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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에 변승우 목사님이 저더러 갑작스럽게 부흥회 인도해 달라고 하셨는데, 목사님 그날 다녀가시고 제가 기도실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 중에 성령께서 레마로 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깨달음, 어떤 교훈, 가르침, 그때 집회에 대해서 총 주제 그리고 일곱 시간을 그 어떤 말씀을 어떤 순서로 정해야 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정해야 될 것인지에 대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 교회 안에도 예언적 계시들이 임하다 보니까 큰믿음교회의 집회에 가면 조금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게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은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릴 것]이라는 그 말씀을 듣고, 되려 [어찌하여 그렇게 우냐] 하면서 [나의 달려갈 길과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면 나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하는 그 말씀이 생각나서 가야 되겠다, 결코 유쾌한 집회가 되지 않을 걸 알지만 가야 되겠다. 근데 좀 전에 우리 변 목사님께서 그 장로교 합동정통인가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 동네에 백석대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한 골짜기 옆에 있는데. 지금 변 목사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이번 부흥사경집회에서 제가 성경 풀어드린 것을 모두 문제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랬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들어가는 게 아니고 회개 안 하니까 바리새인들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그랬고 누가 내 참 가족이냐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 자매 모친이다. 이게 첫 번째 메시지인데 그분들의 결의에 의하면 마태복음은 성경이 아닙니다. 집에 가서 마태복음 제가 빼야 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 사도행전 예루살렘교회가 유대교라는 종교의 영에 사로 잡혀서 성령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다양한 그런 수단, 성령의 임재와 방언과 예언과 환상과 천사의 방문과 주님의 방문, 표적과 기사 이런 걸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 부흥시키셨는데 그것도 잘못 된 겁니다. 그러면 집에 가서 사도행전도 빼야 되겠습니다.
세 번째가 로마서였는데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주심이 되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칭의 그것은 단순히 우리 죄를 사해준 것만이 아니라 죄의 세력에서 구속하셨고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 이게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고 예수님 믿어 구원 받았다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변화입니다. 영적인 변화, 내적인 변화 그래서 이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행위들은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커피 자판기 가서 꾹 누르면 뭐가 나옵니까? 당연히 커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율무자판기에 가서 꾹 누르면 율무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탁 치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아니라면 로마서도 빼야 되겠습니다.
갈라디아서도 빼야 되고 그다음 히브리서 다섯 개(선지자, 모세, 대제사장, 율법, 믿음의 조상)의 그걸 말을 하면서 예수님은 그것보다 뛰어나다 우월하다 둘 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부인하고 타락하면 무서운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고 불사름이 된다고 그랬는데 히브리서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도 빼야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베드로전서인데 그래서 목사님은
선행에 대해서 말씀도 안 했다고 그러는데 저는 선행에 대해서 말을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주제입니다. 구원과 선행과의
관계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빼면 뭘 전하지요? 내 성경은 그러면 성경이 아닙니다. 아! 이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난번 밥 존스 목사님께서 그런 예언적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숨을 불어 넣으시고 그 숨이 바람을 몰고 와서
비를 내리게 될 때 교사들에게 성령의 레마로 주어지는 말씀이 비가 내리듯 내려질 것. 거기에 대해서 열 개의 질문이 생기면 거기에
대한 답변이 이르고 그렇게 계속해서 증가되어지고 이 진리의 말씀이 회복이 되고 교회가 교리적인 오류를 바로 잡고 그리고 진리가
올바르게 선포될 때 진정한 교회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참 시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적인 연합을 이루려다 보니까 신앙은
신앙이고 정치는 정치라는 논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의를 용납하고 서로 나눠먹기를 타협을 하고 이게 신앙은 신앙이고
정치는 정치라는 것입니다. 근데 수많은 목회자들의 이 사고방식을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미혹의 영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신앙도 신앙이고 정치도 신앙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이 성령의 숨, 바람 에스겔이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들이 있을 때 생기를 향해 태어날 때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어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처럼 그리고
엘리야의 제단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 드러나고 엘리야가 주의 종이 되는 것과 그리고 엘리야가 하는 일이
주의 뜻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런 역사가 일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도해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속에 성령의 불을 붙어야 됩니다. 이 심장이 하나님의 그 불이 붙어야 됩니다. 글쎄 여러분의 뱃속에 그
불이 마치 바다를 이룸 같이 생명의 강이 성령으로 가는 생명의 강이 흐르고 이게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하나 붙어 나갈 때
생명의 강이 이렇게 흘러야 됩니다. 서울에 지교회도 함께 한다 그랬습니다. 대전에도 흐르고 대구에도 흐르고 울산, 부산, 창원
큰믿음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초교파적으로 교회들 속에 성령의 불이 붙어야 됩니다. 그럴 때 한국은 우리나라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만큼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까 교회를 다니면서 눈물 흘려 기도하고 특별히 큰믿음교회에서 중보기도 사역을 하고 계시는데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정말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고 그리고 교회는 항상 그래왔습니다. 온전한 교회가 없었습니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봐도 초대교회는 온전했으리라 그랬지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교회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어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려고 그랬습니까? 그게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눈물 흘려 중보기도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어서 혼적인 교회가 영적인 교회로 그래서 교회의 회복과 구원이 반드시 일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자, 오늘은 베드로 전서를 읽으면서 구원과 선행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이 베드로 전서는 어떤 책인지를 보도록
합시다. 1장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아멘!
여러분 이번에 제가 강론하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뭔가 일을 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그걸 기도했습니다. "목사님이 선포하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사용해서 한국교회에 유익을 끼쳐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지금 선포하는 이 말씀이 어떤 예언적 메시지가 되고 교회들을
일깨우는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말씀이 누가 보낸 편지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제자며 사도인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아주 권위있는 말씀입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 이곳은 현재
터키 소아시아 반도의 중간을 동서로 횡단해서 잘라서 중간 위쪽으로 로마의 그 석주들에 해당하는 그런 지방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아르메니아가 있었고, 그 경계상에 파르키아라는 강대국이 있었는데, 부유하고 로마에 내는 세금도 많이 내는 그런
부자 지방들이었습니다. 바로 거기 있는 교회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수신인이 이 지역 사람들인데, 이 지역 교회성도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가? 성도의 신분은 무엇인가? 성도는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나라. 여러분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백성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에게 편지하노니]... 새로운 언약을 맺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삼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약을
파기하고 제 구실을 못하니까, 옛 언약이 있지만 새로운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과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뿌려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에게 지금 편지를 쓴다 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저 뒤로 넘어가서 5장 12-13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아멘.
이 편지를 어떤 목적으로 썼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는 것입니다.
굳게 서다 라는 말은 도로가에다 가로수를 심는데 가로수를 심으면 처음에는 약합니다. 뿌리가 땅에 활착을 못하니까 사람이 지나가다
건드리면 뿌리가 건들건들 흔들려서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고 또 여러 가지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를 여러 가지 외부의 고난이라든지 미혹같은 것이 들어와서 흔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 구원이 우리 안에 활착되고 만발해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그런 사람으로 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이 은혜를 굳게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구원을 굳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옆에다 각목을 대서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각목이 나무와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걸 해놓지 않으면 나무가 죽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서 뭔가 하지 않으면 이게 죽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행함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오는 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고난이
오는데, 이를 인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서 인내하는 것이 구원에 어떤 영향도 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인내하지 못할 때는 주님이 베푸신 그 은혜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과실수를 누가 가져왔습니다. 사과나무를 가지고 왔는데 이게 한 3년 놔두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근데 그냥 열매를 맺습니까? 열매를 맺을 만하도록 전지도 해주고 비료도 주고 뭔가 조치를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히스테미' 즉 굳게하다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는데, 이
의로움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어떤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가 꽃 피려면 우리에게도 무엇인가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에 굳게
서라. 그런데 그렇다면 어떻게 굳게 서야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쭉 가르친 것이 베드로 전서입니다. 여러분께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은혜에 굳게 하는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서 하나는 선행이고 그 다음이 고난에 대한 대처입니다. 베드로 전서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어떤 것인가? 은혜를 굳게 하라고 그랬으니까 그 은혜가 뭔지를
한번 봅시다.
1장 2절부터 우리 함께 읽어 보십시다. 1장
3절부터 12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은혜 위에 굳게
서라] 그랬습니다. 그 은혜를 찬양합니다. 1장 2절에서부터 5절까지 우리 함께 읽어 보십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아멘.
조금 전에 2절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서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하여 주의 백성 되도록 우리가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이 성도에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셨느냐.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혜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이 뭡니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하니까 '거듭남이 뭔가요? 모태에 들어가서 다시 납니까?' '넌 이스라엘 선생이면서도 그것도 모르느냐'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 거듭남이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래서 성령으로 나는 걸 영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거듭남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인겁니다. 여러분 거듭난 것은 은혜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썩어 죽은 소망이 아니라. 그리고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간직하신 것'을 기업으로 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은혜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땅의 것은 얻을 수 있지만 하늘의 간직한 것은 아무도 사람이 노력해서 선을 행한다고 그래서
되는 게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절에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능력으로 보호하고 계십니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고 하늘에 간직한 기업을 잇게 되고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데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은혜를 받은 뒤로 사람들 속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다고 그래서 다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진리를 쫓아간다고 해서 다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된다고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 베드로가 편지를 보내는 이 지역교회들 속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로 인해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은혜를 얻은 다음에 안 좋은 일들이 막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6절에서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아멘.
믿음을 갖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6절에 보니까 뭘 겪게 됩니까?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서 근심하게 됩니다. 오늘 제가 변 목사님을 가까이서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하는데 선배된 입장에서 가슴이 좀 아팠습니다. 진리를 쫓아 가다보면은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냥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렇게 살면 편하게 삽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게 악마의 참 큰 유혹인데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합니다. 그 다음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불시험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현재의 고난이 장차 그들에게 가져올 영광스러운 것과 비교해 보니까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귀한지 천사들까지도 살펴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선지자라든지 그 믿음의 이 은혜를 예언하던 그 선지자들이 어느 때 그런 은혜가 올 것인지 부지런히 연구해 보고 탐하고 사모했던 것들입니다. 그걸 지금 우리가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걸 알고서 그 믿음으로 인해서 은혜를 얻었지만 여러 가지 시련과 그리고 고난 불 시련을 당하는 가운데 있어도 이렇게 아름다운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할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의 상이 큼이라.' 역으로 그래서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지만 믿음 때문에 영광이 옵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지만 믿음 때문에 영광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 이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쭉 찬송한 것이 1장 3절에서 12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은혜 베푸신 그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서 1장 13절부터 2장 10절은 [이제
하나님으로 부터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생활해야 될 것인가?]를 말합니다. 즉
[우리가 은혜를 어떻게 굳게 하는가]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 은혜 받은 사람은 어떻게 생활해야 되느냐. 우리가 받은 은혜는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은혜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해야 되느냐. 이걸 말하고 있는데 첫째로 1장 13절로 16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아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 13-16절을 쭉 보니까 가장 중심되는 단어가 [거룩할지어다. 너희를 부르신 자가 거룩하니까 너희도 거룩하라. 이전
알지 못 할 때 좇던 너의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
거룩한 행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굳게 하는 겁니다. 이 거룩한 행실로 은혜를 받는 게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한 행실로
은혜를 받는 게 아니고, 거룩한 행실로 인해 거듭나고 또 하늘에 속한 기업을 잇고 구원을 받도록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그런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거저 받은 이 은혜를 거룩한 행실로 굳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되고, 거룩한 행실은 필요없고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아도 된다.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너무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동행하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순종하는 자식입니다. 여러분 17절을 읽어봅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나님은 무엇으로
판단하십니까?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어 이것 아닌데...믿음 보고 판단하시는데...죽어서 천국 문에 딱 도착해
가지고 '너 누구야?' '강금성입니다.' 딱 조사해 봤더니 안 좋은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너는 안 되겠다. 지옥에 가라.' '나
예수님 믿었어요.' '그래 예수님 믿었어? 그러면 너 천국에 들어가라.' 하나님이 이렇게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고 그랬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그걸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행위대로 사람을 판단하시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서로 반대가 됩니다. 그러니까 애써 [하나님이 행위대로 심판한다]는 말을 교회에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애써 안 보려고 합니다. 선포도 안 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이다.] 그러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
믿으면 거듭나고 그래서 하나님과 살게 됩니다. 즉, 하나님과 살도록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생활이 정돈되어서
행위가 정돈이 되는 겁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겁니다. 그걸 잘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지금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시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곧바로 17절에서 [외모로 보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여러분 17-19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아멘.
18-19절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아멘! 18절에 보면 여기 구속이라는 말은 몸값을 주고 노예를 빼내와서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을 원래 구속(redeem)이라
합니다. 구속하다...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조상부터 내려오던 그 망령된 행실, 돈 생기면 술집에 가서 술 먹고, 술 안 먹는
사람은 노름 집에 가서 노름하고 또 그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은 성적으로 음란한 짓을 해서 처첩을 거느리고, 우상에게 절하고,
물 떠놓고 경배하고, 빌고... 여러분 그런 망령된 행실에서 여러분을 빼내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은혜입니다! 구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인해서 그런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을 해주셨는데 우리가 또 그리로 들어 갈 수 있습니까?
저희가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고 돼지와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집어 삼키듯이 말입니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 구원은 우리의 어떤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빼내 온 겁니다. 따라서 구원에는 거룩이
수반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에는 반드시 선한 행실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 그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고 그리스도의
피가 아직 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외인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냐?
거듭났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사람들에게 자라나라 성장하라고 권면을 합니다. 2장 1-3절
읽어보십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의 어떤 표징들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아직도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완전히 나오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듭 났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도 종종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가지를 않습니다.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젖을 먹으면서. 여러분 그러므로 각 개인은 구원을 위해서 자라십시오. 어떤 데는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라. 아까도 변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칭의 성화 이런 거 전체가 다 구원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거 맞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어떤 것 이렇게 딱 줘서 이렇게 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생명이 그 사람 속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다 구원 받았을 때에 구원 받아야 될 필요성이 또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구원은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 믿음으로 이 죄로부터 구원받고 죄의 형벌로 부터 구원 받아서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성장은 단순히 우리 각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서 자라야 되는 것은 또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떤 부르심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우리는 자라야 됩니다.
성장! 오늘 4절부터 9절 까지 쭉 말씀을 보면 [우리는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그래서 그 집 안에서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 역할을 위해서 성장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2장 4-5절을 읽어봅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아멘.
9절의 말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제사장, 거룩한 나라,
택하신 족속으로 삼으셨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우리를 나를 주님이 어두운데서 불러내어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덕, 즉 구원을 주셔서 망령된 행실을 끊고 빛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신 그 하나님의 덕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선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의 목적을 성취하려면 여러분 성장하셔야 되는 겁니다. 겨우 구원받는 이런 것이 아니라, 나를 불러주신 주님의 그 은혜, 어두운데서 불러내서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그
하나님의 덕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 목사님들하고 식사를 하다가
옆에서 하는 대화를 들으니까 참 걸직한 욕설이 마구 나왔습니다. 음식점 안에서 예수님 믿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어떻게 저리도 말을
곱고 예쁘게, 깨끗하게 할까? 어쩌면 저렇게 행실이 반듯하고 정결할까? 저 집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반듯하고 화목하고
아름다울까? 그 비결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렇게 안 되어 있다면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2장 11절- 3장 12절을 봅시다. [그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그 하나님의 덕을 선전함]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뭘 요구하는가 하면 [선한
행실] 즉 선행을 요구합니다. 아까 제가 선행에 대해서 말씀드린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니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선한 행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해야 되는데 2장 11-12절을 읽어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아멘.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어떻게 가져야 한다고 합니까? [행실을 선하게 가져] 즉 선행을 행함으로써 라는 말입니다. 우리더러 선행을 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각의 생활영역에서 어떻게 선행을 해야 하는가를 하나하나 조목조목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선행이 따라야 됩니다. 선행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은 사람
속에는 선한 행실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은 은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2장 13-17절을
읽어 보십니다. 인간이 세운 제도나 통치자들에게 순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함께 읽어보십시다.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아멘.
여기 보니까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여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포장하게 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여러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반정부시위대에 맨 앞에 서서 막 시위하는 거 한번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물론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고 정의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말하는 게 아니고, 어떤 이익단체의 이익을 위해
앞장서 투쟁하는 행위들, 여러분 그것은 정말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제가 옳다 그르다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왕이나 방백들에게 순복하라]. 왜 그러한가? 그들의 기능이
있는데, 14절에 보면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이제부터 여러분 선행이라는
말이 나오면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선행이라는 말이 나오면, 베드로 사도가 선행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제가 구원과 선행의 관계입니다. 왜 이 사람들에게 순복하라고 하는가 하면, 그들은 악행하는 자에게 벌을 줍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포상을 해서 장려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 개인적으로 비리를
행하고 잘못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는 불의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일을 할 때에는
악행하는 자를 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합니다. 포상하고 장려합니다. 그러니까 주를 위해서 순복하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셔야 합니다. 15절에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이번에는 종들로 넘어 갑니다. 이제
국가 통치제도와 여러 방백들에게 하는 말이었고 이번에는 이제 종들에게 하는 말인데 18-20절을 읽어봅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아멘.
사환들에게도 종들에게도 [주인들에게 순복하고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복하라] 그랬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리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아도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래서 좀 불의한 주인이 다스리는 집안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가운데서 선행을 중단하지 말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받아도 선행을 행하라 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종들에게 말입니다.
그 다음
21-25절은 주님이 그런 삶에 대해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아멘.
21절을 보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말씀을 하시며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
입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중생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그래서 삽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느냐. 우리로 선행을 행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선행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께서 주신 은혜가 있으니 이걸 위해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으니 선행을 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3장 1-2절을 읽어봅시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아멘.
남편이, 믿지 않는 남편이 무엇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겁니까? 아내의 선한 행위로, 아내의 정결한 행위로. 예수 믿는 사람이 딱 정결합니다. 아내가 정말
반듯합니다. 겉으로는 아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비방하지만, 속으로는 내 마누라 뭘 하든지 믿을 만해. 예수님
믿어서 좀 고리타분한거는 있지만 별 일을 해도 내가 믿을 만은 해. 그러다가 언젠가는 아내를 따라서 남편도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에게 선행을 하라. 선한 행위로 정결한 행위로 단장을 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정 구원을 통해서 행복과 화목과 천국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 그런데 그 주님의 은혜를 굳게 하려면, 먼저 믿은 사람들이 선한 행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은혜를 굳게 하고 또한 풍성케 나가는 겁니다.
3장 7절에서는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함께
읽어보십시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선행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남편들에게도 동일하게 아내에게 잘하라고 하십니다. 남편들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다 보면 손해 볼 일이 가끔 생깁니다. 제가
지난번에 새벽기도를 갈려고 깨었는데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처녀 때 모습의 영림(사모님) 씨가 잔잔하게 옅은 하늘색의 피에르 가르뎅 마크가 찍혀진 원피스를 입고 저를 이렇게 바라보는 겁니다. 아,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그래서 내가 옷 사줄께 하고서 옷을 사주는데... 남편들이 기도하다 보면 그런 손해 볼 일이 가끔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 교회 권사님,
집사님들이 남편들을 잡았지 않겠습니까. '여보, 목사님은 기도하다가 사모님이 예뻐 보여서 옷 사줬다는데 당신은 뭐해.'
그래가지고 천안시내 옷 가게들이 돈 좀 벌었답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3장 8-12절을 읽어보십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아멘.
욕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이런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살면서도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쫓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에게는 저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데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를 향하시느니라]. 여러분, 베드로 사도는 선행에 대해서 얼마나 말을 자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저도 선행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령께서 베드로 사도를 감동시켜서 선행을 하라고 외쳤기 때문에 저도 오늘 베드로서를 그대로 읽으면서 선행을
강조합니다. 선행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하게 사십시오. 가정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선하게
하시고, 남편은 아내에게, 직장에서 부하는 상사에게,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나라에서는 위에 있는 분들에게, 위에 있는 분들은 아랫사람들에게 그리고
국민에게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되는 마땅한
행실입니다. 마땅한 것입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커피자판기에서 찍 누르면 커피가 나와야지, 예수님 믿는 사람 탁 건들면 선한
행실이 나와야지, 망령된 행실이 나오면 되겠습니까? 은혜를 굳게 하는 게 아니라 은혜가 말라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선을 행함으로 은혜를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3장 13절-5장 11절입니다.
이제 후반부는 고난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굳게 하는가 하는 것이 나옵니다. 진리를 따라 살고 선을 행하다 보면, 믿음으로
살고 선을 행하다 보면, 고난도 겸해서 옵니다. 이상하게도 이 사회는 선하게 살면 핍박을 당하는 사회입니다. 회식자리에 가서 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술을 안 먹겠습니다. 그러면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군대를 갔다 왔는데 군대에서 제일 보기 싫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랍니다. 중대회식을 하면서 서로 술을 먹으라. 그러는데 안 믿는 사람이 그러면 그래 그럴 수
있겠다 한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미운데, '나도 임마 장로 아들이야. 어려서부터 교회 다녔고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했어. 아, 이것 좀
어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제일 보기 싫답니다. 아주 이런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근데 이런 영적인 흑암의 세력이 군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좍 깔려있습니다. 흑암의 그 강물이 큰 급류가 되어서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빨리 그 급류를 중단시키고 메마르게 한 다음에, 거기에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해야 되는데, 예수님 믿는
사람도 이게 감각이 없고 의식이 없고 깨닫는 마음이 없어 가지고, 그 흙탕물, 흑암의 물이 흘러가는 사망의 물이 흘러가는 데에다가
자기도 지천으로 물을 대는 것입니다. 같이 그래 가지고서는 그 강물이 더 불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은 우리들에게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저쪽 사람들로부터
시작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진리로 회복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 은혜를 굳게 해서 선한 행실로 거듭나야
됩니다. 그럴 때 이 사회에서 그 흑암의 강물이 점점 말라서 생명의 강이 흐르게 되고, 사람들이 무심코 그것을 먹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겁니다. 마치 바다에 물이 가득한 것처럼, 사람들 속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꽉 차고 우리가 변화되야 되는
것입니다.
3장 13-17절입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아멘.
고난 받는 것에 대해 계속 말을 하면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소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면서 고난 받는 거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음 움직이지 말고 당혹스러워 하지 말아라. 그것 가지고
고민하고 근심하지 말아라. 그런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면 하나님이 여러 배로 채워주십니다. 여러 배로. 그 여러 배가 몇
배입니까? 그렇죠. 백배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금생에서 금세에서 백배로 받습니다. 당장에 백배로 딱 이렇게 환전
치기하는 것처럼 안 되어서 문제이지, 달러 바꾸듯이 안 되어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꼭 백배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고난 가운데서 선행을 중단 하지 마십시오. 악행을 행함으로 고난당하는 것보다 백번은 낫습니다.
3장 18-22절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아멘.
이게 무슨 의미인지 여러 해석이 있고 주장이 있습니다. 불분명하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그리고 의를 전파하고 이 은혜를 전파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 준비할 말을 챙기고 있다가 넌 왜 그렇게 안 하느냐 하고 물으면 여차여차해서 그 사람 마음 속에 복음을 심을 기회로
삼으라. 혹은 그런 고난의 때에 여러 가지 죄와 다른 것들을 단절하고 결국 선행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할 때에 예수님께 하늘
보좌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니 여러분도 고난의 때에 선을 행함으로 그런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수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간에 여러분, 고난을 당할 때에 선을 행함으로, 그리고 고난의 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삼으십시오. 자기를 향해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4장 1-6절은 방금
드린 말씀이 나옵니다. 즉 고난을 죄를 그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자기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겁니다. 아, 이게 뭐가 잘못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 정리해야 될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그러면서 자기 육체의 정욕으로 살던 죄를 완전히 그치고 하나님께 정결하게 서는 기회로 삼고, 6절에는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 되었으니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그 현장에서 하나님처럼 사는
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물질과 짝하고 풍요와 짝할 때는 그런 삶이 안 나오는데, 고난 속에서 연단을 받아서 그
사람이 하나님처럼 살 수 있게 된다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말씀입니다.
고난 속에서 잘 대처할 때, 그것이
은혜를 굳게 합니다. 그 다음 4장 7-11절을 읽어 보십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래서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
차리고 기도하고 서로 대접하고 은사를 받은 대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 우리가 아무리 고난을 겪는다 할지라도 이제는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걸 중단하지 말고 은혜를 받은 대로 그 은혜를 굳게 하기 위해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계속 넘어가 봅시다. 4장 12-19절. 이제 12절에 보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불시험이 올 때, 불시험 같은 고난이 왔을 때 은혜를 굳게 하는 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기고 그러다 보면은 요동하고 소동해서 자칫 잘못하면 주께서 주신 은혜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는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화와 의롭고 선한 행실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이들에게는 마음의 분노가 일어나서 악이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굳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은혜를 굳게 하려면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를 주는 18-19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아멘.
계속 고난과 선행이 짝을 지어서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거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에 대해서
보수적인 학자들은 보통 네로 황제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편지가 아마 트라이아누스 황제 때 써졌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로마의 5현제 가운데 트라이아누스, 그다음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있습니다. 여기
베드로전서 수신인 가운데 비두니아가 나옵니다. 트라이아누스 황제 때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는 로마 역사를 읽어보면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근데
이 플리니우스가 트라이아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씁니다. "일요일이 되면 로마 신들을 섬기는 신전에 오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듭니다. 이건 기독교인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들은 황제숭배도 하지 않고 로마의 고귀한 신들에게도 경배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됩니까?" 하는 고민스런 편지를 트라이아누스 황제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트라이나누스와 비두니아의 총독인
플리니우스 사이에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 받습니다. 그 말은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암암리에 또는 노골적으로 그 당시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데 박해가
오는 그런 환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 할
지어다].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고 선을 행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그러지 않고 살면
어떻게 구원을 얻겠느냐. 은혜를 굳게 하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굳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혼자서 감싸 안고 이리저리 궁리하다 보면 은혜가 붕괴될 수 있습니다. 5장 1-11절은 고난 가운데에 있는 신자를 돌볼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왜 중요한가? 1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아멘. 사도 베드로가 자기도 장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누구냐?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 할 자로다].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처럼 똑같이 그런 모습을 보여라. 이게 고난의 증인입니다. 스테판처럼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열린 환상을 통해서 자기를 환영하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꿋꿋하게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실제 행실로 보이라는 겁니다. 이게 고난의 증인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증인이면서도 나타날 영광에 참여 할 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모습을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 보이면서 양 무리를 즐거움으로 치라고 격려하는 게 5장 1-11절입니다.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베드로 전서에서 은혜는 믿음으로 얻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우리가 굳게 해야 될 필요가 있는데, 굳게 하는 것이 첫째가 선한 행실입니다. 믿으십니까? 선한 행실로 믿음을 굳게 하십시오. 은혜를 굳게 하십시오. 거듭남을, 하늘에 간직하신 그 기업을 잇는 것을, 하나님 능력으로 보호받는 것을, 선한 행실을 통해서 굳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진리를 쫓아가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여러분 그것 때문에 소동하고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으니까. 고난 속에서 은혜를 굳게 하고, 선한 행실로 굳게 해서, 여러분의 은혜가 완전히 자리 잡고 더 풍성해지고 열매 맺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말씀에 자기를 비춰 봅시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 제게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나오게 하여 주십시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만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 이상히 여기지 말고, 소동하지 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그렇게 기도합시다. 그리고 여러분 가정에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해 질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걱정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기도 하십시오. 우리 하나님 앞에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값없이 거듭나게 하셨고, 하늘에 간직하신 쇠하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 할 것을 주신 주님.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망령된 행실을 끊어버리고 이제 주님 안에서 선한 행실로 그 은혜를 굳게 하기를 원합니다. 악한 생각, 음란한 생각, 가증스러운 행위들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서 완전히 단절되게 하시고 우리 삶이 주님 앞에서 온전히 변화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로 이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게 하시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옵소서. 의에 대하여 살게 하옵소서. 의에 대하여 살게 하옵소서. 의에 대하여 살게 하옵소서. 주님! 주님 제가 죄에 대해서 죽기 원하나이다. 완전히 죽게 하시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예수님 믿는 그리스도들 속에 선한 행실의 열매가 무궁무진 맺어지게 하시고 그 열매가 풍성하여 가득 찰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오, 하나님 아버지 오,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은혜 주셨사오니 우리 가운데 선한 행실이 나오게 하옵소서. 주님! 여호와 내 아버지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기다린 이 고난 이상히 여기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을 바르게 믿다가 다가오는 여러 고난에 대해서 그리하지 않게 하시고 소동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오, 주님! 이상히 여기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이 땅에서 백배로 받게 하시고 이 땅에서 백배로 받을 지어다. 선을 행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 이 땅에서 백배로 복을 받을 지어다. 갚음 받을 지어다. 백배로 주께서 말씀 하셨사오니 주님 백배로 받을 지어다.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축복하노니 백배로 받을 지어다. 백배로 받을 지어다. 백배로 받을 지어다. 백배로 받을 지어다. 아내가 남편에게 선한 행실. 남편이 아내에게 선한 행실. 주여! 백성이 군주되는 자에게 선한 행실, 직장에서 위나 아래 사람들도 선한 행실, 여러 사회에서 하나님 앞에 선한 행실, 주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변화되어 선한 행실로 가득 차게 하시고 주여! 영광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시옵소서. 오, 하나님 아버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성전을 사하려는 죄의 권세는 떠날지어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성도를 사하려는 죄의 권세는 떠날지어다. 사단아, 물러날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죄의 사령은 사라질 지어다. 파쇄될지어다. 주님! 아버지 보호 하시옵소서. 성도들을 보호 하시옵소서. 주님 큰믿음교회를 보호 하소서. 이 나라의 교회들을 깨우소서. 이 나라의 교인들을 깨우소서. 진리의 샘이 흐르게 하소서. 진리의 강물로 충만케 하소서. 주님! 진리의 강물로 충만케 하소서. 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아버지, 주님! 오, 우리를 책임져주소서. 아버지, 책임져주소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변승우 목사님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 시온으로 행하시고 앞으로 유쾌케 하시옵소서. 오, 하나님 아버지 고난의 길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오, 주님! 고난의 길에서 정말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고난이 창달이 되게 하시고 그 고난이 참으로 나타날 어떤 영광도 비교 할 수 없는 큰 영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역사하시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길 원합니다. 저희를 치료할 성령의 불이 머리머리 위에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불, 불이 임하시옵소서. 불로서 임하시옵소서. 불로서 임하시옵소서. 악한 행실을 끊어내지 못한 이 성도들의 행실이 성령의 불로 소멸되게 하시고 선한 행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성령의 불로 충만케 하시고 하나님 영광의 가득한 능력이 이 땅에 임하게 하시고 방방곡곡의 병들을 치유하시고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은혜를 굳게 하시옵소서. 주님, 우리 삶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교리를 왜곡하는 어떤 미혹의 영은 사라질 지어다. 종교의 영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파쇄될지어다. 거짓말로 주여, 성도를 잡는 살인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권능 앞에 파쇄될지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고 주님, 영광 보이시옵소서. 영광 나타내시옵소서.
-강금성 목사님 "구원과 선행" (2009. 09. 24) 설교 중에서
큰믿음설교 받아쓰기 카페에 예향님께서 작성해주신 글을 퍼왔습니다.
http://cafe.daum.net/gf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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