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파시즘(이탈리아어: fascismo 파시스모[*], 영어: fascism 패시즘[*], 문화어: 파쑈) 또는 결속주의(結束主義)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며 반공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적인 정치 이념이자[1][2][3][4] 국가자본주의, 협동조합주의 경제 사상이다. 파시즘은 끊임없이 개개인의 자치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평등을 부정하며 불평등이 존재하거나 또는 유발돼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5] 초기 파시즘은 1차 대전 이후 민족주의 작가, 시인들의 낭만적 민족주의와 페르디난트 라살레의 초기 국가사회주의, 조르주 소렐의 민족적 생디칼리즘이 혼합된 형태인 반제국주의적 사상이었으나, 지지자들이 우파쪽으로 쏠리면서 반자본주의 가치가 사라지고 점점 반공주의 가치가 심화되면서 극-반공주의, 극우적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파시즘의 이론적 기원은 초기 사회주의, 그리고 조르주 소렐이 마르크스주의자인 것을 감안하면, 마르크스주의도 포함될 수 있지만, 현재 '파시즘'은 보통 '후기 파시즘'을 의미한다. 후기 파시즘 운동의 주도자는 베니토 무솔리니이며, 이 후기 파시즘에서는 남성은 여성에 비해 신체가 우월하고, 징병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성우월주의를 주장한다. 또한 이들의 정치적 직접 행동에 있어서 남성적 카리스마를 요구 또는 분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파시즘은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진보주의, 전통적인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가 우선시되는 자유주의의 반대가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파시스트들의 특징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교묘히 이용해 대중적 애국심을 고취해 대중 독재를 합리화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때문에 파시스트들의 행동 양상에 있어서 대중주의(라이트 포퓰리즘이라고도 하며 파시스트 운동에서는 인종, 지역, 민족의 우월심리가 심하게 작용한다. 이는 광적인 군중심리와 함께 작용하여 논리가 배제되고 감성이 우선시되는 포퓰리즘이다)와 민족주의는 필수적인 이념이다. 보통 '파시즘'은 초기 파시즘이 아닌 후기 파시즘을 뜻한다. 이는 곧 반공산주의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국수주의적인 대중 독재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후기 파시즘은 '네오-파시즘'으로 불린다. 일부 학자들은 파시즘이 인종주의를 포함한다고 하지만, 인종주의가 포함된 파시즘은 국민사회주의(나치즘)이며, 파시즘은 인종주의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이와 같은 예로 1934년 저널리스트 에밀 루트비그가 주최한 인터뷰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어딜가나 순수한 인종은 없으며, 순수한 인종이 없는 상태에서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나치의 과격 인종주의를 비판했다.[6] 그러나, 무솔리니의 입장은 매번 바뀐 적이 많았으므로, 아직 파시즘이 '인종주의'를 포함하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파시스트 대다수는 인종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에 맞게 파시즘에서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사회에 대입해 사회진화론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
개요
파시즘은 자국의 인종, 민족이 이를 구성하는 개인, 무리, 기구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국가를 최고의 숭배 가치로 여긴다. 즉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찬양한다. 이러한 국가의 실현을 위해 파시스트들은 규율, 세뇌, 실질적 교육 및 우생학을 통해, 국가 전체를 동원시키는 일당 전제주의 국가를 구현하여, 개개인을 조상, 문화, 혈연에 있어 초개인적 연관성에서 비롯된 민족주체성 안에서 하나로 뭉치는, 유기적 국가 공동체로 만든다는 신념 위에, 자국을 청년기로 회복시키고자 한다. 파시스트들은 국가와/또는 민족은 영속적인 갈등 상황에 처해있으며, 이에 따라 강자는 스스로 강해져 그 힘을 약자에게 행사함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7] 파시즘에서는 일당제를 옹호한다.[8] 파시즘 정부는 정부와 파시즘 운동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금지하고 억압한다.[9] 파시즘은 계급 투쟁에 반대하는데,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가 계급 투쟁을 만들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이 개념을 갖고 이용한다고 하여 양자 모두를 비판한다.[10] 파시즘은 개인주의,[11] 합리주의, 자유주의, 정치적 보수주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데, 이렇듯 파시즘에서 반대하는 것, 학자들이 '파시즘이 부정하는 것(fascist negations)'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파시즘을 더욱 잘 정의할 수 있다.[12] 경제 분야에서 여러 파시즘 지도자들은 "제3의 대안" 경제 정책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과격한 개인주의와 국가 공산주의의 엄격한 통제보다 자신들의 정책이 더 우월하다고 본다.[13][14] 이것은 정부가 기업과 노동에 대해 상당한 통제를 가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무솔리니는 자신의 국가 체제를 "협동 국가"라고 칭하였다)[5][15] 파시즘은 대중영합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영웅적인 노력을 요구하며, 단일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강제하여 심지어 개인숭배까지 이른다. 파시즘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포괄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가들과 정치학자들은 파시즘을 간결히 정의할 때 어떤 요건이 들어가는지에 대해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16]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패배하고, 당시 파시즘 정부가 저지른 가혹 행위가 알려지면서 '파시즘'이란 말은 멸칭으로 쓰이게 된다.[17]
어원
파시즘의 상징인 파스케스
'파시스모'(fascismo)는 이탈리아어 낱말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로 "묶음"을 뜻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낱말 파스케스(fasces, "속간")에서 나왔다.[18][19] 1910년대에 '운 파쇼'(un fascio)란 이탈리아어에서 노동 조합을 이르는 구어 표현이었다.[20] 속간은 나무 막대기 여러 개를 묶어서 도끼를 달아놓은 권표로서, 고대 로마에서 정무관의 권위를 상징하였으며, 정무관을 수행하는 릭토르들이 들고 다녔고 정무관의 명령에 따라 체벌이나 사형에 쓸 수도 있었다.[19] 또 속간은 "통합을 통한 힘"을 뜻하기도 하였는데, 나무 막대기 하나는 쉽게 부러지지만 여러 개가 묶여있으면 잘 부러지지 않기 때문이다.[21] 이 형태는 여러 형태의 파시즘 조직에서 널리 쓰인 소재였는데, 가령 팔랑헤의 상징은 멍에로 모인 화살 묶음이다.[22]
기원 및 역사
배경 및 발생 원인
파시즘 발생의 기본 요인은 제1차 대전 후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의한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곧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관성적 공황(慣性的 恐慌)과 사회혁명의 진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금융독점자본의 폭력적 독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국제적인 대립과 전쟁의 위기가 심각해져서 국내정치는 항상 불안정하고 계급대립이 격화된데다 정치·경제의 불안, 부패에 대한 도시 소시민이나 농민의 절망과 고립감, 인텔리겐치아의 니힐리즘·정치적 무관심이 겹쳐 강력한 권위적 리더십을 대망하게 되어 파시즘 발생의 원인이 조성되었다.[23]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파시즘이 일어난 나라를 보면, 근대국가의 형성이 늦게 시작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급격히 자본주의화가 이루어져 사회제도가 이질적이었으며, 특히 농업 부문에 있어서 봉건적 여러 관계가 뿌리깊게 남아 있고,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의 전통과 경험이 얕은 나라들(독일·이탈리아·일본), 또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현저히 뒤떨어진 나라들(에스파냐·포르투갈) 등이다.[23]
발생과 발전
파시즘 운동은 19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파시스트들은 과격한 퇴역군인과 국가주의적 생디칼리스트, 미래파 지식인, 젊은 반(反)부르주아 불만 세력으로 민족의 영광과 사회 변화를 함께 꿈꿨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이 사회주의자 및 급진[24] 적 기독교 정당인 이탈리아 인민당(Partito Populare Italiano, PPI)과 달랐던 점은 민족주의밖에 없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파시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구성비가 우파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지주의 아들들과 심지어는 일부 범죄 집단들도 이제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파시즘은 여전히 초기의 특성을 유지했다. 즉, 새로운 파시즘은 기성세대와 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대의 반란이었다.[25]
이러한 운동은 어떤 경우에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에 대항하되, 그것을 파괴하기 위하여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여 본격적인 파쇼 정당(독일·이탈리아)이 되고, 정권을 수립하는 것도 있으며(이것이 전형적인 것으로 아래로부터의 파시즘), 일본과 같이 천황제에 있어서의 군사·관료기구의 독자성을 확대 활용하여 파쇼적 기구로 전용하는 이른바 위로부터의 천황제 파시즘의 성립도 있었다.[26]
정의 및 특징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파시즘은 어떠한 체계적 논리와 이성을 갖춘 사상이라곤 볼 수 없고, 때에 따라 이념 운동 저의가 달라진다. 그러나 일명 '파시스트'라고 불리는 정치 운동자들이 지향하는 정책, 사회 관점, 행동 양상에는 공통된 특징이있다. 일단, 보편적인 의미로써 파시즘은 역사 과정으로서 파시즘은 1922년에서 1943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를 통치한 권위주의적 정치 운동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나치즘을 비롯한 유사 이념들은 유럽 곳곳에 퍼지게 되었다.
파시즘이란 말 자체는 본래 고대 로마에서 로마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권표에서 따온 말로서, 그 자체가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징표로서 호위병들이 집정관을 호위하며 들고 다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출신인 무솔리니가 이 말을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를 나타내는 말로 차용한 것이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출발한 나치즘과 달리 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것에서 생겨났다는 견해도 있다.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대신 사회주의의 평등사상과 사유재산에 대한 회의론을 받아서 자본가들에 대한 비판과 도덕주의·엄숙주의 강조의 특성도 부분 내포하고 있다.[출처 필요] 그러나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맹점도 있다.[27]
파시즘은 애국심과 애족사상, 국익 등의 담론을 전제로 하기에 민족주의나 애국사상과 구별하기 어렵지만, 맹목적이라는 특성이 있다. 파시즘을 폭넓게 정의한다면 세계 역사상의 모든 권위주의 국가를 포함할 수 있겠지만 이론가들은 중요한 몇가지 분석적 틀을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은 1920년대에 한편으론 극단적인 사회주의 또는 조합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헤겔주의 또는 이상주의적인 국가론, 이들 두가지 이념의 혼합 및 결과로서 태동하였다. 이 중 헤겔적 국가론은 이미 극단적인 국민주의와 연결을 맺은 상태였다. 이후 파시즘은 비규제 경제와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등을 부정하며 국가를 생물적인 주체로 인식하였다. 파시즘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들에 의해 떠받들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파시즘의 본질은 타 대상의 존재나 공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불관용과 부정적인 태도가 존재하고 있다. 또한 사회와 제도의 통제속에서 사상이나 신념의 정직한 표출이 제한되었고 젊은이들은 그 젊음을 발산할 통로가 없는 현실 속에서 참는법만을 강요한다는 비판이 있다.[28]
파시즘과 인권
파시즘의 주된 목표는 혁명 전위조직의 철저한 파괴에 있으며, 직접적인 테러나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파시즘이 정말 두려운 점은 그러한 목표달성 과정에서 지배체제에 반대하는 민중의 모든 자극적 집단조직화를 위협과 폭력에 의해 방해하고, 사상·양심·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등 국민의 자유권을 박탈하며, 또 이러한 인권을 보장하는 여러가지 민주적 제도들, 예컨대 의회제·의원내각제·재판제도·지방자치제 또는 정당제·노동조합조직을 파괴하면서 파시즘의 정통적 이데올로기를 대중의 생활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대중의 사상과 감정을 내면으로부터 획일화하면서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데 있다. 따라서 파시즘 지배는 단순히 혁명의 전위조직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일체의 민주주의적 사상이나 제도까지 철저히 파괴한다. 그리고 자기국가·자기민족을 지상이라고 하는 초국가주의·배타주의·선민사상·지도자 원리에 입각하는 대중의 자발적 사고에 대한 경멸, 부인의 사회적·정치적 활동능력의 경시, 전쟁의 찬미와 군국주의, 사회과학의 위험시와 군사과학의 중요시 등 일련의 정신적 경향이 나타난다. 제2차대전이 파시즘과 전 민주주의 국가의 대결이 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된다.[29]
경제
파시즘의 선호 경제체제는 파쇼적(전체주의적) 협동조합주의 경제 체제와 혼합 경제를 바탕으로 한다. 노조와 자본가간의 불화로 인해 사회 혼란을 막기위해 제3자 입장에서 사법적 제재를 가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협동조합주의와 달리 파시스트들은 자본가가 생산수단 및 노동자라는 노동력을 얻은 다음 상품을 만들어 이윤을 남기고 그 이윤의 일정한 부분을 세금과 같은 형식으로 받는 식인 경제 활동의 주체를 자본가에게 모두 맡기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 체제를 선호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자본가같은 부르주아 계층을 모조리 청소하고 국가의 통제체제 하에서 노동자 자체가 하나하나씩 생산수단을 가지고 상품을 생산하여 이윤을 얻는 사회주의 체제도 부정한다. 그들은 자본가와 노동자를 제3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자본주의 체제는 정부의 역할이 최소화되고 자본가들의 영향력이 국가수반의 주요 구성기구보다 강해지기 때문에 정치, 사회, 문화 및 경제적인 문제를 모두 장악해야할 전체주의적인 파쇼적 사고방식에 의해 배제했다. 또한 사실상 파시스트들이 제일 반대하는 사상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인데, 자본주의 체제는 자유주의에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체제는 국가의 엄격한 통제가 행해지고 있지만 원래 사회주의 체제란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이며, 그 베이스를 민주주의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통치체제이고 그 목적이 공산주의 달성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반공주의를 신봉하는 파시즘 정부에서는 역시 이런 사회주의 체제도 반대했다. 또한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목표가 없는 사회주의 체제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파시즘 경제 체제에서 얻는 이윤방식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와 비슷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자본가가 생산수단 및 노동력을 가질 수 없는 구조이며, 그 모든 것은 국가가 관리한다. 또한 일반적인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가 경제적으로 노동자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만, 파쇼적 협동조합주의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위가 같다. 그리고 이 두 계급은 국가 정부의 명령을 받아야한다. 이렇듯이 이윤을 내는 방식은 자본주의 체제와 같지만, 이윤을 내는 주체들의 통제방식은 사회주의 체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강압적인 협동조합주의 체제는 후에 큰 경제 성장력을 보여주었다. 일단 파쇼적인 협동조합주의는 그 체제가 유지되는 한 경제적인 거품이 낄 수 없으며 완벽한 통제를 통한 국가 자본주의적인 생환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업이 불가하다. 또한 창출된 이윤 대부분의 퍼센티지는 정부가 독식하기 때문에 국가에 큰 발전을 기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윤 독식으로 인해 자본가들이 기업을 외국법인으로 이전하는 심각한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파시즘 사상의 반공주의적인 정책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요 목표로 내세우는 좌파 및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을 일소할 수 있고 정경유착이 쉬워지는 구조라 자본가들은 최고의 사적 이윤을 낼 수 있었다. 또한 파시즘의 국수주의와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주의의 확장을 도왔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여건이 되는 한 최대한 파시즘 정부의 방침에 큰 협조를 했다. 이런 구조를 가진 파시즘은 결국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경제를 부정하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희생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파시즘은 경제 중용이념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운 자본주의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지 계층
파시즘은 대중의 서로 상이한 계층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받는다. 대부분 사회불만계층이며 그 경제적, 신분적인 틀은 일정하지 않다. 파시즘을 지지하는 이들은 대부분 대기업과 농민 그리고 지주, 국민주의자와 반동주의자들, 실망한 전쟁 퇴역 군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와 마르틴 하이데거 등의 일군의 지식인, 보수주의자와 소기업, 그리고 빵과 일자리를 약속받은 빈곤 계층이다.
에스파냐의 파시즘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귀족 계층과 마찬가지로 기득권층이었던 가톨릭 교회에서 선호했다고 한다.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그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코는 유럽의 마지막 파시스트라고 불린다. 물론 프랑코가 죽은 뒤 에스파냐는 보통선거로 그들의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현대에도, 특히, 독점재벌과 독재정권의 강고한 결합을 기초로 국민 대다수를 강압적으로 통치하려는 기도들이 있는 곳에서는, 파시즘은 언제라도 발현될 수 있다. 국민 대다수를 우민화하는 통제 수단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는 재벌집단-정치집단의 결합은 파시즘의 시작이라할 수 있다.
황우석 사건과 디워 사건, 재범 사건 등이 보여주듯이, 한국 사회에서의 유사파시즘을 우려하는 견해가 일부 존재하고 있다.[27][28][30][31]
통치자들
파시즘의 발생이나 진행의 속도, 형태는 각국이 놓여 있는 일정한 조건에 따라 다른데, 어쨌든 이러한 나라에서는 혁명적 상황이 일정 한도의 긴박성을 띠며, 혁명의 전위 조직 파괴를 주목적으로 하는 반혁명조직이 국가 내부에 비공식적인 집단, 또는 민간의 정당·결사로서 등장하였다. 파시즘의 지도층은 현역·예비역 장교, 우익 정치가, 폭력단 간부 등으로 그 주변에는 정상적인 사회진출 루트에서 탈락한 지식인·제대군인·하급관리·소매상점원 등 불만분자들이 결집하였다.[26]
동맹국과 영향력
파시즘의 가장 좁은 의미는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의 국가를 말한다. 또한 이 표현은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 외에도 넓은 의미에서는 기타 권위주의적 체제, 예를 들어 도조 히데키 치하의 일본, 엥겔베르트 돌푸스 치하의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왕국의 총리 이온 안토네스쿠도 파시즘으로 분류된다.
파시즘은 각국에 영향력을 미쳤는데 베니토 무솔리니는 레닌을 연구하여 모델로 삼았는가 하면, 무솔리니의 주요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배웠으며, 히틀러의 경쟁자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를 연구했다 한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스탈린을 통해 배웠고, 이런 식으로 독재체제가 재생산되기도 하였다.[32]
중립국
중립국으로는 샤를 드골의 프랑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에스파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이스타두 노부 포르투갈, 그리고 수하르토의 인도네시아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칠레 등이 있으나, 이들 국가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파시스트 측에서는 "권위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세력은 국가를 '파시스트'로 분류하며, 옹호 세력은 파시스트라는 딱지를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각국에서의 파시즘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19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실패한 좌파 민족주의를 고수하지 않고, 자신의 운동을 정치적 기회로 활용하는 편을 택했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 그의 연설과 강령에서 무솔리니가 점차 우파 쪽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초기 파시즘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사상은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참호(에서 얻을) 반전주의'는 전투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당시 퇴역군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신념이었다.[25]
이탈리아 산세폴크로 광장에서 발표한 강령은 (피우메와 달마티아 해변에 대한 이탈리아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각 나라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최우선의 원리'라는 국제연맹의 원칙을 받아들였다.[25] 이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의 기성 우파, 반왕당파 및 공화정 세력은 귀족과 재벌들의 이권을 수호하고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지하였으며, 이들을 좌파로 규정, 위험성을 경고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다.
1919년 6월의 강령에서는 직업적 군대를 방어적 의미의 민병대로 대체하고 무기 및 군수품 공장을 국유화한다는 파시스트들의 주장은 그대로였지만, 국제연맹 이야기는 사라졌다. 1921년 발표한 강령에서 달라진 파시스트당은 국제연맹을 편파적이라고 비난하고, '지중해 라틴 문명의 보루'이자 이탈리아적인 것(Italianita)의 보루로서 이탈리아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탈리아의 식민지 개척과 대규모 상비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25] 무솔리니는 자랑스러운 이탈리아, 로마 제국의 옛 영광, 반국가 행위자 처벌 등을 주창했다. 이러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의 주장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대중들의 급격한 동의를 얻으면서 기성의 우파 정당을 대체하여 집권당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독일
이 부분의 본문은 나치즘입니다. 일본
이 부분의 본문은 일본 제국주의입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는 6·25 전쟁 종전 이후 전후복구의 과정에서 파시즘이 나타났다.
강준만은 박정희 시대의 파시즘적 성격에 주목한다.[33] 그에 의하면 박정희의 유사 파시즘적 체제는 1972년 민주제도를 파괴하고, 영구집권 기반을 확립한 '10월 유신'으로 성립했다. 박정희식 유사 파시즘은 '민족성 개조'라는 이름의 국민의식 개조운동과, 공포와 폭력이라는 물리적 탄압의 두 가지 수단을 통해 공고해졌다.[33] 박정희는 그해 10월 17일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실로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이른바 10월 유신을 통해서 유사 파시즘 체제의 시동을 걸었다.[34] 유신헌법은 그 유사 파시즘 체제의 법적 표현이었다.[34]
의식개조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이순신 성웅화' 작업이 표본이다. 농촌 새마을 운동에서 시작해 도시-공장-학교 새마을 운동으로 번진 이 운동은 "10월 유신과 영구 집권에 필요한 대중동원 수단"이자 "유신이념과 연결된 정치적 국민운동"이었다. 현충사 성역화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에게 이순신은 "'나'는 없고 '국가'와 '민족'만 있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의 정신"이었다.[33]
이후 1993년의 문민 정부 출범 이전까지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이기주의, 개인주의는 범죄처럼 여겨져 왔다. 애국심과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기주의적인 발상으로 매도되어 규탄과 매장의 대상이 되었다.
기타
파시즘은 경제 불황, 대량 실직, 독재적 권력자와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조하는 쇼비니즘, 외국인이나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인종차별주의 등과 함께 나타난다는 특성이 있다.
비판
이 부분의 본문은 반파쇼입니다. 파쇼라는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불가리아 등)이 패망한 이후 정치적 조롱의 표현이 되었다. 현대 정치 담론에서 주로 사회주의 등 좌파를 주축으로 하는 일련의 정치세력은 파시즘을 악마(惡魔)로 취급한다. 애국심이 과도하면 파시즘으로 돌변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우려가 존재한다.[30][31]
파시스트 모토와 유명한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