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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의 시각으로 본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 의미’
권호덕(천안대, 조직신학)
0. 들어가면서
1. 문제제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우리는 이런 역사적 실재성을 고집해야 하나? 모든 종교들 중에 왜 하필이면 기독교는 처음과 마지막이 있는 역사관을 중요하게 여길까?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이런 직선적인 시간관 내지 역사관이 무시되는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질문은 사실 기독교의 서고 무너짐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매우 흥미롭게도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범신론적인 자연종교들은 윤회적인 시간관을 지니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는 직선적인 시간관이 무시되는 경우 기독교는 자연 종교화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브라텐의 말은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는 역사관이 기독교의 핵심부분을 차지함을 보여준다. “역사의 범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화해케 하시는 행적에 근거한 신학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화해의 행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역사적 사실, 교회를 선택하신 역사적 사실과 함께 역사의 절정에 있는 사건이다”123)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기독교 역사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예수라는 한 인물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 의미 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역사적 비평적 주석 방법은 소위 역사적 예수를 찾아 傳記를 만들려다가 실패했다.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일까? Albert Schweitzer가 쓴 ‘예수 생애 연구 역사’124)는 이런 추구 열심을 잘 보여준다. 또 20세기 중엽에는 불트만 학파에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Ernst Käsemann이다.125) 불트만의 이런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선포된 예수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으나 직접적인 연속성을 믿지 않았다. 사실 역사적 비평법 자체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기 때문에126), 바로 그 방법으로 역사책 아닌 성경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역사적인 인물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역사적 예수의 실재성이 꼭 필요한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역사적 예수의 실재성을 무시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불트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적인 예수를 보여줄 필요는 없고 단지 그리스도-케리그마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127)우리는 영화 “최후의 유혹”이 불트만의 이런 논지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았다.128)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 의미’는 2천여 년 전에 기록된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증거하는 예수와 그 후 그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거리를 두고, 이 둘 사이를 잇는 관계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경우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잇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불트만은 단순히 케리그마-그리스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W. Kuenneth의 비판에 의하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된 그리스도”였지 예배 의식의 인물, 과거의 역사적인 현상, 하나의 개별적인 인간 또는 독창적인 인격이 아니다. 예수의 마음, 생각 그리고 삶은 단지 의미 있게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129)
만일 기독교가 불트만의 말대로라면, 기독교는 하나의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큔네트의 비판은 적절한 것이다. “불트만에게 케리그마는 ‘하나님의 행위’라기보다는 ‘예수의 의미성에 대한 증거’이다. ……… 이 케리그마는 물론 이 신약성경에서는 “신화적인 개념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러나 이 케리그마가 실존적인 해석의 마술지팡이에 데이어서 ‘하나님과 역사적인 만남에 대한 증거’130)인 것으로 증명된다”131)
만일 그렇게 될 경우 기독교는 언젠가 유령 종교 내지 가현설로 둔갑할 것이다. 이런 허구를 믿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 핍박을 받았을까? 아무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바울이 전 생애를 헌신할 수 있었을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인들의 삶이 항상 2천여 년 전 과거의 한 시점과 연결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다른 말로 예수의 역사적인 실재가 없이는 기독교는 무너지는 것이다. “밑에서”(von unten her)의 일반 자연종교의 경우 교조의 역사적인 실재성과 그 교도들의 삶 사이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경우 소위 경전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von oben her)의 계시 종교인 기독교의 경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지적은 주목할만하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하나님의 역사가 단지 하나의 이야기-허구일 뿐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계속 간주할 수 없다. ……… 만일 기독교 신앙이 계속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그 모든 세부 사항에서가 아니라 그 핵심에서 역사적이어야 한다.”132)
따라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한 변증은 기독교를 모르는 자들이나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종교다원주의 사회속에서 기독교 진리의 독특한 면을 보여줌으로써 선교사역을 돕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인 것이다. 즉 기독교 가르침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사실상 이 사실을 변증하는 데 관심을 집중시킨다. 따라서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2. 방법론, 연구범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것의 의미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방법을 적용해 보려고 한다. 그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의 실재성을 추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중생한 여부를 아는 방법을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자연 현상’으로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형상론을 여기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형상을 보고 그 원형을 확인하는 방법인 것이다. 말하자면 “열매는 그 나무를 안다”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것을 귀납법적인 방법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을 다 여기서 언급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가 없다. 첫 번째 방법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성경 구절 이를테면 ‘육체의 부활’(고전 15장), ‘세례’(롬 6장) 그리고 ‘성찬식’(4복음서, 고전 11장) 등에 대한 구절을 주석하여 그 가르침 속에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고 답할 것이다.
둘째 방법을 위해서는 역사속의 한 인물의 삶을 분석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한 인물의 삶이 그 원형(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확인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의 삶을 분석함을 통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확인하려고 한다.
사실 이런 변증 방법은 구원과정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먼저 열거한 다음 위에 언급한 주제들을 점검하려고 한다.
I.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나는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우리와 신비한 연합을 하는 그리스도는 비하 상태에서 의를 이루시고 승귀한 그리스도이다.
1. 승귀하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서는 예수께서 비하 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겠고 말씀하셨음을 증거한다(요 20:22; 행 2:33). 성경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 사건을 중심으로 예수와 성령 사이의 관계가 달라졌음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비하시절에는 성령에 대해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셨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역하시고 마침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히 9:14).133)
그런데 승귀상태의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는 능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고 동시에 그의 사역 방식이 이전과는 다르다. 예수께서는 이제는 더 이상 성령의 도움을 얻어 무슨 일을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이제 그는 부활과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신 ‘성령의 主’134)가 되신 것이다. James D.G. Dunn은 바울 신학을 해석하면서 바울이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과 더불어 성령의 영역속으로 들어갔음을 지적했다(롬 1:4; 8:11).135)예수께서 부활 후에 닫힌 방 안으로 그대로 들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방식의 변화는 그가 부활하여 승귀하심과 더불어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 15:45)에서도 보인다. Dunn은 이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승귀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그리스도 성령 안에서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성령으로서 경험된다”136)
2. 성령의 사역
승귀하신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의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와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일’이다(Inst. III,1,1). 이를 위해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신다.(Inst. III,1,4).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유일한 근원은 성령이다”(Inst. III,1,4)
이 뿐 아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있다. “성령과 사귐이 없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없다”(Inst. III,1,2).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으신 바 된다(Inst. III,1,2).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hJ< de; ejlpi;" ouj< kataiscuvnei: o{ti hJ ajgavph tou' qeou' ejkkevcutai ejn tai'"< kardivai"< hJmw'n dia; pneuvmato" aJgivou tou' doqevnto" hJmi'n.)”
3. 믿음의 기능
믿음이 지향하는 목표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칼빈은 이런 사실을 잘 지적했다.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다(Inst. III,2,1).
오토 베버(O. Weber)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내어 놓았다. “우리는 ‘신인식과 神과의 연합’으로서 신인식(Gotteserkenntnis als Gottesgemein- schaft)에 대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인식은 인식론적으로 무엇을 받아 넣는 것이 아니고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인 나와 인식의 대상인 사랑하는 하나님(너)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적인 총체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태도 안에서 이 관계를 설정한신 바에 근거한다.”137) 이런 의미에서 신인식은 신과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믿음은 신인식을 이루고 이 신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와 연합케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후크마의 지적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138)
4. 그리스도와 연합
이와 동시에 나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순간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사건인 것이다.139)판넨베르크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여 이 과정을 상세하게 열거했다. “믿음의 행위는 신자로 하여금 자신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연합하도록 만든다”.140) 이때 그리스도의 모든 좋은 것들이 나에게로 轉嫁되어 오고 나의 모든 것은 그에게 轉嫁된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내용은 이 轉嫁는 예수께서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속사역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승귀하신 예수
승귀하심
믿음이 성령을 보내심
예수를
잡음
역사속의 비하 예수 나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비하예수)을 전제함을 볼 수 있다.
5. 칭의와 성화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신다. 그리고 의롭다 칭하신다(Inst. III 17,8). 동시에 연합된 이런 상태에서 나는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Inst. III,14,4). 말하자면, 나의 삶의 構造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로 보건대 ‘그리스도와 연합’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관계, 시간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미래의 재림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를 내포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해야 성립되는 것이다.
II.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1-)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의 의미
바울이 여기서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와 그에게 속한 교회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해준다. 바울은 먼저 예수의 부활이 성경대로 이루어졌음을, 역사 속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그를 만난 사실을 열거함으로써 확인한 다음(1-11절), 만일 부활이 없다면 성도들의 운명이 매우 불쌍하게 됨을 가정법(ει)을 사용하여 열거한다(13, 14, 15, 16, 17, 19, 29, 32절).141)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과 연관하여 두 가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1)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믿음의 삶과 죽어 잠자는 것은 역사 속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뿌리는 두고 있다는 말이다(15:13,14,17,18).
칼빈은 우리의 운명이 예수의 역사적인 부활에 달려 있음을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로’라는 표현과 '예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본체'(hypostasis)라는 표현을 통해 지적한다.142)또 우리의 현재의 믿음이 확신에 차 있기 위해서는 역사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어야 함을 지적한다(319). 말하자면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신비한 연합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예수의 부활이 타락한 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예리한 공격의 시각으로 해석한 Werner de Boor143)나 부활을 믿지 않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활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Gordon D. Fee144)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중 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에 시각을 맞추어 해석하지 않는다.
Alfred Plummer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 때문에 육체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제와 後件 곧 그리스도와 인류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의 아들과 입양된 자녀들 사이의 관계가 단순한 논리적이 아니라 인과적임을 보여줌을 통해 우리의 부활이 가능함을 이해시킨다.145) 이 점에서 그의 해석은 칼빈의 설명에 가까운 것 같다.
요컨대 예수의 부활이 우리 육체 부활의 필수적인 전제가 되기 때문에, 예수의 역사적인 실재성을 간과해서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허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2) 첫 열매(21-23절)
그 다음 바울은 ‘첫 열매’ 사상으로 우리의 삶이 예수의 역사적인 부활에 달려 있음을 설명한다. 바울은 여기서 ‘첫 열매’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한다. 한번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 몸의 부활과 연관하여, 다른 한번은 생명의 삶과 공중 휴거와 연관하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첫 열매’와 나머지 열매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연속 상에 놓여 있다. 나아가 바울은 대표원리를 통해 예수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Nuni;< de; cristo;" ejghvgertai ejk nekrw'n, ajparch; tw'n kekoimhmevnwn ejgevneto.)고전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ejpeidh;< ga;r di j ajnqrwvpou oJ qavnato", kai; di j ajnqrwvpou ajnavstasi" nekrw'n.)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w{sper ga;r ejn tw'/ jAda;m pavnte" ajpoqnhv/skousin, ou{tw" kai; ejn tw'/ cristw'/ pavnte" zw/opoihqhvsontai.)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e{kasto"< de; ejn tw'/< ijdivw/ tavgmati: ajparch; cristov", e[peita oiJ cristou' ejn th'/ parousiva/ aujtou':)”
칼빈은 첫열매 사상을 유대주의 종말론 사상과 직접 연결시키지는 않지만 역사속에서 예수가 먼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근거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음을 지적함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일년 중의 수확을 ‘첫 열매’로 바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역시 우리 모두에게 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며, 또는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첫 열매의 수확이 있었다고 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146) 칼빈은 이 ‘첫 열매’ 사상을 시간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대표 원리 차원에서 설명하여 예수의 역사적 부활과 우리 몸의 부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147) 즉 이 말은 우리가 앞으로 몸의 부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부활의 역사적인 실재성에 기인한다는 말이다. 칼빈은 이 역사적 실재성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함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Gordon D. Fee에 의하면, 바울이 여기서 첫 열매를 언급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성령의 강림과 함께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148) Fee에 의하면 하나님은 종말이라는 시간토막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 마지막 절정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149)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은 Fee가 여기서 예수 부활의 역사적 실재성을 우리 부활의 근거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 부활이 이미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종말이 굽힐 수 없도록 작동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부활의 절대적인 보증이다”(746). 이런 점에서 Fee는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실재성 사이의 관계를 칼빈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Fee는 구약에 나오는 첫열매 곧 나머지 모든 수확의 보증으로 역할을 하는 첫열매 개념(레 23:9-14)을 성령의 보증 개념(고후 1:22; 5:5; 엡 1:14)과 연관시키면서 첫 열매로서 예수의 역사적 부활이 우리 몸의 부활의 필연적인 근거가 됨을 지적하고 있다.(748f.).
우리는 Fee의 주장과 비슷한 내용을 Werder de Boor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Boor는 여기서 첫 열매 사상을 단순히 시간적인 전후관계로만 이해하지 않고 첫열매와 나중 열매 사이의 내적으로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는 관계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다.150) 첫열매가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수확의 시작인 것처럼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계속적으로 뻗어나가는 운동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또 이 첫열매 사상은 현재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직 미래에 있을 몸의 부활과만 관계하는가?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 지금 우리로 하여금 죄 가운데 살지 않게 하고 소망을 가지게 한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하는데, 이것은 역사속에 등장한 예수와 우리 사이에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세례 문제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다.
III. 성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성의 중요성
성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약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례가 ‘죄와 사망의 상태’를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상태’로 들어가는 관건이라면 성찬식은 그 상태속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성화되는 성만찬 공동체 상태를 제시한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과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A. 세례식
1. 십자가와 부활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건으로 정의하는 것 같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세례를 받을 때, 한편으로는 우리의 옛자아가 죽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중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h] ajgnoei'te o{ti o{soi ejbaptivsqhmen eij" cristo;n jIhsou'n, eij" to;n< qavnaton< aujtou' ejbaptivsqhmen_)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sunetavfhmen ou\n aujtw'/ dia; tou' baptivsmato" eij" to;n qavnaton: i{na w{sper hjgevrqh cristo;" ejk nekrw'n dia; th'" dovxh" tou' patrov", ou{tw" kai; hJmei'" ejn kainovthti zwh'" peripathvswmen).
이 두 가지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보여주는 그림을 제공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세례와 유추관계에 있음을 지적하여 세례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이 개인에게 적용된 것임을 지적한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Eij< ga;r suvmfutoi gegovnamen tw'/ oJmoiwvmati tou'< qanavtou< aujtou', ajlla;< kai; th'"< ajnastavsew" ejsovmeqa:)” 말하자면 세례는 2천 여 년 전의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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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부활 2000년 세례
죽어 삼일 만에 살아남 옛사람의 죽음 중생
장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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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두 사건 사이를 누가 연결해 주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을 통해 이렇게 됨을 말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성령이 이 신비한 연합의 주체라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딛 3:5에서 말한 대로 세례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중생과 새롭게 하심의 씻음으로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비한 연합을 내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eij"’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여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으로 들어간 듯한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로마서 6:3-5 내용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한 의미와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열거됨을 볼 수 있다. 칼빈은 2천여 년 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의 역사적 실재성으로 가지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에 각도를 맞추어 세례를 설명하고 있다.151) 칼빈은 그리스도 신비한 연합을 전제하고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멸망된 것은 그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의 의가 회복되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152)라고 말한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육신의 부패를 멸하고 넘어뜨리는데 유효하며, 그리고 그의 부활이 우리 안에서 더 좋은 성품을 새롭게 하는데 유효하다는 것이다”(Calvin, ibid.)라고 말했는데, 이런 발언은 신비한 연합이 전제되지 않고는 이해가 될 수 없는 말이다. 로마서 6:5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비한 연합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칼빈은 롬 6:5이 신비한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주석한다. “왜냐하면 접붙임이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성장하는 신비한 연합(arcanam coniunctionem)을 의미한다. 이 신비한 연합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소생시키며,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Calvin, ibid., 222,f.).
루터파 신학자 Lenski는 세례가 우리를 메시아 예수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연결시키는 매개임을 지적하면서153) 세례에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실재성이 중요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도 칼빈처럼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신비한 연합의 관점에서 세례를 다루었다. 이 연합의 대상이 공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역사 속의 예수라는 말이다. 나아가 렌스키는 5절에 나오는 “본 받아”(비슷하게 tw'/ oJmoiwvmati)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과정이 세례 사건 속의 ‘죽고’ ‘살아는 것’ 이 두 가지 과정과 유사함을 명백하게 지적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의 중요성을 집고 넘어간다.154)
또 바울은 우리의 성화 생활이 2천 여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 비밀을 세례가 말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2천여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통해 우리 속에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2 천여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이 없다면 우리의 성화도 없다는 말이다.155)
1) 옛 사람 또는 죄의 몸이 멸함을 받음
롬 6:6-10은 성화는 두 단계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먼저 죄의 체제가 파괴되어야 하고, 그 다음 새 사람이 살아나야 한다. 바로 여기에 2천여 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을 통해 2천여 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면, ‘죄의 몸’이 멸한다고 한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tou'to ginwvskonte", o{ti oJ palaio;" hJmw'n a[nqrwpo" sunestaurwvqh, i{na katarghqh'/ to; sw'ma th'" aJmartiva", tou' mhkevti douleuvein hJma'" th'/ aJmartiva/.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oJ ga;r ajpoqanw;n dedikaivwtai ajpo; th'" aJmartiva".)” 이 구절을 잘 이해하려면 ‘멸한다’라는 동사와 ‘죄의 몸’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면된다.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옛사람 또는 죄의 몸이 멸하는 과정에 대한 그림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의 역사적 실재성은 중요한 것이다. 렌스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세례는 우리의 죄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는 것인데, 이는 죄 곧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해 죽으신 그 죄를 멸하기 위해서이다.”156) 여기에 사용된 ‘멸한다’(katarghqh'/)는 것은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버리라(눅 13:7)고 할 때나 율법을 폐한다고 할 때(롬 3:31) 사용되었는데, 어떤 무엇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옛 사람 또는 죄의 몸은 그렇게 제거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렌스키는 옛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도살되어 한다고 표현했는데 구약의 희생 제물이 바쳐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매우 어울리는 말이다. 렌스키는 이 단어의 의미가 매우 강함을 알고 있었다. 죄의 몸이 그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우리가 죄의 지배 체제로부터 해방되는 동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렌스키, 402). 2천여 년 전의 십자가에서 예수의 몸이 붙들어 매임을 당하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듯이 ‘옛사람’ 또는 ‘죄의 몸’이 그렇게 죽임을 당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죄의 몸’이란 그 속으로부터 정욕과 불안이 나와서 계속 범죄하도록 추진하는 체제를 의미한다.157) 칼빈은 이것을 죄로 형성된 인간의 ‘부패한 실존 덩어리’라고 정의했다.158)렌스키는 “죄의 몸이란 인간의 실존 전체를 노예화한 죄의 악한 능력에 의해 사용된 몸이며 그 몸과 지체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낸다”(렌스키, 402)라고 했는데 모두 같은 의미이다. 이 죄의 몸이 파괴되고 성화하는 것은 역사속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세례를 통해 나에게 적용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여기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말 그 자체가 두 인격이 역사적인 두 시점에서 연합했음을 내포하는 것이다.
2) 중생
바울은 계속해서 2천여 년 전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 더 이상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으심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한다는 말이다.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eijdovte" o{ti cristo;" ejgerqei;" ejk nekrw'n, oujkevti ajpoqnhv/skei: qavnato" aujtou' oujkevti kurieuvei.)” 말하자면 이 구절은 2천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에게 사망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의 ‘죄의 몸’도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말이다. 물론 이 ‘죄의 몸’이 멸해지는 것은 2천여 년 전에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신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Eij< de; ajpeqavnomen su;n cristw'/, pisteuvomen o{ti kai; suzhvsomen aujtw'/,) 대부분의 종교개혁적 신학자들은 이런 역사적 실재성을 전재하고 주석한다.159)
3) 그 결과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역사속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살아나심에 근거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입장을 파악하여 성화할 것을 지적한다. “롬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o}< ga;r ajpevqanen, th'/ aJmartiva/ ajpevqanen ejfavpax. o}< de; zh'/, zh'/ tw'/ qew'/.)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ou{tw" kai; uJmei'" logivzesqe eJautou;" nekrou;" me;n ei\nai th'/ aJmartiva/, zw'nta"< de; tw'/ qew'/, ejn cristw'/ jIhsou' tw/'< kurivw/< hJmw'n.)”
여기 매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할 때는 역사성을 내포하는 아오리스트형을 사용하고, 살았다고 할 때는 현재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또 로마 교인들의 경우 ‘죽은 자’, ‘산 자’로 여긴다는 것은 현재형으로 표현되어, 그들은 역사적인 예수에 근거하여 이제는 한편으로는 계속 죽은 자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산 자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실재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역사적 실재성에 근거하여 과거 예수의 생명이 신비한 연합에 의해 시간공간을 통해 우리의 중생에서 생명이 분출되는 것으로 주석한다(영역, 228. 롬 6:10주석). 렌스키는 ‘단번에’(ejfavpax)라는 부사와 두 개의 아오리스형 시제를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실재성을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근거가 되는 듯이 지적하고 넘어간다.160)
이렇게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조하는 것은 존 머레이에게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머레이는 예수 십자가와 부활사건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 사건 사이의 병행을 중심으로 롬 6:10을 해석하면서, 비하 상태의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지배 아래에 있었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그 역사적 실재성을 보여준다. “사망은 예수께서 그 세력을 깨뜨리실 때까지 그를 지배했다. 죄는 그가 비하상태에 있을 때 그를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비하 상태는 죄 곧 그가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 동일시한 그 죄에 의해 조건지어졌다”161)이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타락후 아담의 몸 곧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롬 8:3)을 의미한다.162) 머레이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은 그의 역사성을 전제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비하 상태의 예수의 이런 특성을 무시하는 경우 결국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에 빠지게 되고 나아가 예수 사건의 역사적 실재성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Douglas Moo는 그런 위험에 처해 있다. Moo는 비하 상태의 예수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없는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163)
바울은 죄가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 못하게 하거나(롬 6:12 Mh; ou\n basileuevtw hJ aJmartiva ejn tw'/< qnhtw'/< uJmw'n swvmat) 몸의 사욕에 순종치 말라고 한 것이나(eij" to; uJpakouvein aujth/' ejn tai'" ejpiqumivai"< aujtou') 자신을 불의의 병기로 들이지 말고 헌신의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것(롬 6:13 mhde; paristavnete ta;< mevlh< uJmw'n o{pla ajdikiva" th'/ aJmartiva/: ajlla; parasthvsate eJautou;" tw'/ qew'/ wJ" ejk nekrw'n zw'nta", kai; ta;< mevlh< uJmw'n o{pla dikaiosuvnh" tw'/ qew'/.) 등등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롬 6장은 세례에 대한 내용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립이 될 수 없는 기독교 핵심 교리인 것이다.
B. 성찬식
구원의 상태속으로 들어가는 사건을 가리키는 세례식과 구원의 상태 속에서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여하는 성찬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약하는 것이다. 전자를 칭의와 관계한다면 후자는 성화와 관계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찬식이 예수의 역사성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를 점검한다. 성찬식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지금 성찬식을 거행하고 참여하는 데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이 필요한 것인가?
1. 과거의 시점을 기억하라:
주께서는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자기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또는 요한 복음에는 나오지 않고 누가복음과 고린도 전서 11장에 나온다. “눅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Kai; labw;n a[rton, eujcaristhvsa" e[klasen, kai; e[dwken aujtoi'", levgwn, Tou'tov ejstin to; sw'mav mou, to; uJpe;r uJmw'n didovmenon: tou'to poiei'te eij" th;n ejmh;n ajnavmnhsin.)”
“여기 나를 기념하라”(poiei'te eij" th;n ejmh;n ajnavmnhsin)는 말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라는 말인데, 고대 히브리어 영역에서는(zkr) 과거의 사건이 지금 현재 나타나고 현현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164)그 사건이 과거에도 있었고 그것이 지금도 작용한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찬식을 거행할 때, 과거의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이 현재에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기 위해서는 그의 희생을 생각해야 하며 이 희생제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단 한 번에 드려진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날마다 주어지도록 하려는 뜻에서다”165)
2. 미래의 시점을 지향함
예수께서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일이 미래의 어떤 시점을 향하는 것을 지적한다. “마 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levgw de; uJmi'n, o{ti ouj- mh; pivw ajp j a[rti ejk touvtou tou' genhvmato" th'" ajmpevlou, e{w" th'" hJmevra" ejkeivnh" o{tan aujto; pivnw meq j uJmw'n kaino;n ejn th'/ basileiva/ tou' patrov" mou.)” 이런 내용은 막 14:25 그리고 고전 11:26에도 나온다.166) 또 Fritz Rienecker는 마태복음 주석과 마가복음 주석에서167)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시간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칼빈은 공관복음 주석168)에서는 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시간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나 고전 11:26 주석에서는 언급한다.169)즉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의 구속사역 시점부터 재림까지 영적인 임재의 연속임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Lane은 막 14:25 속에서 시간적인 요소를 간파하고 있다. Lane은 여기서 성찬식 참여자들의 눈길이 메시아 잔치 날, 궁극적인 구원의 날, 인자의 승리의 날을 향함을 본다.170) Meyer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약속, 완성된 공동체 교제의 그림을 본다. 그는 여기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과 연관하여 예수 당시로부터 종말론적으로 완성된 공동체에 대한 그림을 보고 있다. 말하자면 마이어는 성찬식이 미래의 어떤 시점을 향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171)마가복음 14:25을 주석할 때도 이와 같은 시각으로 주석했다.172)
이로 보건대 Pesch가 주목한대로, 성찬식은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죽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예수의 재림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173)성만찬식에서 과거와 미래 이 두 가지 방향으로 그리스도인의 의식이 향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 곧 그리스도인이 과거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늘 기억하고 동시에 미래의 한 싯점으로 향하면서 현재에 영적으로 긴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내일은 없다하고 현재만 생각하고 일락을 누리려고 하는데 있다(고전 15:32).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인간의 의식구조를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은 이런 의식구조를 지니고 성화 단계의 길을 가는 것이다.
(과거) 십자가 (현재)나 (미래) 재림
IV.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에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추론할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 형상에 대한 개념을 통해서이다. 여기 하나님 형상의 개념은 거울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칼빈의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1. 하나님 형상으로서 아담과 자연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 형상은 아담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역을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형상이 된다는 말이다. 즉 다른 피조물들이 아담을 보고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인식하고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의 존재는 원형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말이다.그리고 성경은 가시적인 인간이나 자연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역할을 함을 가르친다.174) 바울은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한다. 즉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다는 말이다. 즉 자연의 존재 역시 그것이 반사하는 원형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말이다.
2. 하나님 형상 예수 그리스도
또 성경은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자주 말한다(고후 4:4; 골 1:15; 히 1:3). 우리는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지적하는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즉 하늘에 계시 아버지는 도대체 존재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체와 영광을 반사하시는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그와 같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그와 신비한 연합을 이룬 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을 보아 그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그리스도인 사이 곧 수직적인 차원에서 원형과 형상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이 원리를 시간적인 차원에 적용한다면, 복음서가 가르치는 2천여 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실현된 인간 곧 그의 형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그의 역사적 실재성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형상 손양원 목사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내지 하나님의 형상의 역할을 잘 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그러했고 역사속의 많은 경건한 신앙의 위인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형상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준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형상의 역할을 잘 하는 사람을 통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있고 동시에 그 그리스도는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를 이와 연관하여 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우리는 그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뿐 아니라 양아들로 삼은 일이나175) 문둥이 상처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 외에도 나환자를 위해 헌신한 내용은 수없이 많다. 이런 손양원 목사에 대해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다음과 같은 홈페이지에 뜬 내용은 손양원 목사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손양원 목사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날마다 죽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항상 자신을 죽이고 주님이 온전히 자신을 다스리실 때에 그 다스림을 따라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를 가장 잘 아는 황순덕 전도사는 손목사에 대해서 "예수가 산다"고 했다. 손양원 목사를 보면 예수님이 사시는 것 같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을 죽여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하여 사랑의 삶을 살았는데 그가 사랑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자신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손양원 목사의 삶이요 신앙이다.”176)
요컨대 손양원이라는 역사적 인물 속에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가 반사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이를통해,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들도 예수의 형상이 나타난 손양원 목사를 통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손양원 목사는 성품이 좋아서 그런 삶을 살았을까? 손목사는 분명하게 2천여 년 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자신의 삶과 직결시킨다. 「나의 기독교의 간명」이라는 글에서 그는 “예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하고 그의 부활을 나의 부활의 사실로 하여 그 자신 자체를 받게 되어 나의 사는 현재 생활이 즉 예수의 생활 그대로가 됨을 믿어 나의 평범한 생활에서 그를 믿고 자라 나아감을 믿는 신앙이 되었으며 그의 부활의 새 생명의 씨를 받아 자라 나아가 부절이 연락 교통하며 그를 앙망하고 나의 자라가는 분량 표준이 예수 그리스도도 가신 완성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되어 나의 현재 신앙의 생활에 소망이 되었으며”177) 이 말은 로마서 6장을 번언한 감을 준다. 손목사의 이런 발언은 그의 삶이 과거의 한 시점과 연결되었으며 동시에 미래의 한 시점을 겨냥함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손양원 목사의 경우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은 매우 명백하게 나타난다. 물론 그가 언제 어떻게 성령을 통해 이런 관계에 들어갔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178)그러나 그의 기도생활이나 사람을 사랑한 일 그가 쓴 시들은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이라는 삶의 체계를 지니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그의 신앙은 다음과 같은 시에 담겨 있다. “오 - 주님이시여! / 네게 있는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의식주나 기타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실지라도 오직 당신을 信依하는 신앙만은 빼앗아 가지 마옵소서 / 모-든 것은 다 잃어버릴지라도 신앙만 남아 있으면 /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보다 유여한 것이오며/ 모-든 것 다 넉넉히 가진 내가 다 되었을지라도 / 신앙의 마음이 없다면 나는 벌써 패망한 자가 된 것이외다. ………”179)
또 그는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체험한 것 같았는데, 그의 성만찬 이해는 칼빈에 가까운 것 같다.180)그리고 그의 글 「기독교의 簡明化」에서 기독교인의 삶이 신비한 연합의 체계를 지닐 뿐 아니라 자신이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181)
우리는 손양원 목사의 삶 속에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하는 세례와 성만찬의 삶이 실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20세기의 손양원 목사와 1세기에 기록된 성경의 내용 사이에 공통성과 유사성 내지 역사적 상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트뢸체가 말한 역사적 비평법의 한 열쇠인 “유추의 방법”을 역으로 이용하여 손양원 목사의 삶을 통해 예수의 역사적 實在性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트뢸체에 의하면 성경의 내용이 그 타당성을 인정받으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일어난 일과 유사하거나 일치해야 한다.182)손양원 목사의 삶의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세례와 성만찬의 삶의 내용과 일치한다. 동시에 트뢸체는 과거와 현재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지속적인 상관관계에 놓여 있을 때 과거의 그 사건은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한다.183) 과거의 사건인 성경의 내용 그리고 그 후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삶과 20세기의 손양원 목사의 삶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방법을 역으로 이용하여 예수의 역사적인 실재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IV. 결론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은 기독교의 서고 무너짐이 달려 있다. 종교다원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의 탁월성 내지 독특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 실재성을 확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가현설로 떨러질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비평 주석방법으로 역사적 예수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입증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분석함을 통해 한 방법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이 확립되지 않는 한, 기독교는 설 수 없다. 이 역사적 실재성을 확인하는데 전제조건은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이다.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는 첫열매 사상, 세례, 성례 등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이 전제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기독인의 삶의 체계를 구축해 준다. 기독인의 눈길은 항상 과거의 한 시점과 미래의 한 시점을 향하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팽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형상의 삶을 살 때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증거하게 된다. 이런 삶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간과한 나머지 이원론적인 가현설에 빠진데 있는 것 같다. 교회 내에서 과감하게 범하는 악행들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간과하는 데서 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Exkurs(부설)-
우리는 역사에 등장한 다양한 성찬식론을 점검하면서 그 각각의 가르침에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1)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은 다음과 같은 표현 속에 정리되어 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떡의 형태로 내 놓은 것이 진실로 자기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교회에 있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 거룩한 공회는 새롭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떡과 포도주를 축성함을 통해 떡의 모든 본질이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로 변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포도주의 모든 본질이 그의 피로 변한다. 이 변화는 성 카톨릭 교회에 의해 적절하게 화체라 불리어졌다.”184)
위의 내용은 Henricus Denzinger가 편집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조들 모음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로마 교회의 이런 화체설은 이미 오래 전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르친 내용이다. 그는 자기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제 58권 3a 73-78에서 성례 문제를 다루었는데 특히 75문에서 화체설을 집중적으로 논했다.185) 루터의 화체설에 대한 비판에 의하면, “그들은 가르치기를 떡과 포도주는 그 자연적인 본질을 떠나거나 잃어버린다. 단지 남아 있는 것은 떡의 형체와 색갈이다”186)
화체설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완전히 무시할까? 로마 카톨릭 신학도 성찬식 논쟁을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구절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하고 또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를 전제한다. 이들은 신앙고백서에 따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는 하늘을 떠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주께서 하늘에 계시며 아버지의 우편에 가시적이고 형체가 있게 앉아 계심을 고백한다.”(Eck, Ench. 171r)187)
문제는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문자 그대로 떡과 포도주 속에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떡의 형체로 不可視的이고 성례적으로 숨어 계심을 배제하지 않는다.”(Eck, Ench. 171r)(ibid.).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사제들의 축성하는 행위를 통해 지금 현재 임재한다는 것, 2) 사제들의 희생의 행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리스도의 제물을 드리는 것.188)
화체설에 의하면 사제의 축성과 더불어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예수의 몸의 본질로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로마 카톨릭 교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고 떡과 포도주를 볼 때에 그들의 시각이 어디에 머물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예수
2천년 십자가 성찬떡 포도주 나
우리의 관심은 성찬식을 범신론적으로 해석하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 참여하는 사람들의 경우 떡과 포도주가 이미 예수의 몸의 본질로 바뀌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눈길은 물질인 떡과 포도주에만 머물게 된다. 그들의 눈길은 더 이상 하늘에 계신 예수나 2천년 전에 죽으신 예수로 향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유물론적인 오류에 빠진 것이다. 동시에 자연 속에 신적인 것이 들어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범신론적인 오류에도 빠져 있다. 나아가 이들은 신적인 것이 들어 있는 이 떡과 포도주만 먹으면 신적인 존재로 된다로 여기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어 이원론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체설의 경우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겉으로는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기나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함을 볼 수 있다.
2) 루터파의 공재설
루터의 관심 역시 “이것은 내 몸이니”의 예수의 몸의 ‘존재 방식’(est)에 있다. 루터는 사제의 축성과 더불어 떡과 포도주의 본질 변한다는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에 대항하여 비판하면서 자신의 성찬식론을 정립했다. “제단의 성찬식에서 화체는 토마스가 고안한 것이다. 나는 떡과 포도주가 세례식에서 물이 본질 그대로 남듯이, 그것들 역시 그 본질이 그대로 남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설교하는 곳에 인간의 음성은 그대로 남는다. 그럼에도 바울이 말한 바대로(롬 1:16) 진실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 있다”189) 즉 루터는 여기서 로마 카톨릭의 본질의 변화를 비판한다.
그러면 루터는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의 존재 방식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가운데서 교회 공동체 안에 임재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도록 초대를 받는다”190) 공재설이라고 일컬어지는 루터의 성찬식론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면, 그 때 하나님의 우편은 바로 하늘에 있는 특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 안에서 초월적이고 내적인 그의 현존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또한 그의 인성을 따라 무소부재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자체로 우리가 포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191) 즉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무소부재하는 방식으로 지금 성찬식의 표징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의 몸과 표징(떡과 포도주)은 어떻게 결합되어 있을까? 루터는 자신의 공재설을 빨갛게 달구어진 쇠로 설명하는가 하면192)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하는 신비로 설명한다.193)달구어진 쇠와 불 사이를 구별하기 힘들듯이, 예수의 인성과 인성의 결합의 비밀을 이해하기 힘들듯이 예수의 몸과 표징 사이의 관계를 그러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루터의 공재설의 핵심은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피가 육체적으로 임재하는 것을 의미한다(파울 알트하우스, 431). 루터의 공재설에 대한 확신은 다음과 같은 발언속에 보인다. “서로 갈등하는 견해들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나는 마침내 앞의 견해 즉 그리스도의 참된 살과 참된 피는 참된 떡과 참된 포도주에 있다는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다”194)
위의 내용은 우리의 눈길을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으로 향하게 하기보다는 표징에 머물게 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루터의 성찬식론에는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다. 매우 주목할만한 것은 루터가 그의 글 ‘바벨론 포로’에서 시간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나를 기념하라’는 구절에 대해 주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est에 가 있다. 그러나 루터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새우신 새 언약이다”라는 유언을 성찬식과 연관시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다.195) 여기에 관건이 되는 말은 “죄사함을 위하여”(ibid.)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성찬식론에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은 그 전제가 되는 것이다. 만일 집례자가 역사속의 예수의 십자가 구원을 선포할 때 그것을 듣고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면 범신론에 빠져버릴 것이다. 요컨대, 루터의 경우 성찬식에서 참여자가 그 모든 복을 누리려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해야 한다.
3) 쯔빙글리의 기념설
쯔빙글리의 성찬식론을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면 된다.
① 예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쯔빙글리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늘에 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을 비판할 때 사도신경의 “그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 그리고 거기서 산자와 죽음 자를 심판하러 올 것이다”라는 구절을 가리키면서 로마 카톨릭이 사도신경에 모순되게 행함을 지적한다.196)말하자면 쯔빙글리는 떡과 포도주의 상징성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② 2천년 전의 예수 사건은 지금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쯔빙글리의 경우 2천년 전에 행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은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인식의 대상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 인식은 믿음의 눈으로 떡과 포도주를 바라볼 때 생긴다. 즉 성도들의 관심의 초점은 항상 2천년 전의 역사적 사건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성찬식 속에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 믿음의 시각으로 보면 거기에 있음(adsit fidei contemplatio)을 믿는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하심에 대해 감사의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참된 육신을 취하심과 이 육신 속에서 참으로 고난을 당했음과 참으로 우리의 죄를 자기 피로 씻으심을 인식한다. 이런 자들에게는 믿음의 시각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모든 것들이 현존한다.(E. Hirsch, 232)”
③ 성찬식때 참여자는 은혜를 받는가? 쯔빙글리는 떡과 포도주와 같은 매개 수단이 구원의 은사를 전달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유로우신 성령께 달려 있다고 한다. 성령이 직접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한다. “모든 성례는 은혜를 전달하기에 나무나 거리가 떨어져 성례가 은혜를 한 번도 스스로 지니지 못하고 또 그 일을 돕지 못함을 나는 믿는다, 아니 나는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은혜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발생하거나 주어지며 이런 은사는 오직 성령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면 라틴어식으로 그렇게 한다. 은총, 돌봄, 자유로운 은총). 성령께서는 사다리나 운송 수단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스스로 능력이며 모든 것을 운송하는 운송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운송하는 수단이 될 필요가 없다.”(E. Hirsch, 231). 물론 쯔빙글리는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을 의식하고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예수의 몸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바로 그 몸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몸이다. 그리고 그의 몸의 표징은 떡이다. 그리고 그의 피의 표징은 포도주이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거기에 참여한다. 이제 그 표징과 그 표징이 상징하는 내용이 동일한 것일 수 없다”197). 이런 발언은 쯔빙글리가 성례가 거룩한 것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에도 나타난다. “주님의 몸의 표징, 나는 단순히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인 떡을 언급하고 있다”(ibid., 188).
요컨대, 쯔빙글리의 경우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예수로부터 은혜를 받지만 그들의 눈길은 항상 2천년 전의 예수의 역사적 사건을 전제하는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쯔빙글리가 화체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성찬식이 거행되는 마지막 시점인 예수의 재림과 연관해서는 주석을 하지 않는 점이다. 쯔빙글리의 경우 표징을 단순히 상징으로만 간주하는 경우, 예수의 역사적인 실재성은 사변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4) 칼빈의 영적 임재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4권 17장에서 성찬식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칼빈의 성찬식 이해는 루터와 쯔빙글리를 극복한 영적인 임재설이다. 표징(떡과 포두주)의 의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범신론이나 유물론에 빠지지 않고,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영적인 임재를 주장함으로써 표징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우리의 관심은 칼빈의 성만찬설에서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있다. 사실 로마 카톨락 교회의 화체설, 루터파의 공재설, 쯔빙글리으 기념설 그리고 칼빈의 영적인 임재설 모두의 주된 관심이 “이것은 내 몸이니(est)”라고 할 때 ‘est’라는 동시에 집중되어 있다. 말하자면 성찬식을 거행하는 지금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표징 속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주장들은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한다. 문제는 이 각각의 이론에서 2천년 전의 예수 사건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의 경우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한다.
칼빈은 성찬의 특별한 결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말함으로써 성찬이 2천년 전의 예수의 역사적 사역과 연관시킨다. 즉 성찬식때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이 되어 그가 역사속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인 양 지시고 우리에게서 책임을 면제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정죄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감히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인애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이다”(Inst IV,17,2). 이 구절은 분명히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2천년 전의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은 다음과 같은 발언 속에서 드러난다. “주의 몸과 피를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서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그 몸과 피를 분배할지라도 유리에게 큰 유익이 없을 것이다.”(Inst IV,17,3). 이 뿐 아니다. 칼빈은 더욱 적극적으로 성찬식 참여자가 역사속의 예수의 십자가에게 눈길을 주도록 만듦을 지적한다.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Inst IV,17)
동시에 칼빈은 성육신론을 성찬식과 연결시킴으로써 성찬식이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을 전제함을 암시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죽을 성질을 공유하게 되심으로써 그의 신적인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 주실 때, 또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가 받을 저주를 자기가 받으시고 자신의 축복으로 우리를 가득하게 하실 때 스스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삼켜 없애실 때(벧전 3:22; 고전 15:54) 그리고 부활하셔서 그가 입으셨던 우리의 이 썩을 육을 영광과 썩지 않음으로 입히실 때에(고전 15:53-54) 그는 자신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Inst IV,17,4)
요컨대, 칼빈은 앞에 언급한 세 부류의 신학자들보다는 성만찬식 참석자로 하여금 2천년 전의 예수 사건과 긴밀하게 연관시킴을 볼 수 있다. 성찬식을 해석할 때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 또는 시간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경우 미신화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성찬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 수직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식을 거행하며, 수평적인 차원에서 한 떡을 공동체가 함께 뗀다. 시간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과거의 한 시점을 향하고 동시에 미래의 한 시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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