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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히말라야와 알프스의 미답봉을 오르는 요즈음 웬 앞마당의 설악산 개척등반기가 올라야 하는지?
나자신 요델산악회에 창설멤버로(백인섭씨의 불로그에 의하면)입회를 한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악우들의 신뢰와 우정이 바탕이되여 그 어려운시절 우리들이 하고져 했던일들을
성공과 실패라는 양수레바퀴를 돌렸었나보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악우들은 겸손과 배려로 서로를 위로하였고 하나의 쟈일에 묵어온지가
45년이 훌적넘어섰다
그중심에 백인섭씨(요델산악회 창설자)의 이야기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안는다.
나자신 백인섭씨와 함게 설악의 개척등반에 참석하였다.(참고로 백인섭씨의 개척등반기는 나의 메모난에 퍼와 참고자료로 보고있다)
자즌바위골 개척등반,범봉연봉개척등반,고갈봉개척등반,한라산개척등반, 백인섭씨와는 별도로 선인의요델버트레스개척등반,우이암전면개척등반등 나의 악우들인 고송준호,고엄홍석등과 나름데로
암벽에 심취하였던 때가 있었으니 이제는 몆장의 흑백사진이 이야기하듯 아련한 기억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나자신 이글을 마즈막으로 다음부터는 지난 개척등반기를 쓰지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1.마장동 시외버스터미날에서 만나다.
일 시 ; 1968년 1월
등반대원 구성(8명);백인섭,임청규,송준호,엄홍석,나경봉,전철민,이형삼,서성우.
1968년 당시로서는 설악을 가려면 마장동시외버스 터미날에 모여 하루를 여인숙에서 묵고 새벽
4시10분 버스편으로 출발하는것이 관레이였다
당시로서는 통행금지가 있어 일찍들 만나 장비점검후 하루를 여인숙에 맞겨야하는때였다.
이른 새벽 추운날씨를 무릅쓰고 버스에 기스링을 올려놓고 추위와 한판승부를 벌이다보면 홍천버스터미날에 도착도면 간단한요기후 또다시 버스속에서 추위와의 한판승부를 벌여야한다.
요즈음의 버스와는 전혀차원이 틀리다.
비포장 도로를 운전기사는 잘도 달린다.헌데 운전석에나 히팅이될뿐 좌석은 아예 달리는버스의
속도로 더욱 싸늘한 추위가 우리를 엄습한다.
만석이된 승객들의 체온이외에는 우리를 보호해줄 아무것도없다
발가락이 시러워 동동구르며 다다른곳이 인제를 지나 one way에 도착하면 군인 아저씨들의
간단한 검문후에 한참을 기다린후 한대의 차량이 통과한후 우리를 실은 버스는 속초를 향하여
우리를 마구 흔들어댄다.
10여시간을 버스에 몸을 맡긴터에 온몸이 녹초가 되였지만 속초에 도착하니 신선한 공기에 정신이
버쩍든다.
모든대원들은 설악동행 버스에 올라 자즌바위골개척등반에 고무되여 추위도 모두잊었나보다.
하루를 설악동의 여인숙에서 묵고 내일부터는 힘든여정이 우리를 맞을것이다.
설악동에서 하루를 보낸 우리로서는 이른 아침부터 운행을 시작하여야했다.
비선대를 거쳐 자즌바위골에 들어서니 추위보다는 땀이문제인데 그것도 잠시 추위가 우리를 엄습할뿐..
계곡을 오르며 아이젠(8발)이 풀리는 악우가 있는가하면 픽켈에 의존하여 오르는 악우들 ...........
좌측이 임청규형. 오른쪽이 고인이된 엄홍석이다.
8발 아이젠에 기스링 엉덩이에찬 개털방석,기스링위에 놓인 군용설피 엄홍석이가 들고있는 픽켈이
일제top의 제품이다.이위치가 50m폭 직전에서 찍은 사진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당시의 적설량은 그리 많은 상태가 아니였고 오히려 혹독한 추위가 우리를
주눅들게 하였고 따듯한 커피한잔이 우리를 기다릴뿐이다.
자즌바위골에 들어서면서 우리의 운행은 점점 더뎌져 가기만 할즈음 해가지면서 우리는 비박을 준비 하여야만 하였다.
비박을 준비하며 계곡에 나딩구는 고목을 모아 불을 지피니 계곡이 훤하여질정도 이다.
얼은 몸을 녹히며 계곡의 찬바람을 벗삼아 깊은 잠을 청하여 보지만 ......................
당시로서의 비박장비라야
군용 판초우의를 깔고 개털방석을 놓아 한기를 차단한후 군용침낭에서 잠을 청하는것이 전부였으니
추위와의 한판승부라 이야기해도 과장된 이야기는 아닐것같다.
이사진은 너무도 잘알려진 사진이 아닌가 싶다. 중앙일보의 설악에살다에 실린사진으로 자즌바위골개척등반때 찍은 사진으로 좌측으로 부터 고인이된 악우 송 준호,나 경봉,고인이된 엄 홍석이 계곡을 오르며 휴식을 취할때 찍은사진으로 복장은 물론 장갑은 군용장갑으로 지금생각하면 둔하기 이를 데없었던것같다.
하루의 비박을 마감하고 바로 50m폭포에 이르러 완만한 경사의 빙벽은 우리를 혼쾌히 받아주었으나
100m폭을 보는 순간 작난이 아니구나, 마음 한구석이 꿈틀거림을 느끼며 100m폭앞에서 마즈막 장비 점검을 할때에...
내가 처음 바라본 100m폭포의 위용이다.
우리팀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간단한 행동식으로(당시로선 주먹밥) 모든일정을 소화해 내어야만 했기에 빙판위에서 즐거운 식사시간을 보내며 우리들만의 만찬을 즐기며 우리팀은 서로의 신뢰와 악우들의 우정은 더욱 두터워지 않었나 생각된다.
어느 누구도 식사에대한 불만이나 투정을 부리는 악우는 없었고 오로지 본등반을 성공리에 마감 하기만을 기원 하였을 것이다.
행동식인 주먹밥을 먹고있는 대원들
좌로부터 이형삼,백인섭,나경봉,임청규형,전철민,서성우교수,앉은 녀석이 고인이된 송준호이다.
100m폭포를 눈앞에두고 어택준비중인 대원들
위를 처다보는 백인섭씨 그리고 옆에서 아이젠에 날을 세우고있는 고엄홍석악우,앉아서 준비중인
이형삼악우의 모습이보이며 엉덩이에 찬 개털방석이 눈길을 끈다.
장비 점검을 끝내고 있을 즈음 .......
야 경봉이 너 top나가.........
등반대장이였던 백인섭씨의 지시가 나의 머리를 혼돈스럽게 만든다.
당시로서는 빙벽훈련이라고는 해본적이 없을 뿐더러 오로지 투지와 인내로 돌파해 나갈수박에 없는
상황 이였다.
요즈음에도 모든등반대가 그러하듯 등반대장의 지시에 따를뿐 반론을 제기하는 어떤대원도 없었다.
그러나 의견을 제시 할수는 있어도 철저히 등반대장의 의견에 따르는것이 당시로서는 철칙이였고
원칙을 지켰다.
50m폭포를 오르며 stept cutting이 어떤것인줄 알었을뿐 준비된 빙벽의 도전은 결코 아니였다
준비를 하며 엄홍석이의 일제 top픽켈을 건네받고 준비된 아이스하켄을 지참하고 100m폭을 오르기
시작하며 힘겨운 stept cutting이 시작되여 얼마를 올랐을까?
서서히 팔에 펌핑이 오기 시작을 한다.
stept cutting을 하며 몆번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오르는데............
휘두르는 픽켈이 얼음을 만나면 튕겨저 나오기를 몆번 계속되면서 나의 팔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휘두를 뿐 그이상도 아니였다.
이사진은 빙벽을 오를때 선등을 선 나의 모습과 후등자 전철민의 사진이다.
얼마를 올랐을까?
온몸이 펌핑이나고 팔은 그저 픽켈을 휘두를뿐 튕겨져 나오는 픽켈의 힘마저도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때 보조쟈일에 올려 보내진 따근한 커피한잔의 힘을 빌려 다시금 시도를 하여보지만
역부족임을 실감하면서 망설일때 하산 지시가 떨어져 빽을 하고 나니 이미 100m폭을 포기하고
바위길로 우회를 하여 100m폭의 중간 테라스에 오르는 길을 택하였고 대원들은 바위길을 오르고 있었으며 나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얼마나 올랐을까..........그것도 몆시간을 헤메인 빙벽인데......
따근한 커피한잔에 몸을 추스리며 올려다보니 실로 허망하기까지 하였고 나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아야만 하는 그것이 전부였다
겨우 20여m를 오르려 몆번의 방향전환을 하며 고생을 하였던것이 전부이다.
100m폭을 포기하고 바위길로 우회하여 중간테라스에 올라 기스링을 올리기 위해 확보를 한후 도르레를 이용하여 작업준비중인 고엄홍석악우의 모습.
많은대원들이 100m폭의 중간테라스에 올라 기스링을 올리려 여념이없다.
모든대원이 테라스에 올라서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하였던것은 테라스의 경사도가 편히잠을 청할수
있는 장소로는 불안하여 테라스에 쌓인 눈을 치우고 얼음을 깬후 군용설피를 세워 추락방지용 휀스를
설치한후 쟈일로 확보를 한후에야 비박을 준비할수있었고 허기진 배를 채워야만 하였다.
비박준비를 끝내고 찍은 사진이다.비박지아래로 군용설피가 세워진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좌우로 널려져있는 기스링이며 군용설피가 당시의 피곤함을 대변하는듯 널부러져있다.
전자에도 기술하였듯이 비박장비의 열악함으로 잠을 청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군용침낭속에서
혹한과의 사투를 벌였다는 표현이 맞을듯하다.
아니 어서빨리 해가 떠주기만을 고대하였음이 맞는 표현일것이다.침낭속에서 얼마를 뒤척였을까?
해는 뜨고 얼은 몸을 부비며 따근한 커피한잔에 몸을 녹이며 나머지 상단을 올라야만 한다는 중압감에
추위도 잊은듯 빙벽에 다시금 도전을 한다
약30여m로 형성된 상단은 빙폭도 좁을 뿐더러 청빙인 관계로 stept cutting한후 방향전환을 위해
아이스하켄을 치면 얼음이 쏫아져 내리기를 몆차레 또다시 팔에는 펌핑이 오기시작하며
전일과 같이 픽켈을 휘둘러봐야 튕겨져 나오는 픽켈을 감당하기 힘이들다
약10여m를 남겨놓고 다시금 빽을 할수박에 없었고 마즈막 공격을 백인섭씨가 공격에 나선다.
마즈막 공격에 나선 백인섭씨의 모습.모래내 금강제품의 픽켈로 오르는 모습이 경쾌하다.
이사진이 자즌바위골개척등반에서 백인섭씨가 남긴 유일한 2장의 빙벽사진이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또하나의 사진을 올린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나 동작이 서로 다르다.
모든대원이 100m폭을 오른후 능선에 올라 기쁨을 만끽하는것도 잠시 우리는 또한번 긴장을 할수박에
없다.
짖은 gas로 방향을 일고 있을때 백인섭씨로부터 나무람을 받고서야 길을 일고 있었다는 사실을 개닭았으니 역시 등반대장과 대원의 차이 인가보다.
얼마를 기다려 위치 파악이 된후에 비로소 웃음을 찾을수있었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사진이 gas로 인하여 위치파악이 된후에 찍은 사진이다.
2. 누가 100m폭을 올랐는가?
(나의 불로그 메모난의 두번째글인 제6화 자즌바위골 개척기가 백인섭씨가 쓴 글을 참고용으로
퍼온글임을 밝힙니다.)
68년 동계자즌바위골 100m폭은 실패한 등반이였다. 이는 100m폭을 우회하여 바위길을 선택하여
중간테라스에 도달하였기에 초등이라고 말할수없는것 아닌가?
다만 의미부여를 한다면 68년 당시에 자즌바위골을 기획하고 100m폭을 대상으로 기획한 백인섭씨의
탁월한 도전정신과 산에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허면 누가 100m폭을 올랐는가?
71년 1월 고송준호악우와 고오세진악우가 8발 아이젠으로 11시간의 사투끝에 100m폭을 오르며
선등을 섰던 고송준호악우가 10m를 남겨놓고 후배인 고오세진악우에게 선등자리를 내어준 일화는
이미 잘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내용은 이미 "설악에 살다"의 하얀빙벽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전에 기술된바 있으며
이듬해인 72년 12월 고송준호는 12발 후론트포인팅 아이젠을 금강모래내에서 제작하여 100m폭을
픽켈과 아이스대거를 이용하여 30분만에 오른 기록은 이미 "설악에 살다"의 하얀빙벽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전에 기술된바가있다.
이제는 고인이된 두악우들의 숭고한 산악정신과 겸손과 배려가 몸에 배인 고송준호악우의 업적을 다시는 논하지 안았으면한다.
또다른 개척등반사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에 와서 왜곡된 개척등반사를 마치 진실인것 처럼 글을 올려 무었을 얻으려 하는가?
100m폭을 오른 이야기로 제1화를 끝내고 제2화는 100m폭에서 봉정암을 거쳐 두개의팀으로 나뉘여
설악동에서 다시합류하는 이야기와 함게 노루목의 삼동지묘에 얽힌 충혼탑의 이야기로 68년 동계자즌바위골 개척등반기를 마감하고저한다.
2008년 6월13일
나 경봉
첫댓글 숙연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