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8월 20일 밤 11시경 제주도 서귀포 해변에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이동관과 정창룡이 대한민국 육ㆍ해ㆍ공군, 해병대, 중앙정보부, 경찰 특수부대 등 최고 정예요원 500여 명이 투입된 작전에 의해 사살됐다. 중무장한 두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아군에게 총격을 가하며 저항했다. 함께 침투한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은 서귀포 남동쪽 30마일 해상까지 도주했으나, 우리 군함의 공격으로 결국 나포됐다.
무장공비의 임무는 통일혁명당(통혁당) 핵심간부인 이문규(李文奎) 구출이었다.
《월간조선》은 2010년 10월호에서 당시 간첩 지령용 방송인 A-3 지령을 이문규나 통혁당 간부가 아닌 중앙정보부 요원이 북한에 보내 무장간첩선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유인 역(逆)공작 ‘Z작전’임을 사건 발생 42년 만에 밝혀낸 바 있다.
관련자들은 남한에선 처벌됐지만, 북한에서는 영웅이 됐다. 김일성(金日成)은 사형당한 이문규와 통혁당 총책 김종태(金鍾泰)에게 영웅 칭호를 ‘하사’했고, 김종태의 이름을 딴 공장, 거리, 대학이 생겼다.
◆신영복 인터뷰 본 후 증언록 공개 결정
김종태, 김질락(金瓆洛), 이문규 등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던 통혁당 간부 신영복(申榮福)은 1988년 8ㆍ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해 이듬해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명숙(韓明淑) 전(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朴聖焌ㆍ前 성공회대 겸임교수)씨는 1967년 6월 신씨에게 포섭돼 당 소조책(小組責ㆍ북한 지하당 최소 조직 ‘세포’ 3개가 모여 결성된 조직을 관리하는 간부급 당원)으로 활동하며 신씨의 지도를 받았다.
박 전 교수는 2006년 부인이 총리에 지명되자 “통혁당 사건의 일부는 사실이나,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 좌파 지성’으로 활동해 온 신 교수도 통혁당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다.
2011년 1월 1일, 《중앙일보》는 “책은 먼 곳에서 찾아온 벗입니다”란 제목으로 신영복 교수의 새해 특별기고를 게재했다. 신문은 신 교수에 대해 “그는 통혁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나, ‘통혁당 지도간부’로 기소됐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같은 달 15일, 《중앙일보》는 신영복 교수를 직접 인터뷰했다. 객원기자인 영화배우 이혜영(李慧英)씨가 “통일혁명당 사건이 뭐냐”고 첫 질문을 던졌고, 신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구속된 1968년은 김신조 사건이 나고, 미(美) 정보함 푸에블로호(號)가 북한에 나포되고, 예비군 동원법이 만들어지고, 3선 개헌이 추진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해예요. 이런 시기에 간첩단 사건이 터졌는데, 거기에 청년학생운동이 동일 사건으로 엮인 거죠. 그 접점에 제가 있었고요.”
안병직(安秉直) 서울대 명예교수(시대정신 이사장)는 이날 기사를 읽은 후 자신의 비공개 증언록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9월 3일 명지대 정기학술포럼에서 비(非)보도를 전제로 발표한 내용으로,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1960~70년대 좌익(左翼)운동의 실체와 실상을 소상하게 밝힌 자료다. 강연 직후 《월간조선》은 안 교수 측에 수차례 증언록 공개를 요청했지만, 안 교수 측은 “친구, 선후배, 제자 등이 거론돼 곤란하다”며 고사한 바 있다. 그의 증언은 지난 5월 말 출간된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란 책에 수록됐다.
◆“증언록 원본은 훨씬 충격적”
안 교수는 박정희 정권 시대의 ‘민주화 운동’을 ‘야당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운동’과 ‘좌익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으로 구분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등 지도자와 박한상(朴漢相·변호사) 의원, 서남동(徐南同) 목사는 모두 자유민주주의자들이다. 반면 좌익세력은 표면적으론 민주화를 내걸었지만, 핵심사상은 북한과 같은 인민민주주의나 신민주주의였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화’란 명분을 내걸고 운동했지만, 그 사상과 내용은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안 교수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제2차 인혁당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김정강(金正剛) 그룹 등 5대(大) 좌익운동 사건에 대해 듣고 경험했던 일들을 김수행(金秀行ㆍ現 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영복, 박성준 등 관련자의 실명과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해 가며 공개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등 주요 일간지들은 안 교수의 증언을 “충격적이고 용기 있는 고백”이라며 보도했다.
안 교수는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ㆍ발표된 보도내용들은 기본적으로 대개 사실”이라며 “한 다섯 번 정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으며 얻어맞기도 하고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수사기관이 가능하면 법적 테두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으로 느껴졌다”고 증언했다.
안 교수의 증언을 글로 정리한 강규형(姜圭炯) 명지대 교수는 “강연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증언록 원본엔 훨씬 충격적이고 깊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일부 관련 인사의 이름을 익명 처리하는 등 상당히 조절을 했음에도, 사실 그대로의 경험을 공개해 그 파장이 컸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1962년 서울대 대학원 재학 시절 박현채(朴玄埰ㆍ前 조선대 교수)씨를 처음 만났다고 밝혔다. 빨치산 출신인 박 전 교수는 소설가 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빨치산 전사 ‘조원제’의 실제 모델로 유명하며,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바 있다.
당시 안병직은 박현채의 가르침을 받고 사회주의자가 됐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毛澤東)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 사상을 배웠다. 박현채는 사회주의자가 된 안병직을 인혁당에 끌어들이려 했다.
안병직은 인혁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인혁당이 발각될 무렵 후보위원쯤 될 정도로 개입을 했다. 사건 직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당원들을 도운 이유로 박현채와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졌다.
◆실존 인혁당을 ‘짜맞추기’로 규정한 과거사委
안 교수는 인혁당의 2인자인 정도영(鄭道永ㆍ前 합동통신 조사부장)씨와도 가깝게 지냈다. 사건 이후 10년 이상 지속한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인혁당의 실체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됐다고 한다.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혁당을 만들어 학생운동과 연계됐다고 조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2007년 10월 공개된 과거사위의 최종 보고서는 “대통령이나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에서 규정된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의 성격은 그대로 수사지침이 되어 짜맞추기가 진행돼 이들 단체를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간 것”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2010년 6월 박범진(朴範珍) 전 의원의 증언으로 “인혁당은 짜맞추기”란 과거사위의 조사결과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됐다. 1963년 봄 인혁당에 입당해 활동했던 박 전 의원은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닌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실존했던 지하당(地下黨)”이라면서 “정부 당국이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는 등) 객관화하는 데 실패해서 조작사건처럼 계속 논란이 됐다”며 과거사위의 조사발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자생적 조직인 인혁당과 달리 통혁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었다. 안 교수는 신영복, 박성준, 김수행 등 통혁당 주요 관련자와의 일화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신영복이 박성준을 통해 ‘경제복지회’란 기독교 학생단체를 지도했고, 신영복은 통혁당의 2인자인 김질락의 지도를 받았다.
1968년 초여름, 서울대 상과대학 조교였던 김수행이 안병직에게 자신의 연구실에 가득한 북한 서적을 보여줬다. 《마르크스 선집》 《레닌 선집》 《스탈린 선집》 등 이론서와 소설들로, 모두 신영복 쪽에서 받은 책들이었다. 안병직과 김수행은 그날 저녁 몰래 책들을 변소에 처넣었다.
안병직은 며칠 후 신영복을 찾아가 “상과대학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으니 선배인 우리가 수습하자”고 했지만, 신영복은 “왜 그러한 일을 자기와 상의하느냐”며 항의했다고 한다.
몇 달 후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제일 먼저 안병직을 찾아온 사람은 박성준이었다. 안병직은 헐레벌떡 달려온 박성준에게 “자수를 하든지 종적을 끊고 최소한 10년 이상 지방도시에 가서 숨어 지내라”며 “도망갈 땐 모든 연락망을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안병직, 신영복, 박성준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사기관에 검거됐다.
안 교수의 증언록은 통혁당 역공작 검거작전에 대해 “김질락과 이문규를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우리 수사기관이 역공작으로 공작선을 유인해 제주도 서귀포에서 일망타진했다”고 간략히 정리했지만, 실제 증언에선 자세한 정황을 설명했다. 다음은 안 교수의 증언록에 수록되지 않은 비공개 원문 중 일부다.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이문규를 유도하기 위해 ‘네가 그러면 북쪽하고 연락이 되느냐’고 하니까 ‘연락이 된다’고 했고, ‘무엇 가지고 하면 되느냐’고 물으니 ‘난수표를 가지고 조립하면 연락이 된다’고 했던가 봐요. 그래서 이문규가 ‘우리 조직이 다 발각됐다. 대처를 해달라’ 하는 것을 연락하기 위해 중앙정보부 요구에 응한 겁니다.
이문규는 북한과 숫자 하나를 더 넣고 뺌에 따라서 의미가 전혀 거꾸로 읽히도록 서로 이런 약속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난수표를 조직해서 넘겼는데, 그걸 믿을 리 없는 중정이 (이미 전향한) 김질락에게 보여주고 고백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김질락이 난수표를 보고 숫자가 하나 빠졌다면서 보충해 버렸어요. 그렇게 북한에 타전을 하니, 북쪽에서 1968년 8월 20일 무장간첩선을 제주도로 파견해 이쪽 멤버들을 다 싣고 올라가려다 일망타진됐습니다.”
첫댓글 회원님들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