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문경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 寂照塔碑)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네 군데 산(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인데 신라 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857~?)은 뛰어난 문장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남긴 비문 중에서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를 일컬어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칭한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사산비명은 그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 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 ▲봉암사 대웅전 왼쪽으로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적조탑을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때문에 우리 같은 일반인, 아마추어 답사가들이 사산비명을 찾아보고 그 비문을 읽는다거나, 뜻을 이해하고 역사적 가치를 단숨에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실제 어느 정도 해독력이 있다 하여도 현재 대숭복사비는 파손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사본이 존재), 나머지 비명들도 부분적인 훼손이나 풍화 등으로 인한 손상 등으로 식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재의 범주를 정했다면 한 번씩 찾아보면서 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에 대하여도 알아보고 그가 지은 명문장으로 추앙받는 사산비명을 실제로 찾아가 본다면 그 또한 뜻깊은 일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하나하나 찾아보기로 하였다.
- ▲비각 내 왼쪽이 적조탑비(국보 제315호)이다. 비신을 철제로 지탱하고 있다.
ㅇ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통일신라 부도비 대표
- 보령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비(국보 제8호)
- 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국보 제47호)
-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국립경주박물관)… 실물(實物)은 파손, 문장만 전함
-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비(보물 제138호 → 국보 제315호로 승격,
2009.12.31일)
사산비명 대부분은 당대를 살다간 고승들을 찬양하는 기록들인데 비하여 대숭복사비는 숭복사를 중창할 때 이를
기념하고 신라왕실을 찬양하는 기록인 점이 차이가 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 국보 제315호
- ▲용머리를 갖춘 귀부. 얼굴 앞부분이 약간 훼손되었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경북 문경 봉암사의 창건주 지증대사(智證大師)의 부도비로 적조탑비(寂照塔碑)라고 부른다. 부도인 적조탑(寂照塔)과 함께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비각을 세워 그 안에 부도와 부도비를 보호하고 있으며 문경 봉암사는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인 초파일에만 개방되는
곳인지라 일반인이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 부도는 보물 제137호이며, 부도비는 보물 제138호였으나 2009년 12월 31일부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어 최치원 사산비명이 모두 국보가 되었다.
지증대사(智證大師)
지증대사(824~882)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9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 입산하였으며 열일곱에 계를 받고 수행하던 중 꿈속에서 보현보살을 친견하기도 하였으나 경주의 세속화 되어가는 불교를 멀리했던 듯, 경문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수행에 힘쓰다가 879년 이곳에 봉암사를 창건하였다. 창건 3년 뒤인 882년 12월 18일 저녁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로 열반하시니 세수 59세, 법랍 43년이었다.
- ▲높이 273cm의 비신 앞면은 비교적 온전해 보이지만 사실상 글자 해독이 쉽지 않다. 비신의 뒷면은 앞면과 비교하면 여러 곳이 훼손되었다. 철제로 각을 잡고 경사지게 버티고 있다.
스님이 돌아가신 이틀 후 현계산에 빈소를 차리고, 이듬해 1주년이 되었을 때 희양산 봉암사로 모시어 다비 후 부도를 세웠다. 헌강왕은 사람과 제물을 보내어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였고, 3년 후 임금이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내린 시호가 지증(智證)이며, 부도탑을 적조(寂照)라 내리니 부도 적조탑비(寂照塔碑, 국보 제315호)라 칭하였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내리면서 대문자가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최치원은 무려 8년 후에야(그때는 헌강왕은 죽고, 진성여왕 즉위 6년인 892년이다.) 대사의 일대기를 작성하였고, 33년이 지난 924년에야 부도비를 세웠으니 비문의 정식명칭은 유당 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有唐 新羅國 故鳳巖寺 敎諡 智證大師 寂照之塔碑銘)이다.
- ▲귀부에 비신을 꽂는 받침 부분에 새겨진 공양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적조탑비의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는 최치원이 찬하였으나 글씨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는데 탑비에 (분황사 석혜강 서병각자 세팔십삼(芬黃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 :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새겼다)고 쓰여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모든 글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온전하게 남아있어 ‘남한에 남아있는 금석문중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최치원이 적조탑비(寂照塔碑)에 지증대사의 일대기를 쓰기를 그분의 일생에 있던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얘기는 이루 다 붓으로 기록할 수 없다며 여섯 가지 기이한 일(六異)과 여섯 가지 올바른 일(六是)로 추려서 적었다고 한다. 스님의 일대기를 포함한 그 많은 양을 필자가 직접 읽거나 해석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문화재 자료 중에 비문내용을 해석 본으로라도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비각의 오른쪽에는 지증대사의 부도비인 적조탑(보물 제137호)이 있다. 스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다.
아무튼, 최치원은 비문에서 지증대사가 돌아가심에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고 기록하여 높이 칭송하였다고 한다. 최치원답다. 옛 비문을 명(銘)이라고 하면, 비문 끝에 그분의 삶을 기리는 시구를 부기하는 것인데 글쓴이가 명(銘)을 썼으면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없으면 그저 부탁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비문과 비명의 차이를 이해할 것 같다.
문경 봉암사(鳳巖寺)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도헌 지증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지증국사 비문인 적조탑비에 따르면 스님의 명성을 들은 심충이란 사람이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니 대사가 와보고 이곳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 개창된 것이다. 구산선문 중 장흥 보림사와 문경 봉암사만 현존한다.
- ▲팔각원당형의 탑으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 하대와 중대를 올리고 앙련의 상대석이 탑신을 받친다. 중대석 받침에는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의 형상인 가릉빈가를 새겼으며, 그 위 중대석에는 무릎 꿇고 합장하는 공양상이 보인다. 그 오른쪽이 정면에 해당하는데 보주, 보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리기가 있어 이 탑에 사리를 모셨다는 상징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戰禍)를 입어 폐허가 되어 극락전만 남은 것을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조 세종대왕 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임진왜란 때 크게 손실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번의 화재와 중건이 반복되다가 구한말 의병전쟁 때 다시 전화(戰禍)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하였다.
근래 들어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과 주지 동춘 스님 후임 원행, 법연 스님 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있으나 수도 도량이라는 봉암사의 명성에 비하여 이런저런 절집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은 어쩐지 낯설어 보인다.
- ▲사리 몸돌 역시 8각형인데 앞뒤로는 자물쇠를 채운 모습을 새겼고 그 좌우에 사천왕을 새겨 사리를 지키게 하였다.
아무튼,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으로 개창한 봉암사는 고려 태조 18년 정진 대사가 계실 때는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며 정진할 만큼 위세를 떨쳤으며,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가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봉암사를 찾았다’고 할 만큼 유서 깊은 절이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원을 세웠다.
- ▲그 위로 팔각지붕을 실감 나게 새겼으며 노반, 복발, 보주의 상륜부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결사 도량, 봉암사를 찾아온 '봉암사 결사'를 시작으로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등 20인이
참여하여 정진하는 곳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었다.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1972년 향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하기에 이르러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
성역화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의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토록 하였다.
1984년 6월 제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는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하고 특별수도원으로 삼으니 관할 지방정부와 함께 봉암사는 물론 인근 희양산 전역의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군부대 출입보다
더 엄하게 금지된 곳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은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초파일)에만 봉암사를 개방하여 탐방이나 기도하러 들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봉암사는 그래서 더 유명한지도 모른다. 2014년 초파일 (양력 5월 6일)에 다녀왔다.
- ▲아쉽게도 지붕돌 한쪽이 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