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렇게 읽읍시다 20◈
“성경 계시의 종결과 은사의 계속성”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교훈한 예배에 대한 가르침을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따라야 할 예배 모범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에도 은사주의자들 가운데서는 집회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소위 예언을 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고 방언을 통변하는 등의 일들이 없지 않은데, 그것은 성경 계시에 관한 이해가 부족함으로 생겨난 시대착오적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약의 정경들이 확정됨으로써 성경 계시가 완성됨으로써 이제는 그런 형태의 하나님의 계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직신학에서는 사도와 선지자를 창설직원이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약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엡 2:20).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들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계시)을 주셨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교회는 세워져 갔던 것으로, 여기서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약간 다른 개념으로서 예언의 은사가 다른 이들보다 많이 나타나 예언을 하나의 사역으로 행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도행전에 보면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나오며 집사 빌립의 두 딸도 선지자로서 사역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행 11:28; 21:8-12).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대부분 사도들은 1세기가 끝나기 전에 죽었고, 그 후 그들이 기록한 문서들이 보존되고 모여져 오늘날 우리가 신약성경이라고 일컫는 정경이 형성된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이처럼 사도들이 남긴 기록들이 정경으로 채택된 것은 사도들이 그 문서를 기록할 때 성령께서 감독하시고 영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벧후 3:15-16에 보면 베드로는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도 다른 성경과 같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신적 권위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신약성경에는 사도가 아닌 복음서 기록자들이 기록한 책들(마가, 누가, 사도행전)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사도들의 증언을 근거로 기록되었으며, 또 기록될 당시 사도들의 감수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2세기경에 이런 문서들이 정경으로 확정되고 나서는 이런 사도와 선지자와 같은 계시전달적 은사와 직분은 교회에서 사라졌으며, 그 대신에 교사의 직분은 여전히 존속하여 기록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하여 전하고 가르치는 일들을 맡게 된 것이며, 이들 중에서 목자의 일과 교사의 일을 겸하는 자들을 목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엡 4:11에서 ‘목사와 교사’로 번역된 한 것은 ‘목자와 교사(pastor and teacher)’로 고쳐져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에는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예언의 사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설교권에 있어서 목사들만 갖고 있다고 하는 교리나 교회법은 성경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누구든지 말씀을 깨달은 자는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며, 교사로서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소위 개혁주의적 신학의 입장으로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며 또 받아들여야 할 성경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은사 종결설’입니다. 즉 그들은 신약 정경이 확정되고 성경 계시가 완료됨으로써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 은사들도 종결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8-10절)고 한 사도 바울의 언급을 성경 계시의 문제와 관련시켜 해석함으로써 ‘온전한 것’이란 곧 확정된 성경을 말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는 것이란 예언을 비롯한 모든 은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을 함으로써 섬김의 은사나 가르치는 은사 등 일상적인 은사들을 제외한 예언과 방언, 그리고 신유의 은사 등 초자연적 은사들은 다 종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바울이 그 분문에서 ‘온전한 것’이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 것을 부정하는 잘못된 해석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성경 계시의 확정으로 계시의 은사인 예언의 은사가 종료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모든 초자연적 은사들도 종결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자기들에게 그런 은사가 없으므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아전인수격의 책상머리 주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오순절 교회들이 지나치게 방언을 ‘찬양(?)’하며 몰두하는 것은 큰 병폐이지만, 그들 교회로 말미암아 수많은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속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교회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현상을 좇아다니며 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반면에 엄연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단 그 현상들을 성경의 빛에 비추어 해석해서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방언의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 서신의 기록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와 주석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방언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방언을 많이 할 뿐 아니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곧 나의 영이 기도함으로써 내 영이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고전 14:14-18) 방언 기도의 유익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전 14장에서 바울이 금지한 것은 공예배에서의 방언으로서, 기도나 찬양에 있어서뿐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방언의 형태로 나타난 경우, 즉 예언적 방언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말하자면 “자,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하고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열심히 외쳤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했던 것으로서 이에 대해서 바울은 그런 경우 통변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도록 금지한 것입니다.
앞서 설명한 계시의 종결과 관련하여 오늘날에는 이런 류의 방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방언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방언의 현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하여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므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이 그런 방언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롬 8:26). 그러나 이런 방언의 기도에서도 조심해야 할 것은 신비주의적 경향이나 열광주의적 경향입니다. 특별히 무속문화에 오랫동안 익숙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은연중에 몰아적인 체험(엑스타시)을 동경할 수 있으며, 그것이 뜻도 모르는 말을 계속 부르짖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은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교회가 좀 더 신중한 연구와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신령한 것’, 즉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형식주의적이고 의식화된 신앙과 예배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언을 하라고 한 것으로서, 말씀의 은혜가 더 중요한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한 것을 명심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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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은사중지론이나 은사주의의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연적 은사뿐 아니라 초자연적 은사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학적 틀 안에서만 판단하여 종결되었다는주장이나, 모든 초자연적 현상들을 이상한 현상을 간주하는 자세는 편향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카페의 박영돈교수 글 중 59번 글"오늘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은사가 있는가, 또 초자연적 치유 은사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 자신이 그 경험자이기에 더욱 확신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 전에는 저도 방언을 '혐오'했습니다.
@boaskorea 그리고 제가 윗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오늘날의 방언(기도)이나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오순절의 방언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의 방언은 명백한 외국어였지만, 고린도교회나 오늘날의 방언들은 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아나르벡님의 멘토가 돌아가신 대천덕 신부님이라고 하셨는데, 그분 생전에 예수원에서는 은사집회가 있었고, 그분 자신도 방언으로 기도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나르벡 아나르백님의 질문이 타당성이 있는지에대해 의구심이 듭니다. '세계 기독교계' 라는 것은 지나치게 크고, 그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루터 칼빈의 종교개혁 정도 수준의 사건을 제외하고 어느정도 사건이 일어나야 '세계 교회'가 '이것이 이로웠다' 라고 한목소리로 칭찬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어떤 유익이 있었다.'라고 이야기 한다고해도 그것은 일종의 한계를 가진 유익일 수 밖에 없으며 우리네가 사는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은 방언 기도를 해주시는 몇몇 성도님들 덕분에 새벽기도가 활성화되었고, 그것이 우리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jeja 이 때 새벽기도가 활성화 되고, 그것으로 교회가 부흥했다는것은 그 교회의 입장에서 충분히 유익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교회는 '은사주의' 라는 둥 다른 어떤 신학자가 공격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도 됩니다. 이것은 꼭 방언이 주제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주제에서 마찬가지 입니다. 적어도 방언이라는 주제로 이야기 할때, 개인이나 지역교회 수준에서 어떤 동의를 얻을 수 있으면, 그 자체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마귀의 소리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아나르벡 자기가 방언한답시고 큰소리로 떠들어대어 옆 사람의 기도에 방해가 된다면,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방언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방언을 한다면 오직 하나님과 나만의 개인적인 일로써, 골방에 들어가서 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공간이라면 혼자서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용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방언한답시고 인간의 기본도 안된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요.
방언을 못하는 목사님이 계시는가 하면, 방언은 잘하는데, 기본상식도 되지 못한 신자도 있습니다.
방언을 못하시는 목사님은 대신 예언의 은사가 있으신 거지요.
@아나르벡 방언을 못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 것이니까요.^^
@아나르벡 세계교회는 이야기하시면서 몇몇 성도, 새벽기도, 교회부흥등에 끼치는 유익은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신다니, 아주 작은 어린양 한마리를 애태우며 찾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의아한 마음이 듭니다.
아마도 교회부흥보다는 올바른 토지의 재분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굳이 세계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해야 한다면,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교회가 사실상 방언을 뜨겁게 하며 예배하는 교회들인 점을 들고 싶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전도하는데 있어서 방언은 틀림없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것이 없었다면 훨씬 전도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jeja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 기독교와 무슬림의 대립이 있는 것을 생각할때, 방언을 통해 빨리 전도할 수 없었다면 더 많은 지역이 무슬림의 지역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아나르벡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방언하는 성도와 목사님간에 반목하는 모습은 옆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일이 있습니다. 인간은 간사하기 때문에, 방언하게 된 순간 주님께 감사하면서도, 다른 성도에게는 그것이 또 자랑거리지요. 그것으로 성도가 교만하게되면 그 순간부터 교회에 폐만끼치는 존재가 되는것에 동의합니다.
@jeja 멀리 타지에서 힘들게 사역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더 힘드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참, 그리고 뒤늦은 사과이기는 합니다만, 아나르벡님께서 하시지 않은 주장에 대해 말씀드린 것에 대해서는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나르벡 저의 질문은 아나르벡님께서 "교회 부흥 ... 댓글을 달 필요도 없을 정도의 유익이라고 생각되니,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에서 비릇된 것이니, '더'라는 부사 하나때문에 불편하신 마음을 토로하시기 이전에 스스로 자신의 말씀을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라는 말씀을 일면식도 없는 분으로부터 들은 상대방은 어떤 감정을 느낄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교회 부흥을 대답할 가치가 없는 작은 유익이라고 표현 하신것과 교회부흥이 토지정의 보다 더 중요하다는 대답사이에 서로 괴리되는 거리감이 상당합니다.
@아나르벡 저는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출신 기독교인들과 충분히 더 대화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님의 주장을 정당화 하기위해, 사실상 한 대륙 전체의 예배습관을 그렇게 부정하시는 모습이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아나르벡 '마귀의 소리다'라고 제가 주장하지 않은 것은 잘 아시고 있겠지요? - 라는 말씀과
'신비주의나 무속에 빠진자들을 외관상 기독교인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인지' - 라는 말씀은 모순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머리가 무거운지 보겠다고 하시니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족을 답니다.
아나르벡님, 화 푸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지지난주에는 보아스님과
지난주에는 바나바님과
이번주에는 아나르벡님과 다투다보니,
왜 저는 항상 이렇게 누구와 다투는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글과 댓글을 잘 쓰지 않았었는데, 새언약님께서 워낙 친철하게 초대해 주셔서, 좀 적극적으로 쓰려다보니 매일 툭탁툭탁입니다.
@jeja 아나르벡님의 다른 의견들, 예를 들어 여전히 한국교회에서 희망을 본다고 하신다던가 하는 말씀들에서는 크게 공감하고, 젊은 사람으로써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화 푸시고, 아나르벡님과 같이 호방한 성격을 가지신분과 한번 제대로 사귈 수 있다면 더 크게 가까워질수도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외지에서 고된 사역 하시는데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jeja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지요.
대화가 전혀 없는 것보다는, 언쟁처럼 보일지라도 대화를 해서 서로를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님께서 잘 표현해 주셨어요.
아나르벡님은 제가 보기에도 호방한 성격을 가지신 분 같습니다.
친해지면 엄청 친해질 수 있는 그런 분이지요..^^
젊은 지성인과, 흰머리의 지혜를 가지신 분이 서로 만나 믿음의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지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차고 넘치는 까페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이년전 즈음에 제 처가 방언을 했습니다. 사실 전 그때까지 방언이 종결되었다고 믿었고 방언하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보았지요. 그래서 방언을 하는 제 처를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었지요. 제 처는 방언을 원하지도 않고 받았고 남에게 말하지도 않고 항상 새벽에 혼자 기도합니다. 가끔 제가 잠결에 아내의 중국말 비슷한 것을 듣곤 합니다. 저는 개혁주의의 계시로써 방언중단 이라는 잣대를 제 아내에게 들이 댈수는 없습니다. 아내를 통해 방언기도는 아직 존재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재미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