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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프랑스 작가(1900~1944) 1943년 발표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백마 탄 왕자님 꿈을 꾸는 소녀들이나 읽는 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사실 이 작품을 소녀시절에 읽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이 작품을 마흔이 훌쩍 넘어서 다시 읽었습니다. 아, 그런데 뭔가 느낌이 왔습니다. 한 번 더 읽고 또 다시 읽고 나서 그때 무릎을 쳤습니다.
“이 작품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 읽는 책이었구나.”
주인공이 어린 왕자니까 어린이나 읽을 책이라고 사람들은 믿어버렸지만, 이 책은 어른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나는 이제 어른의 눈으로, 지천명의 시절에 들어선 눈으로 이 책을 음미해볼까 합니다.
사막 불시착한 조종사에게
불쑥 나타난 ‘어린왕자’는
불의의 순간 마주하게 되는
어린시절 나의 모습일지도
책에 등장한 별나라 사람들
세상 구성원인 어른이 된 후
살아가는 우리 모습과 겹쳐
사람 덕에 외로움 잊지만
관계가 불러오는 문제들은
살아가는 한 피할 수 없어
가장 아름다운 장미 보려면
자신 선택 책임질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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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
살면서 사막에 불시착해본 적 있습니까?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오늘과 그리 다를 게 없을 우리네 삶.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살려진 채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사막의 불시착’은 이변 중에서도 이변입니다. 게다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물도 떨어져가는 상태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볕은 뜨겁고 해가 지면 얼어붙는, 동서남북 분간할 수 없는 사막에 홀로 내쳐져 의식마저 몽롱해져갈 즈음 어린왕자가 불현듯 다가왔습니다.
사실 어린왕자의 출현은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인 내가 생전 처음으로 내 자신과 마주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전혀 원치 않는 상황에서 마주하게 된 또 다른 나는 바로 어릴 때의 모습입니다. 인생에 대해 숱한 호기심과 설렘을 품은 채 세상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기만을 기다렸던 시절, 그 시절에는 적어도 세상이란 곳은 희망과 호기심과 성숙으로 가득 차 있는 꿈의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의 한 구성원이 되어 활보하고 다닌 인간의 거리는 어떻던가요?
권위에 사로잡혀 자기 아닌 모든 사람을 제 수족으로 내려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왕처럼 여기지만 진정 마음으로 복종하는 신하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왕의 옥좌에서 내려올 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만을 갈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우뚝 서지 못하고 언제 어느 때라도 누군가 자신에게 칭찬 퍼부어주기만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참으로 못난 사람입니다.
종일 술을 퍼마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술에 절어서 살아가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다시 술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54년 동안 숫자만 헤아리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어찌나 바쁜지 담뱃불 붙일 여유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온통 특이한 것들을 소유하지만 그걸 감상할 줄 모릅니다.
평생 단조로운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자기 의지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명령이 떨어지면 이행할 뿐입니다. 황혼을 즐길 줄도, 어둠을 가만히 느껴볼 줄도, 환한 불빛의 축복을 누릴 줄도 모른 채 피곤하다는 말만 일삼으며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두꺼운 책을 쓰고 있는 지리학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직 사실의 기록에만 치우쳐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느낌이건 공감이건 소통이건 그런 건 관심 밖이요, 오직 책을 쓰고 기록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대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세상은 책상 위의 문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혹시 이런 유형들 가운데 내 모습도 들어 있을까요? 세상을 가슴이 아닌 문자를 통해서 보려하거나, 나쁜 습관을 과감히 끊지 못하고 그게 부끄러워 더 큰 허물을 저지른다거나, 내 말만 들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거나, 누군가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 없는지 해바라기하고 살아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세상에는 이런 비극적인 어른들로 가득합니다. 어쩌면 어른이란 어린이가 성숙해진 상태가 아니라 어린이가 몸집만 불린 존재가 아닐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무척 현명해지고 관대해질 줄 알았습니다. 어른은 다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는 점점 더 치졸해지고 옹졸해집니다. 게다가 세상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감은 오히려 줄어들어 대롱으로 세상을 보며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치졸한 인간이 이립(而立)하고 불혹(不惑)을 거치고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선 현재 ‘나’의 본모습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도 덜도 말고 딱 나 같은 내 이웃을 버거워하고 있는 내 모습도 보인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사람들 속에 사는 덕분에 외로움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세상과의 인연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끝없이 신경을 쓰고 상대를 인정해주어야 했습니다. 나는 나 혼자도 버거운데, 상대는 자신을 봐달라고 끊임없이 채근합니다. 이 머리 아픈 속세의 인연 확 끊어버리고 어디 조용한 곳에 들어가 독야청청하며 살 수는 없을까요?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나는 세속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 어디에선가 역시 삶의 끈이 이어지고 있을 테지요.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 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나라는 존재가 똑같이 불안정한 존재와 함께 살아갈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생텍쥐페리는 이런 딜레마를 ‘어린 왕자’속에서 장미 한 송이와 어린 왕자의 관계로 보여줍니다. 춥다 덥다 목마르다 지겹다는 투정을 연신 내뱉으며 잠시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하게 심술부리는 장미가 바로 우리 사는 세상에서 내가 인연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왕자는 그 관계 속에서 목이 조여 오는 고통에 시달리다 편한 세상을 찾아 훌쩍 떠나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을 겪으며 무엇을 보더라도 자신을 괴롭힌 장미와 연계해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친구를 찾는 어린왕자에게 사막 여우는 이런 조언을 해줍니다.
“친구가 필요하다면 나를 길들이세요.”
여우가 말하자 어린 왕자가 묻습니다.
“너를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참을성이 있어야 해요. 우선 조금 떨어져 앉아 있어야 해요. 무엇보다 말을 하지 말아야 해요. 말은 오해의 근원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하루하루 가까이서 지내다보면 조금씩 서로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요.”
여우는 한 가지를 더 주문합니다.
“서로 예절을 지켜야 해요. 만나러 오는 시간이 꾸준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어느 사이엔가 나는 당신이 오게 될 즈음에 설레게 될 거예요. 당신이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마음이 들뜰 거예요. 시간이 흐를수록 행복한 기분은 점점 더 부풀어가서 4시가 되면 행복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거예요. 그러다 당신을 보게 되면 행복감에 활짝 꽃 핀 얼굴로 당신을 맞게 될 거예요. 하지만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을 테니까 일종의 의식을 준수하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여우는 마지막 비밀 한 가지를 일러줍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길들인 것에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실이에요.”
생 텍쥐페리가 이 작품을 쓸 당시 그는 조국 프랑스를 떠나 망명한 상태였으며, 정통 문인들 사이에서도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자유분방한 아내와의 사이도 삐거덕거렸으니 마흔 네 살의 사내는 사는 게 참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버릴 수도 없는 것이 세상인지라 차라리 세상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갈 밖에요.
그리하여 고장 난 비행기는 기적적으로 고쳐졌고 그는 이제 사막을 떠나 세상 속으로 날아 들어가게 됩니다. 비행사의 또 다른 어린 나는 사라져야 합니다. 왕자가 뱀에 물려 죽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나 어린 나를 불러내 함께 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세속을 살아가는 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대상을 타성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그 관계에 대해 철저하게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그러면서 불행하다고 절규합니다. 이게 너무 버거워 인연을 끊고 은둔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성이 붙은 사람은 세속을 떠나 활활발발한 출세간의 경지를 활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조금 거리를 둘 것.
꾸준할 것.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것.
이렇게만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만의 장미꽃을 보게 될 거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
법보신문 보리살타서재
첫댓글 .....................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하되 서로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십시오.
마치 기타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에 함께 떨릴지라도, 서로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주되 서로의 마음을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십시오.
사원의 기둥이 서로 떨어져 있듯이, 참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들 아래서는 자라지 못하는 법입니다.
-키릴 지브란 예언자/ 결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