선택하여햐 한다.
진짜 행동파가 되든지 아니면 진짜 실력파가 되든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자신이 선택한 바를 위해 최선을 다해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 세상의 어떤 것이든 자신의 중심으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도구로 쓰고 가꿀 때,
세상은 정말 밝고 멋지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상으로 화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결과로 수반되는 것이 기독교 문화이다.
기독교 문화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언제나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그 분뿐이다.
<청년아,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홍성사)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